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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벌어진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요?
예수님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큰 소리가 납니다. 당연히 모든 사람들의 고개가 다 같은 방향으로 돌이가고 시선이 그쪽으로 쏠립니다. 모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제자 하나가 예수님을 힐끈 처다보더니 목소리를 가다듬고 위엄을 담어서 한마디 한마디 내어 밷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고 꾸짖는 것 같았습니다. 부모들로 생각되는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며 잘 못했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쳐다보던 사람 중에 몇 사람은 아이를 데리온 부모를 향하여 손가질 하기도 하고, 같이 나무라는 말을 합니다.
뒤집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날벼락이었습니다. 도적질하다가 걸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변을 시끄럽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에게 오는데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생각한 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길을 막아서더니 막 꾸짖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오는 것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인지 그저 그 기세에 눌려 있지만, 억울하기도 하고, 주변에서 손가락질하는 것 때문에 창피하기도 합니다. “주님 앞에 나온 것이 이렇게 큰 죄인가?” 한탄해 보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이었습니다.
패배자의 얼굴로, 돌아가려는 순간 노기를 띤 주님의 음성을 들려옵니다.
어린 아이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같이 살펴보면서 그 속에 있는 의미를 같이 나누어 보겠습니다.
만져 주심을 바라고
문제는 예수님에게서 사람들이 나오면서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13절을 같이 볼까요? 왜 데리고 나왔는지 같이 보겠습니다.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이유는 “만져 주심을 바라고”(13절)라고 말씀합니다.
아주 소박하고 단순한 이유에서 예수님에게 나왔습니다. 안아 주시거나, 쓰다듬어 주시면 되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아이를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만져 주시면,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을 만져 주시고, 그 만짐으로 그들의 꿈이 생기고, 회복되어지고, 바로 세워진다면......, 이런 소망 가운데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나왔다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맏기 원하는 그런 마음 아니겠습니까?
제자들이 꾸짖거늘
그런 기대감과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향하여 나아오던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들이 제지 당했습니다. 13절 다시 한번 볼까요?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제자들이 막아서며 꾸짖었기 때문입니다. 쓸데없는 짓 한다는 것이겠지요. 예수님은 바쁘셔서 아이들에게 시간을 내 주실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우선순위의 개념과 바쁘신 일정을 소화하고 계신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을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시간을 내어 주실 수가 없을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소자들과 함께 하면 예수님의 격이 떨어집니다.
예수께서 노하시어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도 같은 생각을 하셨을까요? 제자들의 행동을 보시면서 잘 했다고 칭찬하셨을까요? 우리 14절을 보겠습니다.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을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행태에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화를 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제자들은 잘 못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이 너무 앞서 나간 것이지요.
제자들의 행동이 진정 예수님을 위한 것일까요? 진정 그렇습니까? 아니면 자신들을 위한 것일까요? 혹시 예수님을 빌미로, 예수님을 위한 다는 핑계로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보이지 않게 또 다른 이익을생각한 것은 아닐까요?
마치 가룟 유다가 예수님에게 값비싼 향유를 뭇고 씨기시는 여인을 향하여나무라지만, 그 속에서는 그 돈을 훔치고 싶었던 그런 것처럼, 또 다른 욕심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제자들의 생각은
제자들의 행동을 우리가 분석해 볼까요? 우리가 금방 읽은 13절과 14절을 통하여 제자들은 어린이들이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라는 말슴을 통하여 그들은 아이들을 막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비난을 한 것입니다.
어떤 모임이 있습니다. 그 모임에서 사람오는 것을 막고 꾸짖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초대받은 손님이 그럴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불가능합니다. 주인이던지, 아니면 그 모임의 장이든지, 이런 사람들이 아니면 그 모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여 막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제자들은 이런 정도는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겠지요. 주님과 함께 하면서, 그렇게 주님과 동고동락하면서, 함께 잠밥을 먹으면서 이제 자신들이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그룹 사이에서 힘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제 자신들도 컸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도 보면서,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 사역도 하면서 분병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그들도 컸지요. 어찌 성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성장 하는 것이지요.
성장하면 책임이 따르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성장하면은 책임지는 자리에 나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적과 표적을 행하시는 예수님, 병 낫기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 문지기를 하는 것입니다. 어깨에 힘을 주고, 헛기침을 해가면서, 질서를 유지하가고 큰 소리 치면서 그러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일단 본인들이 오는 사람을 막았다는 것 자체가 자신들이 어떤 큰 기득권이 있는 것을 생각 한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아니라면 어떻게 예수님께 오는 사람을 막습니까? 이미 자신의 허락 없이 아무도 올 수 없다는 그런 생각 아니겠습니까?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뒤 배경으로, 자신들의 어떤 권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 앞에서 그들은 선택한 성장은 커지는 것이었습니다.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겠지요.
