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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부족한 사람을 기장 교역자대회의 강사로 초청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기장 교단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사람입니다. 강원용 목사님의 신학적 입장을 많이 비판했고 박종화 목사님의 선교적 입장도 많이 비판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강원용 목사님의 역사적 및 교회적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고 강원용 목사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박종화 목사님의 균형 잡힌 신학적, 목회적, 사회적 입장을 너무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이동휘 목사님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고, 이중표 목사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전병금 목사님을 많이 좋아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기장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기장 교단 분들도 저를 별로 싫어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2년 전에는 기장교단 장로기도회에 저를 강사로 초청해주어서 가서 강의를 했고 어제는 경동교회에 초청해주어서 일부 이부 예배의 설교를 했습니다. 어제 설교를 시작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이 살아 계실 때 매년 11월마다 강변교회에 오셔서 은혜로운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오늘 그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경동교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강원용 목사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그래서 강원용 목사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몇 달 전에 “보고 싶어지는 사람들”이란 제목의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물론 어머니와 아버지와 어린 아들 철원이가 보고 싶지만 목사님들 일곱 분이 보고 싶어진다는 글을 썼습니다. 우선 박윤선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고 했습니다. 가식과 꾸밈이 없는 순수한 분이셨습니다. 장경재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고 했습니다. 착하신 분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고 했습니다. 약하고 겸손하고 부드럽고 착하신 분이었습니다. 김치선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고 했습니다. 내가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 나에게 깊은 신앙적인 감화를 끼치신 분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고 했습니다. 내가 중학생 시절 나의 감성과 지성과 의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이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고 했습니다. 폭 넓은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가진 분이었고 모두를 품고 아우르는 넓은 분이었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벗어버린 순수하고 착한 분이었습니다. 이분들이 너무너무 보고싶어집니다. 박종화 목사님과는 누구보다도 가까이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틀 전에도 만났고 오는 화요일 아침에도 만날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이제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목사, 우린 누구인가?” 라는 제목을 가지고 소박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목사, 우린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현실적인 답을 제시하기는 너무 힘들 것 같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사상은 너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촛불집회 하나만 보고도 “빨갱이” “사탄” 이란 표현을 쓰는 목사들도 있고 “진리와 정의의 횃불” 이란 표현을 쓰는 목사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목사, 우린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목사의 원형과 모델을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첫째, 목사 바울은 우선 목사 자신의 권위를 내 세우는 대신 목사 자신의 약함과 무능과 죄성을 철저하게 들어낸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후2:3).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나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고전3:5-7).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고전4:13).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오늘날 상당수의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자기들의 권위를 지나치게 내 세우는데 비해 목사 바울은 자기의 약함을 궁핍을 내 세운 약함과 궁핍의 목사였습니다. 둘째, 목사 바울은 설교할 때 로마의 유창한 웅변술이나 헬라의 심오한 지식을 도구와 방편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눌한 표현을 했고 어리석어 보이는 논리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2:1).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고전2:4).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고후10:10).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오늘날 상당수의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심오한 지식과 유창한 설교에 지나친 관심을 나타내 보이는데 비해 목사 바울은 말과 논리의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어리석음의 목사였습니다. 셋째, 목사 바울은 설교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고 그것만 전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오늘날 상당수의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현세적인 정치 사회 경제적인 발전과 성공에 지나친 관심을 나타내 보이는데 비해 목사 바울은 멸시와 조롱의 대상인 십자가만을 증거하고 자랑한 십자가의 목사였습니다. 넷째, 목사 바울은 목회하고 설교할 때 심리학이나 마케팅이나 엔터테인먼트나 음악이나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의 감성을 사로잡으려는 대신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이 움직여 믿음의 생활을 하게 하도록 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상당수의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다분히 각종 유행 프로그램에 지나친 관심을 나타내 보이는데 비해 목사 바울은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의지한 성령의 목사였습니다. 다섯째, 목사 바울은 목회하고 설교할 때 사랑과 눈물과 책망과 희생의 마음으로 했습니다.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31).