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명제(命題)를 던져주신 삼목림선생님께 감사드린다. 평소에 홍익인간에 대하여 많은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정리하지 못하던 차에 이번 기회에 내가 생각하는 짧은 생각을 정리해 보게 되었다. 본인은 역사학자가 아니다. 그저 “내가 누구이고 나의 조상은 누구이며 어디서 왔을까?”하는 궁금증에 역사(歷史)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러다 보니 철학(哲學)과 종교(宗敎)와 우주(宇宙)와 고고학(考古學)의 영역(領域)에까지도 자연스레 접근하게 됐다. 물론 스스로 이런 유(類)의 글을 자신있게 쓸 정도로 탐구해보지는 못했지만 실증적(實證的)으로 접근하는 현재의 역사학이 민족의 상고사(上古史)들을 너무 도외시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직도 궁금한 사항들이 많고 공부하고 있는 과정에 있지만 필자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알리고 그에 대한 의견을 구하고 토론함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고 편향된 사고방식, 골수국수주의자의 궤변(詭辯)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의 언로(言路)가 일백퍼센트 햇볕 아래 드러나는 길이 아니듯 승리자의 전유물인 역사기록물이 전적으로 진실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성경(聖經, BIBLE)이나 불경(佛經)에도 시대에 따라 수많은 가필(加筆)이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은가? 인간사는 다양한 의견이 있고 그러한 주변 이야기에 더욱 더 진실이 내재되어 있을 수가 있으므로 다시 한번 숙고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곰팡내 나는 고서적을 뒤적거림이 별도의 직업이 있는 필자의 삶에 경제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그 때문에 아내에게서 핀잔을 듣기 일쑤이지만 이러한 분야를 탐구하다보면 가끔 짜릿한 감동을 느낄 때가 있다. 추측하건대 고고학자가 유물을 찾아서 오지(奧地)를 헤매고, 문학가(文學家)가 밤을 세워 저작 활동을 하고, 건축가(建築家)가 훌륭한 집을 짓기 위해 세계를 섭렵함도 불국사 석가탑(釋迦塔)을 조영(造營)한 백제의 장인(匠人)인 아사달을 구태여 거론 할 것도 없이 그와 같은 심정이리라고 생각한다. 이에 단지 취미사항으로 가끔 숙고해본 홍익인간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개해 보고자한다.
1. 서 언
우리나라는 다종교(多宗敎) 국가이다. 지금 이 두 동강난 조그마한 반도 국가에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탄생한 수많은 종교들이 저마다의 믿음을 가지고 인간을 구제하고자 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도 소싯적에 여러 종교들을 기웃거려 보았다. 현재는 무종교자이다. 하지만 종교적인 삶을 지향(志向)하고 있다. 많은 종교가 난립하다보니 타종교를 인정하지 않고 우상(偶像)이라고 타부시하는 독선적(獨善的)인 사상을 가지는 종교들이 일부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종교인의 기본예절은 남을 존중하는 신실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믿는 바이다. 그러하지 아니하는 종교집단은 광신도(狂信徒)라고 보면 틀림없다고 단언하고 싶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배달겨레들 중에는 기독(基督)을 믿는 이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들도 따지고 보면 예외 없이 배달의 뿌리에서 뻗어 나왔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진실로 기독을 섬긴다면 자신의 조상들이 믿음을 가졌던 선교(仙敎)와 불교(佛敎)와 유교(儒敎)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관심을 가질뿐더러 깊이 연구하여야 한다고 믿는 바이다. 어떤 기독인은 불교 이야기를 하면 진저리를 치면서도, 그들이 쓰는 말씀들을 가만히 들어 보면 불교 용어(찰나, 피안, 화두, 인연, 인과, 업보, 아수라장, 야단법석 등등)를 자연스레 구사하고 있음을 본다. 이 무슨 모순인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기독사상을 갖는 것은 좋다. 그러나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이 땅의 토양과 풍속은 거부하지 말자. 자신의 할머니들이 정한수를 떠 놓고 삼신할미에게 빌고 성주신께 빌고 조왕신께 빌고 부처께 빌어서 이 땅이 유지되어 왔음이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부한다고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공부하고 계승 발전시킬 때 신실한 기독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불교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천주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가끔 우리는 우매한 특정종교의 광신도들이 단군 상을 훼손하고 때로는 그 정도를 넘어서서 자녀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교정에 서 있는 동상의 목을 자르는 소행을 간간히 듣기도 하지만 그래도 참으로 안심(安心)되는 것은 아직 교육의 기본을 잊지 않고 있다는 고무적인 사실 하나가 있다.
1949년 12월 31일 법률 제 86조로 제정 공포된 교육법 제1조에는 우리나라 교육의 근본이념을 아래와 같이 천명하고 있는데 이제껏 그 이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즉,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하게 하여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며 인류공영의 이상실현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당당히 배달국이념인 홍익인간 재세이화사상을 명시하고 있음은 홍익인간의 위대한 사상의 참뜻을 인지하고 못하고의 차원을 떠나서 작금의 식민역사관으로 쓰인 역사교육 환경 하에서 그 숭고한 이념이 수많은 법개정에도 불구하고 용하게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에 전율하여야하는 현실이 애닮기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민족의 지상과제인 분단의 통합과 더불어 슬기로운 백의민족(白衣民族)은 반드시 이 지상의 지고불변(至高不變)한 사상을 저마다의 가슴속에 새겨 널리널리 알리고 다물(多勿, 되물림)하리라고 본다.
세계의 여러 나라에는 창세(創世)에 관한 신화와 기원에 관한 설화들이 있다. 그런데 그 신화(神話)와 설화(說話)들은 역사학자들에게는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는 자료로 팽개쳐지기 일쑤이다. 과연 그럴까? 일반적으로 논(論)하는 역사시대라야 문자의 기원과 더불어 생각하면 고작 5,000년을 넘을 수 없다. 본격적인 역사의 기록은 2,000년이라고 보아야한다. 암흑(暗黑)으로 가려진 수백만 겹의 베일에는 역사 이전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엄청난 족적(足跡)이 숨어서 신화와 설화로 구전되다가 다만 추상형(抽象型)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이러한 관점(觀点)을 가지고 홍익인간과 재세이화의 기원을 살펴보기로 한다.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를 알려면 단지 그 이념만이 아니고 그 출전(出典)과 기원(起源), 그리고 그에 관련된 왜곡된 우리의 역사, 신화에 대한 고찰(考察)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홍익인간이나 재세이화를 단군(檀君)의 건국이념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상고사(上古史)에 대한 인식결여와 무관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일단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출전으로 알고 있는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지나(중국)의 위서(魏書)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阿斯達; 經에는 無葉山이라 하고 또는 白岳이라고도 하는데 白州에 있었다. 혹은 또 開城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바로 지금의 白岳宮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고(高)와 같은 시기였다. 옛적 우리나라 기록인 기록(古記)에 의하면 桓國의 庶子 桓雄이 늘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 세상의 일을 貪求하였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굽어 살펴 세 가지가 바른 太白山 주변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음을 알고는, 天符印 3개를 주고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한웅이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턱 神檀樹 아래로 내려와 그곳을 神市라 하였으니, 그가 이른바 桓雄天王이었다. 風伯, 雨師, 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人命, 질병, 형벌, 선악 등을 맡아 보살피되, 무릇 인간의 3백 6십여 가지의 일을 두루 맡아 세상을 순리로써 조화롭게 다스렸다. 이때 한 곰과 한 범이 한 동굴 속에서 함께 살면서 항상 神人 한웅에게 빌어 사람으로 탈바꿈하기를 원하였다. 신인은 곧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人形을 얻게 되리라」고 일러 주었다. 곰과 범이 이것을 얻어먹고 忌한 지 三七日만에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으나 범은 잘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熊女는 더불어 혼인할 사람이 없으므로 매양 신단수 밑에서 잉태할 수 있게 하여 줄 것을 빌었다. 한웅이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 뒤 혼인하여 아들을 낳아 檀君王儉이라 불렀다.
1) 마고할미의 마고성에서 시작된 짐세시대(BC63,182 ~ BC7,197)로 4대의 왕조가 54,000년간 다스렸다 한다.
2) 한인들이 다스린 한국12연방시대(BC7,197 ~ BC3,898)로 7대의 한인이 3,100년간 다스렸다 한다. 즉 배달 = BC7,197 + AD2003 = 9,200년으로 한인 천제들이 배달민족을 다스린 배달을 역년으로 삼았다.
