광주역에서 옮겨온 시위대와 이른 아침부터 모여든 시민들로 금남로 일대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많은 희생자를 냈던 지난밤의 충돌로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껴 아세아자동차 공장으로 달려가 장갑차와 군용트럭 등 많은 차량을 끌고 왔다. 이렇게 동원된 차들은 외곽지역을 돌며 시민들을 중심가로 수송해 오기도 하고, 시외로 진출해 광주의 소식을 알리는 등 기동성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차량시위가 전개된다. 시위소식은 더욱 빠르게 퍼져나갔고 시민들 사이에는 이미 강한 연대의식이 형성되어 가는 곳마다 주먹밥과 음료수 등을 제공해 주었다. 한편 도청 앞에서 계엄군과 팽팽히 맞선 시위군중은 자신들의 대표를 선정해 계엄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도지사를 내세워 기만적인 협상을 벌이던 바로 그 시각, 도청에서는 헬기를 이용해 시체와 기밀문서를 빼돌리는 한편, 실탄이 지급되는 등 본격적인 학살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09:00 차량동원과 시민동원을 위해 나선 시위대
- 광주∼목포간 고속버스 운행 정지.
- 관공서 시외전화도 불통. (월간조선, 1985. 7)
- 시위대 아세아자동차 공장에 진입. 대형버스 22대, 장갑차 3대, 군용트럭 33대, 민간트럭 20대 몰고 나와 도청으로 진격하거나 외곽에서 도청으로 시민들 수송. (신동아, 1985. 10)
- 빵, 라면, 신발, 김밥, 타올 등을 시민들이 보급함. 여학생들이 시민궐기를 호소.
- 많은 군중이 금남로 4가로 집결. 군인에게 과잉진압을 사과하도록 요구했고 현 정부지도자들을 규탄. (월간조선, 1985. 7)
- 전교사 무장헬기 지급 건의. (전교사 작전일지)
-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7대, 소형버스 1대, 중형버스 3대, 대형버스 1대 탈취. (계엄사 상황일지)
- 7공수 33대대, 11공수여단에 배속. (특전사 전투상보)
09:05
- 교도소 뒷산에 난동자 1백여 명 버스 1대에 승차, 교도소에 접근. 20∼30여 명 출동하여 해산시킴. (31사단 전투상보)
09:20
- 한국은행과 가톨릭센터 사이에 5천 명이 각목 들고, 군지프 2대,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 1대를 앞세운 채 행진.
- 시체 2구 손수레에 싣고 마이크로 '계엄군은 시체 인도하라'고 방송.
- 오늘 새벽 군병력 1천5백 명 서울서 광주로 출발.
- 군장갑차 1대가 군중에게 탈취됐다고. 아나운서실에서 변칙적으로 뉴스 모아 방송하고 있음. (월간조선, 1985. 7)
- 아세아 자동차 공장 APC 피탈. (전교사 작전일지)
09:40
- 조선대 정문 앞 5백 미터 지점에 시위대 운집.
09:45
- 전교사 무장헬기 10대 지원 승인 접수. (전교사 작전일지)
- 31사 나주 예비군 대대, 지역예비군 중대 무기 및 탄약 부대집결 지시 접수, 경찰과 협조 운반. (31사단 전투상보)
09:49 장갑차를 이용해 도청 공격 시도
-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탈취한 장갑차 1대, 군트럭 10대, 버스 20대를 도청 방향으로 진출. (계엄사 상황일지)
* "가톨릭센터 앞에서 나는 시위대들이 타고 있는 차에 탑승했다. 우리가 탄 차가 광천동 공업단지 입구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 아세아자동차 공장으로 가서 차를 끌고 나오자고 했다. 당시 아세아자동차 공장에 근무했던 나는 겁이 더럭 났으나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행동했다. 우리가 공장 정문에 이르자 20여 명의 경비원들이 가로막고 못 들어가게 했으나 시위대들이 완강하게 버티자 물러났다. 공장 내부구조를 모르는 시민들이 우왕좌왕하며 헤매고있자 나는 차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차를 가지고 도청으로 갔다." (구술 : 김정기, 현사연 조사)
09:50 시민대표와 장형태 도지사의 협상
- 시위대들이 뽑은 시민대표 김범태 군(27. 조선대 법과 1년)과 전옥주 씨(32.
