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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1월, 한겨울 압록강을 건너던 석주 이상룡은 시 한 편을 남겼다.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는데 / 살은 깎이어도 오히려 참을 수 있고 /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 차라리 이 머리가 잘릴지언정 / 어찌 내 무릎을 꿇어 그들의 종이 될까 보냐."
50대 유학자가 전 재산을 정리하고 노비문서를 불태워 노비들을 해방시킨 뒤, 식솔을 이끌고 낯선 만주 땅으로 떠나는 길에서 읊은 것이었다.
1920년 10월, 만주 화룡현의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열흘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연속으로 승리를 거뒀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아는 청산리대첩이다. 그 승리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길고 치밀한 준비가 있었는지, 어떤 사람들이 어떤 조직을 거쳐 그 골짜기에 도달했는지, 대부분은 모른다.
청산리는 결코 기적이 아니었다. 10년에 걸쳐 축적된 힘의 폭발이었다.
청산리대첩 직후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이 상해 임시정부에 제출한 공식보고서는 일본군 전사자를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 기타 장교와 사병을 합쳐 총 1,257명으로 명기했다.
연성대장 이범석은 전사자와 부상자를 합산하면 약 3,300명에 달했다고 추산했다. 자료마다 숫자가 엇갈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느 수치를 따르든 한 가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식민지 피지배 민족의 비정규 독립군이 근대 제국의 정규군을 상대로 이 규모의 전과를 올렸다는 것은, 우연이나 운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당시 일제의 군사력은 세계 최강 수준이었다.
이 전투의 뿌리를 따라가면 1910년 말 서간도로 돌아가야 한다.
신민회는 해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의했고, 이회영·이시영·이동녕·이상룡·김대락이 전 재산을 처분하고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로 이주했다.
1911년 4월 이들은 삼원포에 경학사라는 민단 조직을 세우고, 석주 이상룡이 사장에 취임했다. 경학사의 부속 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개설한 것이 훗날 신흥무관학교가 되는 학교의 출발이었다.
학교 이름에는 뜻이 담겼다.
'신흥(新興)'은 신민회의 '신(新)' 자와 다시 일어나는 구국 투쟁의 '흥(興)' 자를 합친 것으로, 나라를 새로 일으킨다는 의미를 내포했다. 그 이름대로 학교는 강습소에서 신흥중학교를 거쳐 1919년 5월 3일 유하현 고산자(孤山子)로 이전하며 신흥무관학교로 정식 개교했다. 신흥강습소에서 신흥무관학교까지, 이름이 바뀌는 동안 학교의 본질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바로 무장 독립군 양성이다
이 학교의 역대 교장을 나열하면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다. 1대 이동녕, 2대 이상룡, 3대 여준, 4대 이광, 5대 이세영. 설립자인 이회영과 이시영을 포함하여, 이 학교를 만들고 이어간 핵심 인사들이 모두 대종교와 깊이 연결된 인물들이었다.
이시영은 해방 이후 대종교의 원로원장·사교(司敎)를 역임했고, 이상룡은 유학자로 출발했으나 대종교를 접하면서 역사 인식이 확장됐다. 박은식의 역사관 변화도 이와 유사한 경로를 밟았다. 신흥무관학교는 신민회의 무관학교이기도 했지만, 대종교의 민족 신앙이 군사 교육의 정신적 토대를 이루고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 정신이 학교의 교가에 담겼다. 2대 교장 이상룡이 지은 교가의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에영절에 / 여러만만 헌원자손 업어기르고 / 동해섬중 어린것들 품에다품어 / 젖먹여 기른 이 뉘뇨 / 우리우리 배달나라의 / 우리우리 조상들이라."
중국 대륙 전체를 한민족의 고토이자 활동 무대로 바라보는 이 역사 인식은, 단군 사화에 뿌리를 둔 대종교의 세계관 없이는 나오기 어려운 것이었다. 배달나라라는 말 자체가 대종교에서 비롯된 개념이었다.
3절은 더 직접적이다.
"칼춤추고 말을달려 몸을단련코 / 새론지식 높은인격 정신을길러 / 썩어지는 우리민족 이끌어내어 / 새나라 새울 이 뉘뇨 / 우리우리 배달나라의 / 우리우리 청년들이라 / 두팔들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 / 자유의 깃발이 떳다."
