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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증거
“건강하게 씩씩하게 삽시다.”
큰스님께서 인사하러 오신 스님들께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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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 팀입니다.” 하고 같이 인사하시는 학장스님에게 큰스님은 운문사에서 오시는 인원이 더 늘었다고 하셨다.
“자꾸 와야 돼. 바깥 바람도 쏘여야지 한달에 한 번씩, 안그래요 강주스님?”
하고 큰스님이 물으셨다.
“더 깊숙한 속바람 쏘이러 오는 거예요.” 하고 운문사 강주스님이 대답하셨다.
“그래 바람도 여러 가지가 있어요.” 하고 큰스님이 미소를 지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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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에서 여기까지 오시는 스님이야.”
하고 늘 소개하시는 비구니 스님께 큰스님은 암자소식을 물으시면서 왜 그렇게 시끄럽냐고 하셨다.
“그게 살아있다는 증거지요.”
스님이 대답하시자 큰스님은 “전부 도가 나보다 다 높아.” 하셨다.
“사실이 그러니까요.” 하고 무심히 합장배례 하시는 스님에게 큰스님은 “노련하잖아.” 하시며 지난달에 ‘과연 제자로다 ’하실 때처럼 유쾌하게 웃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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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하러 오신 응화스님에게 큰스님은
“이리 가까이 오세요. 오랜만입니다. 아주 신수가 훤해요.”하셨다. 팔순이 넘은 응화스님은 전에 큰스님을 치료하시면서 침을 엄청 많이 놓으신 다음부터는 그전에 대통령상을 받은 서각이며 예술활동 하신 것은 다 잊고 의사스님의 이미지가 강했다.
말끔하게 접힌 누런 서류봉투를 풀면서
“스님 건강도 안좋으신데 화엄경 때문에 노심초사하사 제가 동참하려고.” 하시면서 빨간 비단지갑을 꺼내셨다. 큰스님이 법공양 하시는 것에 비하면 많지 않고 그저 성의라고 하셨다.
기념으로 사진을 찍고 스님이 나가시자
“박사학위도 세 개나 되는 한의사 스님.” 하시면서 큰스님은
“응화스님이 침 놓고 치료해서 모은 돈이야. 무서운 돈이야. 절이 따로 있고 그런 것 같지 않더라고. 법당하나 치료실 하나 있고 자기 방 있고 그렇게 꼬깃꼬깃 한 푼 두 푼 모은 돈인데.” 하시고 염화실지에 사진을 한 장 올리자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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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스님이 늘 법회영상을 찍는 BBS 피디가 득녀를 했다고 회장스님과 함께 상의하셔서 예쁜 아가옷을 준비했다고 하셨다. 법회 전에 대중스님들이 함빡 웃으며 모두 박수를 치는 동안 재무스님이 젊은 아빠에게 아가옷을 전달했다. 아기는 존재한다는 소식만으로도 선원을 사랑스러움으로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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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광불화엄경! 신어산 은하사에서 열린 생전예수재 법문에서 큰스님이 신도들과 함께 정성껏 부르신 ‘대방광불화엄경’ 덕분인지 염화실을 정리하는 동안 전국에는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본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40권 점안의식을 거행하도록 하겠다. 마음을 담아 큰 소리로 서문을 같이 한 번 읽겠다.
서문
그때에 세존께서 마갈제국 아란야 법(法) 보리도량에서 비로소 정각(正覺)을 이루시고, 보광명전(普光明殿)에서 찰나제 제불삼매(刹那際 諸佛三昧)에 드시었습니다.
세존께서 삼매에 드시니 증득하신 바의 일체 지혜 자체의 신통한 힘으로 여래의 몸을 나타내었습니다.
여래의 몸은 몸이지만 텅 비어 청정하므로 무엇에도 걸림이 없었습니다.
또 여래의 몸은 몸이지만 텅 비어 청정하므로 어디에도 의지할 데가 없으며 무엇과도 반연할 것이 없었습니다.
또 여래의 몸은 몸이지만 텅 비어 청정하므로 사마타(奢摩他)에 머물러서 지극히 고요하고 또 고요합니다.
그러나 큰 위엄과 덕을 갖추고 계시면서도 어디에도 물들고 집착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래의 청정한 몸을 친견하는 사람은 모두 다 저절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알맞은 때를 맞춰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중생들을 교화할 시기를 놓치지 아니합니다.
이러한 여래의 몸으로서 항상 한 가지 모양에 머무시니, 이른바 모양 없는 몸입니다. 시회대중(時會大衆)은 보는 것이 없는 것으로 여래를 보시고[無見而見] 깨달음을 얻으소서.
