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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의 에드바르트 뭉크 |
서울지하철 6호선 삼각지역은 지하철 4호선과 교차한다. 6호선에서 4호선 서울역 방향으로 바꿔 타려면 60여m의 긴 환승통로를 지나야 한다. 거리가 제법 되다 보니 통로 양쪽으로 공항에 흔히 있는 무빙워크를 설치해 놓았다. 4호선 서울역으로 가려고 이 무빙워크에 올라서는 순간, 승객은 낯선 포스터에 움찔한다. ‘노르웨이 표현주의 거장 MUNCH, 에드바르트 뭉크 탄생 150주년’.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그는 1863년 12월 12일 태어나서 1944년 1월 23일 눈을 감았다.
마네 · 모네 · 드가의 작품은 몰라도 뭉크의 대표작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TV의 예능 프로그램에서조차 그의 대표작은 곧잘 등장한다. 어떤 연예인이 놀라거나 비명을 지르면 이 그림이 자료화면으로 등장한다. TV의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10대들도 이 그림은 다 안다. 수많은 변용과 변주의 모티브가 된 작품 ‘절규’.
무빙워크를 따라가다 보면 뭉크의 작품이 24점이 전시되어 있다. ‘마돈나’ ‘별이 빛나는 밤’ ‘살인자’ ‘병실에서의 죽음’ ‘자화상’ ‘생명의 춤’ ‘불안’ ‘아픈 아이’ ‘그 목소리’ ‘시계와 침대 사이의 자화상’ ‘해변의 두 여인 2’ 등. 환승통로 오른편은 오슬로에 있는 뭉크미술관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다. 환승통로 왼편은 노르웨이 대자연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일만년 푸른 빙하의 눈물, 세상의 모든 빛을 품어내는 밤하늘 25,148㎞에 이르는 노르웨이 해안의 긴 여정, 지금부터 시작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이 환승통로는 예술과 자연으로 노르웨이를 한국에 알리는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다. 6호선 측은 3년 전 노르웨이대사관 측에 ‘환승통로 공간’을 테마공간으로 활용하고 싶은데 의향이 있다면 계획서를 내보라고 공문을 보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현재의 모습이 됐다. 노르웨이대사관 측은 3년 전부터 이 공간을 자연사진 전시회 공간으로 써 왔다. 이번에 뭉크 탄생 150주년을 앞두고 지난 3월 20일부터 한쪽 공간을 뭉크 특별전으로 꾸몄다.
뭉크는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화가다. 음악의 그리그, 탐험의 아문센과 함께 현대 노르웨이를 상징하는 화가 뭉크. 그림 매니아가 아닌 보통 사람들은 ‘절규’ 외에도 ‘마돈나’ 정도까지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환승통로를 걸으면서 24개의 작품을 완상(玩賞)하다 보면, 미술평론가가 아니더라도 그림을 관통하는 어떤 흐름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어둠과 절망과 죽음이다. ‘별이 빛나는 밤’도 같은 제목의 고흐 그림과는 정반대의 이미지다. 뭉크의 작품들은 생명력과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눈이 쾡하고 다크서클이 얼굴 가득하다. 마치 좀비가 그림에 등장한 것 같다. 죽음의 그림자가 화폭 곳곳에 스며있는 것 같다. ‘마돈나’의 경우도 나신을 드러내곤 있지만 관능적 아름다움은커녕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니 뭉크를 모르는 사람이 처음 보면 일단 본능적 거부감이 들게 된다. 왜 그럴까?
뭉크는 1863년 12월 12일 노르웨이 남부의 엔겔호이크에서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뭉크가 태어난 직후 아버지는 오슬로로 이사를 했다. 군의관 출신 의사로 집안은 유복한 편이었다. 뭉크는 다섯 살 때 어머니를 폐결핵으로 잃었다.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모성(母性)이 필요한 시기에 어머니를 상실했다.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열네 살 때 어머니처럼 따르던 누나 요한 소피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병약한 뭉크를 돌보다 몸이 약해져 결핵에 걸려 숨진 것이다. 뭉크는 자신으로 인해 누나가 죽었다는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소년의 절망감이 어땠을지는 미뤄 짐작하고도 남는다. 뭉크의 그림에 어두운 낯빛의 여성이 많이 등장하는 까닭을 비평가들은 죽음을 응시하는 내향적 성격 탓으로 분석한다.
불행한 상처를 안고 성장한 뭉크에게 유일한 삶의 비상구는 그림이었다. 뭉크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1879년 기술전문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몸이 아파 수업에 빠지기 일쑤였고 결국에는 1880년 11월 기술전문대학을 중퇴하게 된다.
뭉크는 1881년 오슬로에 있는 왕립디자인학교에 입학하면서 드로잉, 입체 표현법 등 회화의 기초를 배웠다. 이후 1883년 프리츠 테울로브의 미술아카데미에 다니게 된다. 당시 노르웨이는 회화의 변방. 그는 1885년 예술의 수도인 파리로 건너가 루브르박물관, 살롱 등을 전전하며 그림 공부를 계속했다. 뭉크의 초기작으로 유명한 작품인 ‘아픈 아이’(1886)는 이 시기에 탄생했다. 미술평론가 전은자씨는 ‘아픈 아이’에 대해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에 대한 심리적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으며 이미 표현주의적인 작품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평한다.
