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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0호 至氣今至願爲大降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포덕 157년 6월 14일(화요일) | |
시일소식 | 포덕 157년 |
6월 셋째주 화요시일 | |
발행처:천도교 동천교구 발행인:강병로 편집인:배영진 주소:부산시 남구 못골번영로 105(대연동) 전 화:(051) 628~1300 Fax:624-0519 카 페:http://cafe.daum.net/dongcheon21 |
집례 : 기암 신원기 교무부장
- 청 수 봉 전
- 개 식 심 고
- 주 문 삼 회 병 송
- 경 전 봉 독 ------ 해월신사법설 ' 待人接物' (경전 274~쪽277) ---- 조유신 학생동덕(2)
- 천 덕 송 합 창 -------------------------- 제18장 우리의 길(천덕송 39쪽, 1~2절)
- 설 교 --------- 만물막비시천주(萬物莫非侍天主) ----------- 중암 김대석 교화부장
- 천 덕 송 합 창 --------------------------- 송가, 시일의 노래(천덕송96쪽 1~2절)
- 폐 식 심 고
* 음악준비 : 강수윤 학생동덕(2)
만물막비시천주(萬物莫非侍天主)
중암 김대석 교화부장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최근에 저는 두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한 권은 맨부커상 수상작<채식주의자>(한강)이고 다른 한권은 <사피엔스>(유발 하라리)입니다. 전자는 문학책이고 후자는 역사책입니다. 나름대로 특색을 지니고 있는 이 두 책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폭력’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채식주의자는 어릴 때의 폭력 경험으로 인해 스스로에게 문을 닫고 결국 자기파괴의 길을 가는 여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입니다. 주인공은 어릴 때 개에게 물립니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자기 딸을 문 개를 오토바이에 매달고 동네를 몇 바퀴 돌아 죽입니다. 평소에도 아버지로부터 수시로 폭력을 당해왔던 딸은 개를 오토바이에 달고 축 늘어져 죽을 때까지 달린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력(!)에 몸서리를 치고 씻을 수 없는 상처(트라우마)를 갖게 됩니다. 소설은 이로 인해 야기되는 갖가지 비정상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읽기에 상당히 불편한 작품이었습니다.
<채식주의자>가 일상의 미시적인 폭력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고 한다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거시적 관점에서 호모 사피엔스라는 현생인류의 폭력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생물학과 역사학을 결합한 큰 시각으로 호모 사피엔스의 폭력적 행태를 개관합니다. 이 책은 인류 역사의 진로를 형성한 세 가지 혁명, 즉 7만년 전의 인지혁명, 12,000년 전의 농업혁명, 500년 전의 과학혁명이 인간과 이웃생명체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서술하고 있는데, 핵심은 호모 사피엔스가 지나간 자리에는 어떠한 종도 남아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 종마저도.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늘 설교는 <사피엔스>에 나타난 내용을 참고로 해서 인류의 폭력성을 살펴보고 그것의 극복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현생 인류는 약 200~250만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진화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오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호모에렉투스를 낳고, 호모에렉투스가 네안데르탈인을 낳고 네안데르탈인이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해왔다는 식으로 진화를 단일 계보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200만년 전부터 약 1만년 전까지 지구에는 네안데르탈인, 호모 데니소바, 호모 사피엔스를 포함한 적어도 여섯 종의 인간이 동시에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치 오늘날 여우, 곰, 돼지 등 수많은 종이 동시대를 살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다양한 인간 종 중에서 호모 사피엔스 딱 한 종 만 살아남았습니다. 