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4:14,15).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전4:21). “내가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2:4).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재물을 허비하고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고후12:15). 상당수의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책망이 없는 아부로, 희생이 없는 탐욕으로 치닫는데 비해 목사 바울은 사랑과 눈물과 책망과 희생으로 목회한 사랑의 목사였습니다. 여섯째, 목사 바울은 목회하고 설교할 때 대상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는 아비와 목자의 심정으로 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1,2).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전5:1,2). 상당수의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양 무리의 사정을 깊이 살피는 것보다는 자기 중심적으로 치닫는데 비해 목사 바울은 양 무리의 사정을 깊이 성찰한 목자다운 목사였습니다. 일곱째, 목사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힌 하나님 중심적인 목사였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4:3,4).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21). 상당수의 목사들이 자기의 성공과 명예에 사로잡혀서 목회하는데 비해 목사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혀서 달려간 하나님 중심적 목사였습니다. 첫째, 인간 한경직은 고난과 약함의 사람이었습니다. 한경직이 17세 되던 1919년 평양 영성소학교 교사로 봉직하고 있던 때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문 당한 후 두려움과 무서움에 떨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비관하기도 했습니다. 한경직이 27세 되던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예일 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때 폐결핵 3기라는 진단을 받고 그는 또 한번 인간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절감했습니다. 진학은 물론 인생 자체를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절망감과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한경직이 1932년 귀국 후 모든 좌절을 딛고 1933년부터 신의주에서 목회의 길로 매진하기로 헌신했으나 1938년 일제의 강요에 무릎을 꿇는 연약함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해방 후 생명의 위협으로 인해 신의주 제2교회의 양 떼를 두고 월남하는 약함을 들어내기도 했고, 1950년 6.25 전쟁 중 또 다시 영락교회의 양 떼를 두고 마포의 한강을 건너는 약함을 들어내기도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가 자신의 약함을 또 한번 드러낸 것은 군사독재정권 시절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2년 동안 노환으로 많은 고난과 약함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한국교회와 민족의 고난을 몸에 짊어지고 약하고 아프게 살았습니다. 그의 약함이 그를 존경 받는 위대한 목사로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강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이 시대에 우리는 인간 한경직에게서 약한 사람을 봅니다. 둘째, 인간 한경직은 참회와 회개의 사람이었습니다. 한경직이 27세 되던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예일 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때 폐결핵 3기라는 진단을 받고 그는 슬픔과 절망 중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처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사람들이 자기를 높일 때마다 자기는 부족한 죄인임을 거듭해서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형식적인 고백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실수들을 절감한 한 영혼의 진솔한 고백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다음과 같이 자기의 허물과 죄를 고백한 일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저 자신을 돌아볼 때 허물 많고 죄 많은 부족한 것뿐입니다. 한가지 드릴 말씀은 나는 육신으로 지금까지 살아 남아 있을 수 없는 중병의 사람이요, 또 내가 주님을 몰랐더라면 내가 무슨 일을 했을지 모를 사람을 목회자로 세우신 주님의 은혜를 참으로 잊을 수 없습니다.” 한경직 목사가 한국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자기의 죄를 고백한 것은 1992년 템플턴상 수상을 축하하는 모임에서였습니다. 1992년 6월 18일 오후 3시 여의도 63빌딩에서 축하예배를 드리는 자리에서 그는 인사말을 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먼저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이런 죄인을 하나님이 사랑하고 축복해주셔서 한국교회를 위해 일하도록 이 상을 주셨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한경직 목사의 죄를 고백하는 참회의 모습에 충격과 진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의인은 많지만 죄인은 찾아보기 힘든 이 시대에 우리는 인간 한경직에게서 죄인을 봅니다. 인간 한경직은 죄를 고백하는 참회와 회개의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인간 한경직은 기도와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한 평생을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친 기도와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자신과 민족의 고난과 약함과 아픔과 절망 중에서 드려진 진솔하고 처절한 눈물의 기도였습니다. 그가 대학교 3학년 때인 1924년 여름 방위량 선교사를 따라서 황해도 구미포에 갈 일이 있었는데 구미포 해변을 혼자 걸으면서 세미한 음성을 듣고 백사장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오랜 시간 동안 깊은 기도에 빠진 일이 있었습니다. 한경직이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진학할 준비를 하고 있던 때인 1929년 폐결핵 3기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한경직은 하나님만 바라보며 처절한 눈물의 기도를 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한경직 목사가 1942년 신의주 제2교회에서 추방당한 후 1945년까지 보린원 원장으로 지내면서 명상과 기도의 시간을 가지곤 했는데 어느 날 언덕에 올라가 기도하는 중 이상한 환상을 보고 깊은 기도에 빠진 일도 있었습니다. 1950년 6월 영락교회당을 건축하고 준공감사예배를 드리자마자 6.25전쟁으로 인해 한경직 목사는 안양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에까지 밀려 내려가는 비극을 경험했는데 부산에서 400여명의 목회자들과 함께 하나님께 무릎 꿇는 회개와 눈물의 기도를 드린 일도 있었습니다. 한경직 목사의 눈물의 기도는 민족의 비극과 함께 계속되었는데 한경직 목사는 한 평생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한경직 목사의 남한산성에서의 마지막 26년 동안의 삶도 기도와 눈물과 묵상으로 이어진 삶이었습니다. 눈물이 메마른 이 시대에 우리는 인간 한경직에게서 눈물의 사람을 봅니다. 