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남정맥 1구간
*김포 보구곶리-문수산-수안산-가현산-계양산-천마산-원적산-철마산-만월산-성주산-운흥산-목감사거리(86㎞, 2017.7.1.~2.)
최북단 수피령에서 시작한 9정맥도 이제 한남정맥 하나만 남았다. 안성의 칠장산에서 시작하여 백운산, 보개산, 수원 광교산, 안양 수리산, 인천 계양산, 가현산을 지나 강화도 앞 김포 문수산까지 190㎞의 한남정맥은 한강의 남쪽을 따라가는 산줄기로 정맥 중에서 가장 낮은 산들로 이어진다. 칠장산에서의 졸업 행사를 위해 역으로 김포에서 시작했다.
응원산행을 나오신 분들이 많아 일행은 19명으로 늘어났다. 김포 보구곶리에서 출발해 문수산을 오르는데 강 건너에서 꿈결처럼 대남방송이 들려왔다. 저쪽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웅얼거렸고, 이쪽에서는 허리 잘린 말들을 허공에 난사해 넘어오는 말들을 지웠다. 임진강을 지나 서해로 합쳐지는 김포의 한강에서 모국어는 서로의 강을 건너지 못했고, 간혹 강을 건넌 말들은 언어를 잃고 소음이 되었다.
산등성이를 따라 문수산성이 끊어질 듯 가늘게 이어졌다. 여름 잡목 틈새로 산성은 겨우 살아남았는데, 이쪽의 목숨들이 저 여린 금 하나로 어떻게 방어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산성 위로 북쪽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이 넘실거린다. 문수산 정상에 섰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강화도는 뭍에 매달려 있고, 한강 너머 안개 뒤덮인 개성시는 밑그림처럼 아득하고 희미해서 숨이 막혔다. 남북의 산들에서 흘러내린 물들은 이곳에서 한데 섞여 서로의 방어진 언저리를 핥고 서해로 빠져나간다. 경계의 강은 사선(死線)이어서 저쪽까지의 거리는 가늠되지 않았다. 잠자리들이 하릴없이 문수산 정상을 선무하고 있었다.
땡볕에 땀이 비 오듯 했다. 무수히 끊기고 짓이겨진 정맥 위로 도로와 아파트가 들어섰다.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도로변 가게가 나올 때마다 맥주와 커피를 사 마셨다. 수안산을 내려오면 학당고개가 나오는데, 그곳 식당에서 감자탕에 막걸리와 초당님이 빚은 술을 거푸 마셨더니 알딸딸하게 술기운이 올랐다. 가현산을 지날 무렵부터 검단신도시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풀 먹인 듯 뻣뻣한 힘줄을 불끈거리기 시작했다. 포장도로와 산을 번갈아 걸어 밤 10시쯤 아라뱃길이 지나는 아라마루 휴게소에 도착했다. 유리바닥에 서서 서해로 난 뱃길을 바라본다. 반듯한 길을 따라 물은 멈추고 억지로 도열한 빛들만 신기루처럼 흘렀다. 직선은 길도 아니고 강도 아니었다.
계양산을 오를 즈음 허기 탓인지 갑자기 속이 쓰렸다. 정상 데크에 누워 설핏 잠들었을까, 금세 듬성듬성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산을 내려가는데 중구봉을 지나 철마산을 지날 때부터는 굵은 빗방울이 세차게 쏟아졌다. 저 아래 부평시내는 빛의 꼬리를 흔들며 부옇게 젖어 들었다. 산길에 검고 눅눅한 숲이 드러누웠다. 정자에서 비를 그었다. 바닥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이는데, 빗소리는 우주의 시원이 되어 모든 경계의 담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애써 세웠던 도시의 결기도 무장 해제되어 속수무책 허물어졌다. 당신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방탕하게 휘젓는데, 간간히 너의 속울음을 타고 넘어 몇 푼어치 희열이 범람했다. 빗소리는 멸망의 징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50킬로 지점인 인천 가정동에 야외님, 풀무님, 컴맹님이 식사 지원을 나왔다. 비가림막을 치고 밥을 먹었는데 속이 메스꺼워 겨우 허기만 다독였다. 맥주도 마다하고 버스에서 십여 분 잤더니 속이 한결 풀어졌다. 새벽 3시, 빗속에 다시 길을 나섰다. 원적산을 내려오면 부평 산곡동이 나온다. 중학교를 다녔던 곳인데도 처음처럼 거리와 건물이 낯설다. 광주 5․18항쟁이 있고 나서 이곳을 떠났으니 벌써 37년 전 일이다. 산곡동 백마장 근처 방 한 칸을 얻어 누나랑 같이 자취했었는데, 그 시절 누나는 공장에 나가고 나는 학교를 파하고 나면 주로 방에서 혼자 지냈다. 연탄가스에 질식돼 쓰러졌던 나를 누군가 구해줬던 일이며, 야근하는 누나를 기다리다 새벽까지 책상에 엎드려 잤던 기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성적표에 적힌 1자를 누나에게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만월산을 내려오면 수현마을이다. 새벽까지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이제 그쳤다. 거마산, 성주산을 넘어 70킬로 지점 부천 소사 민들레농원에 도착했을 때는 일요일 오전 11시였다. 등목을 하고 누룽지백숙에 소폭을 말아 마셨다. 응원 온 손님이 많으니 짜디짠 대장도 인심을 쓰신다. 인천 응원팀은 그곳에 남아 술을 마시고,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비는 그쳤으나 후덥지근한 날씨가 부담스럽다. 시간이 지체되어 예정된 날머리 수원 지지대까지는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습한 포장도로를 오래 걸었더니 발바닥에 불이 나고, 가시넝쿨 우거진 산길에서 긁혀 팔이 쓰렸다. 풀독이 올라 팔이 벌게지고 긁힌 자국은 문신이 되었다. 길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다 겨우 운흥산에 도착했다. 204미터의 낮은 산이지만 정상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멀리 새로 짓고 있는 목감의 아파트들이 한눈에 보였다.