저자는 이것이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범죄(폭력성)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역사 속에 나타난 호모 사피엔스의 폭력의 역사는 너무나 일방적이고 전면적입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인종청소 형태로 멸종시켰으리라고 설은 점점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사실 호모 사피엔스가 발 디딘 지역의 인간 종은 멸종을 면치 못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하여 호모 솔로엔시스, 호모 데니소바, 호모 폴로레스엔시스 등이 차례대로 인류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 한 종만 살아남았습니다. 45,000년 전에 호모 사피엔스가 호주에 들어가면서 몇천년 지나지 않아 몸무게 50kg이 넘는 호주의 동물 24종 중 23종이 멸종하게 되었습니다. 이보다 작은 종도 대량으로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오로지 호모 사피엔스 탓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이보다 더 큰 생태 재앙은 아메리카에서 이어졌습니다. 16,000년 전 시베리아 북동부와 알레스카 북서부를 걸어서 아메리카에 도달한 호모 사피엔스는 이후 몇 천년이 지나지 않아 그곳의 유일무이한 종 대부분이 사라졌습니다. 오늘날의 추정에 따르면, 그 짧은(!) 기간 동안 북미에서 대형동물 47속 중 34속이 사라지고 남미에서는 60속 중 50속이 사라졌습니다. 3천만년 넘게 번식했던 검치고양이도 멸종했고, 대형 땅나무늘보, 대형 사자, 미국 토종의 말과 낙타, 대형 설치류와 매머드도 멸종했습니다. 설사 기후변화의 측면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결정적 책임은 호모 사피엔스(인류)에게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바퀴, 문자, 금속도구를 발명하기 한참 전부터 지구 대형동물의 절반가량을 멸종으로 몰아갔으며, 이런 생태적 재앙은 농업혁명 이후에도 규모만 작아졌을 뿐 수없이 재연되었습니다. 결국 수렵채집인의 확산과 함께 벌어졌던 멸종의 제1물결, 농부들의 확산과 함께 멸종의 제2의 물결에 이어 오늘날은 산업혁명과 함께 멸종의 제3의 물결이 진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생물학의 연대기에서 결단코 가장 치명적인 종인 것입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세상을 정복한 것은 인간의 지혜, 곧 고유한 언어(인지혁명)와, 농업혁명, 그리고 과학혁명 덕분이었는데 그 지혜로운 인간(사피엔스)이 인간 종 뿐만 아니라 다른 이웃 종까지 모조리 멸종시켜왔다는 점은 우리를 매우 불편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이전에 얼마나 많은 종을 절멸시켰는지 안다면 아직 살아남은 종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결코 단순한 생각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폭력적 성향이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최근에만 해도 서울 강남역 묻지마 화장실 살인사건, 의정부 사패산 여인 살인사건, 50여명이 사망한 미국의 올랜도 총기 난사사건 등 우리 주위에는 너무도 많은 폭력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각종 전쟁으로 인해 벌어지는 어마어마한 인명 살상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피부색이나 언어, 종교의 작은 차이만으로도 곧잘 다른 집단들을 몰살시켰습니다.
인간의 폭력은 같은 인간 종에 대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산업혁명에 이은 지구 생태계 파괴도 파괴려니와 가축화된 동물의 실상을 보면 끔찍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10억 마리의 양, 10억 마리의 돼지, 13억 마리의 소, 250억 마리 이상의 닭이 존재한다고 합니다(2004년 기준). 지구의 인구가 70억인 것을 생각하면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이 엄청난 가축이 거의 대부분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길러집니다. 아마 가축이 된 닭이나 소는 진화적 성공의 사례이겠지만 역사상 가장 비참한 동물일지도 모릅니다. 야생닭의 자연 수명은 7~12년이고, 소는 20~25년인데 가축화된 대부분의 닭과 소는 몇 주 내지 몇 개월 만에 도살당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즐겨먹는 닭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만 하루에 무려 1,440,000 마리가 도살당합니다(2004년 기준). 프랑스의 대표적인 요리인 프아그라(거위 간 요리)를 비롯하여 참혹한 동물 학대는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저도 가끔씩 치킨을 시켜 먹고,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거리낌 없이 먹는 편입니다만, 생명체의 생존과 번식의 차원이 아닌, 다른 개체(종)의 고통이나 행복을 근본적 관점에서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반성할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러한 인간(호모 사피엔스)의 폭력성을 없앨 수 있을까요?