넷째, 목회자 한경직은 설교와 전도를 쉬지 않은 복음전파의 목회자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설교하기 위해서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한 평생 설교하며 복음을 전파한 말씀의 목회자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신의주 제2교회에서도 그랬듯이 영락교회를 시작하면서 교회의 3대 목표를 전도, 교육, 봉사로 정하고 전도를 교회의 첫째 사명으로 삼으며 교회 이름을 처음에 베다니 전도교회라고 불렀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목회 시초부터 설교를 통한 복음전파에 주력했습니다. 한경직 목사가 그의 목회 사역에 있어서 복음 전파와 교육과 봉사에 주력한 것은 첫째는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길이 바로 그 길이라는 확신에서 비롯했고 둘째는 그의 성서적이고 복음주의적인 교회관에서 비롯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평생 강단에서 설교를 통해 진리와 은혜의 말씀을 선포했는데 그의 설교는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며 상황적인데 평이하고 경건하고 은혜로웠습니다. 한경직 목사의 복음전파의 열정은 군복음화운동과 학원복음화운동과 아세아복음화운동 세계복음화운동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어느 대담을 마무리하면서 그의 마지막 소원을 민족복음화와 아세아 및 세계복음화라고 밝혔습니다. “민족이 복음화 되고 그 힘이 합하여 공산당까지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평화통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를 아시아와 온 세계 복음화의 발판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자기 세력확장과 자기 왕국건설에 여념이 없는 경쟁시대에 나라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일념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만을 전하기 위해서 한 평생을 바친 복음전파의 목회자를 우리는 한경직 목사에게서 발견합니다. 다섯째, 목회자 한경직은 돌봄을 쉬지 않은 사랑과 봉사의 목회자 목회자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봉사는 복음의 생활화요 신학의 실천이었습니다. 그것은 나라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가 1945년 10월 월남 후 12월 2일 서울 저동에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하고 월남하는 피난민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동시에 양식과 거처할 숙소를 마련하는 일을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교회창립 1주년을 맞은 1946년 12월 1일 주일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면서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 민중들을 인도하고 돌보는 사회 봉사임을 밝혔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영락 보린원을 비롯해서 모자원, 경로원, 노인요양소, 농아원, 장애아원, 어린이집, 재가노인복지 상담소 등을 세웠고 1990년 1월 17일부터는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폭 넓게 펴나갔습니다. 이창로 장로는 목회자 한경직의 특징중의 하나는 ‘긍휼’의 목회자라고 지적했는데 한경직 목사의 사랑과 봉사의 삶은 그의 긍휼에서 비롯했다고 말했습니다. 한경직 목사의 봉사는 이기적인 봉사도 과시적인 봉사도 아니었습니다. 이타적인 봉사였고 드러내지 않는 숨은 봉사였고 동족 사랑과 주님 사랑에서 우러나온 순수한 봉사였습니다. 자기 과시와 자기 명성을 위한 꽹과리 소리가 요란한 선전시대에 이름도 소리도 없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소유와 자신을 모두 허비한 사랑과 봉사의 목회자를 우리는 한경직 목사에게서 발견합니다. 여섯째, 목회자 한경직은 화평을 추구한 협력의 목회자 목회자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교회 일을 보면서 제일 애쓴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것은 화평이라고 대답한 일이 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교회 안에서 온유와 겸손을 바탕으로 화평을 이루어간 화평과 협력의 목회자였습니다. 최창근 장로는 한경직 목사의 목회의 첫째 특징을 화평의 목회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와 같은 화평의 목회는 한경직 목사의 교회관에서 비롯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머리에 붙은 몸인데 그 몸의 통일성과 공동성이 결코 파괴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업보다 인화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교회의 안과 밖에서 화평을 추구한 협력의 목회자였습니다. 자기의 신앙은 보수이지만 교회론에서는 에큐메니칼하다고 지적하곤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영락교회의 목회뿐 아니라 한국장로교회와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목회에 있어서도 화평과 협력과 연합을 추구해 나갔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파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조화와 통일을 추구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손을 잡고 모두를 협력하며 격려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연합회 회장(1955-1956),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총재(1982-1984),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주역 등으로 한국교회의 초 교파적 연합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모두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고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민족을 동서 남북으로 갈라놓은 갈등과 분열이 최고조에 달한 이 시대에 우리는 온유와 겸손과 인내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하나로 치유해간 그리고 민족의 평화 통일을 염원한 화평과 박애의 목회자를 한경직 목사에게서 발견합니다. 일곱째, 목회자 한경직은 민족과 세계를 품은 역사의식의 목회자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역사의식과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산 분이었습니다. 아마 민족과 세계를 바라보는 역사의식은 오산학교의 이승훈 선생과 조만식 선생으로부터 배웠을 것이고 후에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폭 넓게 연마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일대학 박사과정에서 교회사를 연구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귀국 후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몸으로 살아가면서 역사의식을 스스로 터득하며 역사의식을 가지고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다양성 가운데서 조화를 이루는 역사적 안목의 비결을 지녔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평생 한국 나라와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봉사한 분이었지만 동시에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세계를 품고 사랑하며 봉사한 분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성서적 애국심이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우선적으로 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이기주의와 지역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교회를 향해 인류의 연대성을 강조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신앙을 자기 개인의 울타리 안에 가두거나 목회를 개 교회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지 않고 이웃과 사회와 민족과 세계의 울타리로 뻗어나아가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삶과 활동의 범위는 넓고 다양했습니다. 