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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트 매거진-아띠마 원문보기 글쓴이: 예슬이
임승수 단편소설--물봉숭아집
--청소년을 위한 소설--
나른한 초여름의 따끈한 햇살이 강성을 부리다가 잔잔해진 저녁 나절, 소도시의 귀퉁이에 있는 장례식장을 오가는 차량들이 빗발치듯 합니다.
슬레이트 지붕의 낡은 집 굴뚝에선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아련히 허공을 적십니다. 그 길을 고교 1학년인 영민이는 터벅터벅 걸어서 할머님이 혼자 계신 집으로 갑니다.
“강경 새우젓 사세요. 뜨끈뜨끈한 생두부가 있어요.”
한낮이 사그라지는 침침한 골목에서 동생 영수가 삐꼼 얼굴을 내밉니다. 영수를 보자 동네 꼬마들은 잘됐다는 듯 영수 어머니의 흉내를 냅니다.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야, 우라질놈들아! 코빼기를 분질러 놓겠다.”
듣기도 민망한 만큼 험한 욕지거리가 화살처럼 영민이의 귀에 박힙니다. 꼬마들과 영수 사이에 곧 몸싸움이 벌어질 판국입니다. 가로수에 잠자리를 마련하던 참새들도 개구쟁이들의 난장판을 재미있게 구경합니다.
뻗정다리이자 사팔뜨기요, 어머님이 똥차 몰며 골목길 장사한다고 왕따를 당한 분노에 찬 영수의 한 손엔 돌멩이, 한 손엔 긴 막대기를 들고 황새의 긴다리 뻗정다리로 애들한테 쏜살같이 달려듭니다. 돌멩이로 눈이라도 맞힐까봐 덜컹 겁이 납니다.
“영수야, 참아라. 집으로 가자.”
형은 성난 들고양이처럼 숨을 할딱거리는 동생 영수의 손을 잡아끌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립니다. 울화통이 치민 영수의 심장박동소리는 쉽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영민은 동생의 콧잔등에 묻은 흙먼지를 닦아줍니다. 앞쪽의 골목길에서 어머님의 외치는 목소리가 완행열차처럼 다가옵니다.
‘새우젓 사세요, 육젓이 있어요, 따끈따끈한 두부도 있어요. 예쁜 어머님들 어서어서 나오세요.’
골목길을 지나는 어머님의 애잔한 목소리입니다. 늘 그 소리를 듣는 동네 애들은 어머님 차의 꽁무니를 뒤따르며 흉내를 냅니다. 애처롭게 들리는 음성입니다. 육성이 녹음된 봉고 트럭에서 릴레이처럼 흘러나오는 소리는 영민네 가족에게는 슬픈 소리입니다.
골목길을 누비는 소리, 고즈넉한 여운을 내는 어머니의 차가 모퉁이를 돌자, 이내 개구쟁이들이 억세게 흉내 내는 소릴 듣고 동생 영수가 가만히 있을 턱이 없습니다. 끓어오르는 분노에 영수는 보이는 게 없습니다.
영수는 철봉으로 다져진 쇠뭉치 같은 힘을 보여주려 했지만, 영민형 때문에 허사입니다. 어머니의 짐차는 여운만 남긴 채 뒷골목의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 갑니다.
“영수야, 철없는 아이들이야, 참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골목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은 닭 쫓던 개처럼 멍하니 있다가 참새처러 흩어집니다. 영수도 씩씩거리며 집으로 향합니다. 형제는 집 가까이 왔습니다. 대문 앞 바윗돌은 예나제나 할머니 몫입니다. 할머니는 두 손자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팡이를 턱 밑에 괸 채 지는 해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할머니는 저녁노을을 좋아하십니다.
“할머니!”
둘은 달려가서 할머니의 품에 젖강아지처럼 안깁니다. 할머니의 가슴에서 백설기의 시루향기 같은 냄새가 콧속을 파고 듭니다.
“오냐, 내 새끼야. 오늘 100점 먹었쟈? 선생님의 입 똑바로 쳐다보며 공부 했지야?”
할머니의 판에 박은 되풀이입니다.
‘100점 받기가 그리 쉬운가?’
영수는 할머니의 말씀이 못마땅하다는 듯 눈두덩을 씀벅거립니다.