2016년 3월 15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우리가 화엄경을 공부하면서 세월이 상당히 흘렀다. 법화경을 시작한 때로부터는 10년째 접어들었고 화엄경만으로도 매달 공부해서 벌써 89회째 강의를 맞이했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느끼고 나름대로 깨달은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여러가지로 표현이 되는데 오늘 <나를 바꾸는 화엄경>이라고 하는 이 책도 우리가 공부하면서 얻은 소득의 하나다. 또 <화엄경 수행법>이라고 하는 기상천외의 결실을 얻은 스님도 계신다. 중간 쉬는 시간에 나와서 간단명료하고 건강에 좋은 수행법을 보여주실 것이다. 호주행사에 스님이 가셔서 벌써 이 수행법을 전파하고 돌아왔다.
유념하셨다가 쉬는 시간에 꼭 배워서 정신건강 몸건강 모든 분야에 보탬이 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외에도 우리 강주스님은 <화엄경 약찬게>를 벌써 여러 차례 책으로, 도표로 만들었다.
등등 우리 화엄경 공부에서 조용한 것 같지만 그 가운데 개별적인 소득으로 이리저리 맺혀진 결실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 자리에서 표현 안하시는 분들도 또 많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조그마한 것이라도 정리를 해서 이렇게 여러 사람들에게 함께 나누는 것도 또 아름다운 일이고 도반들 공부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그런 일들이 자주 있기를 바란다.
오늘 특별히 <나를 바꾸는 화엄경>은 화엄경 전체를 잘 간추린 책이 되어서 널리 보급하고 싶은 마음이다.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二十七
十廻向品 第二十五之五
四,十廻向
8, 第六隨順堅固一切善根廻向
오늘 229쪽(화엄경 제2권 민족사 刊) 하단에 ‘수족보시’ 라고 하는 부분부터 공부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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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 내용이 상당히 반복이 된다. 이치가 그렇게 여러 가지일 수는 없다.
예를 들어서 반야부 경전만 하더라도 600권으로 표현했다가 다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하는 짧은 경전으로 표현을 하기도 하고, 270자라고 하는 반야심경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270자로도 600권 반야부 경전의 뜻을 표현하는 데는 결코 손색이 없다.
그러나 600권으로 표현해야 할 것은 또 600권으로 반드시 표현해야 할 이유가 있다.
우리가 지금 십회향품에서 여러가지 회향이야기를 비슷비슷하게 중복해서 설명하는 것을 공부하는데 ‘좀 간추리는 방법은 없을까?’ 해서 간추린 사람들도 있고, 반면에 그 한 글자도 놓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글자 하나하나까지도 소중하게 다 소개하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다.
화엄경을 이야기 할 때, 60화엄이다 80화엄이다 하는 이야기를 한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화엄경은 80화엄이다.
80화엄이 우리에게 소개되기 전에는 60화엄이 먼저 있었다.
중국에서 측천무후라든지 화엄경을 좋아하는 분들이 60화엄을 보고 ‘이 글이 좀 미진하다 덜 왔다. 뭔가 책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 다시 사람을 서역에 보내어 80화엄을 완벽하게 갖추고 돌아와서 다시 번역을 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 이 80화엄경이다.
이것은 중요한 사건이다.
만약에 꼭 경전을 줄이기로 하면 60화엄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굳이 80화엄으로 완벽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신심과 그 뜻이 참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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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도 일제 때부터 초기에 경전번역을 한 스님들이 계시다. 그 중에 천하의 대가라고 할만한 스님들, 근대 번역의 선구자라고 할만한 번역이 많이 있다. 그런데 보면 짧은 경전인 금강경도 줄여서 번역을 했다. 반복된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줄였고, 당연히 화엄경 역시 아주 많이 줄였다. 화엄경은 그렇게 줄인 것이 대중들에게 읽혀지지가 않았다.
60화엄마저도 줄여진 경전이라고 해서 그 뜻을 완전하게 하려고 중국에서는 사람을 다시 서역에 보냈다. 그에 따르는 번역자며 온갖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어려움을 무릅쓰고 가서 완전한 화엄경을 모셔와서 다시 화엄경을 공부한 그 뜻을 생각하면 우리가 경전에서 글자 하나라도 줄여서는 안된다. 그런 중요한 의미를 우리가 한 번 짚고 넘어가야 되겠다.
내가 종종한 이야기인데 오늘 이 기회에 다시 한다.
십회향품을 보면 비슷비슷한 뜻이 반복된다.
오늘 공부할 부분은 수족보시인데 앞에서 나온 머리보시와 그렇게 다를 것이 있겠는가, 혀보시가 있었고 치아보시가 있었고 등등 60종류의 보시가 신체를 중심으로도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공부를 아예 안하면 안했지 공부하겠다고 생각을 정했으면, 절대 그것을 두고 ‘왜 이리 반복해서 자꾸 중언부언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거나 말해서는 안된다.
60화엄이 부족한 화엄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한글자라도 더 보충하기 위해서 사람을 서역으로 보내서 다시 80화엄 완전한 화엄경으로 만든 그 뜻을 생각한다면 경전의 글자 하나 함부로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런 점을 앞으로 여러분들이 경전을 대하는 정신으로 삼아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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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학자들이나 학자가 아니어도 불교논문을 쓰는데 경전을 많이 인용한다. 불교 논문들은 전부 경전을 인용하는데 그 논문을 인용한 것을 보면 한결같이 자기 글은 큰 글자로 하고 경전의 글자는 작게 해놓았다. 그것도 크게 잘못된 것이다.