그의 삶과 사역은 전도와 교육과 봉사는 물론 사회복지, 치안유지, 정당활동, UN 활동, 세계선교와 구호활동 등 다양한 영역에 미쳤습니다. 그는 한국 사람과 한국교회가 지니지 못했던 폭 넓은 역사의식과 역사적 안목을 지니고 폭 넓게 살았습니다. 끝으로, 인간 한경직과 목회자 한경직은 삶이 깨끗한 청빈의 사람이요 목회자였습니다. 결국 그분은 예수님처럼 사신 분이었고 성 프랜시스처럼 사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친히 가난하게 사셨고 성 프랜시스도 “나는 가난이란 여인과 결혼했다”고 선언하고 친히 가난하게 살았는데 한경직 목사도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면서 평생 가난하고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본인의 말 그대로 빈손 들고 왔다가 빈손 들고 간 깨끗한 청빈의 사람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가 2000년 4월 19일 오후 1시15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우리 곁을 떠났을 때 세상은 입을 모아 그를 가리켜 “청빈의 사람”이었다고 말하며 그를 높이 기렸습니다. 명예욕과 물욕과 정욕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부끄러운 오늘의 시대가 가장 보고 싶어한 사람의 모습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청빈과 사랑의 사람 장기려 박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작은 예수”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아쉬워했듯이 청빈과 사랑의 사람 한경직 목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작은 예수”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모두들 아쉬워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통장, 집, 재산이 없는 3무의 삶"을 살았습니다. 청빈이 그분의 삶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분의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손봉호 교수는 한경직 목사처럼 청렴하고 철저하게 절제하는 성화된 삶을 산 사람은 “전 세계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고 평했습니다. 저는 인간 한경직과 목회자 한경직의 면모를 살피고 나서 처절한 고뇌를 느낍니다. 절망적인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위대한 참 목자 한경직 목사를 존경하고 예찬하고 흠모하는 것이 도대체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진실도 없고 겸손도 없고 청빈도 없고 참회도 없고 눈물도 없고 숨김도 없고 사랑도 없는 나와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진실 대신 거짓, 겸손 대신 교만, 청빈 대신 탐욕, 참회 대신 위선, 눈물 대신 강퍅, 숨김 대신 자랑, 사랑 대신 비난 등으로 가득한 내가 설 곳은 어디란 말인가? 처절한 고뇌와 절망적인 부끄러움과 깊은 탄식을 느낄 뿐입니다. 단지, 이런 분을 이 땅에 아니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부끄러운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때문이고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들과 같은 고귀한 신앙의 선배들의 제물된 삶과 죽음 때문임을 고백하며 다시 한번 하나님께 부끄러운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 후 어떻게 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강원용 목사님이 이끄시는 “크리스찬 아카데미” 모임에 자주 초청을 받아 강연도 하고 논찬도 하고 참여도 했다. 거의 대부분 나는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는 발언을 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내가 강 목사님이나 그 분의 입장에 서 있는 분들(예 박종화 목사)의 신학적 입장을 비판하는 발언을 할 때 마다 강 목사님은 싫어하시지 않고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김 목사님이 여기 오셔서 비판을 해 주셔서 저는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나를 좀 놀라게 했다. 심지어 1990년 6월 크리스찬 아카데미 25주년 때는 나에게 주제 강연까지 부탁했다.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사회 정치 참여”란 제목을 주셨는데, 내가 그런 주제는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많이 다룬 주제인데 그것 보다 더 중요한 주제인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영적 각성운동”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씀 드렸을 때 강 목사님은 쾌히 승낙했다. 그래서 나는 그 주제를 가지고 주제 강연을 했다. 강원용 목사님은 통이 큰 분이셨다. 우리 보수주의자들이 배워야 할 점이다. 사실 나는 변선환 교수의 종교다원주의 입장을 비판하곤 했는데 변 교수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어느 날 변 교수의 입장을 비판하는 글을 신문에 싣고는 좀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전화를 걸고 또 비판하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변 교수는 의외의 답변을 했다. “김 목사님이 비판하는 글을 자주 쓰시니까 내가 살맛이 나지 않습니까!” 나는 북한동포 돕는 일을 하면서 강원용 목사님과 자주 만나게 되었다. 사실 나는 본래는 반공주의자였고 반일주의자였는데 1990년 전후부터 차츰 북한이나 일본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북한동포 돕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북한동포 돕는 일에 직접적인 도전을 준 사람은 스티브 린튼 박사였지만 배경적인 격려를 제공한 사람은 강원용 목사님이었다. 사실 나는 강원용 목사님 때문에 김수환 추기경, 오태순 신부, 송월주 스님, 법륜 스님 등을 만나 가까이 지내며 북한동포 돕는 일을 하게 되었고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에 있는 우리 조선족 고려인 어린이들과 동포 돕는 일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넓고 긴 안목의 민족 의식과 역사 의식을 깨우쳐 준 분이 바로 강원용 목사님이었다 강원용 목사님은 나에게 보다 넓은 차원의 교회 연합운동을 하는데 도전을 주었다. 나는 본래는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의 교회 연합운동을 벌여왔다. 사실 나는 순복음 측이나 기장 측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차츰 한국교회의 진보와 보수 양극과도 연합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2003년 5월 강원용 목사님과 조용기 목사님 등을 모시고 세종문화회관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독교 지도자 모임”을 준비하는 일에 깊이 참여했고 2005년 4월 강변교회에서 강원용 목사님, 김창인 목사님, 조용기 목사님 등과 함께 참회의 고백을 하는 일에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지난 수년 동안 강원용 목사님은 나를 많이 격려해주셨고 나는 강 목사님을 많이 존경하며 따르게 되었다. 지난 수년 동안 강변교회에서 매년 11월 마다 한 달 동안 원로 초청 주일 예배를 드리곤 했는데 강 목사님은 꼭 오셔서 십자가 중심의 복음 설교를 해주셨다. 