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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는 어떤 성서인가요?
욥기는 구약성서의 세 번째 부분인 성문서에 속하는 지혜문학의 하나입니다. 욥기라는 성서 이름은 이 책의 주인공인 ‘욥’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구요. 그 이름의 뜻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기원전 2000년대 서부 셈족 사이에 흔한 이름이었다고 해요. 욥의 고향으로 나오는 “우스”가 어디인지도 확실치 않아요. 아람 쪽이라고도 하고 에돔 지역이라고도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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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쓰여졌나요?
욥기는 여러 면에서 아주 해석하기 어려운 책으로 꼽혀요.
욥기의 저술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욥기 안에는 거의 없거든요.
게다가 언어들도 다른 성서에 잘 나오지 않는 단어들이 많구요.
학자들의 견해도 중구난방으로, 멀리 기원전 13세기의 모세 시대부터
가까이는 기원전 2세기의 마카베오시대까지 들고 있어요.
그래도 조금 의견이 모아지는 쪽은 바빌론 포로기의 전·후라는 쪽이에요.
헷갈리시죠?
아마도 욥기는 족장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데서 드러나듯이,
상당히 고대에서부터 내려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오랜 기간의 복잡한 형성과정을 거쳐 후대에
오늘과 같은 꼴로 굳어졌을 거예요.
누가 썼나요?
이젠 독자 여러분도 어느 한 사람을 구약성서의 저 자로 못박는다는 게
상당히 곤란하다는 걸 알고 계실 거예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욥기는 여타 성서와 다른 특성을 여러모로 지녀
욥기의 뼈대를 잡은 저자를 추정하기가 참 곤란해요.
아마 욥기라는 독창적인 견해를 남긴 저자는
의인들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 전통적인 해결책이 아닌
새로운 견해를 집요하게 추구했던,
유난히 고통과 하느님의 정의에 민감했던 사람으로 여겨져요.
왜 썼나요?
욥기는 고통에 관해 묻고 도전하고 항의하는 책입니다.
전통적으로 고통은 상선벌악 개념에 따라 이해되었습니다.
악한 자가 받는 벌이 곧 고통이라는 것이죠.
하느님의 보상적 정의를 가리키는 이 말이 전적으로 틀리지는 않지만,
고통의 모든 문제를 해명해 주지도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선한 의인들이 당하는 고통은 적잖았으니까요.
욥기는 하느님의 정의와 함께 인간의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입니다.
욥기의 끝에 가서도 욥이 제기한 물음,
곧 고통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습니다.
의인이 당하는 고통은 인간 삶과 연관된 하나의 신비입니다.
문제는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입니다.
고통을 비롯한 모든 것이 시간 안에서 사라져 갑니다.
궁극적으로 그 문제의 답을 얻을 곳은
영원하신 하느님, 창조주 그분 안에서 입니다.
결국 남은 답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뿐입니다.
욥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현존을 체험하고 그분께 승복합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바로 그에 대한 결정적인 증언입니다.
