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12.日. 진격의 봄날 또 미세먼지
03월12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여보세요, 밸라거사입니다.
점심공양 후 공양간에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벌써 지지난 주 예정해놓았던 대로 운산 용현리 보원사지 연등 체험장으로 자리를 옮겨 초파일 연등 만들기 울력을 하기로 했다. 그때가 오후1시20분이었다. 오늘 일요법회에는 새로이 참석한 사람도 있었지만 맵시 고운 두 서산보살님들과 든든한 태평거사님, 걸직한 팔봉거사님 등이 참석을 못해 다소 쓸쓸한 분위기였다. 일요일이면 항상 밝은 얼굴을 보여주시는, 예쁘고 신실한 대여섯 분 도반님들의 빈자리에 훈기를 들쑤시는 작은 풀바람들이 숭숭 흘러 다니고 있었다. 눈이 새촘한 작은 풀바람들은 탱화를 흔들고, 천장에 걸린 연등을 스치고, 목탁과 요령을 건들면서 왠지 어색하고 위축된 법당 안 풍경을 그려가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격주로 참석을 해주시는 수월거사님과 느지막이 나타난 김화백님께서 허전한 빈자리에 눈썹으로 묻혀온 봄기운을 흩뿌려가며 은근하게 메워주고 있었다. 보원사지까지 가는데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을 태운 차가 네 대나 움직여야했다. 언젠가 두어 차례 우리스님을 모시고 온 적이 있는 곳이지만 그때가 어느 사이에 일 년은 더 지난 것 같았다. 보원사지 입구 주차장 옆에 보원사지 연등 체험장이 있었다. 실내에 등을 켜놓고 보원사 주지스님과 아무도 모르는 분들만 부지런히 연등 만들기 작업을 하고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세히 보았더니 거의 이 년 만에 보는 수덕사 종무소 보살님이 한 분 계셨다. 그것도 그 분이 먼저 기억해내고 내 이름을 불러주신 덕분에 나도 어렴풋이 기억을 할 수 있었다. 벌써 이 년 전쯤인가 우리스님이 주관하는 공부모임에서 그 보살님이 주제 발표를 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생생했다. 그때 아마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켕을 인용해가면서 종교에 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상수上手인 김화백님은 저 안쪽에서 따로, 하수下手인 우리들은 고무판을 깔고 둥글게 둘러앉아 함께, 무언가 일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나는 연등 체험장에서 살짝 빠져나와 보원사지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사지寺址란 거친 주춧돌과 황폐한 유물만이 남아있는 옛 절터이다. 그래서 장구한 역사성歷史性과 땅위의 쇠락衰落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지寺址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일깨워주는 덕목德目은 세상을 보는 안목을 거듭나게 해주기도 한다. 운산 보원사지뿐만이 아니다. 보령 성주사지나 양주 회암사지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은 사寺가 아닌 사지寺址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진정한 무상無常이나 영원永遠을 어렴풋이나마 눈치를 챌 수가 있다. 어느 세상, 어느 시절의 한때 융성隆盛과 흥기興起를 지나 폐허廢墟와 단절斷切을 품고 있는 사지寺址에서 나는 진정한 절의 의미과 종교의 언어를 실감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텅 비어서 오히려 무한히 넓어져버린 보원사지의 허공중을 가득채운 봄 햇살을 오백 년 전의 것으로도 천 년 전의 것으로도 느껴볼 수 있는 것도 알고 보면 순전히 역사와 쇠락이 비밀한 품을 슬며시 열어놓은 채 들여다보기를 허락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아닐는지.
보원사지 5층 석탑을 돌아보고 있는데 저 위쪽 법인국사 보승탑이 있는 곳에서 돌계단을 따라 젊은 남녀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도 5층 석탑 앞으로 와서 햇살을 따라 방향을 잡은 뒤 스마트폰을 내밀면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가까이서 보았더니 남자는 한국 사람이나 동양인 같은데 여자는 쌍꺼풀이 짙고 눈썹을 화려하게 그린 외국 사람이었다. 사진 배경으로 5층탑이 나오도록 내가 위치를 변경해주자 눈치껏 자리를 바꾸었지만 더 다정하게 가까이 몸을 붙이라고 말을 해주자 이해를 못한 듯 공손한 영어로 질문이 들어왔다.