강 목사님도 아주 좋아하셨고 우리 교인들도 아주 좋아하며 많은 은혜를 받곤 했다. 오실 때마다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선물 세 개씩 준비하여 드리곤 했는데 강 목사님은 너무너무 좋아하시면서 다른 곳에 가셔도 그 이야기를 여러 번 하셨다고 했다. 강 목사님은 자신이 시작하신 “평화 포럼”에 나를 꼭 참석하게 하셨고 나는 평화 포럼에 참석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게 되었다. 북한을 향해 “아주 못된 놈들”이라고 솔직하게 심정을 토로하시면서도 그래도 북한과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모든 노력을 경주하시는 것을 옆에서 바라보면서 나는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그분의 영향이 노무현 김대중 정부는 물론 김영삼 전두환 박정희 정부에 이르기까지 길고 깊게 미친 것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존재와 위치가 얼마나 무거웠는지를 가늠해보기도 했다. 강원용 목사님은 나를 좋아하셨다. 그분의 마지막 저서가 된 “내가 믿는 그리스도”에 대한 추천의 글을 나에게 써 달라는 부탁을 하셨고 그리고 출판기념 모임에서 내가 소감의 말을 했을 때 나의 소감의 말을 제일 좋아하셨다. 경동교회 전교인 신앙강좌에 초청해주셔서 두 번 말씀을 전했는데 강 목사님께서 제일 앞 자리에 앉아서 경청해주시면서 너무너무 좋아하셨다. 민족과 교회의 큰 지도자이신 강원용 목사님을 가까이에서 뵈오며 많은 것을 배웠고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받았던 것은 나의 큰 영광이라고 하겠다. 그분의 마지막 고백을 나는 너무 귀하게 여기며 기뻐하고 감사하며 즐거워한다. “모든 것이 변하고 새로워지고 상대화되었으나, 신비롭게도 항상 제 삶의 중심, 마음의 저 깊은 곳에는 열네 살 청소년 시기에 믿기로 작정하고 나의 주님으로 받아 모신 예수님이 늘 떠나지 않고 계셨습니다.” 강원용 목사님의 저서 「내가 믿는 그리스도」는 파란만장한 한 평생을 살아온 한 영혼의 진솔한 신앙의 고백과 한국교회를 향한 애정어린 권면으로 이어져 있다. 모든 신앙의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강원용 목사님도 생의 마지막에 도달하면서 진솔하고 진지한 신앙의 고백과 함께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신앙관과 인생관을 피력했다. 부족한 사람이 한국의 큰 지도자이신 강원용 목사님의 저서에 대한 ‘추천’의 글을 쓰게 된 것을 황송하게 생각한다. 중요하게 받아드린 것을 요약해본다. 첫째 「내가 믿는 그리스도」에는 저자의 그리스도에 대한 진솔한 신앙 고백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새로워지고 상대화 되었으나, 신비롭게도 항상 제 삶의 중심, 마음의 저 깊은 곳에는 열네 살 청소년 시기에 믿기로 작정하고 ‘나의 주님’으로 받아 모신 예수님이 늘 떠나지 않고 계셨습니다.” “한 가지 분명하게 고백 할 것은 험한 세상을 살수록 또 역사의 모순과 죄성의 깊이를 경험하면 할수록 오히려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그분이 더욱 제 생명의 중심에 좌정하셨으며, 지혜를 구하거나 기적을 찾는 종교가 아니라 십자가의 어리석은 도를 가르치신 그분을 주목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저자의 그리스도 신앙은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의 틀 안에서의 신앙이다. “기독교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삼위로서 일체가 되신다는 신앙고백 위에 서 있습니다.” 「내가 믿는 그리스도」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떨리는 가슴의 고백과 함께 한국교회를 위한 저자의 애정어린 권면이 나타나 있다. “부족하지만 오랫동안 한국교회를 섬겨온 사람으로서 오늘의 한국교회를 향한 바람이 간절하였습니다. 무엇보다 한국교회가 성서에서 증언하는 예수님의 진리와 복음의 빛 아래서 철저히 정화되고 갱신되어야 합니다. 이런 절박한 심정에서 제가 믿고 증언해온 십자가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담담히 이야기해보고 싶었습니다.” “생을 마감하기 전에, 제 평생 제 삶의 중심에 계시면서 저를 사로잡아 늘 동행해 오신 그리스도 그분에 대한 저의 고백을 쓰지 않을 수 없어 떨리는 마음으로 글을 썼습니다.” 둘째 「내가 믿는 그리스도」에는 포괄적이고 종합적이고 균형 잡힌 사고와 이해와 상상력의 틀에 비친 저자의 신앙관과 인생관이 나타나 있다. 우선 성서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그동안 많은 부작용을 초래했던 ‘축자 영감설’ 즉 성서의 문자주의를 넘어서는 ‘유기적 영감설’에 기초한다. 그는 루터가 성경을 “아기 예수가 누워 있는 말구유”에 비유한 것에 근거하여 성경에 나타나 있는 역사 문화적 전통의 유산들이 모두 중요하지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누워있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올바로 지적한다. 즉 성경을 “하나님이 어느 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주신 절대 영감의 천계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고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성서의 진정한 권위와 영감성은 그 책이 지닌 시대와 역사의 제약성, 인간 언어의 한계성, 입으로 또 문자로 전해져 내려온 긴 역사 속에서 원 자료를 편집하고 전승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오류나 한계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여전히 인간의 구원에 필요 충분한 진리와 권위를 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서의 문자가 모두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라는 데는 결코 이의가 없습니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보편성을 이렇게 진술한다. “우리는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으로 일하시는 그리스도를 어디에서 만나는가를 생각해봅니다. 그리스도는 이제 육신의 존재로서가 아니고 생명을 살리며 창조하시는 영으로서, 개인의 심령 안에, 교회공동체 안에, 그리고 우주적 생태계 안에 현존하십니다.” “그것은 비유하건대, 우리 몸을 구성하는 60조 이상 되는 세포의 세포핵 안에 들어오셔서, 영적으로 병든 유전자 요소를 개조하고 새롭게 하여 건강한 세포로 바꾸어 주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가 지나치게 성서중심주의, 교회중심주의 기독교 체계였다는 것을 반성하였습니다. 성서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성서 안에 가두어놓는 결과를 초래했고, 교회가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영역을 교회 중심으로만 제약하여 세상과 우주의 전 영역에서 일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왜소화 시켰다는 반성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전 창조세계 안에서, 우주적 그리스도의 현존과 구속사업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주적 그리스도’ 신앙을 소위 범신론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내가 믿는 그리스도」에는 성경의 가르침을 오늘의 현실에 연계하여 해석하려는 저자의 애정 어린 책임성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성탄절 예수 탄생의 설화는 그저 아름다운 목가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전하고자 하셨던 메시지의 본질은 히브리인 같은 세상의 민초들과 가난하고 핍박 받은 사람들, 그리고 고통 가운데서 구원을 기다리던 사람들 가운데 오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저 밑바닥을 치유하는 따뜻한 힘이 되어줍니다.” “누가복음의 예수 탄생 이야기는 권력과 부와 권모술수와 빈익빈부익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이 세상 질서에 대하여 ‘영원한 비폭력적 혁명’을 선포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유혹도 오늘의 상황에 투영하고 연계하는 상황적 해석을 시도했다. "인간이 약할 때가 아니라 도리어 강할 때, 거룩한 소명감으로 넘쳐 날 때,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마음으로 다짐할 때, 바로 그때 유혹이 찾아온다는 것이지요. 