뭉크는 이 시기 첫사랑을 경험한다. 상대는 세 살 연상의 유부녀 헤이베르크. 해군 군의관의 부인이었으나 자유연애주의자였던 헤이베르크는 뭉크와 6년간 연인관계를 유지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헤이베르크의 이별 통보로 끝이 난다. 모성 결핍이라는 상처를 안고 있던 뭉크였기에 실연의 아픔은 남보다 몇 배 더 깊고 컸다. 뭉크는 그 슬픔을 ‘달빛’(1893)으로 남겼다. 실연의 아픔이 아물어가는 순간, 또 한 번 비극이 엄습했다. 어머니 죽음 이후 신앙에 맹목적으로 빠져 살던 아버지가 자살을 선택한 것이다.
뭉크는 1889년 국비장학금을 받고 레옹 보나의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얼마 뒤 생클루(Saint Cloud)로 이사를 했다. 생클루 시절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인상주의, 상징주의 등 새로운 미술 흐름을 호흡하고 받아들였다. 생클루 시절 쓴 일기를 보면 그의 창작 경향이 드러난다. “더 이상 사람들이 책을 읽고 여자들은 뜨개질하는 실내 모습을 그려선 안 된다. 숨을 쉬고 아파하고 사랑하는 실존하는 인물들을 그려야 한다.”
뭉크는 프랑스에서 여전히 무명이었다. 1892년 뭉크는 작품 55점을 들고 독일 베를린으로 가 전시회를 연다. 뭉크 전시회는 절망적인 분위기로 인해 기성 화단에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뭉크는 젊은 화가들의 지지를 받았고, 비로소 그의 이름이 화단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1893년 뭉크는 대표작 ‘절규’를 그린다. ‘절규’ 역시 전시회장을 충격에 빠트렸고, 전시회가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뭉크는 작가 일기에 ‘절규’와 관련 이렇게 썼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친구 두 명과 함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한쪽에는 마을이 있고 내 아래에는 피오르드가 있었다. 나는 피곤하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해가 지고 있었고 구름은 피처럼 붉은색으로 변했다. 나는 자연을 뚫고 나오는 절규를 느꼈다. 실제로 그 절규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진짜 피 같은 구름이 있는 이 그림을 그렸다. 색채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베를린에서 활동하던 시절 뭉크는 한 여인을 사랑했으나 그 여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뭉크는 고향 친구인 다그니 유을을 단골 클럽으로 데리고 와 예술가 친구 스트린드베리와 프시비지예프스키에게 소개했다. 그런데 친구 두 명도 첫눈에 다그니 유을에게 빠져 버렸다. 다그니 유을은 세 명의 남자와 데이트를 하다 결국 프시비지예프스키를 선택한다. 뭉크는 배신감에 절망했다. 이 사건 이후 뭉크의 여성 혐오증이 더욱 심해졌다고 연구자들은 분석한다.
1902년은 뭉크의 화가 인생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생의 프리즈’ 연작 22점이 베를린 분리파 전시회에 출품되어 성공을 거둔다. 유럽 각국에서 전시회 요청이 쏟아져 들어왔고 뭉크는 프랑스 파리와 니스, 이탈리아, 스위스, 노르웨이를 돌며 106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미국에도 건너가 뉴욕과 시카고에서 미국 관객과도 만났다.
1908년 노르웨이는 뭉크에게 왕실훈장과 기사작위를 수여했다. 조국도 뭉크를 마침내 인정한 것이다. 뭉크는 1912년부터 노동자의 삶을 주제로 한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노동자를 주제로 한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게 ‘퇴근하는 노동자들’이다. 1913년 12월, 50세 생일 때 그는 세계 각국의 명사들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이후 노르웨이로 돌아가 정착했다.
노르웨이는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뭉크 역시 나치의 핍박을 받는다. 나치는 그의 그림을 퇴폐적이라고 규정하고 그림 82점을 압수했다. 작품을 압수당하기 직전, 뭉크는 이웃에 살던 토마스 올센에게 몇몇 작품을 숨겨 달라고 요청했다. 토마스 올센은 나치의 감시를 피해 짐수레에 미술품을 허드렛 가구로 위장해 가지고 나가 산속에 숨기는 데 성공했다. 이 속에 ‘절규’ ‘아픈 아이’ 등이 있었다.
뭉크는 많은 일기를 남겼다. 연구자들은 그의 일기를 통해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는 말년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날마다 죽음과 함께 살았다. 나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두 가지 적을 안고 태어났는데, 그것은 폐결핵과 정신병이다. 질병, 광기, 그리고 죽음은 내가 태어난 요람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천사들이었다.”
뭉크는 1944년 1월 23일 오슬로에서 눈을 감았다. 널리 알려진 일화지만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읽은 책은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이었다. 악령의 주인공들은 모두 비극적 죽음을 맞는다.
누이 잉게르가 은방울꽃 한 다발을 동생 뭉크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독일군이 들이닥쳐 꽃을 치워 버리고 총과 철십자 훈장을 얹었다. 가족장으로 치르려던 계획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결국 뭉크는 가족묘에 안장되지 못했다.
지난 1월 23일 노르웨이 왕 하랄드 5세는 오슬로에서 ‘뭉크 탄생 150주년 전시회’ 개막을 선언했다. 현재 ‘뭉크 탄생 150주년 전시회’는 노르웨이 7개 도시를 순회 중이다. 오는 6월 2일에는 오슬로의 국립미술관과 뭉크박물관에서 ‘뭉크 탄생 150주년 전시회’가 열린다. 노르웨이 정부는 지금 세계 각국의 대사관을 통해 뭉크의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다. 뭉크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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