영민이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생활력이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할머니, 어머니, 영민이, 영희, 영수 다섯 식구가 오순도순 달팽이처럼 붙어삽니다.
친구들은 산으로 들로 놀러가는 주말과 일요일이지만, 영민이와 바로 밑의 영희는 주유소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갑니다. 남매가 손세차를 합니다. 아르바이트로 남매가 벌어온 돈을 어머니에게 맡기면 반으로 접어서 길쭉한 양말 속에 넣고 입맞춤을 하시는 어머니입니다. 날이 갈수록 두둑해지는 만큼 보람도 쏠쏠합니다. 양말에 담은 돈자루는 어머니가 관리를 합니다. 매월 25일이면 그것을 개봉합니다. 온가족이 둘러앉아 양말 속의 돈을 셈하고, 그 돈은 적금을 넣고, 생활비는 어머니가 부담합니다. 학급 친구들은 용돈이 생기면 군것질을 하지만 삼남매는 못 본 체하고 지나쳐 버립니다. 하마처럼 찬물을 마십니다.
먹구름이 깔린 주말에도 남매는 손세차를 하여 만오천 원을 손에 쥐었습니다.
“사장님, 손님이 없을 때 빈 의자에 앉아서 공부를 좀 해도 될까요?”
사장님이 허락을 하셨습니다. 염치없는 일이지만 남매는 학습장을 꺼내 공부를 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인 영민이는 키가 작아 맨 앞줄에 앉습니다. 친구들한테는 대추방망이로 통합니다. 주유소 세차장의 한 켠에 나무의자와 세차장 옆의 헌 책상이 친구입니다.
세차 손님이 없는 틈을 내어 공부를 하는 것을 보고 주유소 사장님은 기특하게 여깁니다. 세차장 안쪽으로 부는 하늬바람이 송글송글 맺힌 영민이의 땀을 씻어줍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다음에 배울 교과의 예습을 합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너희들이 받아온 돈으로 할머님 모시고 고기를 구워먹자.”
영희는 소리를 치며 좋아합니다. 오장육부가 뒤틀릴 정도로 정말 먹고 싶습니다. 일하는 것은 힘들지만, 정말 행복한 순간입니다.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도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영수는 사팔뜨기 눈을 치켜뜨고 메기입처럼 벌리면서 고기쌈을 연신 구겨 넣습니다. 그 모습이 측은하면서도 귀엽습니다. 영민이는 가족들 모르게 주먹을 쥡니다.
‘내가 열심히 벌어 동생의 사팔뜨기 눈 수술을 받도록 해야지.’
형의 마음이 간절합니다. 형제의 깊은 사랑입니다.
엊그제는 기분 좋은 일도 있었습니다. 한 손에 영어 단어를 외우면서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행길에서 어머니 봉고 트럭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둘러서서 흥정하는 소릴 지켜봤습니다. 개미떼처럼 웅성웅성 골목을 메웠습니다.
‘어머님의 반찬이 상했다 해서 싸우는 건 아닐까?’
가끔 겪는 일이었습니다. 어머님 일에 대해서 조바심을 하는 영민입니다.
“아주머니, 젓갈이 짭쪼롬 해서 간이 딱 맞데이.”
다행히 말다툼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친구가 경영하는 강경중앙젓갈 상회에서 도매를 하는데 인심이 후하지요. 숙성을 잘 시키는 기술이 있어 대한민국에서는 특등이라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강경 젓갈을 사가세요. 듬뿍듬뿍 드리겠습니다.”
수다스런 아주머니들의 주고받는 얘길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님 옆에서 좀 도와드릴까요?”
“넌, 얼른 들어가서 할머니 발이라도 닦아드려라, 그리고 공부하거라.”
어머님은 효부이고 좋은 엄마셨습니다. 어머님이 하시는 반찬 장사를 아들에게는 보여주기 싫으셨습니다. 아들이 일류대학을 나와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검사, 판사 되는 게 어머니의 간절한 꿈이셨습니다. 하지만 영민이는 자꾸만 돈 벌 궁리만 하게 되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옛말이 있듯이 당장 먹고사는 게 문제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주말에 세차장에서 일을 하다 영희가 말을 건넵니다.
“오빠!”
“왜?”
