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3: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 이는 연속적으로 기록된 다섯 번의 충돌 기사 중 마지막 사건에 해당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마가는 시기나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는 단순히 안식일에 대한 예수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서 사용된 또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시'란 직접적인 반복을 일컫지 않는다. 다만 내용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마가가 의도적으로 붙인 연결구라 할 수 있다.
예수가 회당에 들어가셨음을 평범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 같은 묘사를 통해 본구절은 예수가 자주 안식일에 회당에 가시는 분이심을 은연중에 시사하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본문은 어떤 안식일에 만난 특별한 사건이 이야기되고 있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 보아야 옳을 것이다. 한 편 손 마른 사람이 - 여기서 손 마른 상태를 묘사한 헬라어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서 이는 그의 신체 장애가 선천적인 것이기보다 후천적인 것으로,
어떤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근육이 마비되고 손이 말라 버려 활동력이 완전히 상실된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한편 누가는 힘의 상징인 그의 오른 손이 마른 것이라 표현함으로써 그 처지가 절박했던 사실을 더욱 세밀히 묘사해 주고 있다. 혹자는 이것을 중풍병이라 보기도 한다. 말라 비틀어진 이 손은 결국 그의 삶의 위축과 장애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이 병자가 미장이로서 손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사람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자 자신이 수치스럽게 구걸하지 않도록 자신의 병을 치료해 줄 것을 호소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병자의 처지가 그렇게 다급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다. 단지 마가는 본문을 통해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안식일 개념이 과연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 더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막 3:2]"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 마가는 여기에 등장하는 반대편 사람들의 신분을 자세히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마가가 막연하게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그들의 정체는 분명하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예수께서는 이미 율법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비정통적인 언행을 일삼고 있었고, 특히 안식일 규정에 대한 매우 위험한 교훈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번 안식일 논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예수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에게 있었으므로 큰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예수가 안식일 규정을 직접 파기하기 직전 상황에 있었으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예수의 행동 거지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마가는 예수의 허물을 찾으려고 눈에 빛을 내고 있던 그들의 목적 의식에 대해 '송사하려 하여'라는 말로 묘사하고 있다는 결국 그 적대자들이 예수를 고발하기로 이미 작정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사실 그 당시 회당은 지방 법정 역할까지도 수행하던 곳이었다는 예수의 회당 안 치유 사역은 어쩌면 상당히 불리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안식일에...고치시는가 엿보거늘 - '엿보거늘'은 '지켜보다', '주시하다'는 뜻인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고소거리를 찾기 위해 계속적으로 예수 주변에 머물면서 적의에 찬 눈으로 면밀히 바라보고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사실당시 안식일 규정에는 매우 세밀한 조항까지 만들어 가며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고 있던 터였다. 한 가지 실례로써 어떤 사람 위에 집이 무너질 경우 생명이 위협을 받으므로 구조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 밑에 깔린 자가 이미 죽은 것이 판명되면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그 구조 작업이 연기되어야만 했을 정도이다. 그런 점에서 그 '손 마른 자'는 긴급한 생명 구조가 필요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의 치유사역은 부당한 것으로 정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이란 말씀으로 보아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실 능력을 가지셨음을 깨닫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관심은 '할 수 있는가'에 있지 않고 '할 것인가'에 있었다..[막 3: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예수께서...일어서라 하시고 - 예수께서는 마치 적대자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병자에게 '한가운데 일어서라'고 요구하신다.
그러나 이 요구는 안식일의 참의미를 주위에 앉은 모든 사람들에게 깨우치기 위한 것이었다. 실로 안식일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에 찬 창조 사역을 기리고 또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거룩한 날이다. 바로 이날에 지금껏 하나님의 창조 원형에서 어그러진 불구의 몸으로 고생하며 참평안을 몰랐던 손 마른 사람에게 온전한 몸으로 되돌려주는 것처럼 안식일을 참되게 보내는 것은 없을 것이다.
기적의 시위적인 성격은 중풍병자 치유 사역을 연상시켜 주며, 동시에 은연중에 예수의 안식을 규정 파기를 기대하며 촉각을 곤두세웠던 적대자들의 악의에 찬 행동에 크나큰 충격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정 예수는 당신의 적대자들이 가만히 엿보던 비겁함과는 대조적으로 그 손 마른 자를 일으켜서 한 가운데 나가게 하셨다. 그리하여 당신의 초월적인 권능을 공개적으로 제시하심으로써 당신이야말로 참된 의원이요 오실 메시야이심을 강력히 내비치셨다.