<새김과 나눔>
욥기에 관해 자신이 들었거나 예전에 가졌던 느낌과,
이 번에 새로 읽고서 느낀 점을 비교하여 나눠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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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서를 읽어 가다가 욥기를 대하면, 다른 예언자들의 작품들을 대할 때보다 더 자극을 받게 된다. 본서(本書)는 상상적인 작품인데, 민속 등에서 그 자료를 빼내어 엮은 것이다. 욥은 이스라엘에 널리 알려진 인물로서, 여러가지 시련을 견디어낸 사람 으로 유명하다. 그는 마침내 행운을 되찾았다. 욥기와 같은 그러한 내용은 어떠한 종교 에서도 취급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성서에서도 결코 색다르게 취급된 것은 아니다. 욥기는 무명작가에 의해서 드라마 형식으로 쓰여진 것이다. 욥기는 체계적이며 신중히 엮어졌다. 이 책은 서문으로 시작해서 발문(跋文)으로 끝을 맺는데, 이 둘은 산문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시적(詩的) 대화의 세 장면 으로 되어 있다.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는 삽입문이 나중에 가서 한두 군데 나온다. 우리는 이것들을 별도로 읽어야 한다. 지혜의 시(28장). 엘리후의 충고(32장-37장). 거대한 짐승에 대한 시(40, 15-41,34) 등이 그것이다. 27장(章)은 6절까지가 욥의 말이고 7절부터는 나아마 사람 소바르의 말이다. 욥기가 쓰여진 때는 대(大) 예언자들의 시대 이후이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이 의롭고 자비하시다는 것, 하느님께 순종하면 상을 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지시켜 왔다. 그런데 유다 인들은 사후의 생을 쇄올(Sheol)의 생밖에 믿지 않았으므로 상벌은 이 세상에 한한 것이었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사후 문제를 달리 생각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들이 국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었는가를 한번 알아본다. 이스라엘은 한 국가였다. 국가의 존망은 국민 대다수의 선행 아니면 악행에 기인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유배 이후의 이스라엘은 사제들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모세 율법의 규정을 따르는 조그마한 국가 공동체로 되었다. 이 국가공동체의 존망은 각 개인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와 에제키엘은 개인생활의 책임을 강조하였다. 에제키엘은 특히 각 개인은 행실여하에 따르는 보수를 받는다고 역설하였다. 「죽을 사람은 죄를 지은 장본인이다. 아들이 아비의 죄를 받거나 아비가 아들의 죄를 받거나 하지는 않는다. 바로 살면 바로 산 보수를 받고, 못된행실을 하면 못된 행실의 보수를 받는다 」(에제18,20) 욥기가 기록된 당시의 정통(正統)적인 견해는 이러하였다. 즉 인간이 불행을 당하거나 재앙을 받으면, 그것은 알게 모르게 지은 그자의 죄 탓이라는 것이다. 물질적인 번영은 착한 생활의 보수였다. 신체적인 부상과 재산 피해를 당한 사람 들에 대한 구제책은 죄의 고백, 비행의 참회,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데 있었다. 이것은 욥기의 저자가 받아들이지 않았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 실마리를 던져준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이웃 사람보다 더 좋지 않거나 아니면 더 나빠서 무서운 재앙의 희생자가 되었다면, 이일이 왜 일어나야만 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쉽게 답 할 수가 없었다. 욥기의 저자는 욥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당시 이런 문제를 놓고, 피상적으로만 해명해 왔던 것을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서 론이제 우리는 욥에 대한 이야기에 접하게 되는데, 그는 우스 출신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유다인이 아니었다. 그는 착한 사람으로 남의 귀감이 되었다.「노아나 다넬이나 욥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세 사람도 옳게 산 덕분에 자기들의 목숨이나 겨우 건질 수 있으리라」(에제14,14. 20.) 그는 또 사람들의 신임을 받고 살았으며, 세상의 물질적인 축복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착하게 살았는데도 불행에 직면하게 되고 고통을 당한다면, 이것은「선행을하면 번영을 누리고, 악행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정통(正統) 적인 교의(敎義)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고담(古談)에 따르면 욥에게 재앙이 내려졌다. 결국 욥은 많은 재산을 다시 갖게 되었고, 전보다 더 번영을 누리게 되었는데, 그 해명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야기를 수정하면서, 욥이 불행에 직면했던 이유가 밝혀질 하늘의 뜻의 신비에 우리로 하여금 접하게 한다. 