오늘 나눠드린 <나를 바꾸는 화엄경>에는 경문은 뚜렷하게 글자를 고딕체로 하든지 아니면 진하게 해서 더 잘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전통적인 교육기관에서 경전을 공부하면서 신심을 증장시킨 결과다. 세속의 학자들은 그런 것을 할 줄 모른다. 그래서 자기 글을 크게 하고 부처님의 말씀은 조그맣게 해서 눈에 잘 보이지도 않게 한다.
옛날 책이나 우리가 공부하는 화엄경을 보더라도 화엄경 원문은 한 글자를 앞에 쓰고 소(疏)는 한 자 들여서 뒤에 쓰고 초(抄)는 또 한 자 더 들여서 뒤에 쓴다.
어떤 책은 경문은 글자를 큼지막하게 하고 그다음에 각주라 해서 자기의 소초는 조그만 글자로 두 줄로 쓴다든지 아니면 그보다 더 작게 쓴다든지 하였다.
목판을 가지고 그렇게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도 그런 식으로 한 것은 부처님 말씀인 경문을 그렇게 존중한다는 뜻이다.
요즘 어떻게 된 일인지 소위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자들은 부처님 말씀인 경전은 조그맣게 보일듯 말듯 인용하고 자기 글은 큼지막하게 읽기 좋게 하는데 그런 망발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무심하게 그렇게들 하고 있다.
논문을 써서 책을 내놓은 것을 보면 거의 다 그렇다.
수행으로, 신심으로, 부처님과의 교감을 느끼면서 하는 것이 경전수행이다. 전통적인 경을 공부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지 글을 알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알자고 하는 것도 있지만 글자를 알고 내용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만 알기 위해서 경전 공부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한 전통 경학공부를 제대로 이해 못하고 오늘날 교육원 같은 데서도 교육정책을 이상하게 몰아간다. 첫째 그런 것에 대한 신심이 없고 다음으로는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이해가 없으니 신심이 없고 신심이 없으니 이해가 없다. 그래서 기인한 문제점들이다.
우리가 보기에 그런 것들이 눈에 다 띄고 ‘어떤 마음에서 이렇게 표현이 되는구나’ 하고 알게 되니까 참 섭섭한 점도 많다.
아무튼 경전에서 반복이 되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공부하기 싫으면 안하면 그뿐이지 그것을 절대 생략한다든지 줄인다든지 하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또 논문을 쓸 때 경문을 인용한다면 경문을 자기 글보다 훨씬 크게 하고 뚜렷하게 해주어야지 줄여서 작게 한다든지 하는 일은 해서는 안된다. 이런 점을 우리가 인식해야 한다.
여기 그런 논문을 쓰신 스님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생각하면 후회가 될른지 아니면 논문 쓰는 격식이 있어서 하는 수 없이 그렇게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했다면 잘못된 것이다.
옛날 우리 목판경전을 보면 경문과 자기 글을 어떤 식으로 차이뒀는가를 잘 알 것이다.
너무나도 명확한 사실이다.
이런 기회에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그런 것을 다른 데서도 말할 수가 있다.
내가 언젠가 짚고 넘어가야지 하였던 것을 이렇게 서두에 말씀드린다.
(37) 手足布施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以其手足으로 施諸衆生호대 如常精進菩薩과 無憂王菩薩과 及餘無量諸菩薩等하야 於諸趣中種種生處에 布施手足호대 以信爲手하야 起饒益行하야 往反周旋에 勤修正法하며 願得寶手하야 以手爲施에 所行不空하야 具菩薩道하며 常舒其手하야 擬將廣惠하야 安步遊行에 勇猛無怯하며 以淨信力으로 具精進行하야 除滅惡道하고 成就菩提하나니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如是施時에 以無量無邊廣大之心으로 開淨法門하야 入諸佛海하야 成就施手하야 周給十方하며 願力任持一切智道하야 住於究竟離垢之心하며 法身智身이 無斷無壞하야 一切魔業이 不能傾動하며 依善知識하야 堅固其心하야 同諸菩薩의 修行施度니라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爲諸衆生하야 求一切智하야 施手足時에 以諸善根으로 如是廻向하나니 所謂願一切衆生이 具神通力하야 皆得寶手하고 得寶手已하야는 各相尊敬하야 生福田想하야 以種種寶로 更相供養하며 又以衆寶로 供養諸佛호대 興妙寶雲하야 遍諸佛土하며 令諸衆生으로 互起慈心하야 不相惱害하며 遊諸佛刹에 安住無畏하야 自然具足究竟神通하며 又令皆得寶手와 華手와 香手와 衣手와 蓋手와 華鬘手와 末香手와 莊嚴具手와 無邊手와 無量手와 普手하고 得是手已에 以神通力으로 常勤往詣一切佛土하야 能以一手로 遍摩一切諸佛世界하며 以自在手로 持諸衆生하며 得妙相手하야 放無量光하며 能以一手로 普覆衆生하야 成於如來의 手指網縵과 赤銅爪相이니라 菩薩이 爾時에 以大願手로 普覆衆生하야 願一切衆生이 志常樂求無上菩提하야 出生一切功德大海하며 見來乞者하고 歡喜無厭하며 入佛法海하야 同佛善根이니 是爲菩薩摩訶薩의 施手足時에 善根廻向이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수족으로 여러 중생에게 보시하기를, 마치 상정진(常精進)보살이나 무우왕(無憂王)보살이나 다른 무량한 보살들과 같이 하여 여러 갈래에서 여러 가지로 태어나면서 수족을 보시하느니라.