3) 한웅들이 다스린 배달국(청구국)시대(BC3,898 ~ BC2,333)으로 18대의 한웅들이 1565년간 다스렸다 한다. 즉 개천 = BC3,898 + AD2003 = 5,901년으로 배달국의 연호 개천을 역년으로 삼았다.
4) 단군들이 다스린 단군 조선시대(BC2,333 ~ BC238)로 47대의 단군들이 2096년 간 다스렸다 한다. 즉 단기 = BC2,333+AD2003 = 4336년이 단기의 역년(歷年)이다.
두 기록을 살펴보면 너무나 유사하지 않은가?
다만 일연은 7대의 한인들이 3100년간 다스린 한국12연방을 한국(桓國)이란 한마디로,
또한 18대의 한웅들이 1565년간 다스린 배달국을 서자 한웅이란 한마디로,
또한 47대의 단군들이 2096년간 다스린 단군조선을 단군 왕검이란 한마디로 축약하여 표현함만 다를 뿐이다.
그렇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저작 자료로써 그 당시 쉽게 구해 볼 수 있었던 고기(古記) 즉, 선가사서(仙家史書)들을 참조했음이 분명하다. 동시대인인 김부식과 일연은 분명히 선가사서들을 보았을 것인데 어찌하여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그러한 역사를 언급조차하지 않고 다만 일연만이 축약하여 표현했을까? 그것은 유가들이 우리나라를 소중화(小中華)로 자처한데서 찾아보아야한다. 즉 변방의 역사는 대중화(大中華)인 중국의 역사를 앞설 수 없다는 김부식의 유교사상과 불교와 민간 토속설화에 중점을 둔 일연의 불교적 사고방식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할 것이다. 흔히들 한단고기에 나온 일부 용어의 시대적 불균형을 예로 들어 한단고기가 위서(僞書)라느니 아니라느니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전술한 바와 같이 성서와 불경에도 시대에 따라 수많은 가필이 이루어졌음을 알아야한다. 물론 한단고기의 내용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연까지 언급한 한국, 한웅 그리고 단군의 역사에 대한 잔영(殘影)들을 깡그리 무시하여야만 할까? 그럼 그러한 기록들은 어떻게 전(傳)하여 왔을까? 단지 구전으로만 전하다가 한문으로 기록되었을까? 이에 대한 고찰은 뒤편으로 미루고 우선 한단고기에서 말하는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주인공 한웅천황에 대해 알아보자.(한단고기의 원문은 생략하고 그 내용을 현대적 사고 방식으로 재해설하기로 한다.)
여기서 한웅천황은 일개인의 호칭이 아니라 현재의 대통령처럼 최고지위자의 호칭이란 점을 알아야한다. 배달국에는 18명의 한웅들이 있었다한다. 그럼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이념을 펼치며 단군 왕검이 조선이란 나라를 건국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준 시조 한웅은 누구일까? 그는 신불천황 (神市天皇)또는 거발한(居發桓), 거불단(居弗檀)이라고도 불리는 인물이다. 일 만 년 전 이전에는 사람들이 씨족 단위로 무리를 이루어 이동생활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 그들의 족장을 한인(桓人)이라 부르는 씨족이 있었다. 이 한인씨족은 여러 지역으로 이동생활을 하면서 수렵생활을 하면서 사는 민족이었는데 생활 패턴이 수렵에서 농업으로 바뀌면서 정주(定住)생활을 하게 되었고 삼위산(三危山, 지금의 중국 감숙(甘肅) 돈황현(敦惶縣))과 태백산(太白山, 지금의 백두산)이 가장 정주하기에 좋은 장소임을 알게 되었다. 이 두 산 가운데 태백산이 더 명산임을 알게 된 한인씨족은 지금부터 9천여 년 전에 태백산 아래 기름진 벌판이 펼쳐진 송화강(松花江) 유역에 정착하여 부락을 이루고 살게 되었다. 지금의 간도지방은 기후의 변화로 추운 지방이지만 그 당시에는 살기 좋은 온대지방이었다. 이 때부터 한인씨족은 인구가 늘어나 큰 부족을 이루었는데 그때부터 그들의 족장을 한웅(桓雄)으로 고쳐 불렀다. 한웅부족은 태백산에 신단(神檀)을 설치하고 그곳에 신단수(神檀樹)를 심어 종교적 성지(聖地)로 삼고 하늘을 최고신으로 받들면서 농사를 지으며 정착생활을 하였다. 그 후 서기 전3923년에 거발한 한웅이 태어났다. 거발한 한웅은 어려서부터 영특하더니 부족장인 한웅의 자리에 앉자 종교를 정돈하여 천부인(天符印)을 만들고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등의 관료조직을 정비하여 神을 섬기게 하고 곡물, 명령, 질병, 형벌, 선악 등의 업무를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의 정신에 따라 처리하니 부족구성원 모두가 태평하였다. 이때부터 한웅부족은 스스로를 조선족이라 불렀다. 부족내부의 통치 시스템을 정돈한 거발한 한웅은 3,000명으로 조직된 군대를 만들어 주위의 여러 부족을 종교적인 감화와 무력으로 하나하나 복속시켜 부족연맹체를 형성하여 마침내 큰 정치세력을 만들었다. 이때 거발한 한웅에게 복속된 부족 가운데는 곰을 수호신으로 숭배하던 웅족(熊族) 과 호랑이를 수호신으로 숭배하는 호족(虎族)도 포함되어 있었다. 호족은 새 정치의 틀에 동화되지 못하고 곰족만이 개혁에 성공하여 한웅족의 정치에 공동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렇게 거발한 한웅은 94년간을 재위(在位)하시고 120년을 사셨으며 한웅에 의하여 형성된 부족연맹체는 그 후 거발한 한웅으로부터 18대인 거불단 한웅까지 1,565년간 계속되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배달국(倍達國)이라고도 부른다. 이때는 바로 신석기시대 후기에서 청동기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국가라는 개념이 태동하는 시기였다. 서기전2333년에 거불단 환웅의 아들인 단군왕검이 고조선(古朝鮮)을 건국하니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비로소 국가가 출현하였는바 이러한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 바로 거발한 한웅이었으므로 후세 사람들은 이분을 신시천황(神弗天皇), 개천성조(開天聖祖), 한웅천왕(桓雄天王)등으로 부른다.
이상이 한단고기에 나오는 한웅천황에 관한 기록을 현대고고학적인 자료를 가미하여 정리한 내용인데 그러한 배달국은 어떠한 나라였기에 그러한 사상을 연생(緣生)하였고 세계사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까? 우리는 흔히 배달민족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배달(倍達)의 참뜻을 알고 스스로 배달민족이라 하는가? 과연 세계의 중심(中國)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나인의 오만과 변방국(邊方國)임을 자처한 선조들의 자기비하적(自己卑下的) 사고방식으로 기록된 배달국의 진정한 실체는 무엇일까? 조그마한 반도에서 곰의 자손이라는 일연의 사고방식으로는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려한다는 드넓은 사상이 나왔다는 것은 도대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제 그 지고(至高)한 사상을 잉태한 배달국에 대하여 간단하게나마 알아보기로 하자.
