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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찬양으로 충만한 열방교회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5:8-13).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1) 하고 권면하던 사도는 그의 시선(視線)을 로마에서, “열방”(列邦)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열방”이라는 말이 5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런데 열방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열방 안에, “감사, 찬송, 즐거움, 기쁨” 등으로 충만하게 될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된다는 것인가?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12) 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하여진다고 말씀합니다. 사도는 로마교회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 서로 잘났다고 판단하고 업신여기는 저들의 시야를, “감사와 찬양으로 충만한 열방교회”를 바라보도록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 2:14) 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셨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①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8) 합니다.
㉠ 8절은 “내가 말하노니”, 이렇게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중요한 교리나 권면을 말씀하려고 할 때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서 사도가 즐겨 사용하는 어법(7:1, 9:1, 11:1)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씀하려는 것입니까? 바로 앞 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 같이”(7상) 라고 말씀했습니다.
㉡ 이와 같이 행해주신, “그리스도와, 하나님” 앞에서, “먹어도 되느냐? 먹어서는 아니 되느냐?” 하는 하찮은 문제로 성도 상호간에 “판단하고 업신여기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인가? 그래서 사도는 14:1절부터 시작된 “아디아포라”, 즉 하찮은 일이라는 주제를 7절에서 일단 끝내고, “내가 말하노니”(8상) 하고 주의를 환기시킨 다음에 우리의 시야(視野)를 “감사와 찬양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열방(列邦)으로 향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8절 안에는,
㉮ “하나님의 진실하심”,
㉯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그리스도”,
㉰ “견고케 하신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 등이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중요한 주제들입니다.
② 중심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8상) 한, “그리스도”에 있습니다.
㉠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나타냅니다. 왜 그렇게 하셔야만 했는가? 한 번 언약(言約)하신 것은 반드시 지켜주신다는 “하나님의 진실(眞實)하심”(8중)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을 아니할 것이라”(시 89:35) 하신대로 성취하여주심으로 조상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워주신 “약속을 견고(堅固)케”(8하), 즉 어김이 없이 지켜주셨다는 말씀입니다.
㉢ 이제까지는 로마라고 하는 지역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 서로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이는 한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새로운 담을 쌓으려는 잘못인 것입니다. 이제 사도는 로마 교회라고 하는 한 지역 교회의 차원을 넘어서, 우주적인 교회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③ 그러면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8중) 하는 말은 무슨 뜻인가?
㉠ 누가복음 2장에는 “할례 할 팔 일이 되매(21),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눅 2:22)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한 세례요한에게,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의식에 “수종자”(隨從者)가 되셔야할 분이 전연 아니십니다. 그런데 이를 행하심으로 우리의 대표자(代表者)로서 취하셔야할 “모든 의”를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④ 그리스도는 유대인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오지만 유대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9상) 하고, 말씀합니다.
㉠ 이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 22:18) 하고 언약하신 바의 성취였던 것입니다. 사도는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구약성경을 네 곳이나 인용하고 있습니다.
㉮ 9절은 시편 18:49절의 인용이고,
㉯ 10절은 신명기 32:43절의 인용이고,
㉰ 11절은 시편 117:1절의 인용이고,
㉱ 12절은 이사야 11:10절의 인용입니다.
㉡ 부활하신 주님께서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 24:44) 하고 말씀하셨는데, 사도도 모세의 율법(신명기)과 선지자의 글(이사야)과 시편에서 골고루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⑤ 그리고 인용문의 내용을 관찰해 보면 공통점(共通點)이 있는데,
㉠ 첫째는 “열방”이라는 말입니다. 열방이라는 말이 5번(9, 10, 11, 12, 12)이나 나옵니다.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 둘째로 “찬송, 감사, 즐거워함, 소망” 등입니다. “찬송”이 3번이나 나옵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을 요약하면,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와서 열방에 미칠 것을 성경 전체가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⑥ 사도가 인용한 시편 117편은 전부가 두 절 밖에 안 되는 성경 1189개 장 중에서 가장 짧은 장입니다.
