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저께 서산을 넘은 해는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올라
동편 들창에 한 가닥 빛을 던진다.
옥중에서 아침상이라고 받아 놓고 비리버는 몇 숟갈 뜬 후 물러 앉고,
데레사는 눈 한 번 붙여 보지 못하고 그대로 밤을 새웠으므로
입맛이 얼얼할 뿐 아니라 어린것의 정경이 더욱 딱하여 그를 푼에 안고 앉아
자기보다도 어린애 입에 밥숟갈을 나르기에 분주한 중에 어제처럼 옥문이 활짝 열린다.
“서학 죄수 이성칠, 서금순 내외 나오너라!”
하는 소리가 옥중을 압도한다.
누구보다도 이제 밥숟갈을 보고 입을 벌리던 어린애가 자지러지게 놀라
폐부를 찌르는 울음을 또 내놓는다.
비리버가 일어서고 그에 따라 데레사도 일어나려 하니
어린애가 치맛자락을 움켜잡고 악을 쓰며 매어 달린다.
이를 본 옥사장이 펄쩍 뛰어 들어오더니
“아따! 이건 어떤 놈의 새끼가 야단이여!”
하며 왈칵 덤벼들어 어린애를 잡아떼어 구석으로 밀어 젖히고는
데레사의 손목을 잡고 끌어낸다.
데레사는 뒤의 기절하는 듯한 어린애를 돌아보고
“오냐, 조금 있으면 네 엄마가 올터이니 울지 말고 잘 있거라.”
하며 비록 작은 인간일망정 마지막 하직을 하고 옥 문턱을 넘어서자니
가슴속이 쓰리고 눈이 젖는다.
동헌 마당으로 끌려오니 거기는 벙거지를 쓴 포졸들이
붉은 주장을 짚고 두 줄로 벌려 서 있다.
죄수 부부가 그 가운데로 천천히 인도되어 가는 중 별안간
“서학 죄인 이성칠 부부 대령하였습니다.”
하고 길게 외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머리를 들고 보니
마주보이는 높은 뜰 위에는 큰옷 입은 한 양반이 책상다리로 앉아 있고
그 옆에는 지필을 든 사람이 꿇어앉아 있다.
뜰아래 한가운데는 형틀 한 대가 놓여 있고, 그 곁으로는 쇠 갈구리와
홍사가 흩어져 있는 것이 유별나게 눈에 뜨인다.
가슴이 섬뜩하였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단단히 가져야 한다고 눈을 내리뜨고,
옥중에서 무시로 하던 것처럼 주모께 향하여
‘허약한 우리 인간을 굽어보시고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기구를 속으로 드리며 정신을 수습하느라고 노력할 때 돌연
“네 거기 꿇어라!”
하는 천둥 같은 소리가 뜰 위에서 떨어진다.
옆에 있던 포졸 두 사람이 나는 듯 덤벼들어 비리버 내외를
그 자리에 끓어앉혔다.
“네가 이성칠이라 하는 천주학쟁이냐?”
“네, 그러합니다.”
“네 아내도 천주학을 하느냐?”
“예, 들 다 합니다.”
“언제부터 천주학을 하였느냐?”
“제 조부 때부터 하였사옵니다.”
“너의 부모는?”
“몇 해 전에 두 분 다 작고하셨습니다.”
“네 나이 지금 몇 살이냐?”
“서른 한 살 이옵니다.”
“네 아내는?”
“스물여덟 살 이옵니다.”
관장은 잠깐 문부를 뒤적거리고 나서 뜰아래 꿇린 비리버 내외의 숙인 머리를
말없이 내려다보더니 언성을 높여 가지고
“네, 이 놈, 들어 보아라. 너의 집안으로 말하면 대대로 나라에 벼슬을 하고
문벌이 뚜렷한 양반가의 자손으로서 어찌
저 서양 오랑캐들이 하는 도를 하고 있단 말이냐?“
“천주교는 천주, 즉 하느님을 공경하는 도로서, 사람 된 자는 양반 상놈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봉행할 도요, 인간으로서 잠시라도 떠나지 못할 도로소이다.
논어에서도 공자께서 ‘소사상제(昭事上帝)’라 하여 하느님을 섬기라고 말씀하셨고
중용에도 ‘도야자는 불가수유리야(道也者不可須臾離也)’라 하여
도리라는 것은 모름지기 잠깐이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아따, 주제넘은 놈! 이 놈아, 그것은 다 우리 유교를 가지고 하는 말씀이지,
너희 그 천주학을 가지고 하는 말인 줄 아느냐?“
“천주교나 유교나 다 진리를 따르고자 하는 점에는 일반인 줄 아오나,
유교는 세상 만물의 근원이신 천주를 공경치 않고 그 중간이 되고
결과가 되는 조물에 불과한 예전 성현과 조상만 숭배하라 하므로
이단의 교라 아니할 수 없나이다.
“너, 이놈, 여러 말 할 것 없이 양인 있는 곳이나 말하여라.
아직도 조선에 양인이 셋이 있다던데 그 중 한 놈은 네가 숨겨 두었다지?“
“예, 지난 가을에 한 양반이 소인의 집에 다녀가셨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셨는지 모릅니다.“
“너 이놈, 모르긴 무얼 몰라. 네 집에 다녀갔으면 지금도 어디 있는지 일겠지.”
관장은 자기 짐작이 반이라도 들어맞는 데서 힘을 얻은 듯 좌우를 향하여
“네 그 놈을 형틀에 잡아매라!”
하며 의기양양한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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