오후 4시쯤 목감사거리에 도착했다. 서두르면 수리산을 넘어 산본까지는 갈 수 있겠으나 대장은 이곳에서 산행 종료를 결정했다. 근처 목욕탕에서 불은 때를 밀었다. 산행 후 사우나는 처음이다. 손님이 많으니 복도 이런 복이 없다. 무의미한 줄 알면서도 꾸역꾸역 나선 이 길, 어느덧 그 길던 길들을 뒤로 하고 100킬로만 남겼으니 혼인서약처럼 허망한 발걸음도 이제 멈출 때가 된 것인가.
첫댓글 그렇군요.
허망하니 정맥길도 한구간 남아있군요.
그동안 산행기 읽는 재미가 솔솔했는데....
수고하셨습니다.
지루한 글 읽어주셔서 항상 감사했습니다. 무더위에 건강 조심하시고요~~~
히스토링이 담긴 산행기 쓰신다고 늦었네요!
오래전 객지였던 산곡동에서
열혈공으로 중딩시절 부터 1등을 하고 S대 까징 쭉~잘 나갔네요!
개천에서 용 났지어라~~ㅎ
한남정맥길 첫 구간 다양한 경험도 했지요~
벌써부터 정맥 끝나면 뭘~
하지 하는 분도 있네요!
"世上萬事"가 흘러가면 추억이 되듯이 막상 정맥길도 끝이 나면
많이 그립겠지요?
남은 길,맘에 새기면서 뜻을 두고
걸어 봅시다요~~^-^
긍께유, 끝나면 지루한 길도, 힘들었던 길도, 재미 있었던 길도 모두 그리워지겄지유. 마무리 잘 허십시다요~~~
함께 산행하면서 즐거운시간 보낼수 있었습니다
멋진사진과 글 잘보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다음산행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대대로 대장님이 고생 많이 하셨지요. 함께해서 즐거운 산행이 되었지요. 또 뵙겠습니다 ~~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열심히 사시는 분이시군요.
글도 재밌고, 잘 읽었읍니다.
정맥 졸업,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대간17차 때 같이 걷고 이번이 처음인 것 같네요.
정맥 끝나면 지부산행에서 자주 뵙겠습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손변님의 산행기는 꼭꼭 씹어서 읽는데...꼭꼭 씹는 밥 구수하기는 더 구수하지요?^^ 이번 산행기는 더 구수하군요.
이제쯤은 9정맥 날머리냄새 나실 듯 합니다.^^
비록 길을 걷는 일이 허망하기가 혼인서약 같고, 길위에서 길을 찾는 얄궂은 일입니다만....
인류가 앞발의 자유를 얻고, 두발로 걷게 된 진화의 댓가를 치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9정맥 졸업 미리 축하드리고 그동안 먼길 걸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그동안 넋두리 같은 산행기 읽어 주느라 애쓰셨습니다.ㅎ
본문보다 수행중님의 댓글이 더 수필이고 시였지요.
허망하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누군가 정해 놓은 길에서
뭔가 의미를 찾는 일은 처음부터 가당찮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는 언제나 그 허망한 길 위에서 두리번거릴 것입니다.
참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응원도 감사하구요~~~
더운데 비와 함께 걷느라 고생했어요
언제 문수산정상에 누각이 들어섰구만~~
정자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되나 보네. ㅎ 이번 주말에도 비가 온다는디 단도리 잘 해오셔~~~
수필집처럼 미사여구의 산행기 정성이 대단하십니다
지나온길을 뒤돌아볼수있는 여유가 생겼으니 종착역이 코앞이네요
우리보다 늦게 시작하고 일찍미치는군요 ~~ㅎ
한달에 80km정도도 힘든데 곱을 더해걸었으니 대단들 하십니다
과히 철의 건각들 답습니다 미리 축하드리구요 애많이쓰셨습니다 잘보고갑니다
정신없이 걷느라 제대로 보기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유롭게 걷는 5차팀이 부럽기도 하네요. ㅎ 남은 길 즐겁게 걸으시길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
참 세월 빠르게 지나가네~~
칭구님 소설같은 산행기 접하고 야~
이렇게도 쓰는구나 했던게 엇그제 같은데
졸업이라니~~
갑장인줄 일찍 알았으면 더 살갑게 자주 놀러가고 말도 붙히고 했을낀데~~
졸업해도 자주 놀러 오기요~~
그러게나 이리도 빨리 지나는 것을. 산길에서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네 그려.
칭구님이 많이 도와줘서 무사히 마치게 되었네. 감사하고~~
큰 짐도 내려놨으니 이제 중부지부 산행에 얼굴 보러 자주 놀러갈라요~~~
한남정맥 첫구간도 벌써 추억으로 남았네요
좋은 글 볼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졸업 구간에서 뵐께요
참 오랜 시간이 사이에 있었던 거 같아요. 어찌 보면 별 것도 아닌, 또 달리 생각하면 엄청난 일이 있었던 것이지요. 긴 걸음 대장님이랑 같이 할 수 있어서 늘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