천상의 신비를 관장하시는 YHWH는 사탄 즉 반대자 앞에 군림하신다. 사탄은 이 단계에서, 훌륭하고 신심이 깊은 야훼의 종, 욥을 괴롭히는 악의에 찬 분란자로나타난다. 사탄은 욥의 신심이 그럴만한 이유가 없으면 없어 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느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당신께서 친히 그와 그의 집과 그의 소유를 울타리로 감싸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을 축복해 주셨고 그의 가축을 땅 위에 번성하게 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손을 들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 보십시오.그는 반드시 당신께 면전에서 욕을 할 것입니다」(1,10-12) 욥은 착하게 살면 번영을 누린다는 교의가 몸에 배어 있는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이제 YHWH는 욥을 시험하신다. YHWH는 욥의 신심이 어떤지 사탄을 시켜 알아 보도록 하셨다.「좋다! 이제 내가 그의 소유를 모두 네 손에 붙인다. 그러나 그의 몸에만은 손을 대지 말아라」(1,12) 이렇게 해서 욥의 재산, 가재들, 아들들과 딸들, 욥의 생명 이외의 모든 것이 시험의 대상이 된다. 연극은 이제 시작된다. 사탄의 선동으로 재앙이 차례차례로 욥에게 닥친다. 소, 나귀, 양떼, 낙타떼, 일꾼 들, 마지막으로 아들들, 딸들이 모조리 약탈당하고, 사고로 죽게 되었다. 이러한 재앙에도 불구하고 욥은 자기의 신심을 드러낸다.「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 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1,21) 사탄은 아직 만족하지 않았다. 사람이 온전한 살갗을 가지면, 모든 것을 참는 법이 라고 하면서, 사탄은 다시 욥을 시험할 것을 허락받는다.「가죽으로 가죽을 바꿉 니다.사람이란 제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내놓지 못할 것이 없는 법입니다」(2,4) 다시 천상의 회의가 열렸는데, 반대자의 제안이 허락되었다. 욥이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괴롭힘을 당하도록 허락되었다. 그래서 욥은 발바닥에서 정수리 까지 심한 부스럼이 나서 괴로움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그가 고생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는 위로의 말 한 마디 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죽으라는 것이었다.「당신 은 아직도 요지부동이군요? 하느님을 욕하고 죽으시오」(2,9) 욥은 아내의 말을 놓고 악마의 짓이라고 일축해 버리고, YHWH를 향해 거역하는 말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당신조차 미련한 여인처럼 말하다니! 우리가 하느님 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2,10) 욥의 세 친구인 엘리바즈, 빌닷, 소바르 등이 이 소식을 듣고 욥을 위로하러 급히 찾아 온다. 이들은 욥의 몰골을 보고 너무도 기가 막혀 어떻게 입을 열 수조차 없 었다. 이들은 일주일 동안 주야로 땅에 앉아 욥을 바라다 볼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서론이 끝난다. 이제 우리는 이 책의 골자인 대화의 세 장면을 대하게 된다. YHWH와 반대자 사이에 이뤄진, 상상적인 대담의 내용은 앞으로 전개 되는 시적(詩的) 표현이 이 책의 종교적인 가치를 요약한 것이라는 사실을 흐려놓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는 착한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의 한 가지 이유가 자기들의 선(善)함을 시험받기 위해서라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믿게코자 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신심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아 내는 하느님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만사가 형통할 때는 신앙도 있어 보이고 열심도 내는 법이다. 그러나 인간의 신앙은 역경에 처하게 될 때 어찌 되는가? 욥기의 저자는 시험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버티어 나가고, 온전성과 선함을 드러내는 한 사람의 예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대담(對談)의 세 장면은 각각 여섯 대담으로 되어 있다. 욥의 친구들은 돌아 가면서 충고를 하고, 욥은 그에 대한 답변을 한다. 서론과 대화의 첫 장면 사이에 욥의 감정폭발이 나오며, 그것은 행동으로 극화(劇化)된다. 욥의 친구들이 욥의 곁에 조용히 앉아 그의 몰골을 지켜 보고 있었는데, 친구들 의 태도 여하에 따라 욥이 달라지는 모습과 침착성을 잃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고 깊은 동정심에 빠진다. 욥은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죽음으로써 고통을 끝내기를 바란다.