이 교가를 부른 학생들이 나중에 청산리 골짜기에 섰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낯선 땅에서 산전을 개간하다 수토병에 걸려 쓰러지는 사람이 속출했다. 그러나 1914년 평지를 빌려 논을 일구기 시작하면서 경제 기반이 잡혔다. 신흥무관학교가 있던 유하현과 통화현 일대에만 소학교 30개, 1916년 기준 두 현의 재학생 1,287명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이 소학교들에 졸업생 교원을 파견하고, 소학교는 신흥무관학교에 신입생을 공급했다. 하나의 독립운동 생태계였다. 1917년 6월에는 삼원포에서 4개 현 연합 대운동회가 열렸다. 참가 학생 2,300여 명이 제복을 입고 목총을 들어 병식체조를 선보였다. 학교이자 군사기지이자 한인 자치사회. 이 세 가지가 하나로 결합된 구조가 신흥무관학교의 실체였다.
1917년 6월, 삼원포에서 유하·통화·휘남·해룡 등 4개 현 학교들의 연합 대운동회가 열렸다. 참가 학생 수가 2,300여 명에 달했고, 이들은 제복을 입고 목총을 들고 병식체조를 선보였다. 이것을 지도한 것은 신흥무관학교에서 파견한 교원들이었다. 일제 영사관 감시 보고서들이 이 광경을 두고 "상시 불온사상을 고취"하고 있다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들의 불안이 과장이 아니었다. 한인 마을 전체가 군사훈련장으로 기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 가을에는 또 하나의 전환이 있었다. 신흥학우단이 통화현 제8구 팔리초구 소북차에 수천 명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군영, 백서농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맞물린다.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밀착되면서 러시아 당국이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핍박하고 연해주 각종 단체를 해산하기 시작했다.
연해주에서 쫓겨난 독립운동가들이 서간도로 몰려오면서, 이 지역이 해외 독립운동의 전략 거점으로 부상했다. 당시 이시영이 서간도 각지의 한인 자치단체를 통합하여 중앙교회를 조직하고 통령이 되면서, 북간도와 연해주 세력까지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어냈다. 중앙교회라는 명칭은 일제의 압박을 피하고 미주 동포의 지원을 받기 위해 기독교를 앞세운 위장이었다.
이 모든 역량을 현장에서 뒷받침한 인물이 여준이었다.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그는 이회영·이시영 형제가 1913년 일제의 체포 기도를 피해 서간도를 떠난 뒤, 그 빈자리를 묵묵히 채운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 형제들과 죽마고우였던 여준은 부민단 교육회장을 거치며 서간도 독립운동의 실질적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1918년에는 부민단의 영향력이 길림 지역으로까지 확산되어 동성한족생계회가 조직됐고, 여준이 정회장으로 선출됐다. 이 시기 서간도 인근 환인·집안현의 친일단체 조선인조합 지부 일부가 스스로 사무를 폐쇄하고 부민단 사무에 종사할 정도였다. 10년의 축적이 만들어낸 힘이 어느 수준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여기서 북간도의 또 다른 흐름을 살펴야 한다.
바로 대종교다.
1909년 나철이 중광한 대종교는 단군 사화에 담긴 민족의 고유 신앙을 계승하여, 나라를 빼앗긴 민족에게 정신적 구심을 제공했다. 국망(國亡) 이후 대종교는 빠르게 만주·연해주 한인 사회로 퍼져나갔고, 1912년 무렵 서일이 대종교에 입교하면서 북간도의 독립운동 기반이 종교와 결합했다.
서일은 이미 1911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망명하여 의병 잔류 병력을 기반으로 중광단을 조직한 상태였다. 대종교 입교 이후 그는 교우들 가운데 청년들을 독립군으로 편입하고, 신앙 공동체를 군사 공동체로 전환해 나갔다. 3·1운동 직후 중광단은 대한정의단으로 발전했고, 서일은 무장투쟁 기관으로의 전환을 도모했다. 그러나 대종교·공교회 중심의 대한정의단에는 치명적인 빈 자리가 있었다. 실전 군사 전술을 지휘할 전문 무관이 부재했다.
두 흐름이 길림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1918년 말, 상해의 신규식이 봉천에 있던 정원택에게 밀서를 보냈다. 파리강화회의에 맞추어 만주에서도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하라는 지시였다. 밀서를 받은 정원택은 이틀 뒤 길림으로 달려가 박찬익을 만났고, 1919년 2월 27일 여준의 집에서 대한독립의군부가 결성됐다.
참가자는 박찬익, 조소앙, 황상규, 김좌진, 정운해, 정원택, 손일민, 성락신, 김동평 등이었다. 여준이 총재로 추대됐고, 총무 겸 외무에 박찬익, 재무에 황상규, 군무에 김좌진, 서무에 정원택이 배치됐다. 39인 서명자 가운데 김동삼·여준·이동녕·이상룡·이세영·이시영·이탁·허혁·박찬익·임방·황상규·김좌진이 모두 신흥무관학교 관련 인사들이었다.
