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472년 ~ BC.396년
안읍(安邑,
산시(山西)성 남부 안이시) 사람으로
성은 희(姬)이고, 씨는 위(魏), 이름은 사(斯), 도(都)이다.
전국시대 위나라의 개국군주이다.
BC.445년에 위환자(魏桓子)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정치와 법제 개혁
위나라는
BC.403년에 한(韓), 조(趙)나라와 함께
각기 주왕(周王) 및 각 제후국으로부터 정식으로 국가로 승인받았다.
전국시대에
위나라의
서쪽에는 진(晉)나라, 한나라가 있었고,
남쪽에는 초나라,
북쪽에는 조나라,
동쪽에는 제나라가 있었다.
지리적으로 위나라는 중앙에
있었기 때문에
외부의 공격을 당하기 쉬워 나라를 유지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이에 위문후는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전국7웅 중 가장 먼저 정치와 법제를 개혁했다.
또한 농사와
전쟁을 장려했으며,
수리 공사를 하고,
봉건 경제를 발전시키는 정책을 폈다.
특히 이에 필요한 전문적인 인재로
서문표, 위성(魏成) 등의 인물을 적재적소에 적극적으로 기용한
것은
위나라가 전국 초기의 강국으로 성장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먼저 내부
정치적으로 그는
이괴, 적황(翟璜)을 재상으로 삼아 정치폐단을 개혁하고자 했다.
이괴에게는
위나라의 변법 업무와 법제 개혁을
맡겼는데,
이는 중국 역사에 2천 년 넘게 큰 영향을 미쳤다.
위문후 이후
진(秦) 헌공, 효공과 상앙의 변법이
모두 위나라를 근본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이괴는 『법경(法經)』을 저술하여 법치로 나라의 기반을
다졌다.
군사 증강과 국토 개척
군사 방면에서는
악양, 오기 등 명장을 기용하여
확대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북
쪽으로 조나라를 억제하고 중산국을 멸망시켰고,
서쪽으로는 늘 위협이 되고 있던 진(秦)나라의 하서(河西) 지역을 점령하여
황하에서 물을
얻을 수 있게 했다.
또 동쪽으로는 동방의 강국 제나라를 격파하고,
남쪽의 초나라도 연이어 물리쳐 국토를 크게 개척함으로써
위나라를
중원(中原)의 맹주로 도약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