지나(支那, 중국)의 고대 기록인 <산해경(山海經)>, <회남자>등에 의하면 당시 중국의 동남방에서부터 동북쪽에는 대인국(大人國), 군자국(君子國), 청구국(靑邱國)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각기 다른 나라가 아니라 모두 한웅천왕의 배달국을 가리키는 말이며, 또 후대에는 고조선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후대의 공자까지도 군자가 살고 있는 구이의 땅에 가 살고 싶다고 하였음을 보면 지나인들은 배달국을 이상향으로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논어에 이르길 “子欲居九夷或日陋如之何子曰君子居之何陋之有”(자욕거구이혹왈루여지하자왈군자거지하루지유)라 하였다. 내용을 해설하면 공자가 “구이(九夷)의 땅에 가 살고 싶다”하였다.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그곳은 더러운 땅이라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가 살고 있는데 어찌 더럽다고 할 것인가?” 하였다. 이 구절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풀이가 있으나 동방 구이의 땅에 군자가 살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보는 게 마땅한 해석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구이의 땅이란 곧 한반도를 포함한 중국의 동쪽 일대를 일컫는 것으로 공자가 우리의 선조들을 군자로 일컬은 이래 이와 유사한 기록은 지나 고대의 여러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설문해자>, <산해경찬>, <한서지리지>, <신이경>등에 군자국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자세한 사항은 위에 소개한 필자의 홈페이지[연재코너/역사이야기/군자국이란?]을 참조) 아무튼 그러한 배달국의 정치, 문화, 경제 등에 대하여는 한단고기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데 잠깐 그 내용을 소개해 보기로 하자. 왜냐면 홍익인간이란 큰 사상을 잉태한 배달국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그 뜻을 알기란 수박겉핥기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배달국은 한국(桓國)의 계승국인데 한단고기에 의하면 한국(桓國)은 안파견(安巴堅)한인이 비조(鼻祖)로 7분의 한인께서 3301년 동안 천해(天海)와 천산(天山)을 중심으로 하는 땅에서 남북 5만 리, 동서 2만 리의 땅을 12연방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했다. 그리고 배달이라는 하는 이름은 순수한 우리말로서 지상천국이나 낙원이라는 의미 내포되어 있다. 사람이 서로 존경을 하고 만물이 사랑을 받는 광명의 나라였기 때문에, "밝은 나라"라는 뜻으로 "밝은 땅"->"밝땅"->"백땅"->"백달"->"배달"로 변이된 것이다. 여기서 천해(天海)는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로서 바이칼은 "밝안"으로 이는 "밝음이 시작되는 호수"라는 말이다. 천산(天山)은 중앙아시아의 힌두쿠시 산맥의 파미르 고원, 즉 한탱그리산이다. 그리고 바이칼 호수와 한탱그리산의 중간쯤에 알타이어족이라는 이름의 연원이 되는 알타이산이 있다. 소위 한국(桓國)이란 인류 최초의 국가임과 동시에 우랄알타이어족의 최초의 국가인 것이다.
한단고기는 한국을 세운 한인할아버지에 대하여 말하기를 "시베리아(斯白力)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계시니 그 밝음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가르침은 만물을 낳았다."고 했다. 이 내용은 우리 한민족의 광명사상(光明思想)의 기원이 멀리 9000년 이전의 한국(桓國)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민족의 광명사상(光明思想), 다시 말해 태양신 사상은 이후로 세워진 모든 한민족의 영향을 받은 나라들에 중심이 되고 있다. 그리고 고대의 거의 모든 민족과 국가에 깊이 영향을 준 중요한 사상이다. 또한 "시베리아(斯白力)"란 "새밝"으로서 "태양이 새롭게 떠오르는 장소"라는 의미로 우리 고대국가의 모든 이름과 같은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새밝"은 "셔블"로서 서라벌이며 또한 지금 우리의 수도 서울과도 같은 개념이다. 한 가지 더 밝히면 서라벌의 계림(鷄林)은 "닭이 있는 숲"이다. 여기서 닭은 곧 닥이며 닥은 대가리로서 "탱그리"->"당골"->"단군"이다. 즉 "단군이 머무는 숲", "천하의 중심이 되는 숲"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만 년 전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에서부터 지금의 서울에 이르기까지 전혀 변하지 않은 일관된 사상체계에서 우리는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배달국은 전술한 바와 같이 약 6000년 전 삼위(三危)와 태백(太白)사이에서 나라를 세웠다 했다. 삼위(三危)는 중앙아시아의 천산(天山)과 만주의 백두산(白頭山)과의 중간지점인 북중국에 위치한다. 태백(太白)은 흔히 백두산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더 연구해야 할 대상일 것이다. 지금의 한반도에 있는 태백산은 더더욱 아니다. 중앙아시아의 천산과 만주의 백두산은 지나치게 먼 거리이다. 따라서 천산과 백두산의 중간쯤이 배달국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 위치는 북중국의 서안(西安) 근처의 4166m의 태백산(太白山)으로 이른바 삼위(三危)와 함께 중앙아시아와 만주의 중간 지점에 속한다. 한국이 인류 최초의 국가라면 배달국은 인류최초로 문자(鹿圖文)를 만들고 역법(歷法-일년을 365와 4분의 1일로 확정)을 만들었으며, 불로 익혀 먹는 법 등을 발견하고 팔괘를 만드는 등 가히 인류 문화와 문명의 근본을 세운 나라이다. 특히 한국에서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던 천부경(天符經)을 녹도문으로 기록했고 삼일신고와 366사(참전계경)그리고 한역을 만들어 전함으로서 인류 종교와 사상의 근원이 되었던 것이다. 또 화백(和白)제도를 사용함으로서 민주정치의 근본을 세웠다. 배달국은 18분의 한웅할아버지께서 1565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셨다.
<- [파내류산 즉, 파미르고원]
한 가지 특기할 사실은 배달국 비조 거발한 한웅 말기에 반고가한(盤固可汗)이라는 자가 십간십이지 신장을 갖고 공공, 유소, 유수와 더불어 배달국을 배반하고 삼위산 라림동굴에서 지나를 건국하였으며 배달국의 태우의 한웅천황이 선도수련법을 체계화한 일이라든가, 치우(蚩尤)천황이 나라의 영역을 중원의 핵심 지대로 확장했다든가 하는 업적은 우리의 기록뿐만 아니라 지나의 기록에도 뚜렷이 나와 있으므로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인 것이다. 5대 태우의천황의 막대아들과 막내딸이 곧 복희와 여와씨인데, 특히 지나의 삼황오제 즉 태호복희, 신농씨, 황제헌원(이상 삼황), 소호, 전욱, 제곡, 요, 순(이상 다섯 제왕인 오제)이 모조리 배달족이었다는 사실은 지나의 상고사 자체가 우리 민족의 상고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역력히 입증해 주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추세는 그 후 하, 은, 주,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진나라 대에까지 일관성 있게 지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나 문화를 대표하는 유교와 도교의 근원인 황제헌원이 배달국의 자부선생에게서 전수받은 삼황내문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그 당시 배달국의 문화가 얼마나 찬란했으며, 거의 일방통행 식으로 동양 문화를 이끌어왔는가를 입증해 주고 있다 하겠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양문화의 뿌리는 지나라고만 철석같이 믿어온 것이 얼마나 잘못된 허구였는가 하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즉 배달국의 잔가지중의 하나가 지나족 문명을 일으켰음을 말하는 주는 것이다. 태호복희란 말도 태호는 곧 "탱그리"로서 "당골", "단군"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복희는 곧 "밝"으로서 밝음이니 배달l과 같은 말이다. 이는 곧 "머리밝은"이란 말이다. 태백산의 태가 탱그리, 백이 밝으로 머리밝은산이다. 백두산 또한 머리밝은산이다. 천하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라는 의미일 때 태호복희, 천하의 중심이 되는 산일때 태백산, 백두산인 것이다. 그러한 웅혼한 영역을 가진 한국의 계승국 배달국이 있었기에 홍익인간, 재세이화란 지고한 사상을 잉태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그 사상의 참뜻
<- [알타이 산록의 풍광]
홍익인간의 "홍(弘)"은 "크고 넓다.", "익(益)"은 "유익케 하다."는 뜻이다. 즉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넓게 해석하면 "진리로 세상을 충만하게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홍익인간이란 말은 원래 "홍익인간 이화세계"라는 말에서 나왔다. 홍익인간, 이화세계는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고, 바른 이치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재세이화는 홍익인간을 떼어서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없다. 줄여서 홍익인간, 붙여서 홍익인간 재세이화라 해야 할 것이다.
한웅이 땅으로 내려올 때 한인이 준 천부인에는 홍익인간 정신이 깃들어 있다. 천부인 중 하나인 거울은 태양을 가리키는데, 왕이 항상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반성하며 백성을 다스리라."는 의미이다. 또 "둥근 모양처럼 둥글고 어진 성품으로 백성을 다스리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칼은 힘의 근원으로 외적으로부터 백성을 지키는 데 써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 되며 꼭 필요한 때만 써야 한다. 마지막으로 방울은 그 소리가 왕이 하는 말과 같다. 왕의 말이 천하에 울리는 소리인데 "그 소리가 백성을 감동시킬 수 있는 훌륭한 소리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인은 자신이 이런 홍익인간 정신으로 하늘 세계를 다스리듯이 한웅 또한 땅에 내려가 홍익인간 정신으로 인간을 다스리기를 바란 것이다. 홍익인간은 진정한 자비와 사랑의 경지에서 나온 말이다. 내 가족, 내 이웃, 내 민족만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널리 모든 인간을 사랑하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자비심과 기독교의 사랑 등도 홍익인간과 통한다고 할 것이다.