여) 등 3명이 장형태 전남지사와 도청 상공국장실에서 협상, 대표들은 도지사에게
1. 유혈사태에 대해 도지사가 공개사과할 것
2. 연행 시민, 학생을 전원 석방하고 입원중인 학생의 소재와 생사를 알릴 것.
3. 계엄군은 21일 정오까지 모두 시내에서 철수할 것.
4. 전남. 북 계엄분소장과 시민대표들의 협상을 주선할 것 등을 요구.
- 장형태 지사 '군철수는 최대한 노력하겠다. 나머지도 책임지고 수락하겠다'면서 10시에 대표자 3명 돌려보냄. 그러나 분위기는 계속 고조(한때 시장 납치설). (월간조선, 1985. 7)
* "나는 협상대표자가 되어 대학생 1명, 시민 1명과 함께 도청으로 갔다. 도지사는 '나도 여러분 못지 않게 분노를 느끼고 있습니다. 계엄군이 주둔하면 도지사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는데 보고를 받지 못했습니다. 요구사항을 말씀하십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시민들이 몹시 불안해 하고 있으니 계엄군을 철수하도록 해주고, 연행된 학생들과 시민들의 소재를 파악해 달라. 그리고 공정한 보도를 하도록 하고 계엄사령관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는 요구사항을 말했다. 도지사는 '12시까지 계엄사령관을 만나게 해줄 테니 나가서 시민들을 제지해 달라. 그러면 5분 후에 나가서 시민들에게 사과의 말을 하겠다' 했다. 그 말을 믿고 우리는 밖으로 나와 시민들에게 협상내용을 말한 후 '아리랑', '선구자' 등의 노래를 부르며 도지사를 기다렸다. 약속된 시간이 지나도 도지사가 나타나지 않자 시민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도지사 대신 구용상 시장이 나와 인사말을 하려는 찰라였다. 시민들 틈에서 장갑차가 나타났다. 계엄군의 사격으로 장갑차에 탄 청년은 고꾸라졌다." (구술 : 전옥주, 현사연 조사)
- 군중여론에 의하면 전부 버스를 타고 전북으로 가서 합세하여 서울로 진출하겠다는 첩보임. (계엄사 상황일지)
10:00
- 각종 차량에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는 플래카드를 붙이고 다님.
- 전남대 정문 4만 명, 후문에 1만 명 집결, 차량으로 전남대에 주둔한 공수부대 공격, 정문이 돌파되어 교내 3백 미터까지 시위대가 진입했으나 공수의 반격으로 후퇴.
- 광주 공단내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탈취한 장갑차와 군납품용 지프, 트럭 등이 시내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 장갑차를 이용, 군저지선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페퍼포그와 최루탄에도 아랑곳없이 가톨릭센터 건물 앞까지 진출했다. (월간조선, 1985. 7)
- 가톨릭센터 앞에서 군장갑차 1대 피습 파괴. (전교사 작전일지)
- 군중은 수만 명이었고 숫자는 계속 늘어나 10시쯤에는 10만여 명 운집.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9시쯤 또 다시 김범태, 전남대 상대 3년 김상호(21) 등 4명의 남학생이 도청으로 들어와 현관에 서 있던 장지사를 만나 빨리 나와달라고 재촉하고 나섰다. 장지사는 도청 현관에서 고성능마이크를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대기중이었다.
이때 구용상 광주시장이 시위군중 앞에 나타났다. 도지사가 늦어져 욕설이 나오자 부하로서 조금이라도 상황의 악화를 막아보려는 듯 그는 핸드마이크를 들고 나와 자제를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중들은 '당신은 필요없어. 비켜요, 비켜' 하며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군중들이 도지사가 도착하지 않자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때 대대장인 두 명의 중령이 필자에게 다가와 '빨리 지사님을 나오시게 해서 사태가 나빠지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우리도 협상이 이루어지면 계엄분소장에게 건의해서 협의사항이 꼭 성사되도록 하겠읍니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끝내 장지사는 나오지 않았다. 만약 이때 장지사가 시위군중 앞에 나왔더라면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오지 못했다. 뒤에 이 일로 그는 많은 비난을 받게 된다.
