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1980년, “나무관세음보살”로 암 극복하고,
“나무아미타불”로 극락 간 김병천 거사
운경(백련사 회주)
1) 기도 원력과 범종 불사 인연으로 횡재를 이루다.
1969년인가, 1970년인가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우연한 기회에 병자생(1936년생)인 이연화 보살을 만났는데 산신 기도를 모시고 싶다고 했다. 왜 산신 기도냐고 물었더니, 남편과 본인이 장충공원 서울시 공원용지를 빌려 정원수 조경공사를 하는 장충식물원을 운영하기 때문에 산신 기도를 모시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산신각에서 산신 기도를 열심히 모셨다.
내가 거주하는 백련사에서 부처님 기도와 산신 기도를 열심히 모시고부터 사업이 잘 풀린다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러 다녔다. 그렇게 3~4년 열심히 기도하는 사이 마침 백련사 범종 불사가 시작되자 상당히 많은 불사금을 시주했고, 절에서는 남편 김병천 사장의 이름을 종명에 새겨 올렸다. 1974년 4월 범종 불사 낙성식 날 보살보다 11살이나 위인 김 사장(1925년생으로 당시 50세)도 백련사에 처음 와서 법문을 듣게 되었다. 김 사장은 이북 사람으로 기독교 모태신앙이라 생후 일주일 만에 교회에 가서 유아세례를 받은 바 있다고 한다. 필자 또한 초년에 기독교 신앙을 한 경험이 있어, 여러 방면 종교적인 이야기로 서로 소통하는 게 있었다.
백련사 범종 불사 낙성식에서 김 사장에게 종을 한번 쳐 보게 했다. 김 사장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범종 소리를 듣고, 가슴에 울리는 느낌이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과 함께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연화 보살은 범종 불사 이후 불교에 관심을 두는 남편을 보면서 백련사 법당 기와 더불어 산신 기도에 더욱 정진했다. 기도 원력으로 사업이 잘되어 두 부부가 더욱 신심이 깊어져 갔다.
1971년 말부터 1972년 초까지 남한과 북한은 대한적십자사의 정홍진과 북한적십자사의 김덕현을 각각 실무자로 내세워 판문점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이 비밀회의 협의를 바탕으로, 1972년 5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직접 만났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북한노동당조직지도부장 김영주를 대신해 박성철 제2 부수상이 서울을 방문했다.
한편 남한의 이후락과 북한의 김영주가 6월 29일 그동안의 협의 내용에 서명하고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각기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소위 말하는 남북 7·4공동성명이다. 이 성명은 자주 · 평화 · 민족 대단결의 3대 원칙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중요하고 뜻깊은 내용이다.
김병천과 이연화 부부가 겪은 횡재는 이렇게 박성철 일행은 판문점에서 통일로를 통해 서울로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다. 통일로 주변을 미화하기 위해 양측 2차선 도로의 가로수 사이에 관상수를 심어 나무 벽을 치는 공사를 하게 되었다. 서울시로부터 급하게 수주를 받고 전국에 있는 묘목원을 총동원하여 나무 벽에 쓸 관상수를 납품받고, 많은 인력을 동원해 도로 양측에 나무를 심느라 매일 밤을 새워 가며 공사를 했다. 이 공사는 당시 중앙정보부의 지시에 의한 공사였기 때문에 모든 일이 일사천리였다. 심지어 나뭇값조차도 어디에 있는 나무를 얼마에 사야 한다고 말만 하면 본인들이 나뭇값을 내지 않아도 다 관에서 알아서 처리하는 식으로 해결되었다. 게다가 시한이 임박했기 때문에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함께 밤을 새우며 공사 현장 인부들을 독려했다. 이렇게 하여 간신히 공사 일정을 맞출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해 1972년 12월 31일에 파주농협으로부터 조경공사비를 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현금으로 결제할 것이니 현금을 수송할 차량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지프차를 빌려서 파주농협에 갔더니 현금을 산같이 쌓아 놓고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현금을 차에 가득 실었다. 사람 앉을 자리도 없이 다 채우고 간신히 끼어 앉아 장충식물원까지 오기는 했는데, 장충식물원이 한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사무실 뒷방에 현금을 방 하나 가득 쌓았다.
