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마드릳, 산티아고의 집에서
a. 다시 마드릳으로
집에서 여유 있게 나온 것 같았는데도 공항에 도착하니 체크인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거기서 시간을 다소 잡아먹은 데다, 가방 무게가 초과되어 손볼 겨를도 없었다.
결국 가방 하나를 더 싣는 조건으로 50불을 낼 수밖에 없었는데, 막바지에(그것도 그날 새벽에) 라면 한 박스까지 사서 가방에 욱여넣었으니...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가방 하나로는 될 수 없는 여정이었다. 며칠 잠깐 들렀다 오는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 몇 달을 살러 가는 길이었으니까.
인야는 탑승 전, 인천공항의 와이파이를 이용해 홈페이지에 짧은 글 하나를 남겼다.
인천 공항입니다.
계산을 해보니, 중간에 비행기 갈아타고 기다리는 시간까지 마드릳 도착까지는 19시간이나 걸리나 봅니다.
오늘 새벽부터 떠날 준비한 시간까지 합해보니 거의 하루가 걸리네요.
비행기와 시간이 날 거기까지 데려다주겠지만, 수월치만은 않은 행로입니다.
특별한 감정은 없습니다. 그저 어딘가 가는 그런 느낌뿐......
아, 지금 탑승이 시작되었네요.
스마트폰으로 하는 거라 익숙치 않습니다.
그럼 마드릳에서 뵙겠습니다.
3 . 14
우중충하게 흐린 날, 비행기는 떴다.
곧 구름을 벗어나면서 밝은 해가 눈부시게 빛났다. 기내 지도상으로는 서해 하늘을 날고 있었는데, 어차피 구름 위였으니 바다가 보일 리는 없었다.
좌석은 다행히 헐렁했다. 이코노미석은 거의 찼지만, 인야의 옆자리만은 비어 있었다.
모스크바에서는 늘 그렇듯 검문이 심했다. 신발까지 벗겨가며 휴대품을 다 체크했는데, 그 시스템까지 뭐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륙 시간까지 두 시간 넘게 남아, 인야는 목이 말라도 물 한 병 살 수 없는 그 공항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모스크바에서 마드릳으로 가는 다섯 시간은, 같은 유럽인데도 비몽사몽으로 지나갔다.
비행기가 이륙하려 할 때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유리에 반사되어 잘 나오지 않았다.
이륙 준비 중, 날개에 쌓인 눈 위로 사다리차가 다가와 무언가를 뿌리는 모습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얼음이 얼지 않게 하려는 조치인 듯했다.
마드릳 공항에 내렸을 때는 밤 열 시가 넘어 있었다.
앞쪽 좌석에 앉았던 인야는 남들보다 조금 빨리 수속을 마치고 나왔지만, 짐이 문제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자신의 가방 두 개가 나오지 않았다. 카트까지 미리 갖다 놓고 기다렸는데, 사람들이 하나둘 짐을 찾아 떠나는 사이 회전기계 위에는 주인 없는 가방 하나만 덩그러니 돌고 있었다.
항의할 사람을 찾아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던 검색대로 가서 물으니 안쪽으로 들어가 보라 했고, 들어가 보니 아무도 없었다. 다시 나와 아무도 없다고 하자 이번엔 반대쪽 안내로 가보라고 했다. 그런데 거기서도 자기네 회사가 아니라며, 러시아 항공사로 직접 가보라는 것이었다.
'무슨, 이런 일이 있다지?' 하면서도, 밖에서 자신을 기다릴 산티아고 때문에 일단 밖으로 나갔더니(인야는 짐 때문에 흥분해서 아무 정신이 없었는데)... 그는 다른 쪽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산티아고, 여기야 여기!" 하고 소리를 질렀더니, 깜짝 놀랐던 그는 환한 얼굴로 다가오더니 인야를 껴안고 반갑다고 난리였다. 그렇지만 인야는,
"산티아고, 문제가 하나 생겼어. 내 짐만 안 나왔어." 하고 여전히 흥분한 상태로 말하자,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우선 자기 집 주소가 적힌 명함부터 꺼내 건네주는 것이었다. 나중에라도 짐이 그 집으로 배달되어야 한다는 생각일 터였다. 그래서 인야는,
"일단 안으로 들어가, 그 상황 파악 좀 해 줘!" 해서야, 인야를 따라나섰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산티아고는,
"잠깐, 이 장면만큼은 사진으로 남겨둬야 할 거 같은뎨?" 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들며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자신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인야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사진에 남겼던 것을 역으로 실행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 바빴던 인야는,
'아이고, 두야! 주객이 전도됐군......' 하면서, 마음을 좀 느긋하게 먹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게 다시 안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항의를 하고, 현지 경찰에게까지 매달리던 끝에... 마침내 한 여직원이 다시 확인해 보자고 했다. 그러면서 가 보니,
"어?"
다른 쪽 회전기계 위에서, 외로이 돌고 있는 인야 자신의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근데, 내 가방이 왜 저기에 있지?" 하기는 했지만, 어찌 아니 반가웠겠는가.
나중에 알고 보니, 모스크바발과 런던발 승객들의 짐이 뒤섞여 있었던 것인데... 비행기에 내려 무심코 앞사람만 따라 왔다가 그 사람이 기다리는 곳에서 서 있었던 인야의 실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실수는 인야의 것만이 아니었다. 그 담당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진작 인야가 담당자에게 항의하는 사이에 해결됐을 문제였는데... 인야가 흥분해서 그 안에서 여기저기 다니는 사이에, 그 담당자는 그 주변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그 담당자도 인야의 눈치를 보면서, 그 어떤 푸념도 늘어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해프닝을 벌인 끝에 짐을 찾아 나오자, 산티아고는 다시 한번 마드릳에 온 걸 환영한다며 악수를 청했다.
반갑게 재회했어야 할 순간이, 짐 문제로 김이 다 빠져나간 뒤였지만... 그래도 마음은 어느새 약간의 설렘까지 느껴지는 상태였다.
마드릳의 기온은 21도였다. 인야가,
"야, 이 기온은 정확히 한국의 내 방 안 기온이네!" 하자,
"올해는 여기도 비가 안 와서, 좀 더운 편이야. 그래서 다들, 올 농사 때문에 걱정이거든..." 하고 산티아고가 웃었다.
그러니 인야는 추울까 봐 챙겨온 두꺼운 잠바가 갑자기 성가시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산티아고의 차를 타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정에 가까워 있었다.
마야는 그새 손님방에 꽃을 꽂아두는 정성으로 인야를 맞을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밤 늦게 도착할 인야를 위해 뭔가 슾 같은 걸 준비해둔 모양이었지만, 인야는 생각이 없어 사양했고... 대신 한국에서 가져온 생강차를 선물로 건넸는데,
인야가 다시 온 것을 기념하는 의미의 셋이 들어간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마야는 다음 날 출근 때문에 먼저 잠자리에 들었고...
인야와 산티아고는 한 시간 넘게 웃고 떠들며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