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27. 송씨 일가 간첩사건과 사법부 (3)
고문호소를 간첩의 법정전술로 몰아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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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안기부 수사관의 ‘도움’을 받아가며 구치소에서 피고인들을 조사하여 공소장을 작성했다. 3월 초에 잡혀간 피고인들은 9월이 되어서야 재판정에 섰다. 안기부는 공판이 열릴 때마다 수사관을 보내 공판 상황보고를 작성했다. 재판정에서 피고인들은 공소사실을 대부분 부인했다. 피고인들은 한결같이 심한 고문과 장기간의 불법 구금 때문에 허위자백 할 수밖에 없었다고 억울함을 토로하면서, 검찰에서의 조사는 안기부 수사관들이 구치소로 찾아와 협박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고 호소했다.
많은 간첩사건의 경우 변호인들(대부분이 국선)조차 피고인들의 호소에 귀 기울이는 대신, 검찰에서 자백한 대로 다 인정하고 재판장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려줄 것을 빌라고 권유한다. 그런데 이 사건은 여느 간첩사건과 달리 홍성우 변호사 같은 인권변호사가 1심부터 참여했다. 변호인들은 검찰 자백의 임의성을 문제 삼았다. 그러자 검찰과 안기부는 무려 23명의 증인을 내세워 피고인들의 유죄를 입증하려고 했다.
검찰 쪽 증인 중 눈에 띄는 사람은 1976년에 자수한 거물간첩 김용규였다. 그는 이 사건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간첩들이 남파될 때 ‘비상시 행동전술’의 하나로 ‘법정투쟁전술’을 교육받는다고 증언했다. 재판을 받게 될 경우 유력한 변호사를 돈으로 매수하고, “자신이 진술한 내용까지도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한 무조건 부인”하라는 것이다. 왜 이런 진술을 했느냐고 판사가 물으면 “너무 심하게 고문하기 때문에 한 대라도 덜 맞기 위해서 거짓을 진술”했다고 “끝까지 우겨대면 된다”는 것이 ‘법정투쟁전술’의 핵심내용이었다.
판사의 ‘신원 특이사항’ 파악
검찰의 구형은 대단히 무거웠다. 송지섭·송기준·송기섭은 사형, 한광수는 무기징역, 송기복은 징역 15년, 송기홍·기수 형제는 징역 10년, 한용수는 징역 5년, 송오섭은 징역 3년, 송광섭·김춘순·한영희는 징역 2년이었다. 징역형에는 같은 기간의 자격정지도 부과되었다. 검사의 말처럼 ‘숙명’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무거운 형량이었다.
재판장 이아무개 부장판사는 송지섭·송기준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등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송기섭은 무기, 한광수는 15년, 송기복은 10년, 송기홍, 송기수는 징역 5년 6월이었고, 나머지 피고인 5명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1980년대에 신동아 기자로 이 사건을 최초로 심층 보도했던 서중석 교수는 349면에 이르는 방대한 1심 판결문은 공소장의 오기(공소장 99면, 송지섭이 68년 1월 송창섭과 접선한 것으로 되어있는 것이 네 번째인데도 다섯 번째로 오기)까지 그대로 잘못 적고 있듯이(판결문 79면) 거의 글자 한 자 틀리지 않게 공소장을 옮긴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필자가 두 명이나 사형을 때린 1심 판결 내용을 비판하자 송기수는 손을 내저었다. 그는 재판장이 매우 동정적인 눈빛으로 높은 법대 위에서 몸을 앞으로 수그려가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고 회고했다. 7번 재판받는 동안 가장 따뜻한 눈빛이었다. 간첩사건의 최저형이 징역 7년인데, 자신과 형은 그 이하를 받았고, 5명이나 집행유예로 나왔으니 그 시절 판사로서는 나름 고민한 판결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랬는지도 모른다. 안기부 공판 보고에는 이아무개 부장판사에 대한 ‘신원 특이사항’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원으로 ‘아군의 처형’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의 운신의 폭은 좁을 수밖에 없었다.
조작을 뒤엎은 알리바이 입증
1심 재판에서는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 증인이 위증죄로 구속된 것이다. 안기부는 송기준이 1968년 입북하여 간첩교육을 받고 복귀한 것으로 조서를 꾸몄다. 조작간첩사건에서 입북 혐의가 등장하는 경우는 대개 피의자가 직장을 옮기는 시기이다. 멀쩡하게 출근 기록이 있는 사람을 입북했다고 할 수 없으니 입북 시기는 늘 피의자가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없는 그런 시기로 선택된다. 진도 간첩사건의 박동운도 직장을 옮기는 사이 북으로 가 간첩교육을 받고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송기준의 경우 부산에서 음료수 대리점을 하다가 이를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온 1968년 9월이 입북 시기로 선택되었다. 1982년 기소될 때로부터 14년 전이니 아직 공소시효 15년을 지난 것은 아니고, 피의자가 알리바이를 증명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때였다. 그런데 송기준의 부인이 알리바이를 입증해 줄 증인을 찾아냈다.
그 사람은 송기준이 부산에서 음료수 대리점을 할 때 경리를 맡았던 김재철이었다. 김재철은 송기준의 동업자의 조카로 공무원 출신이라 서류를 잘 챙겨 당시에 송기준과 자신이 작성한 인수인계 서류를 갖고 있었고, 기억력도 좋아 당시의 정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서류의 날짜는 안기부가 송기준이 북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있다고 조작해놓은 날짜였다. 안기부는 송기준이 부산의 친지들에게는 서울에 간다고 해놓고 10여일 북에 다녀온 것으로 해놓았는데, 김재철은 당시 송기준은 치질 수술을 받아 서울은커녕 동래온천도 가기 어려운 처지로 자신과 매일 인수인계 작업을 했다는 사실을 송기준의 부인에게 이야기했다. 안기부의 조작을 뒤엎을 수 있는 결정적인 증인과 물증이 나타난 것이다.