(3,1-26)사탄의 고발 1, 1 - 12욥은 큰 부자이고,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하느님 앞에 완전하고 진실된 사람이었다. 욥은 또 아들들이 속으로 죄를 짓고 하느님께 욕을 돌릴까봐 아들들에 대한 걱정을 언제나 하고 있었다. 욥은 부모로서 귀감이 되었다. 우리도 욥처럼 자녀들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을 갖고 배려를 해 주어야 한다. 사탄은 반대자라고도 하는데, 그는 하느님과 선(善)을 반대한다.「 사탄이 그 오른편에 서서 그를 고발하는 것을 나에게 보여 주셨다」(즈가3,1) 「우리 형제들을 무고하던 자들이 쫓겨났다」(묵시12,10) 사탄은 욥의 선함을 인정하였으나 그 동기를 의심하였다. 욥의 마음 속에는 사욕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사탄은 생각하였다. 사탄은 성자(聖者)들을 존중하나, 그들의 약점, 죄를 찾아 낸다. 그러나 사탄은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유혹을 받는닫면, 은총을 받을 순간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고후12,9)재산이 없어지다 1, 13 - 22욥은 이제 알거지가 되는데, 심부름꾼이 욥에게 고할 때마다 재산은 없어졌다. 심부름꾼이 고할 때마다 우리도 생활에 있어서「암흑」이 오는지도 모른다. 행복의 시절은 이제 간데 없고「고뇌」의 시기가 닥치고 있다. 영혼은 신음하고 심신은 지쳐있다. 친구들이 와서 스바 사람들(1,15), 벼락(1,16), 갈대아 사람(1,17), 모진바람(1,19) 을 탓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우리의 불쌍한 처지를 동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모든 것을 초월해 계시는 하느님을 바라 보면서「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 가신다」(1,21)고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더욱더 한 걸음 나아가서 우리가「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1,21)고 까지 말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이다. 진실한 영혼은 야훼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고, 현양되는 것만 바랄 뿐, 자기에게 어떠한 일이 닥친다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그 분의 뜻을 원망함으로써 하느님을 욕되게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잿더미에 앉아서 」 2, 1 - 13하느님은 인내와 신앙으로 엄한 시련을 이겨 내는 당신 종들을 보시고 기뻐하신다. 악마는 쉴 새 없이 우리를 찾아 돌아 다닌다.「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 다닙니다」(베전5,8) 그러나 여기에 모든 시련을 이겨 낸 한 영혼이 있다. 욥을 통해서 하늘의 권세천사들과 세력천사들이 하느님은 사랑으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케 하시되. 당신께서 주신 선물 때문이 아니고, 당신 자신 때문에 사랑하게 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늘에 있는 권세의 천신들과 세력의 천신들까지도 교회를 통해서 하느님의 무궁무진한 지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엪3,10) 사탄은 엄한 시련을 내리라고 하고,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잘 아시기 때문에 허락하신다. 그러나 아무리 엄한 시련이라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다.「여러분이 겪은 시련은 모두 인간이 능히 감당해 낼 수 있는 시련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신의가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십니다」(고전10,13) 「욥은 잿더미에 앉아서 토기조각으로 몸을 긁었다」(2,8) 이런 고통 가운데서「하느님을 욕하고 죽으시오」(2,9)라고 한 아내에게「당신조차 미련한 여인처럼 말하다니!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2,10)라고 대답하였다. 남이 우리를 보고 뭐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게쎄마니의 예수께서 말할 수 없는 희생을 감수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이행할 것을 가르치신 교훈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어찌 이 목숨을 지하에 버려 두시며 당신만 사모하는 이 몸을 썪게 버려 두시리이까? 」 (시16,10)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지하에 버려두시지 않는다.「 인간은 살 가치가 있는가? 」 3, 1 - 26전장(前章)의 마지막 대목에 세 친구가 나오는데, 데만은 에돔을 말하고, 수아는 창세기 25장 2절을 참고하며, 나아마는 아라비아를 말한다. 이 세 친구들은 와서, 욥의 몰골을 보고 목을 놓아 울었다. 