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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꽃지기 원문보기 글쓴이: 양산박
용문산 정상에 있는 헬기장에서 - 한문희 총대장님 사진
2019년 1월 13일 일요일 백두대간 24 회차 용문산
자유인 산악회
용문산 : 백두대간 24회차 : 큰재 – 웅이산 – 용문산 – 무좌골산 – 작점고개 – 사기점고개 – 해주오씨 산소 - 작동마을
산행거리 : 약 17 km 산행시간 : 약 6 시간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1363440
거리 17.6 km
소요 시간 7h 54m 58s
이동 시간 6h 35m 13s
휴식 시간 1h 19m 45s
평균 속도 2.7 km/h
최고점 812 m
총 획득고도 868 m
난이도 힘듦
백두대간 (白頭大幹) 24 – 웅이산 용문산 구간
기도 (祈禱)
양산박
없는 것을 갖게 해달라 하고
있는 것을 더 갖게 해달라 한다
복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악은 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단다
물질이란 것은
내가 더가지면 남이 덜가져야 한다는걸
잠시 망각하고 기도한다
용문산 자락 기도원에선
수많은 기도가 울려 퍼진다
큰재에서 산행 시작전 단체사진을 쵤영했다.
또 하나의 퍼즐이 맞춰졌다. 작년 7월 8일 추풍령구간을 마치고 해주오씨(海州吳氏) 산소에서 작동마을로 하산하고 나서 금방 이어질 줄 알았던 용문산구간을 6개월이나 지나서 찾게 되었다. 짐작으로 이 구간이 겨울철 산행에 위험하지 않아 남겨 둔 것이라 생각했었다. 사실, 산방기간이나 비법정 탐방구간이나 여러가지를 감아하여 산행계획을 짜는 것도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닐 터이다. 전형적인 흙산으로 밋밋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지는 아주 순한 대간길이다.
겨울산행을 할 때는 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무언가를 간절하게 바래본다. 이번에도 일기예보에 서해안과 남쪽에 1 cm 가량 눈이 쌓일거라는 예보가 있었다. 목적지가 가까워 오면서 그 ‘혹시나’병이 발동하여 차창으로 자꾸만 밖을 내다 보았다. 그런데 ‘역시나’ 눈 부스러기조차 없이 반갑지 않은 미세먼지만 뿌옇게 쌓여 있다. 이런 날엔 혹시나 상고대라도 피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어 보았으나 산 정상에 가까와져 기온은 조금 떨어져 갔으나 얼음을 얼릴 만큼 춥지도 않다. 그럭 저럭 겨울철 산행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처음 산행을 시작하는 모습 - 열을 맞춰서 선두와 후미가 한몸으로 움직인다.
초미세먼지 농도가 아주 나쁨 수준이라고 한다. 호흡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가면 폐에서 걸러지지도 않고 혈액에 섞여서 온몸을 돌고 심지어 뇌에도 들어간다고 한다. 한두번 얘기할 때는 그저 그러려니 하던 것도 여러 번 반복하니까 은근히 걱정된다. 이번 산행에도 마스크를 쓰고 걷는 사람이 두세명 보인다.
들머리인 큰재(320m)는 김천시 공성면과 상주시 모동면을 이어주는 고개다. 경사가 완만하여 고개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데 큰고개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은 그 만큼 고개의 양쪽에 사는 주민들에게 의미가 큰 의미가 있는 고개인가 보다.
큰재에서 웅이산 국수봉(795 m)까지는 약 4 km 이어지는 제법 가파른 길이다. 눈앞에 우뚝 서 있는 봉우리가 아침 햇빛 역광을 받아 시커멓게 다가온다. 그러나 정작 웅이산 국수봉은 고개를 몇 개인가 넘어서야 불쑥 나타났다. 늘 그렇듯이 우리나라 산은 정상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산마루와 맞닿은 하늘이 보이고 또 한잠을 가야 비로소 산의 정상이 나타난다.