더욱 놀라운 사실은 광야의 유혹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으로 예수님을 몰고 간 존재는 마귀 또는 사탄 같은 적대자만이 아니라 성령도 우리를 유혹의 상황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입니다. 조용히 오늘날 우리 사회와 종교계를 둘러보십시오. 나라와 민족과 세계를 망치고 자기 자신을 망치는 사람들, 교회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람들, 그들이 과연 약하기만 한 보통 사람들인지요? 그들 대부분은 사실 애국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큰 종이라고 자처하는 목회자들입니다. 그들은 영웅이거나 독재자이며, 권력과 부를 가지고 큰일을 도모하는 사람들입니다. 유혹은 그들에게 그만큼 더 강력하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성서의 빛에 비추어 현실을 분석 비판하는 저자의 통찰력은 예리하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은 세 가지 유혹을 오늘의 경제 정치 종교적 유혹의 상황과 연계하여 해석함은 매우 적절한 해석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은 세 가지 유혹은 경제지상주의의 문제와 정치적 지배욕망의 문제와 종교적 자기신격화의 문제라고 지적하며 그것을 한국의 현실과 연계하여 정확하고 올바로 해석했다. "경제문제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런 중요함 때문에 유혹과 시험이 생기기 쉬우며, 경제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하거나, 타협하거나, 심지어 비인간적 행동과 가치관까지도 용납될 것 같은 착각이 생겨난다는 데 문제점이 있습니다. 절대 빈곤의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박정희 씨가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뒤 이 국민적 문제를 극복하겠다는 집념으로 노력한 점은 충분히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심각한 문제점을 발견합니다. 그가 ‘절대 빈곤 극복, 경제성장 제일주의’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국민 전체를 휘몰아가던 정책 실현 자체가 글자 그대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되었습니다. 지금도 여당과 야당은 한목소리로 경제와 민생문제를 무엇보다 우선 해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경제를 살리고 민생의 문제를 해결해야지요. 그러나 경제의 발전은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 말하자면 최고의 가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골고루 잘살 수 있게 만드는 수단이 되어야지 그것이 하나의 가치기준처럼 되어버릴 때 우리 사회는 곧바로 사탄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저자의 예리한 분석은 종교계를 향한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받은 세 번째 유혹은, 종교적인 기사와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명예심과 허영심, 인기주의에 대한 유혹입니다. 영적 탐욕이나 종교적 명예심의 경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기 자신도 속아넘어가게 만들지요. 이 유혹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메시지는 우리가 사는 21세기에서 소위 파퓰리즘에 대한 문제입니다. 대중의 인기와 환호, 그리고 갈채를 얻으려는 욕망은 단지 정치계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닙니다. 파퓰리즘의 문제에 가장 심하게 노출되어 있는 종교가 기독교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 세 번째의 유혹과 사탄의 시험에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의 혼란은 한 마디로 말하여 이 셋째 시험에 빠진 종교지도자들의 영적 탐욕과, 자신이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다는 허황한 과대망상증이 그 원인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유혹을 받을 때를 대비하여 제자들에게 주의를 당부하였습니다. ‘너희가 제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당부하였으며, 세상을 떠나기 전 고별설교를 한 뒤에도 "내 제자들이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넷째 「내가 믿는 그리스도」에서 저자 강원용 목사님은 성경을 오늘의 경제 정치 종교적 상황에 연계하여 상황적으로 해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성경에 나타난 이적과 십자가의 죽음과 육체의 부활 그리고 십자가를 통한 죄 사함과 구원을 문자 그대로 믿는 진솔한 믿음을 표명한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기적은 가능하며, 예수님이 활동하신 고대만이 아니라 현대에도 기적은 발생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두 중심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고, [그것은] 두 개의 주춧돌이요, 두 개의 기둥입니다.” “성서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에 관련된 이야기는 모두 십자가를 향한 이야기이므로, 십자가 사건은 예수 생애의 결승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예수의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이 나의 죄를 모두 씻고 나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속량했다.’는 고백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자기 희생을 통해 보이신 절대사랑, 절대용서, 무조건적 용납, 무제약적 자기희생의 능력과 생명력이 나의 죄를 씻고, 죽음의 권세에서 풀어내며, 영원한 생명 나라로 이끌어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깊이 알고 보면 ‘십자가 신앙’과 ‘부활 신앙’은 따로 떼어놓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신앙’ 없는 ‘부활 신앙’은 공허한 신화나 관념적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부활 신앙’ 없는 ‘십자가 신앙’은 맹목적이 되거나 위대한 순교자의 영웅담에 그치고 맙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놀라운 사건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하나님이 일으키신 사건입니다.” “예수의 부활사건은 ‘생명이 죽음을 이긴 사건’이며, ‘사랑이 증오를 정복한 사건’이고, ‘진리가 불의를 폭로하고 승리한 사건’이며 ‘생명이 죽음을 이긴 사건’입니다. 부활은 만물의 종말의 날에 일어날 ‘새로운 창조’가 앞당겨 예수 안에서 먼저 일어난 ‘첫 열매’요, 종말론적 만인 부활의 예표적 사건인 것입니다.” 다섯째 「내가 믿는 그리스도」에는 저자가 이해하는 기독교의 본질과 핵심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직 하나의 계명만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이것만이 내가 너희에게 주는 계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부 하나님, 성자 그리스도, 성령도 결국 한마디로 사랑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속에서 천지만물과 생명을 창조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고, 이 사랑은 죽음으로 생명을 끝내는 세상 속에서 죽음을 끝낸 하나님의 두 번째 창조 사건이었습니다.” 