대한독립의군부는 즉각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4,000부를 인쇄했다. 1919년 3월 11일 서북간도, 러시아령, 구미 각국, 북경, 상해, 국내, 일본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이 선언서는 3·1운동의 독립선언서와 성격이 달랐다.
선언서 말미는 "起하라 독립군아, 齊하라 독립군아"라고 선동하며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하자"고 요구했다. 외교적 청원이 아니라 무장투쟁의 선포였다. 그 배후에는 단군으로부터 이어지는 민족의 주권이 이 땅의 처음부터 우리 것이었으며, 따라서 되찾는 것은 권리이지 저항이 아니라는 대종교적 신념이 깔려 있었다. 이때의 선언장소가 바로 대종교 총본사였다는 점이 그것을 증명한다.
대한독립의군부는 조직적 무장투쟁을 위해 곧 길림군정사로 재편됐다. 1919년 3월 중순 조직된 길림군정사는 이상룡·박찬익·조성환·이장녕·김좌진 등 신흥무관학교 계통의 인사들이 핵심을 채웠고, 역시 여준이 단장이었다.
길림군정사는 임시정부의 만주 독립군 통합 정책에 편입되었다가 이후 독자적인 활동도 전개했다. 1919년 10월에는 여준을 단장으로 하는 급진단이라는 비밀결사도 조직됐다. 여준은 닐콜리스크 방면으로 건너가 러시아제 소총 700정을 구입하여 화전현으로 수송하는 무장 조달 작전도 직접 이끌었다.
길림군정사는 의열단 탄생의 산실이기도 했다. 황상규의 처조카 김원봉이 1919년 5월 길림 인근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독립군관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길림에서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서였다.
학교에서 동지들을 모은 김원봉은 1919년 11월 10일 길림 파호문 밖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 13명과 함께 의열단을 창립했다. 의열단의 고문은 길림군정사의 황상규와 김대지였다. 총과 전술만이 아니라 개인의 몸을 탄환으로 삼는 의열투쟁이라는 또 다른 무장의 경로도 길림군정사와 신흥무관학교라는 같은 뿌리에서 뻗어 나왔다.
1919년 10월, 길림군정사의 군사전략가들과 대한정의단이 합작하여 북로군정서가 탄생했다. 이 결합의 구도가 중요하다. 서일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의단은 대종교와 공교회 인사들이 주축으로, 북간도에 탄탄한 대중 기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실전 군사 지휘 역량이 없었다. 대한정의단 스스로가 이 문제를 인식했고, 결국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와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군사전략가들이 집결해 있던 길림군정사 인사들에게 사령부 요직을 넘겼다.
서일이 총재로서 대중적 권위와 종교적 구심을 맡고, 김좌진이 총사령관으로 군사 지휘를 맡는 구도였다. 대종교의 신앙이 제공하는 대중적 기반 위에 신민회 이래 10년간 축적된 군사적 전문성이 얹힌 것이 북로군정서라는 조직의 실체였다.
임시정부는 1919년 12월 국무원 포고 제205호로써 대한군정부의 명칭을 대한군정서로 변경하도록 조건을 달아 공인했고, 이로써 세간에서는 '북로군정서'라는 별명이 공식 명칭보다 더 널리 퍼지게 됐다. 다만, 대종교인들이 대한군정서로 불리우기를 원했고 자랑스러워했다.
북로군정서의 간부진을 보면 신흥무관학교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총사령관 김좌진은 신민회 청년학우회 활동 이후 서간도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참여했고, 대한독립의군부 군무부장을 역임하며 「대한독립선언서」 서명자 39인 중 한 명이었다.
참모장 이장녕은 신흥무관학교 교관 출신이었다. 사령부 부관 겸 사관연성소 학도단장 박영희, 연성대장 이범석, 소대장 김훈(김춘식), 제4중대장 오상세, 제2학도대 구대장 백종렬, 구대장 강화린, 소대장 이운강이 모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거나 교관 출신이었다.
김좌진은 대한정의단의 군정회로부터 독립군 창설을 위임받은 1919년 8월, 서간도 유하현의 신흥무관학교와 신흥학우단에 직접 연락하여 교관과 졸업생 파견을 요청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이에 응해 교관 이범석과 졸업생 김훈·박영희·오상세·백종렬·강화린·최해·이운강 등을 북간도로 보냈다. 이들이 왕청현 서대파에 세운 사관연성소에서 1920년 9월 298명의 1기 졸업생이 배출됐다. 청산리 전투가 그로부터 한 달 뒤였다.
서로군정서도 이 전투에서 빠지지 않는다. 서로군정서는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한 서간도 민단조직이 한족회를 거쳐 군정부로 전환된 것이었다. 독판 이상룡, 부독판 여준, 사령관 이청천 모두 신흥무관학교 계통이었다.