웅이산과 용문산
웅이산(熊耳山)이라 쓰여진 정상석 사진을 친구에게 보내주니 ‘곰귀산에 갔구나’하고 회신이 온다. 한자가 갖는 폐단이다. 중국 삼협에 있는 웅이산에서 난다는 시초(蓍草)가 이 산에서도 나고 있어 그 산이름을 따 웅이산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시초는 톱풀을 일컫는데 옛날에는 이 시초의 마른 줄기를 점치는 도구로 삼았다 한다. 그 후 시초 대신 산대나무 줄기를 이용했다.
웅이산 정상석 - 예전에 올랐던 사람들의 블로그를 보면 이곳에는 국수봉(掬水峰) 정상석이 놓여 있었다.
정상에서 바라본 상주쪽 정경 - 미세먼지로 인해 시야가 흐릿하다.
앞으로 진행할 방향
나는 이 산의 이름을 따왔다는 중국의 웅이산은 어떤 곳인가 호기심이 들었다. 선종을 창시자인 달마선사가 수도입적한 곳이 삼협의 웅이산 용문굴이라고 한다. 면벽수도를 통해서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을 창시한 달마선사는 중국 위나라 대동 2년 ( 서기 536년 ) 낙주의 우문 (禹門) 즉 현재의 용문석굴에서 입적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한다.
웅이산에서 용문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호젓한 오솔길이다.
높은 지역 음달에는 약간의 눈이 있지만 대체로 먼지가 날 만큼 건조하다
웅이산과 용문산 중간지점 기양지맥이 시작되는 용문사 삼거리에서 점심을 먹었다.
웅이산과 용문산이라는 산 이름이 이처럼 달마선사가 입적한 산이름과 석굴이름과 일치하는 것은 누군가 기획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불교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선사가 입적한 장소와 적어도 이름이 같은 것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 용문산 아래에는 용문사라는 절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오래전부터 여러 종교의 기도처가 이어져 왔다고 한다. 이런 제반 상황과 웅이산 용문산의 이름이 연관되는 것은 나의 지나친 억측일까 ?
웅이산에서의 조망도 아주 좋지 않다. 맑은 날이면 민주지산과 소백산까지 보인다는데 지금은 산아래 마을이 그저 어렴풋이 보일 뿐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아무리 뚫어져라 바라봐도 아름다운 조망은 기대할 수 없다. 평소같으면 이런 산정에 서서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사를 쏱아낼 터인데 회원들은 정상석 앞에서 낯익은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고 서둘러 갈 길을 재촉한다.
낙엽이 쌓인 흙길을 조금 내려와 용문사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점심을 먹었다. 날씨가 차갑지 않아 땅도 말라 있다. 우리는 그 위에 별다른 장치도 없이 둘러 앉아 평소처럼 버너에 라면을 끓여 먹었다. 이렇게 땀흘리면서 산행을 할 때는 짭잘한 라면국물은 진수성찬보다 맛 있는 법이다. 라면에 빵과 떡 그리고 디저트로 사과와 커피까지 여러가지 음식으로 점심을 먹고 이제 용문산만 지나면 산행이 끝날거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번 백두대간 구간은 기존 다른 구간에 비해 편안한 산책길 같다. 낙엽이 쌓인 오솔길에 경사도 그리 급하지 않고 바위도 없다. 눈도 없어 눈이 심심하지만 산행하기에는 위험요소가 하나 줄어 들어 좋다. 용문산에 이르기 전 오르막에 이번에 처음 참여한 안산팀 회원 한 분이 다리에 쥐가 나서 잠시 쉬어가길 반복한다. 산행경험이 많아도 처음 자기 페이스를 오버해서 무리하게 걷다가 힘들어 하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다른 일도 그렇지만 자기 페이스를 지켜서 완주하는 것이 중요하다.
용문산 정상
크지 않은 참나무와 소나무가 주종을 이룬다. 산길은 전반적으로 편안한 흙길이다.