욥이 고통 당하는 모습이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이다. 욥은 자기 생일을 저주하였다. 그러나 사탄이 기대했던 대로 욥이 하느님을 저주 하지는 않았다. 히브리 원문은 2장 9절에 나오는 말과 다른 말을 쓰고 있다. 2장 9절에서는「바레크」라는 말마디를 썼다면 3장 1절에서는「낄렐」이라는 말을 썼다. 욥은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고 자기 생일을 저주한 것이다. 그는 이런 고생을 하느니 차라리 죽기를 원했던 것이다. 욥의 말은 고통을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일리가 있을지 모른다. 인생의 즐거움이 달아났다 하더라도, 그러나 아직도 의무는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대로 사노라면, 가시밭 길은 지나가고 인생의 탄탄대로가 전개될 것이다. 이 시(詩)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1 - 10절은 슬픈 생이 시작되는 생일을 칠흑 같은 어두움으로 묘사하고. 11 - 26절은 왜 죽지 않았는가를 말하고 있다. 고통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을 영위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대화의 첫째 장면 4, 1 - 14, 22어떤 사람이 비참한 처지에서 실의에 빠지게 된다면, 그 고통의 댓가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라고 욥의 친구들은 처음부터 생각하였다. 하느님은 당신의 정의(正義)에서 더 이상 어떤 벌을 내리시지 않을 것이다. 욥은 더 이상 벌을 받지 않을 것임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욥의 비통한 절규는 온당치 못하다. 이에 엘리바즈는 재치있게 논쟁을 걸어온다. 엘리바즈는 분명 욥을 보고 감동이 되었다. 그의 말은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엘리바즈는 현명하신 섭리자의 우주적인 은혜로운 통치를 강조한다. 세상의 통치는 선(善)의 원리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욥이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은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완전히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욥이 당하는 현재의 고통은 하나의 훈련이며, 욥은 결국에 가서 좋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4,1-5,27) 그러나 욥은 엘리바즈 말에 동의하지 않고 자기의 고통을 들어 그에게 항의한다. 욥은 회개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왜 자기를 보고 회개하라고 하는 것인가? 그래서 그는 자기가 받는 고통을 놓고 불공평하다고 불평을 터뜨리며,「사람이 무엇이 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시8,4) 라고 한 시편 작가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면서 욥은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느님은 그를 그냥 두실 수 없는지를 물어 본다. 욥은 하느님을 인간의 정탐꾼이라고 생각한다.(6,1-7. 21.) 두 번째 친구인 빌닷은 욥이 하느님의 처사가 불공평하다고 불평을 터뜨린 것(6,29) 을 알고는, 이것을 반박하기 위해서 인간 체험의 비중이 크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빌닷은 하느님이 분별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역설한다. 욥의 자녀들은 죄를 지은 것이 분명하기에 그들을 당연히 죽은 것이다. 그래도 욥이 죽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그들처럼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사람이 선행을 하면 번영을 누리고, 악행을 하면 망하게 된다는 것은 다 아는 일이다. 이렇게 빌닷이 말한 대로 욥이 과연 죄가 없다면, 번영을 다시 누리도록 하느님께 청하면 될 것이라는 것이다.(8,1-22) 욥의 답변은 대단히 풍자적이다. 인간을 대하시는 하느님의 공정(公正)은 약자를 배격하는 강자의 공정이다. 따라서 하느님과 그 누구도 의논할 수가 없다. 무죄와 범죄는 다 같이 하느님을 즐겁게 해드리는 하느님의 희생물이라는 것이다. 섭리는 정의(正義)의 통치가 아니고 우주적 불공정(不公正)의 통치인 것이라고 욥은 아주 실망을 하면서 고양이가 쥐를 놀리듯이 하느님이 자기를 놀리신다고 하느님을 원망하고 있다. 욥은 또 하느님께서 자기를 일으켜 세워 번영을 누리게 하신다 하더라도, 진흙으로 돌려 보내신다고 원망을 하면서, 무덤으로 가기 전에 잠깐이나마 자기의 괴로움을 없애 주시라고 청한다.(9,1-10,22) 엘리바즈가 욥의 친구들 중에서 제일 재치가 있었고 온유했다면, 빌닷은 인내심이 없었다. 소바르는 셋 중에서 제일 거칠었고 속도 좁았다. 욥의 괴로운 심정의 토로를 듣고 소바르는 두 친구들의 말보다 더 퉁명스럽게 그리고 화를 내면서 말을 걸기 시작한다. 그의 논조는, 하느님은 인간보다 더 깊게 보신다는 것이다. 욥은 자기가 죄없다고 생각하지만 전능하신 분은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욥이 벌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욥이 죄에서 돌아 서고, 하느님께 마음을 향하면 욥은 잘 될 것이라는 것이다. 