믿음으로 손이 되어 이익을 주는 행을 일으키고 가거나 오거나 두루 돌아다님에 부지런히 바른 법을 닦느니라.
보배의 손을 얻어 손으로써 보시하고, 다니는 데마다 헛되지 아니하여 보살도를 갖추며, 항상 손을 펴서 은혜를 베풀려 하고, 편안히 걸어 다니면서 겁이 없이 용맹하며, 청정하게 믿는 힘으로 정진하는 행을 갖추고, 나쁜 갈래를 멸하고, 보리를 성취하느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보시할 적에 한량없고 그지없이 광대한 마음으로 청정한 법문을 열고, 모든 부처님 바다에 들어가서 보시하는 손을 성취하여 시방에 이바지 하느니라.
원력(願力)으로 일체 지혜의 도를 지니어 끝까지 때를 떠난 마음에 머물며 법의 몸과 지혜의 몸이 끊을 수도 없고 깨뜨릴 수도 없어 일체 마군의 업으로 흔들 수 없으며 선지식을 의지하여 마음이 견고하고 모든 보살들과 함께 보시바라밀다를 수행하느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중생들을 위하여 일체 지혜를 구하려고 수족을 보시할 적에 모든 선근으로 이와 같이 회향하느니라.
이른바‘원컨대 일체중생이 신통한 힘을 갖추어 보배손을 얻으며, 보배손을 얻고는 서로 존경하여 복전이란 생각을 내고 가지가지 보배로 서로서로 공양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또 여러 가지 보배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아름다운 보배구름을 일으켜 모든 부처님 세계를 덮으며,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서로서로 자비한 마음을 내어 서로 해롭게 하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의 세계에 다니되 편안하여 두렵지 않으며, 구경의 신통을 저절로 구족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또 모두 보배 손과 꽃 손과 향 손과 옷 손과 일산 손과 화만 손과 가루향 손과 장엄거리 손과 끝없는 손과 한량없는 손과 넓은 손을 얻게 하며, 이런 손을 얻고는 신통한 힘으로 모든 부처님 국토에 항상 부지런히 나아가 한 손으로 일체 모든 세계를 두루 만지게 하느니라.
자재한 손으로 중생들을 보호하며, 아름다운 모양의 손을 얻어 한량없는 광명을 놓으며, 한 손으로 중생들을 두루 덮으며, 여래의 손가락 사이의 그물무늬막과 구리빛 손톱을 성취케 하느니라.
보살이 그때에 큰 소원의 손으로 중생을 두루 덮으면서 원하기를, ‘일체중생이 위가 없는 보리를 항상 즐겨 구하며, 모든 공덕바다를 내게 하여지이다.’라고 하며, 구걸하는 이를 보면 기뻐하며 싫어하지 않고, 불법(佛法)의 바다에 들어가 부처님 선근과 같아지게 하느니라.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수족을 보시할 때에 선근으로 회향하는 것이니라.”
*
수족보시(手足布施) : 수족을 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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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이기수족(以其手足)으로: 그 손과 발로써
시제중생(施諸衆生)호대 : 모든 중생에게 보시하되
여상정진보살(如常精進菩薩)과: 상정진 보살과
무우왕보살(無憂王菩薩)과: 무우왕보살과
급여무량제보살등(及餘無量諸菩薩等)하야: 그리고 나머지 한량없는 모든 여러 보살들과 같이 해서. 여기는 거의 이렇게 나왔는데 상고할 바가 없는 보살들이다.
과거에 법을 위해서 수족을 보시한 사람들이 무수히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면 설사 자세한 사연을 모른다 하더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어제취중종종생처(於諸趣中種種生處)에: 우리가 사람으로만 태어난 것이 아니고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 아수라 등등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종류의 생을 받아가면서 태어난 곳에서
보시수족(布施手足)호대: 손과 발을 보시하게 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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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위수(以信爲手)하야: 믿음으로써 손을 삼는다. 좋은 말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능 가운데 손은 못하는 것이 없다. 물론 머리가 손을 시키기도 하지만 식사도 하고 물건도 만들고 컴퓨터도 만들고 비행기도 만들고 기차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드는 것은 전부 손으로써 하는 일이다. 믿음으로 그와 같은 능력을 가진 손을 삼아서
기요익행(起饒益行)하야: 요익행을 일으켜서, 많은 중생에게 이익을 베푸는 요익행을 일으켜서
왕반주선(往反周旋)에: 어디든지 필요하다면 갈 수 있고 돌아다닐 수 있는 곳에서
근수정법(勤修正法)하며: 부지런히 정법을 닦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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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득보수(願得寶手)하야: 보배 손을 얻기를 원해서
이수위시(以手爲施)에: 손으로써 보시를 삼는다. 보배 손이라는 것이 뭐겠는가.