소나무 숲
용문산(708.3 m) 정상석 곁에는 이 산 이름의 유래를 설명한 작은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1800년대 박송이라는 유생이 산세가 중국의 용문산과 비슷하다 하여 그렇게 불렀다 한다. 중국의 용문산은 낙양시에서 13 km 남쪽에 위치한 석회암으로 되어 있는 바위산인데 수 많은 석굴과 돌부처상을 조각하여 둔황의 막고굴, 대동의 운강석굴과 더불어 중국 3대 석굴중 하나가 자리잡은 곳이라 한다. 그런 용문산이 이 용문산과 어떤 면에서 같은 이름을 붙일 만큼 닮았다고 하는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위에 언급한 웅이산처럼 어떤 종교적인 사고(思考)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본다.
용문산을 지나왔으니 이제 이번 구간의 주요지점을 통과한 것이니 마음이 가벼워진다. 앞서가는 선두팀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지만 이제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느긎해진다. 옛날 작점고개가 뚫려 차량통행이 있기 전에는 충북 추풍령군 사람들과 경북 김천시 사람들이 빈번하게 넘나들었다는 갈령을 지나면서 산길은 잠시 위로 솓구쳐 무좌골산을 만난다.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세자로 된 우리나라 산이름에 비해 네자로 된 것이 뭔가 특별해 보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뜻을 헤아릴 수 없다. 예전에는 이 산 정상석 주변에 신앙인들이 움막을 짓고 기거하면서 기도하는 모습이 많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이번 산행에서도 이 무좌골산에서 내려오는 길 가에 검은 그늘막으로 가려진 움막이 보였다. 하지만 내 눈에는 이 곳이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이처럼 나지막한 언덕 같은 곳에 집채만큼이나 큰 정상석을 세워두었는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갈재 - 작점고개가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확장되기 전에는 주요 이동통로였다고 한다.
갈재에서 바라본 추풍령 방면 - 그 반대 김천 쪽에는 전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던져서 쌓아 놓았던 돌무더기가 있다.
무좌골산 정상석 - 유래도 알 수 없는 산이름에 명찰은 엄청 큰 걸 붙여 놓았다.
작점고개에 이르기 전 오른쪽에 있는 산소자리를 보호하는 철망이 설치되어 있다.
산(山)인가 봉(峰)인가
큰재에서 시작한 이번 백두대간 산행은 약 5시간동안 10여 킬로미터를 걸어 작점고개에 이르렀다. 영동쪽으로 가까운 곳에 있는 작점리라는 마을로 가는 고개라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작점고개에서는 작은 지방도로가 끊어 놓은 백두대간을 이어 붙이는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끊어진 산길의 크기에 비해 공사규모는 굉장히 커 보였다. 이 생태육교가 완성되면 전에 지리산자락에 있던 치재만큼이나 너른 육교가 도로를 덮을 것 같다. 이 작점고개에서 비리소 용문산 산줄기가 함숨 죽이고 쉬어 가는 곳이다.
작점고개는 공사중 - 생태통로를 건설중에 있다.
대간꾼들이 쉬어 가는 곳
힘들거나 지루해 하는 사람들을 태우고 갈 버스
난 여기서 다시 한 번 산山이나 봉峰에 대한 개념을 떠 올려 본다. 어렴풋이 이해하기로는 산은 봉보다 좀 더 큰 규모로 솟아 있는 지형을 일컫는다. 즉, 산에는 여러 개의 봉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설악산에는 대청, 중청, 소청, 귀때기청봉 외에도 많은 봉이 들어 있다. 지리산도 마찬가지고 덕유산도 그렇다. 이처럼 큰 산 등줄기에 높고 낮게 솟은 봉우리들은 봉峰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런데 오늘 걸었던 용문산줄기에는 웅이산, 용문산 그리고 무좌골산 등 세개나 들어 있다. 이는 아직도 정형화되지 않은 산의 체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대간길은 잠시 남함산 통신중계소로 올라가는 포장도로와 친해진다.
잠시 난함산 줄기 가파른 산길을 기어 오르고
다시 난함산에서 내려와 포장도로를 건너 호젓한 산책길로 접어 든다.
오솔길을 걸으며 마음을 너무 내려놨나 보다.