“오빠 때문에 내가 세차거리를 놓친단 말이야. 오빤 나하고 헤어져서 다른 일을 하면 안 될까?”
실제로 그렇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영희도 컸으니 혼자서 세차 일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듭니다.
모처럼 영민이는 영수와 집 가까이 있는 목욕탕에 갑니다. 주말과 휴일에는 근처 사업장에서 일하는 외국 근로자들이 몰리는 바람에 주인아저씨가 쩔쩔 매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집 사정과 일할 수 있는 자신감을 말씀드리니, 주인아저씨가 일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주말에만 일하고 시간을 따져 일당을 준다고 했습니다. 동생 영희와 따로 일할 거리를 찾은 것입니다. 목욕탕 안에 대야, 널려진 수건을 한자리에 모으고, 솔로 바닥을 닦는 일입니다. 대야 안쪽, 탕의 바닥이 깨끗해야지 쾌쾌한 냄새가 덜 납니다.
“기특한 학생이구나. 휴일에는 목욕 손님이 많단다. 겨울에는 더 초만원이지. 팬티만 입고 날 따라오너라.”
주인아저씨는 친절하게 안내합니다. 황토방, 보석방을 여니 뜨거운 김이 얼굴에 화끈히 몰아칩니다. 벌거숭이 아저씨들이 다닥다닥 붙어 육체미 자랑을 합니다. 더러는 탕 바닥에서 네 활개를 펴고 누워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민이는 팬티만 입은 자신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일손이 모자란단다. 세신대가 두 개 놓여 있으니, 넌 손님의 등을 책임지거라.”
오른손엔 세신포를 꼭 쥐고 왼손을 포개어 때를 미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 주십니다. 영민이는 목욕탕에 가면 출입구 신발장과 널부러진 수건 정리, 화장실을 청소합니다. 바닥에 널려진 화장지를 종량제 봉투에 담아 넣고, 탈의실을 쓸고, 봉걸레로 닦고, 타일 바닥을 얼음판처럼 매끄럽고 반짝반짝 빛이 나게 닦습니다.
수증기가 몽글몽글 피어나는 탕 안에는 상상의 나라인 지상천국 같습니다. 바깥에는 매서운 추위에도 이곳은 벌거숭이로 후줄근히 구슬땀을 흘립니다. 보석, 황토, 통나무 한증막이 나란히 있습니다. 대기실에는 탈의실 옆에 매점과 이발칸, 구두닦이칸, 수면실이 있는데 주인아저씨 혼자는 손발이 열 개가 있어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
일하는 것을 지켜보신 주인아저씨가 칭찬하시니 영민이는 우쭐해서 더욱 열심히 찾아서 일합니다. 신발장도 말끔히 쓸고 닦아낸 다음, 목욕실 안으로 들어가 아무데나 나동그라진 목욕 수건도 플라스틱 통에 정리를 합니다.
세상일은 맘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주인정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목욕탕 안의 일은 열심히 해도 표가 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주인이 된 맘으로 영민이는 맡은 일을 열심히 합니다.
때밀이를 가르쳐 주신 아저씨는 세신대에 불곰 같은 체구를 가진 분을 닦느라고 송글송글 땀범벅이 됩니다.
“아저씨, 힘드시지요?”
“어디 돈 벌기가 쉬운 일이 있다더냐? 세신포를 가져와서 같이 닦자구나.”
불곰 같은 아저씨의 체구가 워낙 컸습니다. 가끔은 까다로운 손님을 접할 때도 있습니다.
“야, 멍청아. 삼척 동자도 너보단 낫겠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아버지한테 호되게 꾸중을 들었습니다. 허벅지 사이의 부끄러운 그 곳에 손끝이 덜 갔던 모양입니다. 세신포 자락이 살짝 비껴갔기 때문입니다. 매사는 결과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성심을 다해 닦고, 가볍게 안마를 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영민이는 구두 닦는 일도 배웠습니다. 원래는 주인아저씨의 몫이었지만 잽싼 손놀림이 흥미로습니다.
“구두는 광발을 잘 내야만 되느니라.”
주인아저씨는 열심히 사는 분이었습니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보육원에서 자랐답니다.
“이리 와라. 초벌, 재벌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겠다.”
초벌은 구두의 때를 닦아 약칠을 하는 일이며, 재벌은 구두의 빛을 내기까지의 과정입니다.
