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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사야 6 : 1 - 5
제목: 웃시야가 죽던 해에 성전을 찾은 이사야
일시: 2011. 5. 15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웃시야는 나이 16세에 유다의 왕으로 등극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문둥병이 걸리기 전까지 오십이년 간을 다스렸다. 그는 참으로 유다의 위대한 왕이었다. 역대하 26장에 그의 업적이 잘 기록되어 있다. 웃시야는 예루살렘 성을 견고히 하였다. 군사조직을 체계적으로 만들어 하나냐 장군을 중심으로 2600명의 각 족장 지휘관과 그 아래에 병사 307500을 두었으며 방패, 창, 투구, 갑옷, 활과 물매돌 등 당시로서는 강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뿐 아니라, 무기를 연구하는 연구소도 만들어 신무기를 연구개발하기도 했다.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불레셋땅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하였고 암몬사람들로부터는 조공을 받고 그의 영향력은 애굽의 변방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강한 유다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의 복지에도 관심을 가져 경제발전도 일으켰다. 광야에 망대를 세우고 우물을 팠으며 고원과 평지에 가축을 많이 기르고 산과 들을 농토로 만들었고 경영관리체제를 효과적으로 움직이게 했다.
그러던 그가 마음이 교만해져서 그만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제사에서의 실수였다. 당시 제사는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만이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분향할 수 있었는데 웃시야는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제단에 분향했던 것이다. 워낙 잘 나가는 위대한 왕이었기에 마음이 교만해서 넘지 못할 영역을 침범했던 것이다. 물론 제사장들은 왕의 그러한 행위에 대해 책망하고 제재하였다. 하지만 웃시야는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다 화를 내었는데, 화를 낼 때에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기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웃시야 왕은 왕의 모든 일을 아들 요담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죽는 날까지 별궁에서 숨어 지내게 되었다. 사실, 웃시야는 성전 분향 사건 전까지는 유다의 희망이었다. 유다를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강한 나라로 만들고 부패하고 타락한 유다를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위대한 나라로 이끌 수 있는 지도자로 기대를 모은 왕이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었던 것이다.
II.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
웃시야는 이사야의 무게중심이었다.
그런데 그런 웃시야가 교만하여져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문둥병에 걸리더니 결국 죽고 만 것이다. 웃시야가 죽었다는 것은 유다에 소망이 사라진 것이다. 이것은 당시 나라를 위해 고민하던 하나님의 종 이사야에게 큰 슬픔이었다. 이사야 역시 웃시야에게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그렇게 기대를 걸었던 만큼 얼마나 좌절했겠으며 유다의 불투명한 앞날에 대해 얼마나 염려와 걱정이 되었을까!
우리는 언제나 사람을 보면 실망을 할 수 밖에 없다. 좀 믿음직해서 믿으면 교만하여져서 넘어지는 것을 본다. 사회적 명망이 있고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좌절을 준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삶은 흔들리게 된다. 우리는 군사력이나 경제력이나 지혜나 재력을 삶의 중심에 두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들이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주며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우리 안에 다양한 종류의 웃시야를 가장 중심에 둘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흔들린다. 왜? 무게 중심이 틀려있기 때문이다.