산행에 지친 일부 회원들은 작점고개에 주차된 버스를 타고 날머리로 정해진 작동마을로 가고 나머지는 난함산(남함산 733.4 m) 방향으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남함산 정상에 있는 통신중계소로 이어지는 콘코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얼만큼 올라 가다가 왼쪽으로 가파르게 솟은 산길로 접어 든다. 그리고 남함산으로 오르던 대간길은 얼마 안가서 P턴 하듯이 다시 가파르게 내려와 콘코리트 포장도로를 건너서 사기점 고개로 이어진다. 이 난함산 부분은 얼핏 보아 백두대간의 기본 원리인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의미에 맞는 것 같으면서도 콘코리트 포장길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즉, 대간길 윗쪽 난함산으로 이어지는 도로위의 물은 원칙대로라면 낙동강으로 흘러가야 하지만 도로를 타고 흘러서 추풍령쪽으로 흘러 남한강으로 이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포장도로와 헤어진 대간길은 솔숲 사이로 난 오솔길이다. 솔잎이 잔잔하게 깔려 있는 흙길이 널찍하여 말을 타고 달려도 좋겠고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어울릴 법 하다. 백두대간이 맞는건가 하고 주변을 둘러 보니 그 동안 다녀간 대간꾼들이 나무에 매달아 놓은 형형색색의 시그널이 보인다. 이 길은 곧 이어 사기점고개를 만난다. 옛날 이 고개 진행방향으로 왼쪽인 김천쪽에 사기그릇을 굽던 유기공장이 넓게 분포하고 있었고 구운 사기그릇을 팔기 위해 이 고개를 넘어 다녀 고개이름이 사기점고개가 되었다 한다. 옛날에는 사기그릇을 지게에 지고 팔러 다니는 것이 유행했었나 보다.
서산 너머로 하루가 저물어 간다.
들기산 쪽으로 오르면서 뒤돌아 본 난함산 - 통신중계탑이 보인다.
옛날 어느 산골에 사기그릇을 지게에 짊어지고 팔러 다니는 장사가 있었다.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올라가 고개마루에 지게를 받쳐 놓고 땀을 훔치는데 발 아래 하얀 해골바가지가 하나 눈에 띄였다. 사기장사는 장난삼아 그 해골을 발로 툭 건드리니 해골바가지가 데굴 데굴 구르면서 ‘어이구 아파’하고 소리를 지른다. 사기장사는 재미나면서도 측은한 생각이 들어 자리를 떠서 갈길을 가는데 해골바가지가 데굴 데굴 굴러서 자신을 따라오는 것이었다. 한참을 가다가 또 쉬면서 사기장사는 점심꾸러미를 꺼내 먹으면서 고추장을 한숟갈 떠서 해골바가지에게 듬뿍 발라 주었다. 그랫더니 해골바가지가 ‘어이구 매워, 어이구 따가워’하면서 또 자지러지는 소리를 낸다. 이렇게 며칠을 가도 계속 자기를 따라오는 해골바가지가 성가시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여 이를 떼어낼 궁리를 하였다. 마침 마을 앞을 지나는데 그 마을 한 집에 잔치가 열렸는지 떠들썩한 소리가 들린다. 이에 사기장사는 꾀를 내어 지게를 받쳐 놓고 해골바가지에게 ‘이 지게를 지키고 있으면 내가 가서 음식을 얻어다 주겠다’라고 말하고는 마을로 들어 간 후 다른 마을로 줄행랑을 쳐 버렸다. 그 후 두어달쯤 지나 사기장사는 또 그 마을을 지나면서 보니 자신이 받쳐 놓았던 사기짐은 그대로 있는데 아무리 봐도 해골은 보이지 않는다. 그 동안 지쳐버린 해골바가가지가 더 이상 기다리기 힘들어서 가버렸나 보다고 생각한 사기그릇 장사는 지게 있는데로 다가갔다. 마침 그 지게옆 밭에서 풀을 매고 있는 노인이 있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그 해골바가지가 어디 갔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사기그릇 장사를 빤히 올려다 보며 얘기를 듣던 노인은 그제서야 호미를 놓고 그에게 소리쳤다. “그게 바로 나다 !”. 옛날 내가 어렸을 때 사랑방에서 새끼를 꼬면서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옛날 얘기 한토막이 생각난다. 그 얘기 끝에 ‘그게 바로 나다’하고 소리치면 깜짝 놀라서 혼비백산하였었다. 얘기 하나 끝나면 또 하나 해달라고 하기를 반복하던 어린 시절이었다.