‘하면 된다. 하면 된다!’
영민이는 외쳐봅니다.
목욕탕에서 일을 한 일당을 받았습니다. 14시부터 19시까지 수고한 노임입니다. 이만오천원이 하얀 봉투에서 방긋 미소를 보였습니다.
‘할머니 드실 순대와 동생 영수의 크레파스랑 화첩을 사야겠다.’
차 닦는 일보다 일당을 더 받고 나니 기분이 더욱 좋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호주머니에 넣은 영어 단어장을 꺼내 외웠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하고 싶지 않습니다.
“할머니, 순대 잡수세요.”
할머니는 어린아이처럼 맛있게 드십니다. 영수는 크레파스를 가슴에 안고 좋아합니다.
“시작이 반이다. 영민이와 영희가 벌어온 돈은 가정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어머님은 양말 속에 돈을 넣으며 뿌듯한 표정을 지으십니다.
하늘은 진종일 회색빛입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가 영민이의 옷깃을 적십니다. 이렇게 날씨가 음산할 때는 목욕손님이 더 부쩍댑니다. 단골손님인 임 사장님이 영민이의 나이와 학교를 묻고는 때를 밀어달라고 합니다.
“예서 일하니?”
“예, 주말에만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임 사장님이 장한 일이라고 칭찬해 주셔서 더욱 용기가 납니다. 어느 날 영민이는 사장님께 건의를 했습니다.
“사장님, 이곳 목욕탕이 둔포에서 제일이지요? 할아버님들이 오시면 공짜로 등이라도 밀어들이면 어떨까요?”
“좋지, 좋아. 그렇게 해볼까!”
주인아저씨는 영민이의 의견에 대찬성입니다.
어스름 밤, 하늘의 별을 보며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연필을 입에 물고 그 날에 벌어들인 돈을 셈하고 계셨습니다. 주판알이 짜그락거립니다.
“영민아, 수고했구나.”
“어머님도 고생하셨어요.”
서로 격려를 잊지 않습니다.
아랫목에 못 보던 강아지가 목을 빼고 어머니 옆에 앉아 있습니다. 구슬 같은 눈망울을 굴리며……. 온 가족이 할머니 방에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강경에 사는 엄마 친구인 중앙상회 사장님이 강아지 한 마리를 보내왔단다. 우리 공주님 영희 닮아서 예쁘지?”
“할머니 친구하라고 옆에서 재우면 어떨까요?”
머리가 좋은 영희의 의견입니다.
“아이고, 싫다, 싫어. 똥싸뭉개면 귀찮단 말이다.”
할머니는 두 손을 내저으며 사양하십니다. 그 바람에 가족들은 까르르 웃음바다가 됩니다. 역시 웃음은 마술과 같아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무더위 때의 찬바람과 같습니다.
“얘, 영민아 단풍들면 뒷동산에 할매 업고 올라간다 했쟈?”
“예, 그러고 말고요. 할머님을 등에 업고 소풍 갈 거예요.”
영민이는 할머니의 소원을 들어 들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할머님께서는 젊어서 다녀오셨다는 설악산 울산바위를 늘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영민이의 발걸음은 무겁습니다. 어머니의 장사차가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늦게 집에 돌아오는 길에 봉고차의 꽁무니는 깃털 빠진 들꿩처럼 허전해 보입니다. 후미진 도마동 골목길로 아나콘다 뱀꼬리처럼 사라지는 것을 영민이는 바라봅니다. 넋나간 사람처럼 말입니다.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는데 어머니는 거리를 지킵니다.
“강경 중앙 젓갈, 육젓 사세요. 논산 벌곡에 청국장도 왔어요. 청국장은 위암 예방에 최고랍니다.”
어머니의 봉고 트럭 확성기에서 소리가 울려 퍼지면 길가에서 놀던 아이들이 참새떼처럼 어김없이 기어 나와 차의 뒤를 따라붙습니다. 이번에는 개구쟁이들의 차례입니다. 어머님의 목소린 애절한 것 같은데 다른 장사들의 흉내는 아우성입니다.
“따끈따끈한 조개젓이 있어요. 비지락젓, 어리굴젓, 조개젓이 있당께요.”
어머님의 흉내를 내니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주먹맛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동생들을 생각해서 참기로 합니다.