여름에는 절에서 한참 풀이 많이 난다. 대중들이 나가서 마당의 풀뽑기를 하면, 풀을 뽑은 곳과 뽑지 않은 곳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럴 때 어른들이 하는 말이 ‘손이 보배다’라고 한다. 전부 손이 한 것이다. 풀 뽑은 자리와 풀 뽑지 않은 자리가 명확하게 차이가 나는 것도 손을 그렇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밭을 매도 마찬가지고 논을 매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보배 손이다.
손이 보배다. 무슨 보배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손을 그렇게 사용할 줄 아는 것이 보배 손을 얻는 것이다.
소행불공(所行不空)하야: 그 행하는 바가 헛되지 아니하다. 손보시라는 것은 손을 잘라서 보시하는 것도 생각할 수가 있겠지만 손을 사용해서 보시하는 일로 이해해야 한다.
손과 발로 보시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손과 발이 들지 않으면 보시할 수 없는 일이 대단히 많다. 그런 뜻으로도 이해를 해야 한다.
물론 손과 발을 주어서 보시할 수도 있겠지만 손과 발은 한 번 줘버리면 평생을 사용해서 보시하는 것과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렇게 본다면 손발을 써서 보시하는 것을 수족보시로 보는 것이 훨씬 좋다.
구보살도(具菩薩道)하며: 보살도를 갖추며, 소행이 불공해서 보살도를 갖추며
상서기수(常舒其手)하야 : 항상 그 손을 펼쳐서, 여기에도 그렇게 나온다.
의장광혜(擬將廣惠)하야 : 널리 혜택을 베풀려고 해서
안보유행(安步遊行)에: 편안한 걸음으로 이리저리 다님에
용맹무겁(勇猛無怯)하며: 용맹해서 겁이 없으며
이정신력(以淨信力)으로 :정신력으로써
구정진행(具精進行)하야: 청정한 믿음의 힘으로써 정진행을 갖추어서
제멸악도(除滅惡道)하고: 악도를 제멸한다. 청정한 믿음과 정진행은 악도를 제멸하는 원인이 된다. 그래서
성취보리(成就菩提)하나니: 보리를 성취하나니 깨달음을 성취한다. 살다보면 갑갑할 때가 많다. 불교에 들어와서 깨달음에 대한 것을 설명으로라도 이해하고 나면 ‘아 그거 한 번 시원하게 깨달았으면’ ‘꿈속에서 이렇게 헤맬 것이 아니라 시원하게 깨달아서 모든 것이 걸림이 없는 상황이 되었으면’ ‘어떤 것이든지 환하게 꿰뚫어 보는 상황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날 때가 많다. 그런 것이 보리다. 보리를 성취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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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여시시시(如是施時)에: 이와 같이 보시할 때에
이무량무변광대지심(以無量無邊廣大之心)으로: 한량없고 가이없는 광대한 마음으로
개정법문(開淨法門)하야: 청정한 법의 문을 열어서
입제불해(入諸佛海)하야 :모든 부처님의 바다에 들어가서
성취시수(成就施手)하야: 보시하는 손을 성취해서
주급시방(周給十方)하며: 시방에 다 나눠준다. 시수를 성취한다. 보시를 하는 것이다.
불교 수행을 딱 한가지만 꼽으라고 하면 보시다. 물론 육바라밀 십바라밀이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만 선택하라면 보시다. 그래서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라고 하는 사섭법(四攝法)에도 보시가 나온다. 육바라밀에도 보시가 처음에 나온다. 십바라밀에도 보시가 처음 나온다.
금강경에도 여러가지 수행법이 있는데 보시를 강조했다. 이 보시를 우리가 잘 연구해야 된다. 단순하게 어떤 책을 주거나 물건을 주거나 경제적인 혜택을 주고 돈을 주는 것이 다 좋은 보시이기는 하다. 그런데 나는 늘 보시 이야기를 할 때 ‘남을 배려하자’고 말한다.
모든 부분에 있어서 남을 배려하자. 책을 받는 것도 책을 나누게 된다면 옆에 사람 먼저 받게 배려하는 것이다. 조금만 참으면 자기에게도 돌아오는데 그걸 못 참고 먼저 추태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욕심에 기인해서 그런 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불교에서 모든 수행법 가운데서 보시를 최우선 하는데 그것은 남을 배려하는 것이다. 시수(施手) 보시하는 손을 성취해서 시방에 두루두루 나눠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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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력임지일체지도(願力任持一切智道)하야 : 원력으로 일체 지혜의 도를 임지(任持) 가져서
주어구경이구지심(住於究竟離垢之心)하며: 철저히 때를 떠난, 번뇌를 떠난 마음에 머물며, 구경은 ‘철저히’라는 의미가 있다.