장지사의 출현이 늦어지자 군중들은 조금씩 앞으로 전진해 왔다. 공수부대와의 간격이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그때 학생들은 카빈총과 쇠파이프, 식칼 등으로 무장한 후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빼앗아 온 장갑차와 군용차량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오전 10시 10분 뒤쪽, 그러니까 도청 광장쪽에 있던 공수부대에게는 실탄이 지급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이때 사병 1명당 10발씩 지급되었다.
시위군중과의 대화가 불가능해졌을 때, 장지사는 도청 본관 3층 지사실 옆 복도에 있었다. 필자도 함께 있었다. 실탄이 지급되고 있는 광경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10일간의 취재수첩)
- '광주시민 단결하라' 외치고, 여고생들도 태극기 들고 앞장. 주부, 꼬마들도 각목, 갈쿠리 등을 데모대에 건네주고, 도청 도경이 고립돼 군, 경은 헬기로 진압 화기 공급, 고속버스 시내에 못 들어오고 있음. (월간조선, 1985. 7)
10:00
- 31사단 나주 예비군 대대, 폭도 도착시 행동 지시. (31사단 전투상보)
- 전남대 정문 시위대 4만, 후문 1만 명 운집. 차량으로 정문 돌파되었으나 3개 대대의 역습으로 격퇴. (특전사 전투상보)
10:19
- C-123(수송헬기) 광주 도착. 설득 영관장교(?) 46명 수송, 최루탄 1천 발 휴대. (육본 상황일지)
10:22
- 교도소 전방 5백 미터 주유소에 군용트럭 3대, 버스 1대, 트럭 1대에 분승한 1백50여 명의 시위대 차량 주유 후 주유소 앞 선회, 지휘관의 해산권유로 서방 쪽으로 사라짐. (31사단 전투상보)
* "백운동 로터리에서 시내버스 1대를 몰고 외곽지역을 돌아나녔다. 돌고개에서 아주머니들이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와서 우리에게 주먹밥을 주면서 '김대중 석방하라,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온 학생들이 담양과 장성에 도착했는데 길이 막혀 오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차 2대가 교도소 쪽으로 갔다. 교도소 부근의 주유소(부산-광주 고속도로 진입로) 앞에 1개 중대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중대장이 다가와 '이쪽으로 나갈 수 없으니 돌아가시오' 하고 말하자, 주유소로 가 차에 기름을 넣고 그들에게 박카스와 음료수를 주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절하던 군인들이 아무 말 하지 않고 받았다. 우리는 차를 돌려 장성으로 향했다. 비아를 거쳐 장성으로 가던 중 시위대 차를 만나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온 대학생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혹시 주위에 매복해 있는 계엄군에 의해 살해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광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구술 : 구성주, 현사연 조사)
10:30 도청은 철수준비를 서두르고
- 군헬기 4대가 도청, 조선대, 전남대에 이착륙하며 도청 지하실에 모아놓은 시체와 진압무기, 주요 기밀서류 공수 시작.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 데모군중 장갑차 1대, 군 지프 4,5대 빼앗아. 도청 반경 5백 미터내에 군경이 사수하고 그 외의 천지는 완전히 무법지대. 광주시장, 데모군중 설득하려다 군중에 납치설. 변두리 지역 축제 분위기. 현재 2명의 시체를 리어커에 실어 태극기 꽂고 돌아다녀. (월간조선. 1985. 7)
- 장형태 도지사, 헬기에서 저공비행하며 선무방송.
- 도청 뒤쪽에서 실탄을 지급받은 3개 소대 가량의 병력이 맨 앞쪽의 병력과 교대. (10일간의 취재수첩)
- 계엄사령관 담화문 발표.