세월은 산고랑의 물처럼 잘도 흘러갑니다. 영민이의 가족은 자신들의 맡은 일에 정성을 쏟을 뿐입니다. 영민이는 고등학교 2학년, 영희는 중학교 3학년, 막내인 영수는 초등학교 3학년이 됩니다.
영민이는 학교 공부를 마치고 집에 가는데 다세대 주택의 거미줄 같은 길이 떠들썩했습니다. 어머님의 차와, 영광굴비의 생선차, 전자제품 중고품 차가 뱀의 똬리처럼 뒤엉켜 아우성입니다. 결국엔 어머니와 영민이의 양보로 뱀의 똬리는 풀어집니다. 어머님의 당당한 태도는 처음입니다.
“저놈의 장사치들! 밤낮없이 골목이 터지게 시끄러워 살 수가 없단 말이지, 갓난 애기가 잠을 잘 수가 있나?”
길에 서 있는 할아버지가 푸르락 붉으락 역정을 냅니다. 영민이는 그 자리에서 굳게 결심을 합니다. 어머님을 하루빨리 골목장사를 그만하시게 해야겠다고. 동네 할아버지의 푸념도 알 만합니다. 확성기 소리로 골목이 소란한 걸 영민이도 동감하고 있습니다. 영민이는 눈물을 삼킵니다. 뒤엉킨 차들이 풀리고 어머니는 기운이 다 빠졌는지 집으로 돌아가자며 자동차 시동을 겁니다. 어머니의 녹음된 목소리가 비둘기 날개 타고 저녁연기에 실려 메아리치는 듯합니다.
‘어머님이 다른 일을 하면 안 될까!’
영민이는 골똘히 생각에 젖어봅니다.
그날밤, 영민이는 앞뜨락의 감나무 기둥을 잡고 국어시간에 배운 옛시조를 읊어봅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은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좋아하는 양사언의 시조를 낭송해 봅니다. 어눌한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합니다. 힘들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납니다.
어머니 방에 낡은 추시계는 재깍재깍 쉴 틈이 없습니다. 영민이는 똘똘 뭉쳐 돈을 모았습니다. 영민네 통장은 비온 뒤에 대나무 싹 자라듯이 숫자가 늘어났습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란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영민이는 밤잠을 설치며 골똘히 생각에 젖었습니다. 어머님을 설득시키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10년이 넘은 세월을 봉고트럭을 몰고 다니며 반찬 장사를 했는데, 바꾸어보시라고 제안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이 잘 먹는 떡볶이, 김밥, 어묵, 돈가스, 도너츠 장사 같은 것도 좋을 텐데. 머릿속에서만 맴돌았습니다. 도서관 옆에 중학교, 초등학교가 있고, 도서관도 있으니, 시장기가 돌면 틀림없이 끼니를 때우거나 간식거리를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 같아 장소는 그쪽이 좋을 듯 싶었습니다.
저녁에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도서관 옆 감나무가 있는 옆에 빈터가 있는데, 그 땅을 빌려서 먹거리 장사를 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말씀 드렸습니다.
“어머니, 오백만원이 모아졌으니 한번 부딪쳐 봐요.”
“좋다. 뜻이 있으면 통한다고 했으니 한번 해보자.”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골몰하던 어머니도 영민이의 말에 동의를 합니다. 벌써부터 먹거리 장사를 고민하고 계셨다고 하면서 장남 영민이의 생각을 받아들이십니다. 어머니는 영민이와 함께 장사할 빈터 땅 주인을 찾아갑니다.
“그야, 빈터인데 빌려 드릴 테니 쓰시유, 임대료나 잊지 말고 줘요.”
자녀들을 다 키우고 혼자서 쓸쓸히 사는 할머니도 허락하십니다. 만사형통입니다. 일이 착착 풀립니다. 영민이네 사정을 잘 아는 할머니가 도와주신 일입니다. 식당 설치는 아버지의 옛 친구분이신 영태 아저씨가 맡아 주셨습니다. 음식점의 이름은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물봉숭아집’이라고 간판을 달았습니다.
장사를 시작하는 날, 어머니는 시루떡과 국수를 준비하여 가까이 지내는 이웃사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식당 둘레에 고무풍선과 만국기를 달아 꽃대궐 같습니다.