법신지신(法身智身)이: 법의 몸과 지혜의 몸이
무단무괴(無斷無壞)하야: 끊어짐도 없고 무너짐도 없어서
일체마업(一切魔業)이: 일체 마군의 업이
불능경동(不能傾動)하며: 능히 법신과 지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그것을 어떻게 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에게는 법신도 있고 지신도 있고 또 마업도 있다. 특히 보통 사람에게는 오온(五蘊)이라고 하는 자기를 생각하는 관념들이 너무 강하다. 그것도 어찌보면 마업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 것을 이겨내는 것은 법의 몸과 지혜의 몸이다. 진리에 대한 이해, 그것을 통한 지혜 같은 것들이 나를 붙들어 주는 것이다. 마업이 동하려고 하지만 그래도 좀 배운 것이 있어서 나의 속에서 일어나는 마업을 붙들어 준다. 그렇게 붙들어 주지 아니하고 내버려 두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별별 일이 다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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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선지식(依善知識)하야: 선지식을 의지해서
견고기심(堅固其心)하야: 그 마음을 견고히 한다. 선지식을 의지한다.
나는 선지식 하면 항상 이 시대에 선지식을 달리 찾지 말라고 한다. ‘화엄경이 선지식이다. 화엄경보다 더 좋은 선지식은 없다’라고 주장한다. 절대 사람을 선지식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런 시대는 아니라는 것이다. 화엄경의 가르침을 의지해서 그 마음을 견고히 해서
동제보살(同諸菩薩)의: 모든 보살들의
수행시도(修行施度)니라 :보시바라밀 수행하는 것과 같이 할지니라. 시도는 보시바라밀이다. 모든 보살들은 전부 육바라밀 십바라밀이 있고 사섭법 사무량심이 있지만 한마디로 표현하면 보시다. 여기도 보면 분위기가 완전히 그런 이야기다. 수행시도라고 했잖은가. 모든 보살들이 보시 바라밀을 수행하는 것과 같이 하느니라.
그러니까 보시 이것만 우리가 몸에 익히고 마음에 늘 무장이 되어 있으면 다른 수행은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다른 것을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
보시 바라밀은 치우쳐도 좋지만 선정 바라밀에 치우치는 것은 병이 된다. 문제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 제대로 보시 바라밀만 실천하는 사람은 그런 문제가 없다. 이런 말속에는 아주 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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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위제중생(爲諸衆生)하야: 모든 중생을 위해서
구일체지(求一切智)하야: 일체지를 구해서
시수족시(施手足時)에: 수족을 보시할 때에. ‘노는 입에 염불한다’고 조금만 손을 움직여 주면 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수족을 보시할 때에 모든 선근으로써 이와 같이 회향하나니 이것은 보살의 기본이다. 그 기본을 수행하면서 그 다음에 뒤따르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 회향이다. 십회향품은 항상 그런 식으로 되어 있다.
일찍이 정행품에서도 읽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걸음을 한 걸음 뗄 때, 손을 한 번 들 때, 식사를 할 때, 옷을 입을 때, 양치질을 할 때, 세수를 할 때, 심지어 화장실에 갈 때 까지도 항상 ‘중생들이 이렇게 되기를 원하여지이다’라고 연관을 시켜서 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도 늘 같은 형식이다. 불보살의 화두는 중생이기 때문이다. 아니 불교의 화두는 중생이다. 고통받는 중생이다.
누가 화두를 묻거든 ‘중생이 화두다’ 이렇게 대답해야지 ‘간시궐(乾屎厥)이 화두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이 화두다, 무(無)자가 화두다, 이뭣고가 화두다’ 그렇게 하는 것은 벌써 폐기된 화두를 쓰레기통에서 주워서 소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중생이 화두다.
화엄경을 보라. 이것은 아주 오래된 고전이면서 가장 이 시대에 필요한 화두다.
스님들은 이런 말을 섣불리 듣지 마시고 여기서 따로 이야기 할 건 아니로되 도반들끼리 이런 문제에 대해서 토론도 하고 논강도 하고 비판도 하면서 ‘아 그 스님 이상한 소리 하더라. 우리는 화두가 무(無)자나 간시궐이나 시삼마(是甚麽)나 판치생모(板齒生毛)나 이런 걸로 알고 있었는데 무슨 중생이 화두라고 하니 우리가 한 번 적나라하게 신랄하게 비판도 하고 따져도 보자’ 하는 기회를 좀 가져야 된다. 중생을 위해서 일체지를 구해서 수족을 보시할 때에
이제선근(以諸善根)으로 : 모든 선근으로써
여시회향(如是廻向)하나니: 이와 같이 회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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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원일체중생(所謂願一切衆生)이 : 이른 바 일체 중생이
구신통력(具神通力)하야: 신통력을 갖추어서
개득보수(皆得寶手)하고: 다 보배손을 얻으며, 손이 착 움직이면 그대로 보배손이 된다.