오늘날 세계 국가는 개인이나 국가의 이익만을 앞세우고 있다. 얼마전 우리 농민 이경해씨가 자살한 WTO협상도 인류공영은 말로만이고 기실 속내를 들여다 보면 각국의 이익을 위한 각축장이라고 생각한다. 유럽이 EU로 통합되었지만 공존공영은 명분일뿐 자국, 자민족의 이익을 위한 명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진정으로 공존공영을 위한다는 철학이 필요하고 그런 방향으로 가기위한 단계를 밟아 나가야 할 텐데 이럴 때 바로 이런 홍익인간 정신이 강조되어야 한다. 홍익인간은 모두를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길임을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재세이화(在世理化)란 세상에서 삼라만상의 氣를 理로 변화시켜 理化世界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홍익인간이란 스스로의 피와 땀과 눈물로 이룬 재세이화를 남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이다. 이것이 6,000년 전 배달민족이 건국하면서 내세운 國是인 것이다.
흔히 기독교는 “사랑”을, 불교는 “자비”를 내세운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만으로 부족하여 그 이념을 사람들이 알기 쉽고 객관성 있게 “성경(THE BIBLE)"과 ”불경(佛經)“으로 후세 사람들은 그럴 듯하게 포장하고 있다. 물론 율법과 구약이 예수 이전의 유대 사회에 존재했지만 신약은 후세 사람들에 의하여 저작되고 수차에 걸쳐 개정되었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그러한 가필 과정에서 예수의 일생중 20여년을 빈 생애로 남겨 신비로움을 더하게 하고 있고, 구약에도 물론 교파의 논리에 의하여 수많은 가필이 이루어 졌다. 그들은 성서공의회에 의하여 가필이 이루어진 경전을 정경(正經, Canon)이라 하고, 가필이 안 된 경전의 자료들을 외경(外徑, Apocrypha)이라 한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외경은 존재하는가? 이집트, 나일강가, 그리고 중동의 석회암 동굴들, 사해(死海)등지에서 양피지와 파피루스의 두루마리로 발견되어 놀라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외경을 연구하는 이들은 이단자로 낙인찍혀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공허한 메아리로 동굴 벽을 울릴 뿐인 것이 현실이다. 현재 우리가 보는 구약과 신약을 합본(合本)한 성서도 이와 같이 교파들의 논리로 가필되고 나라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또 한번 중차대한 오류를 범하게 된다.
불경은 어떤가? 석가 생존시에는 애당초 불경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제자들에 의하여 세존의 생전의 말씀들이 암송되어 전해지다가 말씀의 변질을 우려한 일부 제자들의 제안으로 수차에 걸쳐서 결집되고 제자들이 경전을 만들고 수차의 가필이 이루어졌으며 다시 지나로, 티베트로, 조선으로, 삼도로 전승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번역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즉, 우리가 지금 소중히 알고 있는 인류의 경전들은 여러 시대와 교파들의 논리에 의하여 가필이 이루어졌는데 결과적으로 정본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성경이나 불경은 예수나 석가의 말씀이 아니라 예수나 석가의 말씀에 사람의 이상향이 가미된 한얼님의 말씀인 것이다. 사람들이 누대에 걸쳐서 공동 참여하여 만든 합작품이란 이야기이다.
그런데 세상을 한없이 이롭게 하고 바른 이치로 교화한다는그토록 지고한 사상이 홍익인간 재세이화라면 그 사상만 가지고는 우매한 백성들을 깨우치게 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사상이 사상으로 인정받을려면 그 사상을 뒷받침하는 해설이 필요할 것이다. 불교의 금강경이 유명한 것은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이 있기 때문이듯이 기독교의 “사랑”과 불교의 “자비”를 구체화한 성경과 불경이 있기에 우매한 백성들이 이해되는 바 아닐까? 마찬가지로 ”홍익인간 재세이화“가 좀더 구체화된 경전은 없을까? 유대의 역사가 구약에 서사시로 읊어졌듯이 배달의 역사가 기록된 경전은 없을까? 그 이념을 알기 쉽고 객관성 있게 후세사람들이 포장한 경전은 없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있다. 분명히 있다. 배달의 역사는 한단고기에, 사상은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참전계경(參佺戒經)에 구체적으로 구현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해설은 필자의 아직 공부가 빈약하여 후일로 미룬다.
그러면 이 조그만 반도국(半島國)에서 어떻게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 “바른 이치로서 세상을 교화한다.”는 드넓은 사상이 나왔을까? 그렇다. 현재는 반도(半島)에 몰려 그것도 두 동강으로 갈라져 있지만 앞에서도 열거한 지나인(支那人)들도 동경한 웅대한 대군자국(大君子國)이 있었기에 가능한 사상(思想)이었다. 그러면 그러한 사상은 어떻게 계승될 수 있었을까? 삼국유사에 단지 몇 줄의 신화로만 언급된 한국, 배달국, 고조선의 찬란한 역사는 어떻게 전하여 질 수 있었을까? 후대에 몇 몇 사람에 의하여 조작된 것일까? 아니다. 그러한 역사는 이미 지나, 고려, 조선의 정사(正史)에도 언급되고 있다. 자세히 서술되지는 않았고 은폐되고 있지만 사실 자체를 어찌 완벽하게 덮을 수 있으랴. 더구나 어떻게 그 방대한 기록을 감쪽같이 날조할 수 있단 말인가? 날조라면 날조자체로도 커다란 의미가 있다할 만큼 정교(精巧)하다는 것을 읽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어떤 이는 너무나 정교하여 의심된다 했는데 그러한 어불성설이 어디 있단 말인가? 년대별 편년, 왕조별 상세한 기록 등은 조작이라기보다는 원작(原作)이 있었고 여기에 가필(加筆)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하여야 겨우 납득이 될 정도이다. 오히려 외국인들이 더욱 탐독하고 연구한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한단고기를 위서(僞書)라고 무시만 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살펴보자. 한단고기에 기록된 10여 군데의 천문현상(天文現狀)들에 대하여 천체 과학자들이 시뮬레이션 기법으로 역추적해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의 정확히 일치하다고 하는데 위작이라면 어찌 설명할 것인가? 예를 들어 한단고기에 의하면 홀달 단제 시대(BC1733년)에 오행성 결집(五星聚婁, 목성.화성.토성.금성.수성이 일렬로 늘어섬)현상이 기록되어 있어서 서울대 박창범 교수와 표준 연구원 천문대의 라대일 박사가 컴퓨터 합성 기법을 이용해 역으로 추적하여 시각화해 보니 그 해에 그러한 현상이 실재 일어났음을 증명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은 왜나 지나의 기록에는 일절 나와 있지 않다고 한다. 동양에서의 천문현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BC776년(지나 기록)이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한단고기에 수 없이 언급되는 큰 썰물현상, 일식현상등도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구한말 한단고기를 편집한 계연수란 분이 타임머신을 타고 2000년대로 날아가 그러한 천문현상을 연구하여 그 자료를 갖고 다시 1900년대로 날아가 한단고기를 위작하였을까? 단지 몇 군데 등장하는 용어의 문제라든가 문맥의 불일치함만 가지고 위작(僞作)이라고 몰아붙일 것인가?
일본인들의 역사 날조와 모방정신은 유명하다. 백제인 안마려(安萬侶, 安麻侶)가 저술한 고사기(古史記)와 일본서기(日本書記)에 가필을 거듭하여 한국사의 상고사 부분을 일본고대사로 꾸민 일본인들은 그것도 부족하여 최근 언론에 보도된 바와 같이 구석기 유물까지 미리 묻어 놓고 발굴이라고 조작할 정도로 역사에 대한 애착이 심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역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반증(反證)일 것이다. 이와 같이 남의 역사를 빌려 자국(自國)의 역사로 둔갑시키는 기술을 차사(借史)라 하는데 그러한 차사행위는 일본사에 극심하고 중국사도 마찬가지라 한다. 어제(03/9/17) 올림픽 축구 대표팀 한일친선경기가 있었다. 관심 있게 본 사람들은 보았을 것이다. 일본축구협회(JFA, Japan Football Association) 상징 엠블렘에 그려져 있는 삼족오(三足烏)의 마스코트를... 이 삼족오는 고구려 고분벽화(길림 오호분4호묘, 덕화리 1,2호묘)에도 나오는 천지인, 삼신, 한인(조화).한웅(교화).단군(치화)등을 나타내는 배달겨레의 상징물인데 1930년대부터 JFA에서 마스코트로 사용해오고 있다. 문제는 심지어 2002월드컵 홍보책자와 홈페이지에까지 사용하여 세계인들이 삼족오가 일본 고유의 상징물로 인식하고 있다는데 있다. 동해가 일본해로 둔갑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차사(借史)를 즐기는 민족이 일본 민족이다. 그런데 일본족도 결국은 배달겨레의 일족임으로 삼족오를 쓴다는 사실 자체만 가지고 나무라기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그러한 발상을 먼저 하지 못하는 배달의 본가 사람들이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한단고기 대부분의 내용이 차사(借史)가 아니라는 것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위작(僞作)이 아니라면 정교한 편년을 갖고 있는 그러한 역사가 문자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던 시절에 어떻게 전하여 질수 있었을까? 우선 이러한 의문을 염두에 두고 홍익인간 재세이화란 위대한 사상의 탄생 배경과 계승되어질 수 있었던 동인(動因), 그리고 그 사상이 왜 위대하고 어떻게 계승 발전 시켜 나가야 할까?를 생각해보기로 한다.
