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행동, 아니 받아들이기 힘든 행동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 먼 길을 한 걸음에 달려온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을 두고 예수님은 마치 그들이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그들과의 친족 관계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다음의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
오늘 복음의 배경이 되는 상황을 살펴보면 이 말의 의미는 보다 더 크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 예수에 관해 들리는 항간의 소문을 접하게 됩니다.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아들 예수는 이전까지의 목수로서의 삶을 버리고 갈릴래아를 떠돌아다니며 제자들을 모아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다는 소문을 접해 들을 때까지만 해도 어머니 마리아는 그 모든 일에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들려오는 아들에 관한 소문, 곧 아들 예수가 세리들과 창녀와 같은 죄인들과 어울려 안식일의 규정들도 무시한 채 먹보요 술꾼처럼 지낸다는 소식을 들려오자 그리고 이에 더해 악령에 들린 이들과 어울려 다닌다는 소식을 접하자 어머니 마리아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예수의 형제들과 함께 아들 예수가 실제로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아들을 찾아 나섭니다. 먼 길을 고생하며 마침내 아들이 있는 곳을 찾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아들을 두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기쁨에 그 곳에 있는 사람에게 아들을 불러달라고 청합니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가 예수를 불러오려니 기대하고 있을 때, 방 안에서 들려온 아들의 목소리를 통해 마리아는 어머니로서는 믿을 수 없는 말을 듣게 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
그리 크지 않은 그래서 사람들이 바람과 비를 피할 정도의 아주 작은 당시 유대의 가옥 구조를 감안해 보았을 때, 예수님의 이 음성을 문 밖에 있는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음성 그대로 분명하게 들었을 것입니다. 아들이 마치 자신을 낳아 길러준 어머니를 부정하는 듯한 이 말에 어머니 마리아는 자신의 심장이 예리한 칼로 꿰뚫는 것처럼 아프고 아리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가 듣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들으라는 것처럼 이 모진 말을 해야만 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독서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의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은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새로운 임금이 된 다윗이 주님의 계약의 궤를 왕국의 한 중심으로 모셔오는 장면을 전합니다. 그 모습을 독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 무렵 다윗은 기뻐하며 오벳 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하느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주님의 궤를 멘 이들이 여섯 걸음을 옮기자, 다윗은 황소와 살진 송아지를 제물로 바쳤다.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2사무 6,12-14)
다윗은 자신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 것이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의 뛰어남이나 용기와 지혜 때문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은 오직 전적으로 하느님 그 분에 의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임금에 오른 그 순간, 제일 먼저 자신의 이 자리에 있게 해 준 하느님의 현존의 상징이라 여겨지는 계약의 궤를 왕궁 한 중심으로 옮겨오고 그를 보며 매순간 하느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자신의 내면 깊숙이 새겨 놓습니다. 다윗 임금의 바로 이 모습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모습을 이해할 단초를 제공해줍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요셉을 이른 나이 잃고 홀몸으로 자신을 길러준 어머니 마리아가 문 밖에 와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먼저 그 곳으로 뛰어나가 어머니와 자신의 형제들을 만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들과 그간의 일들을 이야기하며 항간의 소문에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불식시켜 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해야 할 소명이 무엇인지를 그 순간 분명히 깨닫고 있었기에 눈물을 삼키며 지금 이 순간은 어머니가 마음 아파하시겠지만 언젠가 모든 것이 밝혀질 그 순간, 그 순간에 아버지 하느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주실 영광을 생각하며 눈물을 삼키며 다음의 말을 내뱉었던 것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
그리고 그 말에 뒤이어 자신이 해야 할 말, 곧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라고 말씀하시면서 육적인 인간관계를 뛰어넘어 하느님 안에서 맺어지는 새로운 혈연관계, 곧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 안에서의 한 형제임을 그 곳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일깨워주십니다. 곧, 예수님은 우리 삶의 인간적 기쁨과 애환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우리 삶 자체를 존재토록 해 주시는 하느님으로 인해 맺어진 새로운 관계로서의 하느님의 한 가족을 일깨워주기 위해 자신의 인간적 슬픔을 감내하며 이 모진 말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오늘 영성체송의 시편의 말씀은 오늘 복음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마음을 잘 표현해 줍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 34(33),6)
주님께 바라고 바라면 주님은 우리를 굽어보시고 그분은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리고 이 빛은 우리에게 새로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새로움으로 인해 이제껏 내가 누려오던 기존의 그 무엇을 벗어나는 그래서 누군가는 마음 아파하고 어느 부분에서는 상처받을 수밖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아픔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시려는 새로운 뜻임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할 수 있을 때,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아픔으로 구약의 율법이 완성되는 새로운 계약이 완성되었듯이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오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기고 여러분의 삶 안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믿음으로 순종함으로서 여러분 삶 안에서 하느님의 새로운 뜻을 이루는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 34(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