풀을 맨 쪽과 매지 않은 쪽은 천지 차이다. 풀을 매면 그 순간 바로 그 풀맨 손이 보배손이다. 또 집안이 사정없이 어지러워져 있는데 약간 귀찮더라도 손을 좀 들어서 낱낱이 정리하고 청소를 깨끗하게 해놓고 한 번 뒤돌아 보면 그야말로 손이 보배다. 그것이 바로 신통력이다.
득보수이(得寶手已)하야는: 보배 손을 얻고 나서는
각상존경(各相尊敬)하야: 각각 서로 존경해서
생복전상(生福田想)하야: 복전상을 내어서 남을 도와주면 그것이 바로 복전이다. 모두가 서로서로 복전이 되는 것이다. 불전함만 복전함이 아니고 사람이 복전이다. ‘인시복전(人是福田)’내가 잘 쓰는 소리다.
사람이 복전이다. 어디에 복을 짓겠는가? 사람에게 복짓는 것이다.
이런 명확한 이치를 이제는 확연히 드러내서 우리가 서로 의논할 줄 알아야 된다.
복전이라는 생각을 내어서
이종종보(以種種寶)로 : 가지가지 보배로써
갱상공양(更相供養)하며 : 서로 서로 공양하기를 원한다. 공양하니까 먹을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이바지 한다. 받든다는 뜻이다. 뭐든지 또 어떤 것이든지 이바지하고 받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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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중보(又以衆寶)로 : 또 여러가지 보배로써
공양제불(供養諸佛)호대: 제불에게 공양하되
흥묘보운(興妙寶雲)하야 : 묘보운을 일으켜서
변제불토(遍諸佛土)하며 : 모든 불토 온 국토에 두루하기를 원하며, 여기는 형식은 같은데 원(願)자를 생략했다.
요즘 우리나라 뿐만 아니고 아프리카나 동남아나 조금 못 사는 나라를 많이 도와주고 있다.
영제중생(令諸衆生)으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호기자심(互起慈心)하야: 서로서로 자비한 마음을 일으켜서
불상뇌해(不相惱害)하며: 서로 침노하거나 해롭히거나 또 고통스럽게 하거나 마음 상하게 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제불찰(遊諸佛刹)에: 모든 불찰에 노닐며
안주무외(安住無畏)하야 : 편안히 머물러서 두려움이 없어서
자연구족구경신통(自然具足究竟神通)하며: 자연히 완전한 신통을 구족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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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령개득보수(又令皆得寶手)와: 또 하여금 다 보배손
화수(華手)와: 꽃손
향수(香手)와 : 향수 무엇이 화수이고 무엇이 향수이고
의수(衣手)와: 무엇이 의수인지는 여러 스님들이 한 번 잘 해석해 보기 바란다.
개수(蓋手)와 : 일산 수
화만수(華鬘手)와 :화만수
말향수(末香手)와: 말향수
장엄구수(莊嚴具手)와: 장엄구수와 그리고
무변수(無邊手)와: 무변수와
무량수(無量手)와: 무량수와
보수(普手)하고: 넓을 보자다. 그런 손을 얻고
득시수이(得是手已)에: 이러한 손을 얻고 남에
이신통력(以神通力)으로 : 신통력으로써
상근왕예일불토(常勤往詣一切佛土)하야 : 항상 부지런히 일체 국토에 나아가서
능이일수(能以一手)로: 능히 한 손으로써
변마일체제불세계(遍摩一切諸佛世界)하며 :일체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두루두루 한손으로 다 만지며, 한손으로 다 만지는 소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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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재수(以自在手)로: 자재한 손으로써
지제중생(持諸衆生)하며 : 여러 중생들을 가지며
득묘상수(得妙相手)하야 : 묘상수를 얻어서
방무량광(放無量光)하며: 한량없는 광명놓기를 원하며
능이일수(能以一手)로 : 능히 한 손으로써
보부중생(普覆衆生)하야: 널리 중생을 덮어서
성어여래(成於如來)의 : 여래의
수지망만(手指網縵)과: 수지망만과, 여래의 손과 발에는 망만이 있다고 한다. 오리발에 있는 물갈퀴 같은 것이 망만이다. 그것이 좋은 건지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부처님의 손발에는 망만이 있다. 여래수지 망만과
적동조상(赤銅爪相)이니라 :손톱 발톱이 말하자면 붉은 동색을 지니는 것을 원할지니라. 적동조상이란 건강한 손을 의미한다. 손톱이 하얗게 되면 뭔가 문제가 있다. 희면서 붉은 색을 가져야 된다. 그것이 적동조상인데 그런 것을 원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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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이 : 보살이
이시(爾時)에 : 이러한 때에
이대원수(以大願手)로: 큰 원력의 손으로써
보부중생(普覆衆生)하야: 널리 중생을 뒤덮어서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지상락구무상보리(志常樂求無上菩提)하야 :가장 높고 높은 보리의 뜻에 항상 구하기를 구해서
출생일체공덕대해(出生一切功德大海)하며: 일체 공덕대해를 출생하기를 원하며, 일체 공덕 대해다. 무상보리를 구해야 인생에 대해 확연히 눈을 떴을 때 ‘자기의 오온만 나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말 마음이 열려서 일체 공덕 대해를 짓게 된다. 공덕을 안지을래야 안지을 수가 없다.