(나) 셰계인이 감탄하는 훈민정음
우리는 학교교육에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세종대왕이 창제(創製)했다고 배웠고 현재도 대부분 그리 알고 있다. 또한 세종 스스로 훈민정음 서문에서 “어리석은 백성이 나타내고자하는 바가 있어도 쉽게 나타낼 길이 없음을 불쌍히 여겨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다.”고 갈파하였다. 그리하여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기도 한 대한민국 국보가 바로 세종 25년(단기 3776년, 서기 1443년) 창제한 훈민정음이다. 하늘, 땅, 사람을 상징하는 삼재(三才)에서 모음을 만들고 발음기관의 형상에서 자음을 만든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글자가 훈민정음이라고 자타(自他)가 공인(公認)하고 있다. 미국의 시카코大 언어학과 매콜리 교수는 해마다 10월 9일이면 학생들과 교수들을 불러 모아 파티를 열어오고 있다고 한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문자가 만들어진 날인 한글날은 마땅히 "인류가 축하해야 할 우리들의 공휴일"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유엔 산하기구인 유네스코에서는 문맹퇴치에 공헌한 국가나 단체에 주는 상을 만들었는데, 그 이름이 "King Se-Jong Prize" 즉 세종대왕상이다. 그 상의 이름도 이색적이지만 그 상의 첫 번째 수상국이 바로 한국이었는데, 그 이유는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을 세종대왕께서 처음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며 그 결과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문맹률(文盲率)이 낮은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한글의 우수성은 세계 언어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또한 언제 누가 어떤 의도로 그 문자를 만들었는지가 분명하고 또 유일한, 그리고 아주 과학적인 글이라고 언어학자들은 감탄하여 마지않는다. "대지"의 저자인 펄벅 여사 같은 이는 "한글을 발명한 세종대왕은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이다" 라고 찬탄하기도 했다. 이렇든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어느 나라 말이든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글자가 훈민정음이다. 그런데...
필자는 일찍이 그렇게 과학적이라는 훈민정음이 과연 “세종, 일개인의 노력으로 창안되었을까?”하는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있다. 즉 기록에 의하면 초기에는 집현전 학자들까지도 반대하여 세종 혼자서 연구했다고 했는데 “그런 훈민정음을 과연 아무리 영민하시다 하더라도 세계인이 찬탄하듯이 세종대왕께서 그 짧은 시간에 혼자서 창안했을까?”하는 점이다. 그런대 의외로 이에 대한 해답은 1940년 경북 안동의 고가(古家)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스스로 말해주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세종 28년, 단기 3779년 서기 1446년 발간)”이 그것인데 그에 의하면 "형상은 옛 전(篆)자를 모방(字倣古篆)하고 소리는 7조(調)를 화협하였는데 삼극(三極)의 뜻과 이기(二氣)의 묘(妙)가 모두 포괄되어 있다."고 했다. 이외에도 한글이 세종대왕의 완전한 창작품이 아님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조선 왕조 실록> 세종실록 제102권 세종 25년(1443) 음력 12월 30일 그믐 조에, “이달에 임금이 몸소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였고,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룬다. (是月上親制諺文 二十八字其字倣古篆)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우리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되었지마는 전환 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이른다.”라고 하였으며, 또 최만리의 소(疏)에서도, "글자 틀이 비록 옛 전문을 모방하고 글자를 합쳐서 소리를 내나 모두 다 옛 것과 반대이다."라 하였다.
여기서 자방고전의 “고전(古篆)이 과연 어떠한 글자일까?”하는 의문이 일 것이다. 어떤 이는 한자의 전서체라고도 하고, 주변국들의 옛 글자라고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의문은 필자뿐이 아니고 한글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여도 꾸준히 제기 되어 왔는데 요약하면 가림토문자기원설, 아히루문자기원설, 한문전서체기원설, 산스크리트문자기원설, 몽고파스파문자기원설, 발음기관상형설, 히브리문자기원설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답은 한단고기에 명쾌하게 나와 있다. 상술한 바대로 한단고기의 가림토문자기원설 이야말로 모든 의문을 풀어 줄 수 있는 명쾌한 해답이라고 믿는 바이다. 또 <단전요의(檀典要義)>라는 책에도 "태백산에 단군의 전비(篆碑)가 있으니 해독하기 어려워서 고운(孤雲, 최치원)이 번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바로 그 옛 전자가 가림토문(加臨土文, 또는 加臨多文)이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독자들은 “한글이 세종대왕의 완전한 창작품이 아님이 왜 중요한가?”, “우리뿐 아니고 세계인들이 인정하는 훈민정음의 세종창제설을 왜 부인하려 하는가?”고 의문을 가지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한문 이외에 훈민정음 이전의 글자가 있었다면 그 글자는 어떠한 글자였고 또 그 글자는 어디서 나왔느냐가 민족의 역사와 사상이 오랜 기간 동안 전승되어질 수 있었던 까닭을 설명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흔히 석기시대는 국가개념은 없고 단지 부족단위 부락이 여기저기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고 알고 있는데 하지만 이는 지극히 국지적이고 단편적으로 살펴 본 편견이 아닌가 한다. 선사시대의 동아시아의 자연 환경부터 살펴보자. 약 200만년 전부터 1만 년 전 사이에 4차례에 걸쳐 빙하기가 있었다. 빙하기에는 중국 대륙, 한반도, 일본, 타이완이 육지로 연결되었고, 후빙기(약 1만년 전)에 들어 기온상승으로 해수면이 상승하여 현재와 같은 지형을 형성하게 된다. 4차례의 빙하기와 빙하기 사이에 3차례의 휴식기와 같이 기온이 올라가는 시기가 있었는데 이를 간빙기라 한다. 빙기에는 지구상의 평균 기온이 3℃-10℃정도로 매우 추웠으나, 간빙기에는 기온이 올라가서 해수면이 상승하였다. 인류나 동식물은 빙하기가 되면 거의 전멸 상태에 들어가게 되고, 간빙기에 다시 나타나는 현상을 보였다. 즉 한단고기에서 말하는 짐세시대를 거쳐 70만년 전부터 시작된 구석기시대는 이와같은 혹독한 빙하기를 거쳐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운 [주먹 도끼.찍개.찌르개(사냥용), 긁개.밀개.자르개(조리용), 돌마치.새기개주먹도끼.긁개.새기개(연장)]등 뗀석기를 발달시켜 왔고 웅기 굴포리, 상원 검은모루 동굴, 연천 전곡리, 청원 두루봉 동굴, 단양 수양개 유적, 제천 점말 동굴, 제주도 빌레못 동굴, 공주 석장리등지의 흔적에서 볼 수 있듯이 가죽옷을 입고 사냥과 채집을 위하여 무리로 이동을 하며 동굴 막집등에서 3, 4명 내지 10명 단위로 생활하였고 생산과 풍요를 위해 뼈나 돌에 짐승, 물고기등의 그림을 그리며 예술과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것이 그 고고학적 실증이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무렵 한국 12연방 시대로 접어들게 되는데 BC6,000년 경에 드디어 토기가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민무늬에서 빗살무늬로 발전하며 강가등지에서 정착 농경생활을 하여 한국12연방같은 국가 전단계의 정치 조직이 등장하게 된다. 평북 의주 미송리, 황해 봉산군 지탑리, 강원 양양 오산리, 서울 암사동, 부산 동삼동 등 한반도 전역에서 베짜기(가락 바퀴, 뼈바늘 등 사용)를 하고 수렵, 어로, 채취, 간석기를 이용한 농업(돌괭이, 돌낫, 뼈낫, 돌갈판, 조.피등을 재배)에 종사하였다. 