㉠ 그런데 첫 절에서는,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 지어다” 말씀함으로, 가장 작은 장으로 알고 있는 그 속에는 “모든 나라들과, 모든 백성들”이 다 들어있는 엄청나게 크고도 넓은 장(章)인 셈입니다.
㉡ 그리고 둘째 절에서는,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永遠)함이로다 할렐루야” 함으로, “크신 인자(仁慈)와, 영원(永遠)하신 진실”이 들어있는 크고도 영원한 장인 것입니다.
⑦ 어떻게 해서 이처럼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하나가 되어서, 구원을 감사하며 찬양하며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까?
㉠ 8-12절의 핵심은,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12) 한, “이새의 뿌리” 곧 그리스도에 있습니다. 이는 이사야 11:10절의 인용인데 이 말씀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게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 11:1)와 함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명백한 예언입니다.
㉡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은 너무나 높고 견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폐하시고 둘로 하나를 만드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둘로 하나를 만든 그들은 유대인이 된 것입니까? 이방인이 된 것입니까? 성경은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엡 2:15)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닌, “새로운 피조물이요, 천국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인 “그리스도인”들인것입니다.
㉢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런 상태에 있던 이방인들이, “이제는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둘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엡 2:12-15)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⑧ 사도는 이미 14:17절에서,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사도의 관심은 로마교회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건설과 확장에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 사도는 로마 성도들이 이 엄청난 영광스러움을 깨닫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찮은 먹는 문제 따위로 몸 된 교회를 분열시켜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는,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 6:2-3) 하고 묻고 있습니다. 이를 알았다면 우물 안 개구리들처럼 왈가왈부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7) 하는 말씀입니다.
⑨ 끝으로 사도는,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3) 하고 말씀합니다.
㉠ 13절 안에는, “소망, 기쁨, 평강, 믿음, 성령의 능력, 넘치는 소망, 충만” 등이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건설해나가고 계시는 하나님의 나라요, 영광스러운 교회입니다. 그러하건만 근시안(近視眼)이 되어 같은 교회 안에서 서로 판단하고 업신여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13절은 사도의 간절한 간구입니다. 이를 요약을 하면,
㉮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시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중심점은, “소망의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는, “소망”(所望)에 있는 것입니다.
㉡ 우리는 5장에서 “더욱, 넘친다”(15, 17, 20)는 말씀을 받은 바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 “넘치는 기쁨”(고후 7:4),
㉯ “넘치는 감사”(골 2:7),
㉰ “넘치는 은혜”(고후 9:8),
㉱ “넘치는 사랑”(살전 3:12)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⑩ 이 시점에서 사도가,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는 의중이 무엇일까요? 4절에서도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所望)을 가지게 함이니라” 말씀하고, 12절에서도 “열방이 그에게 소망(所望)을 두리라” 하고, “소망”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 그것은 우리의 과거(過去)는 각각 다를 수가 있습니다. 민족도, 출신도, 신분도, 성장과정도, 문화적 배경도, 성격도 각각 다를 수가 있습니다. 이런 다르다는 것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는데 장애 요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여, 우리의 과거는 달라도 장래(將來)에 주어질, 우리의 소망(所望)은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⑪ 사도는 결론 부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엡 1:10) 영광스러운 교회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 에베소서에서는,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요 소망이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엡 4:4-6) 하고, 교회의 일체(一體)를 말씀하는 속에 “하나의 소망(所望)”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목표와 동일한 목적과 한 소망을 바라고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형제들아”(12:1) 하고 시작된 실천윤리는 15:13절에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남은 부분은 앞으로의 계획과, 문안 등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저도 여러분이 섬기시는 교회 위에, 하나님의 모든 기쁨과 평강과 소망이 충만하시고 넘치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것이 “감사와 찬양으로 충만한 열방교회”입니다.
⑫ 교리부분(1-11장)을,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11:36) 하고 끝맺은 사도는, 실천윤리(實踐倫理) 부분도,
㉠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榮光)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6),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榮光)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7),
㉢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榮光)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9) 하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이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