저자는 이웃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의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룬다. 그 이야기가 자기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친 사실과 ‘선린형제단’을 조직하게 된 이야기를 간증적으로 기술한다. “ ‘네 이웃’은 단순히 인간관계에서의 생명체만은 아닙니다. 강도를 만나서 피 흘리고 신음하는 사람들은 개인일 수도 있고 집단 일수도 있고 사회계층일수도 있고, 심지어 자연 생태계와 지구환경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평화 실현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지적한다. “21세기는 전쟁을 막고 평화를 실현하는 일이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당면 과제인 것입니다. 신구약성서에는 평화라는 글자가 88회 나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성서에서 핵심 되는 단어는 ‘사랑’이고, 사랑이라는 말의 현실적인 과제는 ‘평화’입니다.” 저자는 그 사랑의 비밀과 신비를 지적하며 그 이해와 실천의 불가능을 겸허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고요히 천국을 바라본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왜 유대 나라와 같은 약한 나라, 그 중에서도 제일 작은 땅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태어났으며, 또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고난을 받으면서 이 사랑을 실현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비밀을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우리는 그 사랑을 성령을 통하여,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나를 죄에서 해방하고 그 사랑의 세계에서 살게 해주신 것, 이것이야말로 구원인 것입니다.” “과연 나는 정말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아들이며, 그 사랑에 응답하여 살고 있느냐 하는 물음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 앞에서 저는 ‘그렇다’고 대답할 용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저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 두 가지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하나는 내가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낼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고, 두 번째는 사도 바울이 말하였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맺은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내게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그러니까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인 나, 이러한 나를 끝까지 사랑하고 버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을 결코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저 또한 오래지 않아 저의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알리게 되겠지요. 그러나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슬픈 부고장이 전달되는 그날이 또한 저로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저를 당신의 사랑의 왕국으로 초청하신다는 초대장을 받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숨쉬는 그 순간까지 이 사랑에 응답하면서 저의 나머지 삶을 살아가렵니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강원용 목사님도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과 세상과 천국에 대한 보다 진솔하고 보다 겸허하고 보다 애정어린 고백과 호소와 기도의 마음을 글로 표현했다. 결국 인생은 땅에서 주어진 사명을 다하느라 몸부림치면서 우여곡절의 여정을 지난 후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그 분이 가리켜 보여주신 ‘아버지의 집’ 곧 ‘하늘 처소’로 옮겨 가는 존재이다. 한 평생 한국교회와 나라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서 달려오신 강원용 목사님에게 사랑과 존경을 표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목사님에게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기원한다. 첫째, 저는 어릴 때부터 순교의 길로 걸어가시는 믿음의 아버지와 저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시는 사랑의 어머니로부터 믿음과 사랑을 받아 먹으면서 자라났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평안과 안일을 버리고 순교의 길을 걸어가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저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11살 때 고향과 부모의 포근함을 버리고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 38선을 혼자서 넘어 남쪽을 향해 달려올 수 있는 결단과 용기를 체 받을 수 있었고, 그리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맏아들을 떠나 보내는 가슴 저미는 슬픔과 희생을 감수하시는 어머님의 극진한 사랑을 바라보고 가슴에 지니면서 저는 나중에 모든 고난과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위로와 여유를 지닐 수 있었는데, 그 믿음과 그 사랑이 결국 저를 목사의 길로 인도하는 씨앗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저는 평양 서문밖교회 주일학교 시절 주일성수와 새벽기도와 순교의 신앙을 저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심어준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믿음과 사랑의 가르침을 가슴에 깊이 새기면서 자라났는데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의 가르침은 저를 목사의 길로 인도하는 등불과 활력소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남쪽으로 와서 중학생 때는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에는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깊은 신앙적 감화를 받으면서 자랐고 고등학생 때 "사랑의 원자탄"을 읽으면서 손양원 목사님을 저의 흠모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자랐는데,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은 박윤선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함께 저를 목사의 길을 걸어가게 하는 모델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를 이별하는 슬픔과 아픔을 지니게 되었고 후에는 사랑하는 어린 아들 철원이을 먼저 천국으로 보내는 슬픔과 아픔을 지니게 되었는데 제가 지닌 슬픔과 아픔은 강퍅한 저의 마음을 조금은 부드럽게 만드는 역할을 했고, 무정한 저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게 하는 역할을 했고, 냉랭한 저로 하여금 십자가의 슬픔에 다가가게 하는 역할을 했고, 이기적인 저로 하여금 슬픔과 아픔을 당한 수 많은 불행한 사람들에게 (아프리카로 방글라데시로 북한으로 연변으로 아프간으로) 다가가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슬픔과 아픔은 저로 하여금 목사의 길을 걸어가게 하는 거름과 자양분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부족한 저를 슬픔과 아픔의 길로 걷게 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넷째,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11살 때 혼자서 38선을 넘게 하시므로 모험과 담력의 길로 걷게 하셨는데 그 후부터 저는 한 평생 무엇이든지 새로운 것을 해 보고 싶은 호기심을 품게 되었고,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그것을 꼭 하고야 마는 추진력과 담력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것은 저로 하여금 목사의 길로 걸어가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1962년 8월 돈 100불을 가지고 미국으로 가서 12년 동안 공부한 것도 모험과 담력이었다고 생각하며, 미국에서 귀국한 후 주일성수 문제로 1977년 11월 어느 날 중앙정보부에 붙잡혀 가서 심문을 받으면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설교준비까지 한 일도 모험과 담력이었다고 생각합니. 