주거는 움집 생활이었는데 부족장 중심으로 족외혼을 하고 공동 생산 공동 분배원칙을 지켰으며 애니미즘(해, 달 , 산 , 강, 큰 나무 등 숭배)과 토테미즘(특정 동물을 자기 씨족의 수호신으로 숭배)의 신앙이 있었고 예술의 잔영으로 각종 암각화(예: 울주 암각화, 수렵, 어로의 생활 묘사)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 고고학적으로 알려진 사실인데 석기 시대의 어마어마한 돌무더기나 구조물들과 신앙, 암각화 조영(造營)등을 본다면 국가라는 통치체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사업들이었다는 것은 누구든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문명의 시스템은 어느 한날 갑자기 조제(造製)되어진 것은 아니다. 인류 역사의 알려지지 않은 오랜 기간의 축적된 기술로 이루어진 것이며 현대기술의 어떤 부분은 고대의 기술보다 오히려 뒤떨어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현대 과학의 기본 알고리즘은 석기시대에 제시한 수준을 결코 넘지 않는다고 본다. 일례로 그들의 동굴벽화를 뛰어넘는 예술을 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문자의 발달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단순한 표현 문자가 등장한 시기를 대략 50,000년으로 보며, 그림문자가 등장한 시기는 10,000년전으로 본다. 그림문자, 결승문자, 설형문자가 오늘날의 문자에 비하여 전달능력이 뒤떨어지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정확한 의미 전달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실용적인 문자의 역사는 5,000년 전으로 보는 것이 통례(通例)이다. 수메르인들은 쇄기문자로 기록된 점토판을 소장한 도서관까지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시기가 바로 고고학에서 말하는 신석기 시대인데 한단고기에 의하면 한국12연방시대에 해당하는데 그들의 역사가 구전이나 그림문자로 전해졌을 것이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배달국에서는 거발한 한웅천황 때 신지(神誌)의 지위에 있던 혁덕(赫德)에 의하여 녹도문(鹿圖文)이 정리되어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뒤 지나에서는 창힐(蒼詰)이 녹도문을 본떠 조족문(鳥足文)을 만들고 결승문(結繩文), 서계문(書契文), 갑골문(甲骨文)등의 변이를 거쳐 진시황이 예서체(隸書體)로 문자를 통일함으로써 오늘날의 한자(漢字)가 성립된 것이다. 진시황은 한문의 문자체의 통일과 함께 중국위주의 역사를 기록하게 하고 중국보다 우월적 사항을 기술한 역사서들을 모조리 불태웠는데 그 사건이 다름 아닌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지나측 배달의 역사 기록은 이때 대부분 소실되게 된다. 즉 중국보다도 우월한 문화와 역사를 진시황은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곳이다. 그것이 분서갱유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엄청난 지나측 기록이 멸실되었지만 그 찬란한 흔적은 여기저기 남아 배달의 역사를 알게 한다. 그 배달국에서 창안된 문자의 역사를 알게 한다. 배달국의 녹도문은 그 뒤 단군조선의 가륵단제 때(BC 2,181년) 삼랑(三郞)직에 있던 을보륵(乙普勒)에 의하여 가림토문(加臨土文)으로 개량되었는데 바로 이 즈음에(BC 3000년) 중동에서는 수메르인들에 의하여 알파벳의 전신인 설형문자류가 등장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훈민정음의 모태(母胎)가 된 것이다. 따라서 어제 훈민정음에서 언급된 말씀은 “세종대왕께서 옛글인 38자의 가림토문을 참고하여 창제라고해도 좋을 만큼 음운체계로 정비하여 28자의 훈민정음을 완성하니 백성들이 자기 뜻을 나타내기에 편리하게 되었다.”라고 해석하여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녹도문이나 가림토문이 존재했다는 증거라도 있을까? 물론 증거가 있다. 학자들이 발표한 바에 의하면 울주 반구대, 천전리 암각화, 영천 보성리 암각화, 평북 용천군 신암리 발굴 토기 문양도 녹도문이라 하며 이외 남해도 낭하리 금산 부소암, 만주 경박호, 선춘령 오소리강등의 암벽문자에 녹도문의 잔영(殘影)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러한 녹도문은 구한말 서예가 김규진의 “서법진결”에 11자가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700년 전에 일본에는 이미 원시 한글이 존재했고, 그 유물이 지금도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 대마역사 민속자료관과 일본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을 모신 이세신궁 등에 아직 보관되어 있다. 이것들을 신들의 시대에 신들이 쓰던 문자라 해서 "신대문자(神代文字) 혹은 아히루문자(阿比留文字)"라 한다고 한다. 즉, 가림토문자가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일본에도 전해져 97종의 아히루 문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은나라 유적지 은허에서 갑골문이 발굴 되었는데 지나인들은 갑골문이 한자의 원형이라고 하지만 전편 참고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한자보다는 오히려 가림토문에 더욱 가깝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가림토문자는 역시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몽골 지방으로 건너가 “파스파”란 고대문자가 되었으며, 배달국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인도로 건너가 산스크리트 알파벳과 구자라트 문자의 원형이 되기도 했다.
얼마 전 어떤 책을 보니 히브리어 문양이 새겨진 고조선 시대의 와당(瓦當)이 대동강변에서 발굴되어 성서에 기록된 유대민족 12지파 가운데 하나인 단지파의 족적을 규명하는 단초를 제공한다고 하여 단군은 바로 단지파를 나타내며 따라서 배달겨레는 히브리 민족의 하나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이는 한단고기를 정확히 연구하지 아니한 결론이 아닌가 싶다. 즉 한국12연방과 배달국의 강역으로 보아 히브리 민족이 배달겨레의 하나인 수메르(수밀이국, 須密爾國)민족과 연관성은 분명히 있어 보이고 또한 녹도문, 가림토문의 영향을 받아 히브리어가 성립된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대동강변에서 출토된 와당의 글자는 히브리어가 아니라 바로 가림토문인 것이다. 한글을 연구하는 이들은 훈민정음의 원형(자방고전, 字倣古篆)을 산스크리트문자, 구자라트문자(BC 2,200년), 갑골문자(은나라 BC1,500-1,100), 신대문자(AD 700년), 파스파(八思色)문자 등에서 찾지만 이는 오히려 이들 글자들은 배달국의 강역이었던 지역에서 가림토문의 영향을 받아 한글과 형제 글자들로 발전되어 갔다고 보면 자방고전에 대한 의문도 자연스럽게 해소된다고 할 것이다. 즉 가림토 문자의 흔적들은 한단고기 뿐 아니라 일본, 인도, 몽고등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나라들에 풍부하게 남아 단군조선 시대와 그 영향력을 지금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다. 다만 우리만 가림토 문자의 존재를 공식화하지 않고 있을 따름이다. 실재 가림토문은 이외에도 함경도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보고가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한다. 또한 영변지에 녹도문으로 쓴 천부경에 관한 자료가 기록되어 있다. 한단고기(桓檀古記:소도경전본훈)에 수록된 가림토(加臨土:加臨多)의 38자(字) 정음(正音) 부호는 일견 보기에 훈민정음28자와 거의 비슷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배달국의 홍익인간의 사상과 역사는 유구한 배달족 자신의 문자와 더불어 그들의 구전과 설화, 녹도문, 가림토문등에 의하여 전승되다가 한자의 등장으로 삼성기, 태백일사, 단군세기, 부도지, 삼일신고, 참전계경, 부도지, 규원사화, 삼한관경본기, 삼성비기, 표훈삼성밀기, 조대기, 대변기, 진역유기, 배달유기, 단기고사, 청학집, 영변지등에 기록되었던 것인데 구한말 계연수란 분이 그 때까지 남아 있던 고서들을 참조하여 한단고기란 책으로 집대성한바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자행한 살벌한 민족 고서적 말살정책에서도 그나마 살아남아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바) 영원하여라! 훈민정음! 그리고 홍익인간!
그러한 배달국의 역사와 사상이
유구한 세월 속에서도 전하여 질 수 있었던 배경과
역사의 주역에서 약간의 잔영만 남기고 사라진 원인을 정리하여 보자.