소바르는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그것을 회피한다면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환기시키면서 끝을 맺는다.(11,1-20) 욥은 지금까지 친구들이 말한 것이 전혀 귀에 들리지 않았다. 욥이 이른 대로, 들의 짐승들, 기타 어떤 것도 하느님의 눈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욥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아는 자기의 지식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힘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힘이 있으시기에 이 세상에 길흉을 내리시나, 그 누구도 이에 대해서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욥은 자기에게 일어난 것을 놓고 그 공정성 (公正性)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4, 1 「데만사람 엘리바즈가 말을 받았다」 엘리바즈, 빌닷, 소바르의 말은 다 시적(詩的)인 표현이다. 성서는 이들의 말을 다 수록하고 있는데, 이들의 말이 다 옳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이론에 대해서 분노를 터뜨리셨다. 그렇지만 그들 진술의 일부는 옳은 것이 있어 신약에 인용되고 있다. 엘리바즈의 진술(5,11-13)은 루가복음 1장 52절의 내용이며, 고린토 전서 3장19절에서 인용되고 있다. 엘리바즈의 주장은 이러하다. 즉 ① 욥이 정말로 의로운 사람이면, 하느님을 신뢰하고 죽기를 원하지 않을 것 이라는 것이다. ② 고통은 '인간이 심는 대로 거둔다'(4,8.9.)는 원칙에 따르는 법이라는 것이다. ③ 욥은 지금 회복될 것이라는 것이다. 엘리바즈의 이론(理論)은 그럴 듯하나 욥에게는 적중되지 않는다. 욥은 친구들이 말한 대로 드러나지 않는 죄를 범하여 벌을 받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 8, 1 「수아 사람 빌닷이 말한다」 빌닷의 이론은 엘리바즈의 그것과 다르다. 욥이 자기 고통에 대해서 반항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욥을 대하시는 하느님의 바른 처사를 받아 들이기만 한다면, 욥은 즉시 회복될 것이라는 것이다. * 11, 1 「나아마 사람 소바르가 말을 받았다」 소바르는 엘리바즈와 빌닷이 한 말을 되풀이할 뿐이다. 소바르에 의하면 욥은 거짓말장이이고 위선자이다. 욥의 고통은 죄의 정당한 보수라는 것이다. * 11, 16 「네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 덜 하느님께서는 벌하신다」 소바르는 욥이 그보다 더 벌을 받아 마땅할 사람으로서 참으로 위선자라는 것을 주장한다. 소바르의 결론은 신상필벌(信賞必罰)에 근거를 둔 것이지, 엘리바즈의 신비주의나 빌닷의 철학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다. 「죽을 인생이 어떻게 하느님 앞에서 올바를 수 있으랴?」 4, 1 - 21 대화의 첫째 장면은 엘리바즈의 충고에서부터 시작된다. 세 친구들은 다 같이 고통은 죄의 결과요 죄의 표지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생각에 비추어 볼 때, 욥 자기는 완전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고통은 친구들이 생각한 대로 욥이 죄인임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세 친구들의 철학에 따라 욥이 죄를 고백하면 욥은 다시 만사가 형통 해질 것이고 앞길이 훤히 열리게 될 것이다. 엘리바즈는 밤의 환상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오는 천벌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과 하느님과의 거리가 무한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죽을 인생이 어떻게 하느님 앞에서 올바를 수 있으랴? 그 누가 자기를 지으신 이 앞에서 깨끗할 수 있으랴?」(4,17) 그러기에 죄 때문에 받는 고통 이면의 욥의 죄는 인간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느님 앞에는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그의 심복들 가운데도 허물없는 자 없는데 하물며 땅 위에 터를 잡고 토담에 사는 사람들이랴!」(4,19) 천사들도 하느님 앞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면 우리 인간은 얼마나 더 낮추어야 하겠는가! 죄에서 돌아 오면 5, 1 - 27 본장(本章)에서 엘리바즈는 자기의 첫 번째 충고를 끝맺고 있다. 욥의 고통은 죄의 결과라는 것을 그는 이미 말했다. 그의 철학대로 욥이 당하는 고통의 이유는 다른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고통과 재앙은 우연히 닥치는 것이 아니다. 불이 있는 곳에 불티가 오르듯이 죄가 있는 곳에 재앙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법칙의 현상이다. 엘리바즈도 이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 사실 죄는 인간을 멸망시키는 것이다. 8 - 17절은 참다운 참회에서 오는 생활을 그리고 있다. 