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높이18m 나신상, 무상의 경지에 든 고행의 상징
자이나교 최고성지 12년 마다 열리는 축제엔 100만 인파가…
드라비다인과 시바(Siva)의 세상, 남(南)인도(스물아홉)
(2012년 3월 11일 ~ 3월 20일)
자이나교 최고의 성지 스라바라…, 작은 읍촌
스라바나벨라골라(Shravanabelagola).
한반도면적의 3배에 가까운 드넓은 데칸고원(Deccan Plateau)에 자리한 카르나타카(Karnataka) 주(면적 19만1천800㎢ : 한국의 두 배에 조금 모자람)의 평원을 달리다 보면 가끔씩 바위산을 만나게 된다.
이 마을 또한 드넓은 평원 속에 자래했다.
마을 양쪽엔 큰 돌산 두 개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그 복판에 마을이 형성됐다.
(스라바나벨라골라의 빈디야기리 힐의 디감바라사원에 모셔진 18m 높이의 고마떼스와라 나신상 전경.)
(디감바라사원을 오르면서 바라본 건너편 원경. 벨라골라호수와 그 뒤쪽에 찬드라기 힐이 보인다.)
자이나교 최고의 성지인 디감바라(공의파 : 空衣派 : Digambara)사원이 있는 돌산이 빈디야기리 힐(Vindhyagiri Hill)이다.
그 반대편의 돌산은 찬드라기리 힐(Chandragiri Hill)이고.
이 마을 중앙의 시외버스터미널 옆엔 큰 정4각형 석축인공호수가 자리했다.
이 호수에서 마을을 바라볼 때 오른쪽이 빈디야기리 힐, 왼쪽이 찬드라기리 힐이다.
스라바나벨라골라(Shravanabelagola).
‘하얀 연못의 수도승’이란 뜻이라고 한다.
‘하얀 연못’이라니?
이 큰 정4각형 인공호수를 두고 한 말이겠지?
벨라(bela : 하얗다.)와 골라(gola : 연못)가 합쳐졌으니‘하얀 연못’이다.
(벨라골라호수 네 변 중앙마다 사원이 들어섰다. 그 뒤 언덕에 찬드라굽타 바스티 사원이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호수 네 변 복판엔 모두 자이나교사원이 세워졌고.
4각형 벨라골라 호수를 둘러싼 석축은 흰 돌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호수에 담긴 물은 푸른색이다.
이 호수는 17세기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찬드라기리 힐 정상에는 아주 오래된 사원이 뿌리박고 있다.
찬드라굽타 바스티 사원(Chandragupta Basti Temple)이다.
BC 3세기 경 남인도일부를 제외한 거대한 통일제국을 이룬 마우리아왕조 3대 아소카(Asoka : 재위 BC 268 ~ 232)왕이 지원해서 만들었다.
무려 2천3백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유적이다.
자이나교 창시자 바하비라(Mahavira)의 일생을 묘사한 기록과 자이나교 신상들, 그리고 20여m가 넘는 ‘명예의 기둥’과 돌로 지은 사원 군이 보존돼 있다.
불교를 중흥시킨 인물 아소카왕은 다른 종교도 포용하는 폭 넓은 정책을 폈던 고대 인도의 영웅이다.
12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축제엔 100만인파가
그럼에도 스라바나벨라골라 마을은 빈디야기리 힐 주변이 중심이다.
이 일대에 많은 자이나교 유적들이 흩어져 있어 관광객도 대부분 이곳을 찾기 마련이다.
이 일대의 유적은 빈디야기리 힐에 7곳, 마을주변에 8곳이 있다.
빈디야기리 힐의 디감바라사원(Digambara Temple : 공의파 사원)이 중심임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스라바나벨라골라에 있는 자이나교유적을 표시한 큰 선전간판.)
12년 만에 한 번식 2월 초에 열리는 이름도 고약(?)한 자이나교 마하마스따까삐세까 축제 땐 이 작은 마을에 100만의 인파가 몰려든단다.
이 때 이들 인파의 숙식문제는 어떻게 해결할까?
물론 인근의 하산(Hassan)이나 마이소르 또는 뱅갈로르 등지에서 묵고 이곳으로 오는 신도들이 많겠지만 말이다.
(12년 마다 열리는 축제 때의 고마떼스와라 나신상 주변의 모습.)
그래도 또 좁은 읍촌에 그 많은 인파가 몰려든다면 과연 발 디딜 틈은 있을까?