1) 한국12연방, 배달국 같은 원대한 강역이 있었기에 홍익인간이란 위대한 사상이 탄생할 수 있었고
2) 그러한 사상과 역사는 구전과 설화뿐 아니라 문자로도 전승되었다.
3) 배달국 문자는 그림문자, 녹도문등 상형문자에서 가림토문, 훈민정음 등으로 표음문자화하여 변화하여왔다.
4) 가림토문은 구자라트문자, 산스크리트문자, 히브리문자, 아히루문자, 볼리비아 문자, 파스파문자등에 영향을 주었슴이 증명되고 있고,
5) 녹도문과 가림토문은 산목, 구결, 각필, 훈민정음 등의 모태(母胎)가 된 배달족의 고유문자임에 틀림없다.
6) 한자도 녹도문에서 갈라져 나와 결승, 서계, 갑골문, 예서문으로 표의문자화하여 변화하여 왔다.
7) 그러므로 한자와 한글은 표의와 표음으로 표현기법이 상이하지만 근본으로 따지자면 형제 문자이다.
8) 따라서 한글을 우선으로 하되 무조건 한자를 배척하지 말고 한자문화권에서 살아가는 현재의 상황을 고려하여
9) 북한처럼 한글을 전용하기보다는 필요할 때에만 한자를 병기하여 사용하는 것도 좋겠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10) 이와 같이 그림문자, 녹도문, 가림토문, 한문등 문자의 역사와 함께 배달국의 역사와 사상이 전승되어 왔는데
11) 너무 오랜 시일이 흐르다 보니 사상(불교, 유교, 기독교)의 유입과 영향으로
12) 원래의 내용에 가필이 이루어 졌지만 한단고기의 큰 흐름은 유지되어 왔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13) 가림토문은 그 당시의(단군조선)의 강역으로 볼 때 세계적으로 영향을 주어
14) 삼도(일본)에는 신대문자(神代文字), 아히루문자(阿比留文字), 기타 인디언, 중근동등에 영향을 준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15) 아울러 문자의 전파와 함께 홍익인간의 지고한 사상이 함께 전파되어 오늘날의 종교들에도 영향을 주었다
16) 그러다가 은둔, 겸양, 도를 중시하는 배달국은 점점 쇠퇴하게 되고
17) 배달족의 秘書는 단지 산속에서 수련자들에게만 전승되게 되고 역사의 전면에서 잊혀지게 된다.
18) 그의 후손들도 몽골, 티베트, 한반도, 일본, 인디언들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19) 그들에게 인종적인 특징이나 풍속, 전설로만 공통적인 특징을 공유할 뿐 서로 동족임을 알지 못하고
20) 문명(文明)의 성쇠(盛衰)에 따라 타문화에 동화되게 되었다.
21) 동양의 역사는 거대문화인 한자문화 중심으로 편성되고
22) 배달족 역사는 의도적으로 대중화정책으로 축소되고 왜곡되었다.
23)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 고유의 사상인 선가(仙家)의 도맥(道脈)이 이어져 한단고기란 책으로 전승되고 있다.
24) 배달의 역사가 기록된 문헌들을 집대성한 한단고기는 거기 기록된 천문현상등의 증명으로 상당부분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25) 거기에 약간의 가필이 이루어졌다고 판단되지만 우리가 한단고기를 주목해야하는 이유이다.
26) 배달족의 역사는 한단고기에, 홍익인간 재세이화를 근간으로 하는 사상은 민족성에 면면히 녹아 흘러 이어지고 또한 민족의 삼대경전인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에 구체화되어 있다.
그렇게 구전과 설화와 문자로 전승된,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위대한 사상인 홍익인간 재세이화 사상은 민족의 삼대경전인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참전계경(參佺戒經)에서 꽃을 피웠던 것이다. 한사상(桓思想)은 외래의 사상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한국인의 사상으로 “크다, 밝다. 하나다”라는 의미와 같다. 또한 “희다, 바르다‘ 하늘, 동쪽, 많다, 길다, 으뜸이다, 위다, 처음이다, 오래다, 온전하다, 우두머리다, 성하다, 가득하다”등의 의미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한사상은 역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근본적으로 같은 뜻을 가지고 고대사회에서 현대사회까지 면면히 내려져 왔다. 이것은 배달민족의 각 시대별로 면면히 이어져 배달국 시대의 홍익인간(弘益人間), 제세이화(濟世以和), 승유지기(昇遊至氣), 접화군생(接化群生), 고구려의 이도여치(以道與治:도로써 세상을 다스린다.), 신라의 광명이세(光明理世: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 고려의 금탑(金塔), 조선의 금척(金尺)등으로 이들은 모두 밝은 진리와 빛을 상징함으로서 한(桓)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한(桓)을 “크다, 전체적인 하나다.”고할 때 이것은 대립성(對立性)이나 분열성(分裂性), 배타와 독선을 허용하지 않는 통일의 정신이며 전체라는 입장에서 포괄성(包括性)을 근간으로 하며, 조화성(調和性) 또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한(桓)에는 통일성(統一性), 총체성(總體性), 초월성(超越性), 종합성(綜合性), 협동성(協同性), 평화정신(平和精神) 등이 내재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국기의 핵심인 태극(太極)은 “크다”라는 한사상(桓思想)을 적절한 이미지로 표현한 좋은 예로 볼 수 있다.
2001년 현재 세계의 언어는 6809개인데 그마저도 6000개 이상이 금세기 말이 되면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중에 문자를 갖고 있는 언어는 30여종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문자를 갖고 있는 언어들은 절대 사라질 수가 없다. 지구상의 30여종의 문자들 중에서도 훈민정음은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고 세계인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아직 이런 발상을 해 본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아는데 필자는 종종 문자를 갖지 못한 언어의 민족들에게 훈민정음을 전파하면 좋지 않을까도 생각해 본다. 그러한 훈민정음은 바로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배달의 역사와 함께 오랜 기간 발전 되어 왔던 것이고 그와 유사한 인도 구자라트문자, 산스크리트문자, 히브리문자, 아히루문자, 볼리비아 문자, 파스파문자등이 바로 배달겨레의 영역임을 증명한다고 볼 때 훈민정음을 전파한다고 하여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훈민정음이 세종의 창작품이 아니고 옛글을 참고했다고 강조함은 한글의 우수성을 깍아 내리려함도 아니고 세종대왕의 노력을 폄하하려함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세종대왕의 노력이 있었기에 배달민족의 가림토문이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우리의 조상들의 그 지고(至高)한 사상은 그렇게 탄생되고 계승 발전되었던 것이다.
(가)
요즘은 외국 여행을 많이 한다. 필자도 몇 번의 외국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얼마 전에는 유럽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경주나 부여정도의 조그마한 유적을 보아온 나에게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한마디로 거대한 도시전체가 유적의 바다였다. 수천 년에서 수백 년 된 건물들이 즐비하고 아직도 그 안에서 현대인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보고 두 동강이 나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이 조그마한 반도 국가에 대하여 “과연 반만년, 아니 일만 년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든 것도 사실이다. 거대한 알프스의 산자락 구석구석까지 소형 열차가 운행되는가 하면 파아란 초원에 전통양식을 잃지 않은 고유의 목조주택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 스위스에서는 차라리 거기에 몇 달이고 눌러앉고 싶은 충동이 일어온 것도 부인하지 않겠다.
(나)
섬나라 삼도(日本)에 가보니 평소에 마음속으로 왜놈들이라 깔보던 그들은 울창하게 우거진 숲과 얄미울 정도로 구석구석 잘 다듬어진 정원 같은 국토를 가꾸어나가고 있었고, 전통 양식을 잃지 않은 건축물들을 유지함과 생각보다도 상고시대 유적들이 온전하게 구석구석 산재해 있음을 둘러보고, 잦은 전란과 외침에 망가진 벌거벗은 민둥산이 산림녹화사업으로 우거지긴 우거졌는데 쓸모없는 잡목투성이인 산야와 전통 건축 양식은 실종 되고 국적 없는 콘크리트 건물로 뒤범벅된 우리의 도시들 그리고 농업정책의 실패로 버려진 농촌의 전답들과 공장들이 뒤엉켜 있는 금수강산에 대하여 자괴감이 든 것도 사실이다. 태풍이 들면 우리의 산야는 쑥대밭이 되는데 그들은 별피해가 없는 것을 보면 그 또한 우리가 그들보다 열등민족이 아닌가? 하는 자기비하의식에 젖어들 때가 있는 것도 부인하지 않겠다.