[막 3:4]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안식일에...어느 것이 옳으냐 - 당신의 고소를 전제한 적대자들의 예민한 촉각을 향해 예수께서는 병행 구조로 된 이중적인 질문으로 그들의 불타오르는 적개심에 오히려 도전하셨다. 한편 이 같은 예수의 질문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무엇이 요청되는가에 대한 필요성의 원칙에 입각한 것이다.
실로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유익을 제공하고 생명을 보존하게 하는 일은 그것이 곧 최상의 선이요, 타인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더 나아가 법조문에 얽매여 자신의 무관심을 합리화하는 것은 그것이 곧 악인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을 돕는 선한 행위를 생명을 구하는 것과 동일하게 여기심으로써 안식일에 그러한 일들이 허락될 수 있다고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하다고 간주하심으로써 적대자들의 견해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이렇게 인간을 위해 정열적으로 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지한 노력을 단순히 도덕적인 선행으로 평가 절하서는 안 된다. 진정 예수의 이 같은 노력은 왜곡된 진리를 바로잡고 인생들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허락하시기 위한 신적인 사랑의 행위인 것이다. 한편 본문에 제시된 반립명제를 요약하면 (1) 살인 행위와 곤궁에 빠진 자를 구하려 하지 않는 행위는 별 차이가 없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실로 선행을 거부하는 것은 곧 살인과 같은 악행을 간접 조장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구하는 것, 즉 건강을 회복시키는 것이지 바리새인들과 같이 살인 음모를 꾸미려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사악한 마음을 간파하시고 본문의 말씀을 하셨을 수도 있다. (3) 여기에는 사단의 음모를 멸하시는 예수의 사명이 암시되어 있는 것 같다. 병과 상처는 궁극적으로 사단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를 멸하러 오셨다. 한편 사단은 1주일 내내 악을 행하기 때문에 다른 엿새와 마찬가지로 안식일에도 사단과의 싸움은 계속되어야 한다.
저희가 잠잠하거늘- 이는 3인칭 미완료 시상으로 예수의 적대자들이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한 채 계속 머뭇거리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실로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형식주의적 율법관에도 자신이 없었을 뿐 아니라 참 진리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는 무기력한 종교인들이었던 것이다....[막 3:5]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 '완악함'이란 마치 대리석처럼 단단히 굳어버린 완고한 마음 상태를 일컫는다. 진정 유대인의 개념으로 볼 때 '마음'은 인간의 지.정.의를 모두 포함하는 전인격의 좌소로서 마음이 굳어버리면 예수가 전하고 보여 주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올바른 행동을 할 수도 없게 된다. 예수께서는 이 완고함을 목도하시고 '근심하셨다'. 여기 '근심하사' '함께'란 뜻의 '쉰'과 '걱정하다'는 뜻의 '뤼페오'의 합성어로서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함께 염려하는 측은지심을 의미한다.
예수의 근심하시는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완악함으로 인한 무지를 애끓는 심령으로 바라보시는 예수의 이 같은 모습은 바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의 한계와 아픔에 함께 동참하시기를 원하시는 예수의 뜨거운 인간애를 보여 준다. 노하심으로...둘러보시고 - 여기 '노하심으로'란 마치 이글거리는 눈으로 보듯이 매우 분노하신 상태를 암시한다. 이것이 바로 마가의 복음서가 지닌 특징이다.
마가는 전혀 숨김 없이 예수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노하셨다는 표현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1:41). 그런데 그가 노하신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의 감정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표현된 적은 결코 없다. 이 '분노'는 곧 부정과 부패에 대한 정의의 분노 곧 의분으로서 이것은 인간의 도덕적 기본 덕목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조화를 이룬다. 실로 예수는 당신의 적대자들이 지닌 그릇된 마음, 죄악에 가득찬 눈길에 분노를 터뜨리셨지만그 영혼에 대해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근심해 주셨던 것이다.
한편 '둘러 보시고' 많은 목격자들이 있음을 보여 줄 때 사용된 용어로 순간적으로 쭉 한번 둘러보셨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는 곧 예수의 분노의 대상이 주위 많은 사람들이었음을 간접 시사해 주고 있다. 네 손을 내밀라...회복되었더라 - 예수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시고자 하셨다(4절). 그리하여 병자에게 명령하셨고 그 병자는 즉시 순종함으로써 완전한 회복을 체험할 수있었다. 이때 예수는 오직 '말씀'으로 그 능력을 행사하셨다.
이 '말씀'은 곧 당신께서 친히 태초에 온 우주를 창조하실 때의 그 능력과 동일한 능력을 지닌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그 말씀 한마디는 그 어떤 비뚤어지고 파괴된 것이라 할지라도 능히 원래의 모습으로 온전케 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능력은 예수의 명령에 오직 순종으로, 오직 신앙으로 대답하는 자에게만 창조 원형으로의 완전함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