결국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근심이나 두려움이나 염려대신 마음에 평안과 여유를 가지고 달려가게 하셨습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역사를 공부하게 하시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므로 폭 넓은 역사적 안목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것은 저로 하여금 목사의 길을 걸어가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경직 목사님의 조언을 따라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에 들어가서 역사를 전공하게 된 것도, 미국에 가서 12년 동안 교회사를 연구하며 성 어거스틴을 전공하게 된 것도 그래서 사고와 삶의 다양성과 양면성을 배우고 지니게 된 것도 너무너 중요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페이스 웨스트민스터 예일 아퀴나스 풀러 등 다양한 전통을 지닌 학교들과 다양한 전통의 스승들을 만나게 하신 것도 그리고 귀국해서 일본, 인도, 필리핀, 중국 등 다양한 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나게 하신 것도 너무너무 중요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섯째, 하나님께서는 결국 저로 하여금 다양성을 수용하고 품는 화해와 사랑의 길로 걷게 하셨습니다. 재건파 출신의 김창인 목사님도, 부흥사 이성봉 목사님도, 합동측의 박형룡 목사님도, 통합측의 박종렬 목사님도, 성결교의 정진경 목사님도, 기장의 강원용 목사님도, 순복음의 조용기 목사님도 만나게 하시므로 보다 폭 넓은 이해와 시야를 지니게 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본래 이기적이고 보수적이고 비판적인 사람이었고 반일 반공주의자였는데 조금씩 바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교회와의 화해와 협력을 주도하게 되었고 북한 동포 돕는 일에 앞장을 서게도 되었습니다. 제가 비판하던 강원용 목사님과 조용기 목사님을 존경하게도 되었습니다. 양극화된 한국교회 안에 화해와 연합을 이루는 일에 심부름을 하게도 되었는데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일곱째, 하나님께서는 한 평생 저로 하여금 건강과 풍부의 길로 걷게 하시고 그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저는 한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건강 때문에 걱정한 일은 거의 없었고 돈 때문에 걱정한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단 돈 100불을 가지고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가서 12년 동안 공부했는데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귀국 후 지난 34년 동안 저는 경제적으로 부족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항상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지난 1월 13일 은퇴 후에도 작은 교회들을 돌아보는 목회의 일과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는 선교사들을 돌아보는 선교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한 교회만 섬겼는데 이제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수 많은 작은 하나님의 교회들을 섬기게 된 것이 그리고 지금도 중국 연변 지역에 있는 200여명의 조선족 어린이들과 동포들을 돕는 일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선한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저의 한 평생을 가장 선한 길로 걷게 하시고 인도하신 것을 생각할 때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따르는 착하고 순한 양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 멋대로 한 평생을 살아온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정욕의 길로 걸어간 때가 많았고, 불순종의 길로 걸어간 때가 많았고, 위선의 길로 걸어간 때가 많았고, 교만의 길로 걸어간 때가 많았고, 게으름의 길로 걸어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를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선한 일로 인도하셨습니다. 믿음과 사랑의 길로, 슬픔과 아픔의 길로, 모험과 담력의 길로, 다양성과 양면성의 길로, 화해와 사랑의 길로, 건강과 풍부의 길로 걷게 하셨고, 앞으로는 천국의 길로 걷게 하실 것입니다. 특히 저에게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가득가득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고맙고 황송한지 모릅니다. 제가 2007년 1월 3일 차를 타고 교회로 가면서 차 안에서 쓴 사랑에 관한 글을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리므로 “목사, 우린 누구인가?” 라는 제목의 소박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한 평생 나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과 사랑이 어찌 그리 크고 어찌 그리 많은지! 실로 모래알보다 더 많은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나의 가슴에 눈물을 자아낸다. 사랑하고 싶어라.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어린이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귀엽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예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사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때도 비슷한 느낌을 가진다. 저들의 얼굴과 마음과 영혼 속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고귀한 인성과 신성의 흔적을 보기 때문이다. 저들을 모두 사랑하고 싶어라. 모슬렘도 공산주의자도 상관이 없다. 저들은 모슬렘이나 공산주의 라는 불행한 유산에 쌓여있는 가련한 영혼들일 따름이다. 사랑하고 싶어라.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
첫댓글 카페를 그만두어야 하나 고심하다 오늘만.하자
어려운 살림에 늘 낙심하며 하루를 버티고 있습니다.
카페에 후원참여가 없습니다.....
한달에 두세분 후원으로 카페를 계속할수가 없어요
방 월세와 공과금을 내야합니다 공과금을
못내고 있습니다 후원으로 도와주세요....
먹을것(식품,반찬거리) 사도록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카페지기는 지병.때문에 매달 치료비가 많이듭니다
매월 공과금과 LH.주거임대 임대료 관리비 마련이 어렵습니다
먹을것 반찬거리도 사야 살아가는데 지병과 장애 나이도
들다보니 수입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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