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모- 땃사 바가와또 –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3회)
Namo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청정도론 3권
제21장 도닦음에 대한 지와 견에 의한 청정
paṭipadāñāṇadassanavisuddhiniddeso
일곱 분의 성자들의 분류p317~
Sarra-ariyapuggala-vibhāga
74. 앞에서 ‘익서은 일곱 분 성자들의 분류를 위한 조건이 된다’라고 설했다.(§66) 여기서 ① 믿음을 따르는 자 ② 믿음으로 해탈한 자 ③ 체험한 자 ④ 양면으로 해탈한 자 ⑤ 법을 따르는 자 ⑥ 견해를 얻은 자 ⑦ 통찰지로 해탈한 자 ᅳ 이들이 일곱 분의 성자들이다.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가 그들의 분류를 위한 조건이 된다.
75. 확신(결심,adhimokkha)이 큰 자는 무상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믿음의 기능(信根)을 얻는다. 그는 예류도의 순간에 ① 믿음을 따르는 자가 된다. 나머지 일곱 경지(즉, 세 가지 도와 네 가지 과)에서 ② 믿음으로 해탈한 자가 된다.
편안함(輕安)이 큰 자는 괴로움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삼매의 기능을(定根)을 얻는다. 그는 모든 곳에서 ③ 체험한 자가 된다. 무색계 禪을 얻고 최상의 [아라한]과를 얻은 자를 ④ 양면으로 해탈한 자라 한다.
영지(靈知)가 큰 자는 무아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통찰지의 기능(慧根)을 얻는다. 그는 예류도의 순간에 ⑤ 법을 따라 행하는 자가 된다. [그 다음의] 여섯 곳에서 ⑥ 견해를 얻은 자가 되고, 최상의 과에서 ⑦ 통찰지로 해탈한 자가 된다.
76.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무상이라고 마음에 잡도리 할 때 믿음의 기능이 강해진다. 믿음의 기능이 강해지기 때문에 예류과를 얻는다. 그러므로 ① 믿음을 따르는 자라 한다.(Ps.ii.53)”
다시 설하셨다. “무상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믿음의 기능이 강해진다. 믿음의 기능이 강해지기 때문에 예류과를 실현한다. 그러므로 ② 믿음으로 해탈한 자라 한다.(Ps.ii.53)”
77. 다시 설하셨다. “[첫 번째 도의 순간에] 믿음을 가지고 해탈했기 때문에 ② 믿음으로 해탈한 자라 한다. [무색계 禪을] 체득하고 증득했기 때문에 ③ 체험한 자라 한다. 견해라고 불리는 첫 번째 도의 지혜]를 얻기 때문에 ⑥ 견해를 얻은 자라 한다. [나머지 세 가지 도의 순간에] 믿음을 가지고 해탈하기 때문에 ② 믿음으로 해탈한 자라 한다. 먼저 禪을 체득하고 다음에 소멸인 열반을증득하기 때문에 ③체험한 자라 한다. 상카라들은 괴로움이요 소멸은 행복이라고 통찰지로 알고, 보고, 확인하고, 실현하고, 체득했기 때문에 ⑥ 견해를 얻은 자라 한다.(Ps.ii.52)”
78. 나머지 네 가지 경우에, 믿음을 따르기 때문에 혹은 믿음으로써 따라 가기 때문에 ① 믿음을 따르는 자라 한다. 마찬가지로 통찰지라 불리는 법을 따르기 때문에 혹은 법으로써 따르기 때문에 ⑤ 법을 따르는 자라 한다. 무색계 禪과 성스러운 도와 두 가지로 해탈한 자를 ④ 양면으로 해탈한 자라 한다. 꿰뚫어 알면서 해탈했기 때문에 ⑦ 통찰지로 해탈한 자라 한다. 이와 같이 단어의 뜻을 알아야 한다.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였다.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는 앞의 두 지혜와 같다.
79.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는 앞의 두 가지 지혜와 뜻으로는 하나이다. 그래서 옛 스승들이 말씀하셨다.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는 하나지만 그 이름은 세 가지다. 처음에는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라는 이름이 생겼고, 중간에는 깊이 숙고하여 관찰하는 지혜라 이름하고, 마지막 정점에 이르렀을 때는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라 한다.”
80. 성전에서도 역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어떻게 해탈하기를 원함과 깊이 숙고함과 평정에 대한 통찰지가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인가? 일어남(uppāda)으로부터 해탈하기를 원함과 깊이 숙고함과 평정에 대한 통찰지가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다. 진행 ∙∙∙ 표상 ∙∙∙ 절망으로부터 해탈하기를 원함과 깊이 숙고함과 평정에 대한 통찰지가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다. 일어남이 괴로움이라고 ∙∙∙ 공포라고 ∙∙∙ 세속적이라고 ∙∙∙ 일어남이 상카라라고 ∙∙∙ 절망이 상카라라고 이것으로부터 해탈하기를 원함과 깊이 숙고함과 평정에 대한 통찰지가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헤다.(Ps.i.60-61)”
81. 여기서 합성어인 ‘muñcitukamyatā(해탈하기를 원함)- paṭisaṅkhā(깊이 숙고함(-santiṭṭhanā(평정)’는 [드완드와(병렬) 합성어로] ‘muñcitu-kamyatā(해탈하기를 원함)’와 ‘paṭisaṅkhā(깊이 숙고함)’와 ‘santiṭṭhanā(평정)’로 분해된다.
처음 단계에서 역겨움의 지혜로써 역겨워하는 자가 일어남 등을 버리기를 원함이 해탈하기를 원함이고, 벗어나는 방편을 찾기 위해 중간에 숙고하는 것이 깊이 숙고함이고, 해탈한 뒤 마지막에 침착함이 평정이다. 이것에 대해서 “일어남이 상카라이다. 그 상카라들에 대해 침착함이 상카라에 대한 평온이다.(Ps.ii.64)”라고 설하셨다. 이와 같이 이 [세 가지]지혜는 오직 하나이다.
82. 더욱이 성전을 통해서도 이 지혜는 오직 하나라고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해탈하기를 원함과 깊이 숙고하여 관찰함과 상카라에 대한 평온이라는 이 법들은 뜻으로는 같고 문자만 다르다.(Ps.ii.64)
붓다사 사낭 짜랑 띳타뚜(3회)
(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불법이라 불리우는 법과율의 가르침이
오랜세월 훼손없이 존속하여 머무소서.
Sādhu! Sādhu! Sādhu!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