담 화 문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 본인은 오늘의 국가적 위기에 처하여 국가 민족의 안전과 생존권을 보유하고 사회 안녕질서를 유지해야 할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계엄사령관으로서 현 광주시 일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비극적인 사태를 냉철한 이성과 자제로써 슬기롭게 극복해 줄 것을 광주시민 여러분의 전통적인 애국심에 호소하여 간곡히 당부코자 합니다.
지난 18일 수백 명의 대학생들에 의해 재개된 것은 상당수의 타지역 불순인물 및 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약탈 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 데 기인된 것입니다.
이들은 대부분이 이번 사태를 악화시키기 위한 불순분자 및 이에 동조하는 깡패 등 불량배들로서 급기야는 예비군 및 경찰의 무기와 폭약을 탈취하여 난동을 자행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들의 극한적인 목표는 너무나도 자명하며 사태의 악화는 국가 민족의 운명에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 명약관화한 것이 사실입니다.
본인은 순수한 여러분의 애국충정과 애향심이 이들의 책동에 현혹되거나 본의 아니게 말려들어 돌이킬 수 없는 국가적 파탄을 자초하는 일이 없도록 조속히 이성을 회복하고 질서유지에 앞장서주시기 바라며 가정과 지역의 평화적 번영을 위하여 맡은 바 생업에 전념해 주시기를 충심으로 당부하는 바이며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1. 지난 18일에 발생한 광주지역 난동은 치안유지를 매우 어지럽게 하고 있으며 계엄군은 폭력으로 국내치안을 어지럽히는 행위에 대하여는 부득이 자위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2. 지금 광주지역에서 야기되고 있는 상황을 볼 때 법을 어기고 난동을 부리는 폭도는 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다수의 주민 여러분은 애국심을 가진 선한 국민임을 잘 알고 있읍니다. 선량한 시민 여러분께서는 가능한 한 난폭한 폭도들로 인해 불의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거리로 나오지 말고 집안에 꼭 계실 것을 권고합니다.
3. 또한 여러분이 아끼는 고장이 황폐화되어 여러분의 생업과 가정이 파탄되지 않도록 자중자애하시고, 판단성있는 태도로 폭도와 분리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계엄군의 치안회복을 위한 노력에 최대의 협조 있기를 기대합니다.
1980년 5월 21일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이희성
- 소요학생 버스 2대와 승용차를 타고 각목 등을 들고 광주 인터체인지 17킬로 미터 지점에서 경찰 순찰차 1대를 탈취. (계엄사 상황일지)
- 전남대학교 정문 4만, 전남대학교 후문 1만과 대치, 일단 폭도들의 차량과 특공대에 의해 정문이 돌파당했으나, 3개 대대의 역습으로 격파됨
. 전과 : 노획 1/4톤 3대, 2 1/2톤 5대, APC 1대, 5톤 구난차 2대, 소방차 1대, 경찰 개스차 1대
. 피해 : 없음 (특전사 전투상보)
* "2백여 명의 시위대들과 함께 전남대 농과대학 후문으로 갔다. 농대 후문을 통해 우리가 전남대로 들어가자 공수들이 사회관에서 몰려왔다. 그들이 최루탄을 쏘며 정문 앞으로 질주해 왔다. 그곳에도 1백여 명 정도의 공수들이 전남대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시위대들이 그들을 향해 돌을 던지자 총을 쏘았다. 우리는 순식간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3명의 시민이 총에 맞아 길거리에 쓰러졌다." (구술 : 강주원, 현사연 조사)