‘자기 오온만이 나다’라고 하는 데서 이미 벗어났으면 그저 보이는 것이 중생이다.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중생이 화두가 되고 중생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능력이 있는 대로, 또 자기 능력을 극대화 하면서 공덕 대해를 출생하게 되는 것이다.
견래걸자(見來乞者)하고: 와서 구걸하는 사람을 보고
환희무염(歡喜無厭)하며: 환희해서 싫음이 없으며, 이거 참 어려운 일이다. 내가 지난번에 여러 번 말씀을 드렸는데 빈말이라도 ‘내가 가서 드려야 되는데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하다’고 하면 다같이 한바탕 웃기라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다. 제대로 보살심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말로만 배웠지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겨 있지는 못하니까 어렵다. 그래도 책에 있는 말을 흉내라도 내는 것이다.
여기도 보면 구걸하는 사람이 올 때 환희무염이다. 구걸하러 온 사람을 싫어하지 않고 아주 친한 도반을 오랜만에 만날 때처럼 그야말로 버선발로 뛰어나가서 부등켜 안을 정도의 기쁨으로 맞이한다. 우리가 이런 것을 말로 상상이라도 하고 ‘내 마음이 이럴 수만 있으면’‘마음이 그렇게 옹졸하지 않고 내 생각만 하고 우리절 생각만 하고 그렇게 쪼잔하게 살았는데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이럴 수만 있으면 얼마나 툭 터질까’하고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얼마나 근사한가. 툭 터지게 시원하다.
입불법해(入佛法海)하야: 부처님의 법의 바다에 들어가서
동불선근(同佛善根)이니: 부처님의 선근과 같이 함이니
시위보살마하살(是爲菩薩摩訶薩)의: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시수족시(施手足時)에: 수족을 보시할 때의
선근회향(善根廻向)이니라: 선근회향이니라.
우리가 견성 견성 견성성불을 지상최고의 과제로 삼는 경향이 있는데 내가 가끔 말씀드린다.
우리가 말 한마디 할 때 그 견성, 성품, 진여자성, 진여불성이라고 하는 것이 끼어들지 않고 말할 수 있을까?
간단히 이렇게 부채질 하는 동작도 진여불성이 동원되지 않고 할 수가 있을까?
말 한마디 안놓치고 듣는 것 진여불성이 들지 않고 과연 가능할까?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미 우리는 진여불성을 너무 잘 쓰고 있다.
잘 쓰고 있는 진여자성을 더 이상 보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다.
‘도불가수유리(道不可須臾離)요 가리(可離)면 비도(非道)라’ 진여불성은 한 순간도 떠나있지 않고 나하고 함께 있다. 나하고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게 나다. 가리면 비도라. 가히 떠나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진여불성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때는 이야기도 없다. 그런 것이 우리 진여자성이다.
그렇게 알지 못하니까 그걸 찾으려고 하고, 봐야된다고 견성, 견성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견성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진여자성이다.
찾으려고 하던 그것을 가지고 그렇게 노래하고 있는 것이고 그걸 가지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생각해 보면 너무 어이없는 일이다.
성품을 쓰고 있으면서 그것을 다시 돌리려고 찾으려고 하는 그 일이 너무나도 가소롭다.
‘기우갱멱우(騎牛更覓牛), 소를 타고 소를 찾는구나 참 가소롭다’ 라고 조사스님들이 그런 말을 무수히 많이 했다. 소를 타고 소를 찾는구나
‘장두멱두(將頭覓頭)라. 머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머리를 또 다시 찾는구나’ 능엄경에서도 우리가 일찍이 배웠다. 만약에 머리가 있는데 머리를 어디서 하나 찾았다손 치자. 그래서 머리 위에 머리를 올리면 뭐가 되겠는가? 그건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다. 찾을 수도 없을 뿐더러 만약에 찾아서 머리위에 머리를 하나 얹어놓으면 그 모습은 괴물이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이치다. 이미 능엄경에서 다 이야기 해버렸다. 그 이야기를 할 때는 어디 가버리고 이제사 다시 또 그걸 찾아야 한다고, 봐야된다고 하고 있는데 사실 너무 딱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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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_()()()_
꽃물님 수고 많으셨습니다._([()()_
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 모처럼 햇살이 비칩니다. 세차게 내리던 빗줄기도 오늘은 잠시 멈춰서서 공항가는 길이 좋아보입니다.
고맙습니다..._()()()_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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