어디서 왔지요?
네, 카자흐스탄에서 왔습니다.
아, 그러세요. 그럼 카자흐스탄 분입니까?
아니요, 저는 고려인이고, 아내는 카자흐스탄사람입니다.
아, 그렇군요. 지금 한국여행중입니까?
네, 제가 합덕에 있는 공장에서 일을 하는데 아내가 와서 이곳에 놀러왔습니다. 여기에서 사십니까?
아니요, 나는 서울에서 삽니다. 나는 불교신도여서 성지순례 차 여기에 왔습니다. 카자흐스탄에 고려인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네, 원래는 러시아에 살았는데 스탈린 시절 우리 할아버지 때 카자흐스탄으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고려인들이 많이 삽니다.
이름이 무엇인가요?
Olic Kim올릭 김입니다.
아, 그러세요. 나도 Kim김입니다. 아주 많이 위로 올라가면 할아버지가 같을지도 모르겠네요.
네, 저의 할머니는 Park박입니다.
그래요? 거참, 내 할머니께서도 박Park입니다. 반갑습니다.
네, 저도 반갑습니다.
네, 그렇군요, 잠깐 사진을 먼저 찍어드리지요. 하나, 둘, 셋... 찰칵. 자, 그러면 즐거운 여행을 하십시오. 부인이 굉장히 아름다우시네요.
네, 감사합니다. 잘 가십시오.
카자흐스탄은 카자흐어가 고유어이고 러시아어가 공용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영어는 외국어여서 그랬던지 서로 알아들을 정도의 인사말 같은 대화만 오고갔어도 그 정도면 첫 대면으로는 충분했다. 젊은 한 쌍의 남녀가 당간지주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다가 나는 다시 연등 체험관으로 돌아왔다. 가운데 철골 팔모등을 쌓아놓고 빙 둘러앉아 철골 위에 하얀 종이를 붙이고 있었다. 팔각등八角燈 또는 팔모등 이라고 하는 등燈은 아마 위에서 수직으로 내려다보았을 때 팔각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붙은 듯했다. 정육면체는 정사각형 6개로 만든 입방체이고, 정사면체는 정삼각형 4개로 만든 다면체가 된다. 그런데 다면체나 입체도형이 구球의 형태를 띠게 되면 다소 복잡해진다. 요즘 축구공은 가능한 둥글도록 6각형 20개와 5각형 12개를 붙여서 만들어낸다. 그리고 팔모등은 정사각형 16개와 정삼각형 8개를 붙여서 만든다. 그러니까 가운데 정사각형을 8개 나란히 띠처럼 이어붙이고, 그 위로 정사각형 4개와 정 삼각형 4개를 서로 엇갈려 붙이고, 아래쪽으로도 정사각형 4개와 정삼각형 4개를 엇갈려 붙이면 맨 위와 맨 아래쪽에 각각 정사각형 두 개의 공간이 남게 된다. 이 공간이 팔모등의 위아래 뚫린 구멍이 되는 셈이다. 점이 0차원, 선이 1차원, 면이 2차원, 부피가 3차원이라면 거꾸로 부피를 빛으로 비추면 2차원인 면으로 나타나고, 면을 빛으로 비추면 1차원인 선으로 나타나고, 선을 빛으로 비추면 0차원인 점으로 나타나게 된다. 어떤 형태를 빛으로 비추었을 때는 한 차원 아래의 형태가 그림자로 현실에 나타나게 된다는 이론이다. 그렇다면 어떤 형태를 빛으로 비추었을 때 3차원인 부피로 나타나게 될까? 바로 그 어떤 형태가 4차원의 실제 모습인데 우리들은 그 모습을 설명을 할 수는 있지만 아직 시각적으로 구체화 시킬 수는 없다. 즉 3차원의 우리 모습은 4차원인 어떤 형태의 그림자로서 이 세상에 구체화되어 있다는 말이 된다. 지금 나라는 이 그림자의 본래 모습은 무엇일까. 역시 또 나만 궁금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