* "정오를 전후하여 트럭에 탄 우리가 전남대 정문 앞에 도착하자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차에서 내린 나는 전남대 안으로 들어갔다. 인사대 건물 아래 잔디밭에 10여 명의 공수가 시민들에게 에워싸인 채 이리저리 도망 다니고 있었다. 정문 앞과는 달리 학교내에는 시위대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숫적으로 공수가 훨씬 적었다. 공수들을 붙잡기 위해 이리저리 달려다니는 사이에 전남대 후문 쪽에서 굉장히 많은 공수들이 최루탄을 쏘며 몰려왔다. 그뿐만 아니라 총구에서 불이 뿜어나오는 공포탄을 쏘아대며 우리를 향해 뛰어왔다. 붙잡은 시민을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때린 후 끌고 갔다. 전남대 정문 앞 삼익맨션 공사장으로 한 무리의 공수들이 나타나 시민들을 구타한 뒤 그들을 끌고 전남대 교정으로 갔다." (구술 : 이지형, 현사연 조사)
10:48
- 군 헬기에서 방송, '공수단 병력을 철수시키겠다. 시민도 협조해 달라'. 그러나 시민의 호응은 없음.(월간조선, 1985. 7)
- 도지사, 시장도 헬기에서 계속 설득방송. 광주시민은 질서를 지켜달라고 설득하고 있으나 효과가 전혀 없음. (월간조선, 1985. 7)
10:56 서울로부터 코와 귀를 자극하는 CS액 수송
- 서울에서 경찰 소속 대형 헬기로 2리터들이 CS액(코와 귀를 자극하는 액체) 10통짜리 20박스 수송. 이 비행기로 민간인 시체 1구와 중상자 2명 싣고 출발. 오늘 중으로 도청, 도경 함락될 듯. 비밀문서 후송은 이에 대비한 것.
- 경찰과 군인은 왜 이런 식으로 지휘해서 우리가 피해를 입어야 하느냐며 불만.
- 무장 데모군중이 사방에서 군을 포위하고 압축하는 상황에서도 낮에는 실탄을 회수. 이에 대해 '탄환을 달라'고 아우성.
- 군은 부상병이 생겨도 사방이 포위돼 응급치료나 수송을 못해 불만 가중.
- 현재 데모군중 10만 정도. 금남로에 5만 정도가 몰려 있고 자동차들은 이들을 도경과 도청 쪽으로 수송중.
- 전남대 학생회에서는 제일교회에 마이크를 설치하고 '어떤 폭력과 방화도 막아야 한다. 광주시민의 긍지를 살리자'고 설득. 그러나 효과 없음.
- 칠십 노인까지 거리로 나와 '왜 죄없는 사람을 다치게 하느냐'고 계엄군에 항의. 전반적인 현상은 갈수록 악화. 직접 보지 않고는 못 느낄 정도로 험악. 전남일보, 전남매일 직원들 출근을 못 해 신문 발행 못 함. 금남로에 있는 관광호텔 외국손님 대피. 광주시장은 피랍 모면. (월간조선, 1985. 7)
11:00 시위군중 계속 집결
- 호남동 천주교회에서 김성용, 조철현, 장옥석, 이영수, 이천수, 박상수, 백용수, 남재희 등이 회합, 광주사태를 논의하다가 김성용 등 신부들이 장백의를 입고 태극기를 앞세우고 윤공희 대주교의 선두로 도청에 들어가자고 결의한 다음,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자', '비상계엄 철폐', '민주인사 석방' 등 플래카드를 준비. (공소장)
- 김경국, 전용호, 김성섭, 윤개원, 박용준, 정재호, 이영주 등은 광천동 650 빈 가게에서 미리 준비한 등사기를 이용하여 윤개원이 문안을 작성하고 박용준이 필경한 '5.18 광주사태 때 광주시민들이 입은 피해상황'을 내용으로 하는 '투사회보 제2호' 를 2천여 매 프린트. (공소장)
- 도청 광장에는 경찰 헬기가 자주 착륙하고 또 이륙하고 있었다. 함락 직전의 탈출작전처럼 보였다. 헬기가 착륙할 때는 주로 보급품이 내려졌다. 이륙할 때는 부상자와 각종 서류상자가 실렸다. (10일간의 취재수첩)
* "20일 아침. 영암에 돌아온 나는 시위가 지방까지 확대되리라 보고 오전 11시 경 박병권, 김희규, 김석규 씨 등을 영암읍 '수진다방'으로 불러 시국에 관한 모임을 가졌다. 나는 '영암에서도 자체적으로 광주시민들에게 성원을 보내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회의결과는 '일단 관망을 하다가 상황이 바뀌면 그때 대처방안을 정하자'는 쪽으로 결정지어졌다."(구술 : 유광열, 현사연 조사)