특히 빈디야기리 힐의 디감바라사원이 들어선 바위산은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그 많은 수의 신도들이 가파른 돌계단을 타고 오르내리다가 일어나는 사고도 엄청 많지 않을까?
대규모 축제행사를 치러내면서도 자이나교의 유적 보존은 어떻게 할까?
이처럼 큰 행사를 치러낼 수 있는 건 2천6백여 년이란 긴 세월동안 면면히 이어진 종교의 힘이 아니면 과연 가능할까?
자이나교도들의 신심이 얼마나 깊으면 이런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 등 많은 궁금증이 일어남은 물론이다.
◆자이나교(Jainism)의 공의파(空衣派 : Digambara)와 백의파(白依派 : Svetambara)의 유래는?
자이나교 창시자 마하비라(Mahavira) 사후 200여 년이 지난 마우리아(Maurya)왕조 찬드라굽타 왕 시대에 인도 마가다(Magadhi : 지금의 비하르(Bihar)주 : 바로 네팔 남쪽지역)지방엔 심한 기근이 닥쳤다.
마가다지방은 갠지스 강 중류의 충적평야지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예부터 쌀 등 농산물이 풍부했던 곳이다.
물산이 풍부한 곳이라 새로운 문명과 사상이 생성하는 자양이 됐다.
따라서 타락한 힌두교를 개혁하려는 불교와 자이나교도 이곳에서 생겼음은 물론이다.
마가다지방의 기근은 12년 동안 이어져 수많은 인명이 아사하기에 이른다.
이 때 자이나교수행자 바드라바후가 한 무리의 교도를 이끌고 수만리 떨어진 남인도지방으로 떠난다.
바로 자이나교가 남인도 쪽으로 전파된 계기가 된 사건이다.
또 다른 수행자 스탈라바후를 중심으로 한 마가다지방 자이나 교인들은 그곳에 남아 자연의 대 재앙과 맞선다.
(자이나교와 불교가 처음 탄생한 비하르지방의 지도. 빌려온 것임.)
데칸고원(Deccan Plateau)을 중심으로 한 인도대륙 아래쪽 남인도지방에 머물렀던 자이나교인 대부분은 기근이 끝나고 마가다지방으로 환향한다.
이들은 오랜 시간에 걸친 수만리 대이동이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수행방식을 엄격히 지켜냈다.
반면 마가다지방에 잔존했던 교도들은 생존하기 위해 수행방식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집단은 의견차를 없애기 위해 여러 차례 회합을 가졌으나 끝내 합의도출에 실패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자이나교는 두 파로 갈린다.
남쪽에서 귀향한 정통수행방식의 고수 파를 공의파(空衣派 : Digambara)라 부르고, 마가다지방에 잔존해 수행방식을 수정했던 파를 백의파(白衣派 : Svetambara)로 부르게 됐다.
공의파는 엄격한 금욕과 나체수행, 철저한 채식주의를 지켰다.
그들은 옷을 욕심의 근원으로 생각했다.
인간이 최초로 가진 게 몸을 가린 나뭇잎이나 옷의 형태일 것이다.
또 무소유 즉 모든 걸 버린다고 해도 몸에 걸친 옷만은 남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옷마저 벗어던져버리면 정말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는 무소유를 실천하는 게 아닐까?
그들이야 말로 자이나교의‘5대 서약’중 세 번째 “무소유 즉 어떤 탐욕도 지니지 않음.”을 지켜내는 수행자임이 분명하다.
나체수행자의 정신세계가 너무 깊다는 걸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살아있는 신이나 마찬가지다.
나체수행자가 지나가면 일반신도들은 발에 입을 맞추기도 한다.
그들은 여성만은 교단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공의파의 나체수행자 모습. 손엔 앉을 때 살생을 막기 위해 쓰는 공작깃으로 만든 비자루. 빌려온 사진임.)
백의파는 채식주의를 비롯한 다른 교리는 지켜나가지만 상당히 시대상황에 맞게 바꾸었다.
특히 흰옷을 입고 수행하기에 이른다.
자이나교의 수행자들은 이렇게 고행과 무소유 등‘5대 서약’을 철저히 지켜나가는 반면 일반신도들은 가정에서 서약 지키기에 전력을 다하기에 사회에서 존경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불교는 인도에서 거의 신도가 없는 대신 동남아 등 해외에 뿌리를 내린 종교다.
