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눈망울에 애별이고(愛別離苦)에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
살아 남는 자가 죽임으로 보내야 하는 아픔……!
몇 년을 등 기대어 함께 살던, 우리를 죽음이 갈라놓다니,
질병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우리를 애지중지 먹여 살리던 주인으로부터 당하는 죽임에 통곡이 갈라산을 흔든다.
주인 마순돌이가 추석 대목장을 보려고 서울 송파구 가락동 도살장으로
한우 30마리를 출하한다.
떠나는 한우를 나일론 끈으로 입을 묶어 남은 끈으로 목까지 묶은 고삐에 끌러
차에 오른다. 묶인 입때문에 아무 말 못하고 떠나지만,
남은 이들은 죽음으로 보내야 하는 아픔에서 온 종일 먹지 않고 목을 맨다.
커피잔을 쟁반에 받쳐 든 정숙이는
'그냥' 가수가 부른 ‘애별이고’에 맺힌 이슬을 지운다.
애별이고는,
경상북도 안성시 정하동 택지개발 때 한 묘지에서 400여 년 전에
남편의 시신에 보낸 아내의 편지다.
[“원이 아바지에게 병술년(1586)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씀.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이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애별이고 -
애별이고 원이아범 애별이고 원이아범
울어지어 불려봐도 대답없는 님이시여
당신혼자 그먼길을 어찌그리 가시니껴
구구절절 긴긴사연 원이어멈 어쩌라고
당신없이 단하루도 나혼자서는 못사니더
님이시여 님이시여 내사랑 원이아범
저민사랑 텅빈가슴 월령교 눈물편지
보고싶고 그리워요 내꿈속에 당신와서
못다이룬 우리사랑 속삭이고 속삭이다
새벽닭이 횃치면은 당신따라 나도 갈래
당신없는 안동땅에 나혼자는 못사니더
애별이고 애별이고 내사랑 원이아범
정숙은 입술을 깨물면서 애별이고 노래 따라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와 흐느끼는데….
“여보! 갔다 오마! 내 갔다 올 동안에 내 생각만 하고 있어.”
남편 마순돌이가 집을 떠날 때마다 아내 배정숙이한테 하는 인사말이다.
매번 듣는 인사말이지만, 배정숙이는 싫지 않다.
순돌이는 목장장 겸 기사인 박영대 차를 타고 가락시장으로 간다.
2년여이나 함께 하던 식구들을 죽음으로 가는 먼 길 배웅에 찢어진 가슴!
마누라의 눈물!
한우를 떠나보낼 때마다 한우를 먹이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통장에 돈이 들어오면 또 마음이 달라진다. 돈이 뭐길래…….
산굽이 물굽이 굽이굽이 돌고 돌아
가시밭길 철조망을 맨발로 걸어온 내 인생아!
걸음마다 허기진 배
눈물로 채우면서 살아온 내 인생아!
길 없는 길
험악한 길 춘화 처리된 내 인생아!
지금 어디로 가는가?
무엇을 찾아 왜! 가는지? 너는 아는가?
순돌이 고향 가현골은 TV도 나오지 않는 첩첩산중 마을이다.
도회지에서 상상도 못할 오지 중의 오지라,
돈 많은 양반이 살기엔 토양이 맞지 않는 곳이다.
한 때는 가현골에도 26가구에 100여 명이 살았다.
인정을 퍼주는 나무꾼에 무딘 미소와
젖가슴이 볼록한 아가씨의 물동이 엉덩이가 고샅을 다니던 곳이다.
지금은 모두가 떠난 떵 빈 마을에 한우목장을 하는 주인공 순돌이 부부와
묵이가 늦장가를 들어서 낳은 아들 내외,
그리고 목장에 일하는 목부들 3가구를 합해 다섯 가구가 산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고향을 지키고자 하는 귀신들이 마을 빈집에서
밤마다 화투놀이를 한다.
거기에는 순돌이 아부지와 할매도 같이 있다.
순돌이 할매는 살아생전에는 친척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산골에서
어린 남매와 셋이서 외롭게 살았다.
순돌 할매의 딸은 아들 마천복이 나이가 15살 때 안동 월곡면 마꼴로 시집을 갔다.