11:00 - 12:00 동별로 시위대에게 음식 제공
* "지역주민들이 돈을 걷어 동 단위로 음식을 만들어 시위대에게 제공한다는 말을 듣고 산수동 오거리로 나갔다. 아주머니들이 모여 벽돌을 쌓아놓고 그 위에 커다란 솥을 걸어 밥을 짓고 있었다." (구술 : 손종래, 현사연 조사)
* "18일, 시내에서 계엄군이 학생들을 죽도록 때리는 것을 목격하고 집에 돌아온 뒤 문 걸어 잠그고 바깥 출입을 삼가고 지냈다. 2,3일을 그렇게 두문불출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식 키우고 사는 사람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밖으로 나갔다. 같은 동네 사는 선배 언니와 함께 동네 아주머니들을 모아 쌀을 걷어 밥을 지었다. 라면상자에 비닐을 깔고 주먹밥을 만들어 전남대 의과대학 앞으로 가서 시위차량이 지나가면 차에 올려주면서 몸조심하라고 격려도 해줬다." (구술 :김경애, 현사연 조사)
* "20일 차량시위 때 금남로에서 붙잡힌 나는 도청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21일 오전 도청 앞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공수들의 모습이 보였고, 헬기가 도청 옥상에 이착륙하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런 뒤 방송을 통해 '긴급상황을 알립니다. 전대원 대피하시오'라는 긴박한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위기의식을 느낀 나는 그곳에 잡혀와 있던 친구와 함께 도청 뒷담을 넘어 도망쳤다." (구술 : 임재구, 현사연 조사)
- 31사, 나주 예비군대대로부터의 보고 받고, 부대 근처 1백 미터 지점 민가에서 폭도 정탐활동중. (31사단 전투상보)
- 충장로 부근에서 군용트럭 4대에 군중이 타고 애국가를 부르며 계엄해제를 외침. (계엄사 상황일지)
- 금남로에 시민 30만 명 육박. (신동아 1985. 10)
11:30 집결지를 알리는 전단 배포
- 전남지역 학생총연맹 이름으로 '오후 2시 도청 앞에서 도민궐기대회를 갖자'는 전단이 시내에 뿌려져 도청점령설을 뒷받침했다. 시내의 시위상황이 예측을 불허하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 같은 상황은 광주 동구청 건물 3층 우리 지사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순식간에 일어났다. (월간조선. 1985. 7)
- 버스 3대에 분승한 무장폭도 150여 명 함평읍 도착. (31사단 전투상보)
11:40
- '4.19 의거로 연결하자'는 제하에 '각 대학은 대학별로 집결지를 정해 행동할 것' 과 '전남대생은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조선대생은 계림파출소, 서강실업과 간호대는 MBC 방송국, 고교생은 산수 오거리, 시민은 도청으로 집결하라'는 내용을 담은 전남민주학생총연맹 명의의 전단이 살포. (신동아, 1985. 10)
11:45
- 시위대원 몇 사람이 전남일보사 건물 뒤쪽에서 불을 지르려 했으나 경찰이 즉시 최루탄을 발사하는 바람에 방화기도는 일단 좌절. 그때 1백여 명은 대의동 남도예술회관 앞까지 진출.(10일간의 취재수첩)
11:46
- 헬기로 교도소 경계병력에 탄약 수송. (31사단 전투상보)
11:50
- 시위군중 3백 명 전남매일신문 지역 3공수여단 공격차량 12대로 돌진공격 감행. (전교사 작전일지)
- 군용트럭에 탄 50여 명이 충장로에서 도청 앞으로 나오려다 군과 경찰의 공동 저지로 되돌아갔고, 노동청 쪽 길에도 수만 명의 시위대가 몰려들어 경찰 단독으로 막아내느라 진땀을 빼고 있음. (10일간의 취재수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