반면 자이나교는 해외로 뻗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인도 내에서도 소수의 신도를 가진 종교에 머물렀지만 명맥을 유지하는 데는 그 만한 이유가 있다.
자이나교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자아(自我)보다 낮은 위치에 둔다.
또 계급사회(카스트제도)에 대한 비판도 불교처럼 강하지 않다.
사람이 높거나 낮은 가문에서 태어나는 이유는 전생에서 지은 업(業 : 카르마) 때문이기에 전생의 업을 수행을 통해 씻어내고 현생에서 더 이상 업을 짓지 않으면 누구라도 해탈할 수 있다는 게 자이나교 교리의 핵심이다.
힌두교의 카스트제도를 철저하게 반대했던 불교는 해외로 뻗어나갈 수 있었지만 인도 내에선 설 땅이 없었던 반면 자이나교는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소수로 명맥을 이어갈 수 있고, 또 신도들은 사회적으로 존경의 받는다.
디감바라사원 계단 오르면 멀리 지평선 출렁여
나그네는 오전 11시 30분 드디어 빈디야기리 힐의 디감바라사원(Digambara Temple : 공의파 사원)을 향해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라 돌계단은 이미 햇살에 달아올랐다.
두터운 양말을 신었지만 발바닥이 뜨겁다.
(힘겹게 빈디야기리 힐의 돌계단을 양말 신고 오르는 나그네.)
돌계단은 분리대를 두고 오르는 길과 내려오는 길이 나누어져 있다.
두 길 모두 철제 난간 대를 세워 손잡이로 이용한다.
10여분 오르자 숨이 찬다.
계단 난간 대를 잡고 뒤를 돌아보자 한동안 머뭇거리던 정 사장님과 ‘아샤’씨가 그제야 첫 계단을 밟고 오른다.
계단 위쪽을 처다 보니 일행 한 분이 20여m 앞서 올라가고, 서양관광객 내외가 내려올 뿐 텅 빈 계단길이다.
(여행도반 정원덕사장님이 힘차게 계단을 오른다.)
5분쯤 오르다가 다시 아래쪽을 내려다본다.
눈 아래 정4각형 벨라골라 인공호수가 펼쳐졌다.
4변마다 복판에 세워진 사원들의 모습이 선명하다.
호수에 담긴 물은 야자수와 주변 나무색깔과 꼭 같은 녹색이다.
(찬드라기리 힐에 위치한 찬드라굽타 바스티 사원과 높이 20여m의 '명예의 기둥' 모습.)
그 뒤로 찬드라굽타 바스티 사원이 자리한 찬드라기리 힐 정상부분이 한 눈에 들어온다.
20m가 넘는 우뚝 솟은‘명예의 기둥’과 사원 군의 모습, 그리고 그 오른쪽 바위덩이산과 바위틈에 자란 큰 나무들이 잡힌다.
그 아랜 스라바나벨라골라 마을이 엎드렸고.
머리를 오른쪽으로 더 돌리자 마을 뒤편의 드넓은 데칸고원(Deccan Plateau)의 지평선은 아스라이 해면처럼 출렁인다.
(계단이 끝나는 부분에 있는 디감바라사원의 정문.)
다시 힘든 발걸음을 떼어놓는다.
한 계단 두 계단 오르는 게 숨이 찬다.
고개를 위로 젖혀보니 사원을 둘러싼 석성과 계단이 끝나는 부분과 연결된 사원정문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앞서 오른 일행은 벌써 정문에서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발아래 펼쳐진 풍광을 감상하는 여유를 부린다.
나그네도 마지막 5분을 힘겹게 오른다.
그리곤 정문에서 또 눈 아래 펼쳐진 시원스런 풍광을 카메라에 담는다.
시다라사원에 들자 높이 18m의 나신상이 압도
돌로 쌓은 성곽정문을 들어선다.
성곽 안 전체의 사원 군(群)을 통칭해 디감바라사원(Digambara Temple : 공의파 사원)이라고 부른다.
성곽정문오른쪽으로 조그마한 바스티(Basti : 사원)가 보이고.
왼쪽으로 Wodegal사원이 있고, 오른쪽 뒤로는 Chennanna사원이 자리했다.
(시다라사원 출입문 좌우에 자리한 작은 사원들.)
(시다라사원 출입문에 붙은 감실에 모셔진 자이나교 창시자 마하비라의 좌상.)
(정교한 조각을 새긴 돌기둥을 모신 Tyagada Kamba 정자.)