이 대목은 각 문장마다 값진 내용이 들어 있고, 돌아 오는 탕자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구절 구절들이다. 이 내용에는 돌아 오는 탕자에게의 약속이 그리스도의「아멘」에 의해서 보증되고 있는 것이다.「하느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아멘"하고 응답합니다」(고후1,20)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전서 3장 19절에서 욥기 5장 13절을 인용하고 있다. 「사막의 개울 바닥」 6, 1 - 30 욥은 친구들이 냉대함을 참으로 괴롭게 생각하였다. 친구들은 욥의 괴로움을 헤아려 주지 않고 비난만 하는 것이었다. 「전능하신 분의 화살이 몸에 박혀 나의 영혼은 독을 마시고 있는데 하느님의 두려움이 나를 휘몰아치는구나」(6,4) 이렇게 욥은 자기의 괴로움이 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 욥은「뜯을 풀이 있는데 나귀가 울겠는가? 꼴이 있는데 소가 울겠는가?」(6,5)하면서 자기의 심정을 알아 달라고 호소한다. 음식투정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면,하물며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는 욥 으로서는 얼마나 불평을 해야 할 것인가!(6,6-7) 그래서 욥은 고통이 이토록 심하기에 차라리 죽기를 바란다.(6,8-10) 그는 이제 그 이상 버틸 힘이 없다고 한다.(6,11-13) 욥은 자기를 돕는다고 하는 친구들을 비유해서「사막의 개울바닥」(6,15) 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얼음이 녹아 흐르면 흙탕물이 되고, 눈이 녹아 내리면 넘실거리다가도 더워지면 곧 마르고 뜨거워지자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6,16-17) 것이다. 욥은 말의 실수를 친구들이 꼬집어 내려고 한다(6,26)고 하면서 자기의 무죄함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6,28-30) 우리는 이렇게 신앙이 없고 실의에 찬 불평을 늘어 놓고, 고통을 통해서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셧다」(히브5,9) 「해지기를 기다리는 종」 7, 1 - 21 품꾼은 고된 하루의 일이 끝나는 것을 알리는 해지기를 고대하고 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의 생애는 품꾼의 나날 같지 않은가?」(7,1) 우리는 여기서 보답의 시기와 해방의 때를 예기할 수 있다. 이 애처로운 표현 안에서 욥은 자기의 간난신고를 말하고 있다. 욥은 하느님께서 까닭없이 자기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면서 그분 께 기도를 올리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욥에 대해서 무정하시고, 매정스러우시다는 것이다. 그런데 끝까지 자기가 죄가 없다고 한 욥이 말을 바꿔서 이제 자기가 죄인 임을 시인하고 용서를 청했다. 「 사람이 무엇인데, 당신께서는 그를 대단히 여기십니까? 어찌하여 그에게 신경을 쓰십니까? 어찌하여 아침마다 그를 찾으시고 잠시도 쉬지 않고 그에게 시련을 주십니까?」(7,17-18) 이와 같은 내용이 시편 8편 4절과 144편 3절에 나온다. 「사람을 감시하는 이」(7,20)라는 표현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여기서 욥은 구원의 능력을 가지신 그분이 인간을 도우시려는 뜻에서 인간의 죄를 탓하시기 전에 인간의 곤경을 살피시기를 바라고 있다. 「하느님은 허물없는 자를 물리치지 아니하신다」 8, 1- 22 빌닷이 욥을 보고 충고를 하는데, 선조들을 끄집어 대면서 욥처럼 그들도 죄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빌닷이 또 하느님은 심판을 그르치게 하실 수 없다고 하면서, 욥의 아들이 죽은 것은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11 - 13절은 옛날의 싯귀(詩句)에서 따온 것이다. 왕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악인은 쉽게 없어진다는 내용이다. 14 - 15절은 악인의 마음 상태를 묘사하면서, 그자의 신념과 확신을「실오라기」 와「거미줄」에 비하고 있다. 16-19절은 싱싱한 풀포기의 경우를 들어 말하고 있는데, 이 풀포기가 햇빛 아래 아무리 싱싱하다 자란다 하더라도, 그것을 뽑아 버리면 그것이 섰던 자리마저 외면한다는 것이다.「나 너를 본 적이 없다」(8,18)고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허물 없는 자를 물리치시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의 손을 잡으 시지도 아니하신다네」(8,20)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께 돌아 오는 자들의 손을 잡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용기를 내어 그분께 돌아 가서 그분을 찬미하라! 「우리 사이를 중재해 줄 이」 9, 1 - 35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하느님께 대한 개념들을 생각해야 한다.「기둥들이 마구 흔들리도록 땅을 그 바닥째 흔드시는 이」(9,6) 하느님이「지진을 일으키신 분」 으로 묘사되고 있다.