(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말하는 경복궁, 비원, 덕수궁, 석굴암들은 지나의 자금성이나 진시황릉에 비하면 조그마한 정자나 암굴에 불과할진데 “그러고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한국12연방이나 배달국 단군조선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객관적으로 검증되지도 않은 한국12연방, 배달국, 고조선에 대하여 열변(熱辯)을 토함은 커다란 착각과 아집은 아닐까?”하고 반문해 본다. 그것이 바로 식민사관으로 교육받고 신지식으로 무장한 이들의 항변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아니다. 위에서 필자가 말한 여러 가지 거증자료(擧證資料)를 살피건대 우리는 우리의 찬란한 상고사에 대하여 위축되거나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잦은 외침과 강대국들의 말살정책으로 실증적인 자료들이 많이 사라졌다하더라도 다행히도 과학적 첨단 시스템의 발달은 거기 기록된 사실들의 추적이 가능하게 하여 그러한 부분을 보완하여 주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우리의 그 지고한 사상을 잉태한 우리의 상고사의 진실은 더욱더 밝혀질 것이므로 자랑스럽게 말하여야한다. 자신 있게 말하여야 한다.
(라)
얼마 전, 필자가 몸담고 있는 회사에서 지나(中國)사업 진출을 위해 현지 조선족을 채용한 일이 있었다. 그는 한국 대학원에 재학 중인 조선족 지식인으로 그를 자주 만나 보게 되었는데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였다. 필자가 그에게 말하길 “당신들 조선족들을 나는 자랑스럽게 여긴다. 왜냐면 이 반도에 남아 있었던 우리 조상들은 일제에 순응한 사람들의 자손이고 당신들은 일제에 항거하여 타향으로 가 독립운동을 한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당신들만 보면 뭐든 잘해주고 싶다. 혹시 고조선의 역사를 아느냐? 북부여와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아느냐?”하였더니 그러한 나의 우호적인 생각은 환상이었음을 얼마 안가 알 수 있었다. 즉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애정 어린 감정으로 바라보는 동족이 아니다. 지나 정부의 소수민족 우대 정책으로 육신은 조선족이되 마음은 지나인으로 동화 된지 오래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도 지나 역사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다. 그들 대부분 육신은 조선족임을 부인하지 않되 국적은 중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알고 있다. 한국은 선조들의 조국이되 자신들의 조국은 중국이며 이에 대하여 대단한 긍지를 갖고 있다.”란 결론에 도달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은 50여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지나(支那)의 국가 체재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을 사전에 분쇄함이 최우선 과제라 여기고 그들에 대한 교육, 경제, 정치정책에 있어서 각종 우대정책을 취하고 있어 문화운동과 냉전체재의 혹독한 공산당 시절을 통하여 소수민족들 스스로 민족의식을 버린 지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고국을 아는가? 필자의 판단으로는 그들의 육신은 한민족이되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할 뿐 이방인이라고 본다. 그들이 한민족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역사를 알고 우리의 정신을 알아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 그런가? 그들의 가정에서 조선의 사상과 역사를 가르치는가? 유태인들이 이천여년을 세계각지를 떠돌면서 몸은 백인과 흑인으로 탈바꿈하였어도 유태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피부색이 달라도 유태인으로 인정하여 줄 수 있었던 것은(유태인에는 백인, 흑인, 황인이 있음을 사람들은 많이 모르는데 유태의 피를 받고 유대교를 믿고 계율을 따르면 유대인으로 인정함을 알고 놀란 적이 있다.) 그들의 말과 역사와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갖은 박해에도 그들의 율법과 말과 경전을 버리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정신과 경전을 찾아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지 않으면 역사상 931회(2년에 한번)라는 외침(外侵)에도 조선(朝鮮)을 지켜온 선조들의 노력이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리라고 생각한다. 이 지상에 조선족의 육신은 남아 있으되 그 얼은 죽어버리는 현상이 나타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리하여 민족 자체가 없어지고 타문화에 동화되리라고 예단해 본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정신과 경전을 찾아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발전시켜 나가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마)
이제 세계는 하나인 시대이다. 민족이나 국가가 울타리를 두르고 혼자서만 살 수는 없다. 인터넷이 장벽을 허물고 사상과 이념이 잦은 교류로 허물어지고 있다. 유럽이 통합되었다. 유럽여행을 해본 사람이면 알 것이다. 국가간 이동에 있어 아무런 장애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다. 일본은 일찍이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외쳤다. 아시아 민족이 공동으로 번영할 수 있는 공동체를 세우자는 겉보기엔 그럴듯한 공존공영의 논리를 내세웠지만 기실 속내는 우월적인 선민의식으로 일본중심으로 아시아를 지배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또한 팍스 로마나(Imperium Mundi)의 근거가 된 로마의 세계주의(Cosmopolitanism), 중세 로마가톨릭의 초국가주의(Supernationalism) 보편주의(Universalism), 근대 공산주의자 들이 즐겨 쓴 국제주의(Internationalim), 다민족 연합국가들의 전체주의(Globalism)등은 말만 다를 뿐 기실 특정 집단의 논리로 무장되어 얼마나 많은 소수민족들과 약소국들이 신음하여야 했던가? 즉 그러한 논리의 뒤에 숨어있는 음모를 알아야 한다. 강대국들의 언로(言路)에서 말하는 대로 그저 “세계는 하나다.”라는 환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이러한 혼란의 시대임에도 세계는 한국 12연방의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 흐름은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공존공영을 원한다면 그러한 주의와 사상을 부르짖는 자들 스스로 마음을 열고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마음을 갖출 때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이다. 그러하지 않으면 분열과 갈등은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인류가 유럽으로 가 유럽인종이 되고, 아시아로 가서 황인종이 되었지만 그들의 몸에 간직한 디엔에이는 변하지 않아 다시 하나로 통합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은 확실하다. 이러한 하나지구시대에 소수민족들과 약소국들을 동등한 권리로 사랑할 수 있는 홍익인간 재세이화야말로 진실로 이 시대에 적합한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강대국들도 이러한 사상으로 무장한다면 진정으로 공존공영의 길로 나아 갈 수 있으며 전쟁과 고통이 사라지는 낙원세상이 될 것으로 믿는다. 그러한 사상이 농축된 우리 역사야말로 바로 세계의 역사요 그러한 사상이 용해되어 있는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참전계경(參佺戒經)이야말로 세계인의 경전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한 사상의 내력을 지닌 훈민정음이야말로 문자를 갖지 못한 민족들에게 자랑스럽게 전파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초부터 조그마한 반도에만 몰려 살지 않았던 우리민족이 느껴야할 자부심이요, 홍익인간의 큰마음으로 살아가야하는 이유요, 자랑스러워해야할 이유인 것이다. 세계인들이 진정으로 공존공영 하는 사상적 근간이 되고 종교적 신념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끝)
배달9200/개천5901/단기4336/서기2003/9/26/이름 없는 풀뿌리 나강하
덧붙임)
아래 서적들은 필자가 한번 이상은 본 책들입니다. 게중에는 지금도 옆에 두고 읽는 책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서관에서 잠시 본 책도 있는데 대개 그런 책들은 출판년도가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출판년도와 저자등이 자세히 표시된 책들은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책들입니다. 따라서 아래 책들을 보신다면 제 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사료됩니다.
■ 참고서적
- 형질 인류학 / 권분구
- 선사고고학 / 권분구
- 중국의 원시시대 / 윤내현
- 인류문명의 기원과 한 / 삼성문고
- 잃어버린 뮤대륙 / 제임스 처치워드
- 세계의 대역사 / 삼성출판사
- 서양사개론 / 金聲近著 정음사(1974)
- 네안데르탈 2권/ 존단튼, 한기찬역, 황금가지(1996)
- 축소지향의 일본인 / 이어녕, 기린원(1986)
- 이것이 일본이다 / 송효빈, 한국일보사(1985)
- 치앙마이2권 / 김병호, 매일경제신문사(1992)
- 멀고 먼 힌두쿠시 / 김병호, 매일경제신문사(1992)
- 소설 정도전
- 소설 강증산
- 소설 留記
- 소설 일본서기
- 생활참선 / 박희선, 정신세계사(1986)
- 본주 2권 / 박문기, 정신세계사(1995)
- 성웅이순신 / 이은상 횃불사(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