무게중심 : 우리가 대학교 다니던 80년대에 민속놀이이자 스포츠인 씨름이 있었다. 씨름은 정해진 모래판 위에 두명의 장사가 서로 샅바를 잡고 상대편을 신체의 어느 부위든지 먼저 땅에 닿게 하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유명한 두 선수가 있었다. 하나는 천하장사를 가장 많이 한 씨름판의 황제 이만기선수였고 그의 라이벌은 인간기중기라는 별명을 가진 이봉걸선수였다. 둘이 붙으면 가장 흥미로운 경기였다. 이봉걸은 이만기를 언제나 들어올린다. 역시 기중기이다. 그런데 문제는 들고만 있지 어떻게 내어 치치를 못하는 것이다. 어떠한 기술을 걸어도 이만기는 발을 땅에 디디고 오히려 이봉걸은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넘어지곤했다. 결국 무게중심의 싸움이었다. 씨름선수와 같이 사람이 무게 중심을 잡는 것은 참으로 대단하다. 사람들은 로봇을 만들어 내는데 사람형상을 한 로봇을 만들어 내는 연구를 하고 있다. 거기에는 많은 기술이 집약되게 되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기술이 무게중심을 잡는 기술이라고 한다. 로봇을 만들 때 직진을 하는데 코너웍이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 더 높은 차원의 기술은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오는 일이다. 움직일 때마다 매 순간 무게중심을 컴퓨터가 계산해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사야가 흔들리고 유다가 흔들리고 우리의 삶이 흔들리는 것은 무게 중심에 웃시야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사야는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적으로 웃시야에게 기대했고 그러므로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좌절한 것이다. 웃시야라는 중심 역시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다. 무게 중심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게 될 때 넘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사야가 찾은 곳은 성전이다
유다의 소망이었던 웃시야가 죽고 슬픔과 좌절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이사야가 찾은 곳은 성전이다. 웃시야라는 무게중심이 사라져 버리고 그 안에 무엇이 담겨져야 하는가? 성전이 그 중심에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성전은 예로부터 이스라엘민족의 중심이었다. 모세가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를 진군해서 나갈 때도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막이 있었다. 광야생활 내내 이스라엘의 중심은 장막으로 지은 하나님의 처소였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그들은 오랫동안 염원하던 하나님의 전을 짓게 된다. 다윗은 자신의 왕궁을 지을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수는 없었다. 자격이 되지 않은 것이다. 대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게 된다. 하나님이 임재해 계심을 상징하는 예루살렘성전은 이스라엘백성의 삶의 중심이 되었다. 기도도 성전을 향하여 했고 일정한 나이가 되면 의무적으로 성전을 방문했으며 생활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성전이 이스라엘의 운명이기도 했다. 나라의 흥망성쇠의 결정적인 풍트였다. 성전이 함락되면 이스라엘이 망한 것이고 성전이 회복되면 이스라엘이 회복된 것이다. 나라가 안정되었을 때 솔로몬의 성전의 성전을 세웠으며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스룹바벨이 가장 처음 행한 것이 예루살렘성전 재건축이고 헤롯이 유대땅을 통치할 때에 유대인들을 위해 해 준 것이 예루살렘성전 개축이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에게 성전은 삶의 중심이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문제투성이이다. 언제나 숙제가 잔뜩 쌓여서 해결하고 풀어야 할 것들이 산적해 있다. 우리는 무게 중심을 옮겨야 한다. 우리의 삶의 중심이 잘 잡혀 있다면 오뚜기와 같이 아무리 흔들어도 제대로 다시 설 수 있는 것이다. 믿었던 그 유능하고 위대한 황 웃시야가 우리를 실망시킬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이것 저것 인간적인 모든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서 해결해 보고 마지막에 주님을 찾아가지는 않는가!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는 찬송과 더불어서... 우리는 처음부터 성전을 찾아야 한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을 찾은 이사야와 같이 나의 웃시야가 죽게 된 때에 찾아야 할 곳은 성전이다.
20대 30대의 우리 지체들은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들이 몰려 있는 때이다. 공부, 직장, 결혼, 자녀출산, 군대... 지금 결정되는 것으로 인생이 판가름나며 지금 잡는 각도와 방향에 따라 인생이 크게 변화될 것이다. 그러기에 가장 기도할 제목이 많은 고민의 시대이다. 라이프찌히에 와서 가장 먼저 한 것이 새벽기도이다. 제가 먼저 하자고 한 것은 아니었다. 기도할 것이 많은 학생부부로부터 나왔다. 박성환집사 조은경집사가 “목사님 새벽기도를 우리 집에서 하려고 하는데 목사님이 오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어찌 아니할 수 있는가! 하자는데... 이후에 집사님댁에서 할 수 없으니 다른 기숙사방으로, 그리고 이후에 우리 집에서 또한 잠시 얻은 교육관에서 드렸다. 뭐 번거럽게 그러냐! 그냥 집에서 드리면 되지 뭐 싶다. 그러나 성전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은 이미 마음속에 주님을 중심으로 산다는 것이다. 새벽기도를 할 때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가장 먼저 일어나 땅층의 문을 열어 놓는다. 그리고 예배실로 올라가서 마이크를 켜 놓고 음악을 틀어 놓는다. 음악을 틀 때도 볼륨도 생각한다. 그리고 곡도 선정한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들어와서 새벽말씀을 다시 한번 묵상하고 올라온다. 찬양을 준비하는 것도 말씀과 연관을 시킨다. 새벽이 용해서 기도의 응답이 있는가? 아니다. 이미 사모하는 마음에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부어주신다. 우리의 시선이 성전으로 향하고 심령이 주님을 사모해야 하는 것이다. 갈급한 마음에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단비를 부어주신다.