「해를 보고 솟아 나지 말라 명령하시고 별들을 봉해 버리시는 이」 (9,7) 하느님이「천체를 주관하신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홀로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9,8)「북두칠성과 삼성을 만드시고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신 이」(9,9) 이렇게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누가 감히 항변할 수 있겠는가 하고 욥은 말하고 있다.(10,19) 인간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제 아무리 깨끗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현존 앞에 나설 수가 없는 것이다.「만일 우리가 죄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이됩니다」(요일1,8) 욥기의 저자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해서 참으로 잘 보았다. 하느님의 성성(聖性)을 조금이라도 알아 듣는 사람이라면, 자기의 죄를 매일 고백하고, 「주의 기도」에서 일러진 대로「용서」를 언제나 청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중재자가 필요하다.「우리 사이를 중재해줄 이가 있어 우리의 어깨에 손이라도 얹어 준다면...」(9,33) 우리의 중재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느님은 한 분 뿐이신데 그분이 바로 사람으로 오셨던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팀전 2,5) 영혼의 고뇌 10, 1 - 22 욥은 이 장(章)에서「당신께서 손수 만드신 것을 억압하고 멸시하시는 것이 기쁘 십니까?」하고 하느님께 항의한다. 또한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여유가 없으신 만큼 뜻을 빨리 성취하시기 위해서 하느님은 욥을 치신다고 욥이 항의한다.「당신의 수명은 사람의 수명과 같으시며 인간이 사는 만큼밖에는 살지 못하십니까?」(10,5) 그리고「나에게 목숨을 주시고 숨쉬는 것까지 보살펴 주셨습니다」(10,12) 라고 하느님께 대해서 욥이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또 욥은 사자처럼 자기에게 달려든다고 원망하고 있다.「내가 몸을 일으키면, 당신께서는 어찌하여 사자처럼 나에게 달려드십니까? 어찌하여 계속 몰아치십니까? 공격에 공격을 퍼붓고 진노의 불길을 뿜으시며 계속 군대를 풀어 몰아치시니 어찌된 일이십니까?」(10,16- 17) 따라서 욥은 빨리 쇄올(Sheol)에 보내 주기를 청한다.(10,18-22) 이러한 욥의 불평을 놓고, 우리도 같은 처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우리는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을 원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처지에서 하느님의 지혜를 알아 들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역사(役事)가 우리 안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결국 하늘에 있는 권세의 천신들과 세력의 천신들까지도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무궁무진한 지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엪3,10) 하느님께서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굳건한 사람으로 만드신 채, 선택의 영광을 우리에게 안겨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단련을 능히 참을 수 있을 것이다. 「자네가 하느님의 신비를 파헤칠 수라도 있단 말인가?」 11, 1 - 20 친구들이 욥에게 죄있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욥이 스스로 의롭다고 한 사실을 놓고, 소바르는 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소바르가 욥을 너무 나무라기는 했지만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우리는 사실 자기만족에 차 있다. 남들이 잘못한 것을 보고, 우리와 비교하면서 자기가 낫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또 무엇을 바라시는가를 우리는 잘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 앞에 세리처럼 가슴을 치며 통곡해야 하며 자기 죄를 고백할 줄 알아야 한다. 「자네가 하느님의 신비를 파헤질 수라도 있단 말인가?」(11,7) 우리는 이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하느님의「깊으심」,「완전하심」,「높으심」 을 우리가 파헤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깊으심」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욥은 하느님께 자기 얼굴을 쳐들 수 없다고 하였다.(10,15) 그러나 만일 죄가 없어진다면,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의 얼굴을 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