우선 강력한 법과 제도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법은 사람들의 행위를 강제하는 측면은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사형이라는 강력한 법과 제도가 있어도 범죄가 없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법과 제도보다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의식과 마음을 바꾸지 않고서는 폭력이 사라질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오염되고 폭력성에 찌든 인간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근본 처방입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요? 바로 종교와 명상같은 것을 통해서입니다. 어떻게 보면 종교야말로 인류 역사에서 인간의 폭력성에 브레이크 작용을 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물론 인류 역사에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휘두른 경우도 없진 않았습니다만). 다행스럽게도 우리 주위에는 우리의 폭력적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줄 종교가 있습니다. 바로 천도교입니다.
해월신사께서는 ‘만물막비시천주(萬物莫非侍天主)’라고 하여 ‘만물이 한울님을 모시지 않음이 없다’(해월신사법설 「대인접물」)고 하였습니다. 인간 뿐 아니라 인간 이외의 모든 동식물이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치를 알면 살생은 금치 아니해도 자연히 금해지리라.”(해월신사법설 「대인접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존을 위해 부득이하게 다른 생물 종을 접수하게 될 때도 ‘한울님이 한울님을 먹는다’(해월신사법설 「이천식천」)는 이천식천(以天食天)을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후천 5만년의 이치를 담고 있는 수운 대신사님의 ‘시천주(侍天主)’에 바탕합니다.
수운대신사께서는 일찍이 “개벽후 오만년에 너를 만나 성공하니”(용담유사 「용담가」)라고 말씀하신 데 이어 새로운 이치로서의 시천주를 말씀하십니다. 이어 해월신사께서 “천지가 부모인 이치를 알지 못한 것이 오만년이 지나도록 오래 되었으니(해월신사법설 「천지부모」)”라고 하여 인류(호모 사피엔스)가 선천 5만년 동안 이 시천주의 이치를 몰랐다고 말씀하십니다. 선천시대가 폭력과 죽임의 시대였던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죽임의 선천시대를 극복하고 상생과 살림의 후천시대를 여신 분이 바로 수운대신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와 같은 인간 종 뿐만 아니라 인간 이외 여타의 우리 이웃 종에 대해 선천시대의 마음을 버리고 후천시대의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제1, 제2, 제3의 폭력의 물결에 물들어 폭력이 자리한 선천시대의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천도교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바꾸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주문(呪文)에서 찾고 있습니다. 천도교의 대표적 수행자였던 월산 종법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주문은 우리의 DNA도 바꾼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천도교의 주문이야말로 폭력성이 자리하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의 DNA를 바꿀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아직 저는 주문을 통해 한울님 마음의 깊은 경지를 체득하진 못했지만 그 이치만큼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만물막비시천주(萬物莫非侍天主)의 이치를 깨닫고 주문을 통해 한울님마음을 체득하여 인간과 인간 이외의 종과 상생하는 길을 걸어갑시다. 감사합니다.
☞ 포덕 157년도 학생입교식 실시(6/21, 화) : 포덕 157(2016)년도 학생입교식이 오는 6월 21일(화) 화요시일식 시간에 성화실에서 실시될 예정이다. 본교 민족사상탐구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이번 학생입교식에서는 경인당 오희복님(본교 이사장)이 전교자가 되어 1학년 과 2학년 민족사상탐구부 학생들 약 20여명이 입교식을 하게 된다(작년에 입교한 학생은 제외). 새로 천도교의 도문에 들어서게 되는 민족사상탐구부 학생들에게 한울님의 감응을 심고합니다.
☞ 시일식 순연 : 다음주 화요시일식(6/21)은 학생입교식 관계로 봉행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주 6월 28일과 7월 5일은 1학기 기말고사 관계로 순연합니다. 따라서 다음 화요시일식은 7월 12일(화)에 봉행될 예정입니다. 많은 양해 바랍니다.
☞ 제236차 흥신포연원회 개최 : 교계 현안문제를 의논하는 제236차 흥신포연원회가 오는 6월 19일 천도교 대남교구에서 개최될 예정입니다. 교역자와 동덕님들의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 집례 : 석암 유석운 경리부장
* 경전봉독 : 안형민 학생동덕(2) (해월신사법설 '영부주문'(289~294쪽)
* 천덕송 합창
(1) 제21장 검가(기1)(천덕송 43쪽 1~2절)
(2) 송 가, 동학혁명기념가(천덕송 97쪽, 1~2절)
* 설교 : 노암 강병로 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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