마침 연말연시가 되어 3일간 휴무여서 두 부부는 돈을 지키느라 차례로 잠을 자고 화장실도 간신히 다녀오는 상황으로 만 3일을 보냈다. 돈 냄새가 어찌나 고약한지 나중에는 머리가 아프고 정신이 몽롱할 정도임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평생 이렇게 많은 돈을 가져 보는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냥 즐겁기만 했다고 한다. 4일 아침에 은행에 가서 예금하겠다고 했더니 은행에서 차를 가져와 여러 사람이 동원되어 입금하게 되었다.
부부는 통일로 가로수 공사를 수주받고 공사를 원만하게 완료한 모든 일이 부처님의 공덕이라고 생각해 감사의 원력을 함께 했다. 그 후 김 사장은 태고종 총무원에서 봉행하는 ‘불교중흥기원법회’ 단상(장충체육관)에 올릴 화분들을 수십 개 시주하고 또 적당한 장소에 장엄하는 일도 손수 해 주었다.
2) 몸이 아플 때는 “관세음보살”
그 후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이연화 보살이 내게 전화를 걸어서 다급한 어조로 남편이 몹시 고통스러워한다고 했다. 전화를 받은 후 문병하러 가 보니 김병천 사장은 이미 간암 세포가 전신에 번진 상태일 뿐 아니라, 온몸이 여기저기 몹시 아프게 쑤셔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온몸에 쑥뜸을 직구로 떠서 전신이 모두 새까맣게 탄 상태였다. 얼굴만 빼고는 1cm 간격으로 전부 뜸에 탄 자국이 있었다. 얼마나 아플까? 얼마나 아팠을까를 생각하니 안쓰러워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본인은 스님께서 걱정하실까 봐 연락을 안 했다고 도리어 나를 위로했다.
나는 김 사장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나와 함께 관세음보살 기도를 합시다. 모든 병과 고통에서 구해주시는 분이 관세음보살입니다. 김 거사님은 원래 기독교인이니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관세음보살은 천사나 예수님이나 하나님처럼 우리 중생들 가까이서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가 발원하는 기도를 이루어 주시는 분입니다. 확실하게 믿고 저하고 같이 관세음보살을 부릅시다.”
둘이서 손을 잡고 관세음보살을 20여 분 동안 같이 부르고 난 뒤 “나는 절로 돌아가 3일 동안 기도를 모시겠으니, 김 거사님은 집에서 관세음보살을 놓치지 말고 열심히 계속 부르세요”라고 하고 떠났다.
이렇게 헤어져, 나는 절로 돌아와 3일 동안 하루에 세 차례 정근 기도를 정성스레 회향했다. 이연화 보살에게 전화가 왔다. 그렇게 아파하던 온몸이 한 군데도 안 아프다고 나 나았다는 것이다. 나는 바로 장충식물원으로 달려갔다. 김 거사는 연신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면서 부처님과 스님 덕에 암이 다 나았고, 그렇게 아프던 게 지금은 하나도 안 아프다는 것이었다. 며칠 사이에 암이 그렇게 완치된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지만, 본인은 아무 데도 아픈 데가 없으니 다 나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후 김병천 거사는 운영하던 조경 사업을 계속하며 현장에도 다니고 설계도 하고 열심히 사업을 하였는데, 1년 6개월 뒤 다시 간암이 악화하여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김 거사가 나를 찾는다고 하여 병실을 방문하였다. 김 거사는 내게 말했다. “병원에서는 암세포가 전신에 전이 되어 수술할 수가 없답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도 아프질 않으니 이상합니다.” 내가 물었다. “김 사장님, 수술받고 싶으십니까?” 그러자 김 거사는 수술받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결국은 이연화 보살이 인연을 동원해 수술해 주라고 요청하여, 결국 수술을 했다. 막상 열고 보니 암세포가 전신에 번져서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어서 그냥 꿰맸다. 그런데 꿰맨 자리도 봉합이 되지 않을 것 같다고 하면서 그냥 퇴원하라고 한다며 나에게 연락이 왔다. 나는 그냥 병원에 계시게 하면서 봉합된 다음에 퇴원하는 게 좋겠다고 했고, 과연 병원 의사들이 예상과는 다르게 수술 자국은 완전히 봉합되었다. 김 거사는 퇴원 길에 내가 사는 백련사에 들러 기도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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