“친구들아, 제 버릇 개 주냐? 청국장, 도토리묵, 두부, 어묵은 가게 안에 마련해 놓을 테니 가끔 들려.”
어머니는 개업식에 온 친구들의 손목을 잡으며 큰소리로 말씀하십니다. 봉고트럭을 몰며 10년 세월을 잊을 수가 없으신가 봅니다. 식당 옆에 젓갈, 반찬 장사도 겸해서 하시겠답니다.
영희의 단짝 친구들도 알록달록한 오색 풍선을 식당 출입구와 천정에 매달고 고운 테이프로 늘입니다. 삼원색 풍선이 보드라운 아기 볼처럼 싱긋거립니다. 작은 폭죽도 터뜨립니다. 축제 분위기가 대단합니다. 솥단지마다 보글보글 맛자랑을 합니다.
영민이는 친구들에게 별미 음식을 공짜로 먹게 합니다. 떡볶이를 허겁지겁 먹으면서 마냥 즐거워합니다. 영민이의 친한 친구 병윤이는 ‘사랑의 집’ 축가도 불러서 모두를 기쁘게 합니다.
차림표는 어머니 친한 친구인 오영미, 전선옥 아줌마가 아크릴에 새겨 오셨습니다. 모두들 자기 일처럼 기뻐했습니다. 형제나 다름없는 건우와 하현이 엄마가 고마웠습니다. 감나무 밑의 하얀집이 신기루처럼 쌍무지개 위에 떠올랐습니다. 꽃바람 친구도 불러들였습니다.
‘까르르’
어머니들의 해바라기 같은 웃음소리에 스치는 하늬바람도 어깨춤을 춥니다. 두둥실 흘러가는 흰구름 한 점도 창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축하를 합니다. 물봉숭아집 안에는 칼도마소리,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습니다.
장사를 할망정 어머님은 살색이 곱고 청양미인이라는 얘기를 듣는 40대의 나이십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창가에 숨어서 아버지의 혼령이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민이도 아버지 생각이 간절하여 눈물이 납니다. 사람이란 기뻐도 눈물, 슬퍼도 눈물을 흘리나 봅니다.
음식 장사는 예상 외로 잘 됩니다.
“어서 와요. 또, 와요. 모자란 것 있으면 달라고 해요.”
단골 고객은 거의 학생들입니다. 미인이신 어머님이 지극한 친절을 베풀어서인지 단골이 점점 늘어 납니다.
“학생, 밥 한 숟가락 더 받을까?”
먹는 것을 봐서, 어머가 덤으로 주시는 라면에 밥 한술은 인기폭발입니다. 밤에는 지나는 아저씨들이 가락국수를 찾습니다. 젊은 엄마들이 아기의 손을 잡고 찾아옵니다. 새벽 6시면 어김없이 문을 열고 저녁 12시에 문을 닫습니다.
영민이는 목욕탕에서 일하는 것을 놓지 않았습니다. 학교 공부를 마치면 어머니의 식당에 들러 설거지도 돕고, 음식물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며, 주변 환경을 깨끗이 하기 위해 신경을 씁니다. 힘들 일이 있을 때는 두 주먹을 꼭 쥐며 마음을 다스리고 공부에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습니다.
아스라이 어려웠던 지난날의 옛 추억이 가슴 절절하게 그리울 때가 있겠지요. 그날을 위해 한시도 게으름을 부릴 수 없습니다. 골목길을 누비던 지난날 어머님의 애잔한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영민이네 집에는 웃음꽃이 핍니다.
알콩달콩 물봉숭아 집 앞 뜨락에 동그란 노랑꽃이 지나가는 벌나비들을 모아들입니다. 영민이 어머니가 봉고트럭에 음식을 싣고 다니는 반찬 장사는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이야기입니다. 젊은 날의 아련한 추억입니다.
영민이는 음식점 둘레에 물봉숭아를 심었습니다. 어머니 손끝에는 물봉숭아 꽃잎이 곱게 물들여져 있습니다. 식당영업이 날로 번창하였습니다.
‘하면 된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영민이는 다시 한 번 다짐을 합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성공을 하면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어야겠다는 꿈을 키워봅니다. 커다란 꿈이 소년의 가슴 속에 파도치며 하늘거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