그 후로 순돌이 할매 과부 천씨와 살던,
순돌 아부지 마천복이도 17살 되던 해 접실에 사는 2살 많은
순돌어매 권씨와 결혼을 했다.
1932년 임신생 개띠, 삼대 외 아들이자 유복자 마천복은
뱃속에 아이 이름을 아부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지어준 이름이라 한다.
아부지가 누리지 못한 천 가지 복까지 다 받으란 뜻이란다.
마순돌 아부지 마천복은 6·25 전쟁 때는 총알을 입에 물고,
4.19, 5.16, 5.18을 목에 걸고
먹고 살기 위한 일 외엔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농사꾼이다.
아는 것이라고는 면서기와 마을 이장이 나오라는 부역(賦役)에는
아무런 토씨 달지 않고 ‘예’ 한다.
단 한 가지 단점이라면 겨울이면 노름 병이 심한 환자다.
순돌 어매는 삼촌 집에서 자란 고아다.
순돌 아부지가 결혼한 날부터,
순돌 할매는 자식 번창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새벽이면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갈라산 산신령님께 비나이다. 마씨 가문에 자식번창을 비나이다.”
매달 보름이면 늑대 우는 뒷동산에 올라
노심초사 둥근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가 달이 떠오르면
“비나이다. 비나이다. 달님께 비나이다. 마씨 가문에 자식번창을 비나이다.”
제삿날이면 제사지내는 뒷자리에 앉아
“비나이다. 비나이다. 조상님께 비나이다. 마씨 가문에 자식번창을 비나이다.”
손금이 달도록 빌고 빈 치성 덕택에 순돌 부모님은 7남매를 두었다.
7남매 중 한가운데인 순돌이는 위로 누나 둘에 형이 있고
밑으로 여동생 둘에 남동생 하나가 있다.
주인공 순돌이가 태어난 곳은
지금도 사람도 달구지도 갈라산이 막혀 더는 갈 곳이 없는 막창 마을이다.
사방 어디를 보아도 산 넘어 산에 겹겹 산으로 둘러싸인 산촌이다.
좌우 앞뒤로 높은 산 낮은 산 산 산…….으로, 둘러쳐진 마을이라 해가 짧다.
동지섣달에 코 찌레기 같은 해가 서산으로
길 떠나면,
고샅을 바삐 뜀박질하는 칼바람 겨울은 유난히 춥다.
문풍지를 비집고 들어온 칼바람에 윗목의 대지비에 물이
그 겨울이 다 가도록 매일 밤 얼었다.
그래도 방에 군불 한 번 뜨끈뜨끈하게 때지 못했다.
노름 병이 걸려 집을 나간 순돌 아부지를 대신해서 순돌 어매가
산에서 땔나무를 해 온다.
여자 혼자서 하는 땔나무는 언제고 모자랐기 때문이다.
순돌이 할매는 5살 난 순돌이를 무릎에 앉혀놓고
화롯불 앞에서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손수 작사 작곡한 노래를 부르신다.
“돌아! 돌아! 순돌아! 목천 마씨 마순돌아!
니 애비 이름은 마천복이고, 니 애미 이름은 권금순이다.
병신생 1956 잔나비띠 마순돌이 니 나이가 다섯 살이데이∼
언제 버뜩 커서 이 할매 호강시켜 줄래
돌아! 돌아! 순돌아! 니 할배는
이 할매 나이 열여덟 살에 나를 혼자 두고, 북망산천 간 지가 28년하고도 3달이 넘었다.
니 할배가 북망산천 갈 적에 니 어비 만천복은 내 배속에 석 달 됐고
마꼴 간 니 고모는 빽빽 우는 두 살일 때다.
영감아! 영감아! 내 영감아!
금쪽 같은 우리 손자 마순돌이 얼굴 한번 보러오소
북망산천 어디길래 한 번 가면 왜 못 오니껴!
영감아! 영감아! 이내 영감아!
그캐 버뜩 갈려거든 오지나 말지.
이내 청춘 어이하라고 그 캐 버떡 왜 갔니껴
언제 올라니껴! 언제 올라니껴! 내 만나러 언제 올라니껴!“
애별이고에
눈물을 흘리면서 순돌이와 겨울 화롯불 이야기로 하루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