해가 산너머로 굴러 떨어지고 있다.
여기서 대간줄기 산행을 마치고 우리는 작동마을로 하산한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대간길이 오히려 산으로 이어진다. 선두팀에서 쳐진 회원 두명이 우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행한다. 오후 5시가 넘으면서 해가 산마루에 걸쳐 있고 앞에 보이는 산봉우리가 들기산이겠거니 하고 가다 보면 능선길은 오른쪽으로 틀어 버리고 또 다시 앞에 우뚝 선 산을 넘으면 되겠거니 하고 산마루에 오르면 또 산길은 정처 없이 이어진다. 마음이 급한 두 여성 회원들은 어느 새 시야에서 사라지고 황일병과 둘이서 발길을 재촉한다. 한참 앞에서 왁자지껄 소리내며 가던 선두팀은 이미 하산을 했는지 사위가 조용하다.
오후 5시 18분 멀리 서산위에 아스라이 걸쳐 있는 해가 뚝 떨어질 즈음 우리는 마침내 하산 기점인 해주오씨(海州吳氏)산소에 도착했다. 내 스스로 의령남씨 산소가 하산 기점일거라고 착각하여 얼마쯤 더 가다가 되돌아와 오른쪽으로 길이 잘 나있는 능선길을 따라서 하산했다. 아직 햇빛이 구름에 비쳐 사물이 어렴풋이 보여 랜턴없이 길을 찾는데 어려움없이 내려오는데 미리 버스를 타고 도착해 있던 별동대장이 걱정하며 올라 오길래 감사한 마음으로 골목길을 걸어 내려갔다.
작동마을에 어둠이 깔리고
하루 일정이 끝난 후 간단한 하산주를 즐기는데
특수요원들이 헤드랜턴을 갖추고 실종자(?) 수색을 위해 다시 대간길로 향한다.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나고 버스 있는데로 가니 여느때와 같이 먼저 내려온 사람들이 랜턴불빛에 기대어 하산주를 마시고 있다. 다른 한쪽에서는 이곳 특산물인 사과를 싸게 판다며 사과맛을 보여준다. 산에서 내려오기 전에 간단하게 빵을 먹었더니 그다지 배도 고픈 줄 모르겠어서 맛배기로 보여주는 사과 몇 점 얻어 먹고 말 참이었다.
그런데 그만 사단이 나고 말았다. 우리보다 앞서가던 두 여성회원분들이 하산지점을 놓치고 그대로 직진하는 바람에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전화기와 배낭을 차에 실어 두고 갔기 때문에 연락도 닿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 갈팡거리다가 총대장님을 위시한 몇몇 회원들이 산으로 향하고 또 남아 있는 사람들이 119에 신고하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데 산으로 갔던 총대장님이 전화로 연락을 해 왔다. 그 두 여성분들이 계속 직진하여 들기산을 지나고 금산을 지나 추풍령에 내려섰다는 것이다. 이에 회원들은 모두 무사함에 환호를 보내고 자리를 정리한 후 두 회원을 찾아 버스에 태우고 상경했다.
벌 탈없이 모두 안전산행을 마치고 중간에 황간휴게소에 잠시 정차한 후 서울로 무사 귀환하여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그 회원은 경험이 많은 데다 다행히 총대장님의 핸드폰 번호를 외우고 있어서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 디지털 시대에 수 많은 사람들의 연락처를 쉽게 찾아 낼 수 있으니 굳이 외울 필요성이 없는 요즘 그래도 중요한 몇몇 번호는 꼭 외워둘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새삼 가져본다.
첫댓글 애쓰셨습니다^*^
췩고 쵝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