부인이 증언해 줄 것을 부탁하자 김재철은 “이런 데 증언한 사람들이 다 경치고 왔다는데 증언 서기 좀 그렇다”고 말했다. 부인이 거듭 “그래도 자세히 알고 증언 서 줄 사람은 댁밖에 없으니 좀 서 달라”고 부탁하자, 김재철은 고민 끝에 ‘내가 안 서 주면 누가 서겠냐’는 심정으로 법정에서 증언할 것을 승낙했다. 홍성우 변호사는 미리 증인신청을 했다가는 안기부의 손길이 미칠 것을 우려해 김재철을 11월 30일 공판에서 재정증인으로 신청했다. 재정증인이란 미리 증인으로 호출되거나 소환되지 아니하고 법정에서 선정된 증인을 말한다. 김재철은 12월 7일의 공판에서도 재정증인으로 다시 송기준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는 증언을 했다.
사실을 얘기한 증인, 위증죄로 구속
김재철이 증언을 마치고 거주지인 군산으로 돌아온 지 사나흘 뒤 안기부에서 그를 찾아왔다. 안기부원들은 그를 눈을 가려 군산분실로 데려갔다가 다시 인근 여관으로 끌고 갔다. 안기부원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네가 14년 전 것 뭘 알아, 이 자식아” 하며 발로 차고 때렸다. 그들은 증언을 한 번만 했으면 봐주려고 했는데 두 번씩이나 다 된 밥에 재를 뿌렸으니 도저히 용서해 줄 수 없다고 을러댔다. 김재철은 그 기세에 눌려 그들이 시키는 대로 진술하고 읽어보는 것도 포기하고 조서에 도장을 찍었다. 조서 내용은 송기준의 부인에게서 돈을 받고 홍성우 변호사가 시키는 대로 위증했다는 것이었다.
임휘윤 검사실로 끌려온 김재철은 입회서기와 똑같은 내용의 조서를 작성했다. 김재철의 제2회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김재철은 “변호사 홍성우가 허위증언하여 달라고 하므로 그렇게 허위증언한 것인가요?”라는 질문에 “송기준에 대한 인정도 있었고, 또한 홍성우 변호사가 송기준을 위해서 유리하게 신문하므로 그 신문 내용에 끌려 들어가 허위증언한 셈”이라고 답했다. 안기부는 김재철의 친구까지 연행하여 김재철이 허위증언한 사실을 자신에게 고백했다는 진술까지 받아냈다. 김재철을 데려온 안기부 직원들이 검찰 입회서기에게 “잘 처리하라”고 해서 김재철은 이제 내보내라는 소리로 알았는데, 그것은 구속하라는 소리였다.
국정원에는 <간첩 송기준에 대한 변호인(홍성우) 측 증인 김재철 출장수사 결과보고>라는 안기부 보고서가 남아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82.12.14 군산출장, 친구 ○○○의 여관 건축현장에 피신 중인 위 김재철의 신병 확보, 현지 조사 결과 82.12.5 군산에서 간첩 송기준의 처 ○○○와 접촉, 그로부터 송기준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달라는 조건으로 10만원 수수, 82.12.6 상경, 12.7 법정에 출두, 변호인 홍성우의 유도신문에 따라 기억이 전혀 없음에도 송기준 입북시기인 68.9 매일 회사에서 접촉하였다고 허위 증언 사실 자백”했다고 한다. 안기부는 12월 16일 김재철을 서울로 연행, 12월 17일 임휘윤 검사에게 신병을 인계, 12월 20일 검찰에서 위증죄로 구속 처리했다고 밝히고 있다. 선고공판은 김재철을 구속한 나흘 후인 12월 24일에 있었다. 김재철은 위증죄로 기소되어 1심에서 6개월 형을 받았고, 항소가 기각되어 만기출소했다. 재재항소심에서는 위증죄로 감옥에 간 김재철의 증언을 받아들여 송기준의 입북 혐의에 무죄를 선고하였으니, 이런 기막힌 옥살이는 다시없다.
미안함과 야속함
김재철은 자기가 구속되었는데 송기준의 부인이 변호사비도 대주지 않았다고 야속해했다. 송기준의 부인은 김재철에게 10만원을 준 사실이 있음을 필자와의 면담에서 인정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김재철이 두 차례나 자기 돈과 시간을 들여 법정에서 증언해 준 것에 대해 차비와 밥값으로 준 것이지 위증을 교사한 것은 아니었다. 송기준의 부인 역시 이 일로 다시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김재철과 대질했는데 그는 다리가 아픈 듯 자꾸 손으로 무릎과 허벅지를 만졌다. 조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고 한다. 내 식구가 당한 것과는 또 달라서 너무 힘들더라는 것이다. 그 후 남편의 영치금을 넣으러 갔다가 김재철의 부인을 만났는데 그 부인은 자신을 보고 엄청나게 울었다고 했다. 그 뒤로는 자기도 영치금 넣으러 그 앞에 가지 못했다고 한다. 너무 미안해서…. “그 후에도 미안해서 연락도 못하고 그쪽에서도 연락이 없고…”하며 여든이 넘은 할머니는 25년 전의 일 때문에 처음 보는 필자 앞에서 펑펑 울었다. 하염없이 울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