성전에서 이사야가 본 것이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이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실 때 성전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빌딩이다. 보눙을 개조해서 만든 라이프찌히 교회도 하나님이 계시기에 교회이다. 성전이다. 만일 아무리 아름답게 예루살렘성전처럼 지어 놓는다해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돌집에 불과하다. 이사야가 성전을 무게 중심으로 놓았다는 말은 하나님을 중심에 모셔 놓았다는 말이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본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였다.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보았다.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했다. 여섯날개를 가진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창화한다. 그로 인해서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의 연기가 충만하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는 자신의 부정함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사야의 문제는 자기 자신이었다. 이사야가 발견한 것은 실제 자신의 모습은 연약하고 부정한 자신이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이사야는 회개할 사람은 자신이었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개혁될 사람임을 알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충만한 임재를 통해 이사야가 가지고 있었던 웃시야에 대한 일말의 소망과 미련을 털어 내셨다. 웃시야가 살아 있고 죽었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웃시야가 선정을 하느냐 아니하느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사야는 흔들렸던 자신의 방법과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생각을 무너뜨리고 그분의 생각을 모셔들일 때 무게중심이 바로 잡혀 흔들리지 않게 된다. 내 생각이 앞서게 될 때 무너진다.
서울 시내 번화가에 위치한 어느 교회 입구에 게시판이 있다. 40여 년 전에 어느 권사님이 권사 취임 기념으로 만든 것인데 재료가 나무인지라 비바람에 썩고 망가져 보기가 흉했다. 어느 목사님이 그 교회 집회를 인도하면서 담임 목사님께 물었다.
“돈이 들면 몇 푼이나 든다고 게시판을 저 모양으로 놔 두셨습니까. 수많은 사람이 오고가는 길거리인데 그럴싸하게 다시 만들어 세우도록 하십시오” 라고 그랬더니 담임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 “어느 집사님이 게시판이 보기 흉하다며 500만원 헌금을 이미 하셔서 칼라 스텐레스로 틀을 짜고 전기까지 가설해서 설치하려는 계획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게시판을 당장 착수를 하려다가 40년 전에 그것을 헌납하신 권사님이 생각나서 전화를 걸었답니다. 전화를 받고난 권사님의 대답은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됩니다”라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지금껏 게시판을 바꾸지 못하고 있는데 무슨 좋은 해결 방법이 없겠습니까”라고 그 초청된 목사님에게 묻는 것이다. 한참 생각 끝에 초청된 강사목사님이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게 뭔데요”
“오늘부터 기도를 시작하십시요.”
“무슨 기도를 시작하라는 겁니까?”
“주여 그 권사님 눈에 빨리 흙이 들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들은 자기 주장 자기의 생각 자기의 지혜를 가지고 중심에 넣고 선택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가게 되면 문제는 내 자신임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앞에 서게 될 때에 나의 생각과 고집이 얼마나 우매한 일인지 알게 된다. 나의 웃시야가 죽고 내 자존심이 죽고 나의 가치가 죽고 하나님의 생각과 그 임재의 충만함이 내 중심에 있을 때 우리의 삶은 무게중심이 잡혀 제대로 돌아가며 든든히 서게 된다.
III. 웃시야가 죽던 해에 이사야가 성전을 찾았다
삶에서 어떠한 것을 계획하고 있는가? 어떠한 문제와 어려움이 내 삶에 있는가? 무슨 일로 좌절하고 실망하고 속이 상해 있는가?
성전을 찾으라.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라.
웃시야가 있던 자리에 하나님이 중심하여 계시게 되면, 그의 죽음으로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 때 거기에 위로가 있다. 거기에 내 자신의 변화가 있다. 거기에 회복이 있다. 이사야는 스랍중 하나가 제단 숯불을 그의 입에 대니 정하여졌다. 그리고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말씀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한다. 성전에서 주님 안에서 삶에 새소망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