다시
30여개의 돌계단을 오른다.
계단 위엔 4개의 돌기둥이 받친 석조건물의 출입문이 앞을 가로 막는다.
그 출입문을 들어서자 왼쪽 석실에 자이나교의 창시자 마하비라(Mahavira)의 검은 돌 조각상이 안치되었고.
또 정교한 조각을 새긴 돌기둥을 모신 Tyagada Kamba 정자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시다라사원 출입문 옆에 자리한 큰 바위덩이. 자이나교의 신상들이 부조돼 있다.)
그리곤 어렵게 시다라(Siddhara : 완전을 성취한 자이나교성자)사원에 이른다.
출입문 왼쪽엔 큰 바위덩이가 붙었다.
그 바위엔 크고 작은 많은 수의 자이나교신상을 정밀하게 조각해 그냥 지나칠 수 없도록 했다.
(시다라사원의 출입문. 출입구 위쪽에 '가자 - 락슈미'조각을 새겼다.)
출입문(Akhanda Bagilu) 위엔 두 마리의 코끼리가 락슈미의 좌우에서 코로 물을 뿌려대는 ‘가자 – 락슈미(Gaja – Laksmi)’조각상이 새겨졌다.
출입문을 통해 바위산정상의 시다(Siddha : 완전을 성취한 자이나교성자)사원에 들어서서 만타파(mantapa : 예배실)를 지나자 바로 고마떼스와라(Gomatesvara)의 거대한 돌 나신상이 눈을 가로막는다.
(고마떼스와라 나신상의 정강이 위쪽 모습. 나무덩굴이 나신상을 감았다.)
(고마떼스와라 나신상의 가슴아래 부분. 황금색 옷을 입은 자이나교 사제가 보인다.)
자이나교 전설에 등장하는 바후발리(Bahubali)를 모델로 한 높이 18m의 나신상은 하나의 암석을 조각한 모노리식(monolithic) 거석 조각상(statue)이다.
20㎞ 거리 밖에서도 보이는 세계최대의 신상이다.
이 석상은 워낙 거대해 고개를 젖히지 않곤 한 눈으로 다 볼 수 없을 정도의 크기다.
나신상 주인공, 무상의 경지에 든 고행의 상징
이 나신상의 주인공은 바후발리(Bahubali)다.
그는 BC 10세기 경 리샤바(Rishabha)왕의 아들로 바라타(Bharata)왕국의 후계를 놓고 왕자 간 다툼을 벌인 인물이다.
그는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제들은 왕권을 두고 다툰다.
그는 왕권을 거머쥐자마자 환멸을 느끼고 형 바라타에 왕국을 바치곤 바로 고행에 들어간다.
(고마떼스와라 나신상의 다리와 발. 나체수행자가 기도를 올리고 있다.)
그는 두 발을 모으고 양팔을 붙인 채 선 ‘카요트사르가(kāyotsarga)’라는 자세로 깨달음을 얻을 때 까지 명상에 잠긴다.
이 명상을 통해 자이나교에서‘구원자’라는 뜻의 첫 번째‘티르탕카라(Tīrthaṅkara)’에 오르게 된 것이다.
명상 기간 중 그의 몸에는 나무덩굴(보리수줄기)이 자라 다리는 물론 팔까지 감았다.
또한 두 발 앞에는 개미집이 지어져 있어 완벽한 무념의 경지에 들어갔음을 보여준다.
이런 게 바로 고행의 상징일 것이다.
무소유를 의미하는 발가벗은 그의 나신상 주위 회랑에는 24명의 티르탕카라 신상이 진열되었다.
(서 강가왕조가 들어섰던 지역의 지도.)
이 거대한 나신상은 긴 팔에 비해 다리가 짧다.
정상적인 인체 각 부분의 비례에 맞지 않는 구도로 조각돼 예술적인 가치를 따지긴 어렵다.
이 신상은 마이소로지방을 한 때 지배했던 서 강가왕조(Western Ganga Dynasty : AD 350 ~ 999) 24대 라차말라 4세(Rachamalla Ⅳ : 재위 975 ~ 986)왕이 집권하던 981년에 만들어졌다.
이 서 강가왕조는 촐라왕조(Chola Dynasty)의 라자라자 촐라 Ⅰ세(Rajaraja Chola Ⅰ: 재위 985 ~ 1014)에게 병합되고 만다.
2013/02/12 09:5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