1920년 7월 일본군의 수색작전으로 서로군정서가 유하현을 떠나 안도현으로 이동할 때, 이청천이 이끄는 교성대(신흥무관학교 사관생도들로 구성)도 함께 움직였다. 이들은 안도현에서 홍범도 연합부대를 만났고, 홍범도 부대가 제공한 무기로 무장하여 전투에 합류했다. 이들 대다수도 대종교인이었다.
연합작전은 사전에 설계되어 있었다. 1920년 5월,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과 서로군정서 헌병대장 성준용 사이에 상호 협력을 명문화한 체약문이 체결됐다. 양 기관이 임시정부를 절대 옹호하며, 군사상 일체 중요 사안을 상호 협의하고, 사관 연성과 무기 구입에 있어 상호부조한다는 내용이었다. 청산리 전투가 시작되기 다섯 달 전의 일이었다. 전투 직전인 10월 19일에는 묘령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연합부대 수뇌들이 연합작전회의를 열었다.
청산리대첩의 최대 격전은 어랑촌이었다. 북로군정서가 일본군 동지대의 대병력에 포위되어 혈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 홍범도 연합부대가 소대장의 긴급 연락을 받고 측면에서 지원하러 왔다. 신흥무관학교 생도들로 구성된 서로군정서 교성대가 그 홍범도 부대에 합류해 있었다. 어랑촌에서 일본군 기병연대장 가납(加納) 대좌를 비롯해 다수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북로군정서 사령부는 어랑촌 전투의 일본군 전사자와 부상자를 합쳐 1,600명이라 발표했고, 중국 관변은 1,300명으로 추산했다.
이 모든 계보를 관통하는 줄기가 대종교였다.
신흥무관학교의 핵심 인사들과 대종교의 연결은 우연이 아니었다. 상해 독립운동의 대부 신규식은 대종교인이었고,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종교인이었다.
서일은 중광단을 만들고 대한정의단을 만들고 북로군정서를 조직하는 전 과정이 대종교 신앙과 분리되지 않는 삶이었다. 청산리전투 직후 임시정부에 보낸 공식 보고서도 총재 서일 명의였다. 북로군정서 사령부를 채운 신흥무관학교 인사들 가운데서도 대종교와 인적 연결을 가진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대한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39인은 신흥무관학교 관련 인사와 대종교 관련 인사들이 겹쳐 있는 목록이었다. 신앙이 독립운동의 정신적 뼈대였고, 신흥무관학교가 그 뼈대에 살과 근육을 붙이는 훈련 기지였다.
대종교는 단군 사화에 기반하여 이 땅의 역사가 외부로부터 부여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우리의 것이었다고 가르쳤다. 그 가르침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외교적 협상이나 국제 사회의 보장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되찾아야 한다는 내적 확신으로 작동했다. '대한독립선언서'에 담긴 "육탄혈전"의 언어는 그 확신의 표현이었다. 청산리 골짜기에서 방아쇠를 당긴 사람들은 그 선언의 약속을 몸으로 이행한 것이었다.
청산리대첩 이후 독립군은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일본군은 독립군이 아닌 간도 일대 한인 마을을 향했다. 1920년 경신참변에서 민가 3,209채, 학교 36개소, 교회당 36개소가 불탔고 상해 임시정부 집계만으로 3,469명의 민간인이 학살됐다. 살아남은 독립군은 러시아령으로 이동했고, 이듬해 자유시참변에서 또 한 번 큰 타격을 입었다.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은 1921년 부하들이 이역만리에서 희생되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청산리의 승리는 그 무게만큼의 희생을 이미 예비하고 있었다.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길러낸 독립군은 서로군정서 의용대, 대한독립군, 임시정부 광복군 등 독립운동의 모든 전선에서 지도자로 활약했다.
이시영은 해방 이후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을 이어 1947년 신흥전문학원을 설립했다. 학교는 이후 여러 사정으로 운영권이 이전됐고, 새로운 재단이 학교명을 경희대학교로 바꿔 오늘에 이른다.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적 계승이라는 역사적 연원을 가진 학교가 바로 경희대학교이다.
청산리 골짜기에서 총성이 울리기까지, 경학사의 첫 삽질에서 백서농장의 군영 건설까지, 길림에서 밀서가 오가고 선언서가 인쇄되던 그 밤들까지, 모든 과정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 있다.
그 선의 이름이 신흥무관학교였고, 그 학교에 정신의 불을 지핀 것이 대종교였다. 이 두 흐름이 만나지 않았다면 청산리는 없었다. 우리가 청산리를 기억한다면, 그 기억은 골짜기의 총성보다 더 먼 곳, 압록강을 건너던 이상룡의 서릿발 같은 시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아래 사진 : 대한군정서 보병 제일연대 제일대대 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