사람이란 내가 커지만 내 앞에 사람들이 작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ㅡ러다 보면 내 앞에 있는 어린 소자를 우습게 생각한 것입니다. 어린 소자들에게는 이렇게 대우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힘없고, 가난하고, 내가 무시해도 항거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지요.
사울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를 하나님께서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왕으로 삼으셨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사람으로 만드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해서 그들을 다 진멸하라고 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순종하지 않음으로 하나님게서 그를 버리고 다른 사람으로 왕을 삼겠다고 말씀하시는 가운데서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15장 30절을 같이 볼까요?
(삼상 15:30)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나를 높이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도 높아져야 하겠습니까? 아직도 올라갈 때가 있습니까? 사무엘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선지자입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무엘을 통하여 높아지기만을 찾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높이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땅에서 주님께서 부여주신 비전을 바라보며 그 성품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제자들의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14절입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이런 사람들이, 아이 같은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예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십니다. 15절입니다. 같이 볼까요?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무슨 말씀입니까?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 작은 소자가 가지는 마음, 그런 마음이 천국에 들어감에 있어서 기준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높아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부수적인 것들이지요. 이 땅에서만 잘 살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살면 되지만 우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서 천국 가는 것입니다. 내가 높아져서 뻐기는 것이 아닙니다. 목에 힘주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배워야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읽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했습니다. 주님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그 버림의 아름다음을 배워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겸손하게 섬기시는 그 섬김의 모습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시는 그 길을 동행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그들은 어린이 같은 마음이 됩니다.
더 순순해집니다. 거짓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소박해 집니다. 작은 것을 사랑할 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이런 삶을 배우게 되고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지요. 그렇게 주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내 속에 주님의 마음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요. 내 삶 속에서 주님의 가신 그 길을 묵묵히 가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욕심을 못 박았습니다. 세상의 정욕을 못 박았습니다. 내 생각을 못 박습니다. 내 이기 주의를 못 박습니다. 내 자존심을 못 박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내 것을 못 박는 길입니다. 그렇게 내 것을 모두 못 박은 다음에 비로서 내 것이 아닌, 주님의 것으로 가득한 세상을 내 마음 속에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서 우리를 세워 주실수록 우리는 더욱 겸손해 지고, 우리는 더욱 낮아지고,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 왕 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울과 다윗과 압살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가질 수 있는 두가지 성품을 이야기하면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의 하나는 하나님의 본성에 가장 가까운 옷이다.
너희를 감쌀 때,
이것은 너희를 하나님의 큰 숨결로 옷 입힐 것이니,
마치 물이 바다를 감싸는 것처럼
그의 숨결이 너희를 감쌀 것이다.
이것,
너희를 옷 입힌 이 숨결과 함께 너희는 군대를 다스리고
하나님의 적을 모욕하며,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다.
여기 선물로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이 성품을 받은 사람들을 통하여 얼마나 위대한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병든 자가 일어 날 것입니다. 귀신이 쫓겨 나갈 것입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칭송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세 왕이야기는 이렇게 계속 됩니다.
이 성품을 받은 사람은 분명히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너의 삶이 다하기 전에,
이 힘의 방법들로 너희 본성은 알려질 것이며,
실로 드러날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 성품은 밖으로 드러나는 능력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은 만져 주지 못합니다. 마음의 변화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인내하며, 낮아지며 겸손하게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그 속에 있는 자연 그대로의 괴팍한 성격은 그대로 들어 나게 됩니다.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이 존재를 입고,
이 존재를 행사하는 모든 이의 운명이다.
이 운명은 오직 겉 사람만 만지며,
속사람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겉으로 나타나는 힘은 항상 그 내부의 근원과 결핍을 드러낼 것이다.
능력이 있지만 겸손이 없습니다. 인품이 안되었습니다.
두 번째 성품이 있습니다.
이것은 선물이 아니라 유산이다.
선물은 겉사람을 옷 입히는 반면,
유산은 씨처럼 속 안에 깊은 뿌리는 내린다.
비록 이것은 매우 작은 파종이지만,
이 파종은 자라나 이윽고 모든 속 사람을 채우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라.
인간의 마음을 변화 시키는 유일한 요소......,
이것은 하나님의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이지만,
이것을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과 잘 섞기 전에는,
그 일을 이룰 수도,
자랄 수도,
그리고 네 속 사람의 모든 부분을 채울 수도 없다.
그러기에 이것은 고통과 슬픔, 그리고 좌절과 잘 섞어야만 한다.
우리는 너무 높은 곳에 길들여 졌습니다. 높은 곳을 가야만 성공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힘 있는 자리를 너무 사랑하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어깨에 힘주고, 목을 곧게 세우고 살아가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주시는 능력을 행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무엇보다 우리가 지배 해야 할 것은 내 마음입니다.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채우고, 그 분의 살았던 삶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극대화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내 욕심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허세 떨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주님의 마음을 더 배워 가는 것입니다. 마음은 어린아이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이 천국 가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천국 가는 길 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