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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뜰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몸이 없고 느낌도 없고. 생각도 없고 행위도 없고 의식도 없다. 앞에서 반야심경은 색즉시00즉시색을 말했습니다. 책 즉 몸은 공허하다. 공은 몸과 다르지 않다. 몸이 곧 공이고. 공이 곧 몸이다. 이것은 세간의 공입니다. 세간의 공이란 몸 몸 느낌 생각 의식 제 속에서는 분명히 나타나지만 그것들이 인연화합으로 생겨났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몸은 있습니다. 느낌도 있죠. 생각도 있고 행위도 있으며 의식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독립적이고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가 아닙니다. 비유하면 파도와 같습니다. 파도는 분명히 보입니다. 높은 파도도 있고 낮은 파도도 있고 거친 파도도 있고 잔잔한 파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파도는 바다와 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닙니다. 파도는 바다가 인연 따라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파도는 있지만 파도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습니다. 이것이 세간의 공입니다. 몸은 있지만 몸이라는 고정된 나는 없습니다. 느낌은 있지만 느낌이라는 고정된 나는 없습니다. 생각은 있지만 생각이라는 고정된 나는 없습니다. 행위도 의식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이제 반이야 심경은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지구 공중 무색 그러므로 공가운데에는 색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공중 즉 공 가운데의 공은 단순히 현상이 공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공은 출세간의 공입니다. 근원의 공입니다. 열반의 공입니다. 법칙 도 그 자체를 말합니다. 제간의 곰은 파도를 보면서 이 파도의 본질은 바다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출세간의 공은 바다 그 자체를 아는 것입니다. 파도를 통해 바다를 보는 것이 세간의 공이라면 바다 그 자체를 밝히는 것이 출세간의 공이다. 이렇듯 반야신경은 공을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세간의 공 둘째는 출세 간의 공
그러므로 공중무색은 몸이 없다는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공중 즉 꿈 그 자체도 그 자체에는 몸이라는 고정된 자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도 그 자체에는 느낌이란 고정된 자성도 없고 생각이라는 고정된 자성도 없고 의미라는 고정된 자성도 없고 의식이라는 고정된 자성도 없습니다. 이것이 무색 무수상행식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줄세간의 고물 어떤 영혼이나 아트만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돈은 어딘가에 따로 존재하는 신비한 실체가 아닙니다.
모든 고정된 실체성이 쉬워진 자리 분별과 집착이 사라진 자리 생멸의 착각을 넘어선 근원의 진실입니다. 그래서 도 그 자체에는 책 수상행식이라는 세속적 범주가 고정된 자성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반야심경은 여기서 표면적 공에서 근원적 공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처음에는 몸은 인연와비므로 공화다고 가르칩니다. 그다음에는 공 즉 도 그 자체에는 몸이라는 자성도 느낌이라는 자성도 생각이라는 자성도 뱅위라는 자성도 의식이라는 자성도 없다고 밝힙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의 깊은 순서입니다. 제간의 공에서 줄세간의 공으로 파도의 공에서 바다 그 자체의 공으로 현상의 공에서 노의 공으로
이것을 모르면 반여 심경의 뒤 구절들이 단순히 없다. 없다. 없다는 허무의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반야심경의 문은 허무이 없다가 아닙니다. 공중 즉 도 그 자체에는 세속적 범주들의 고정된 자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공중무색은 몸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몸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또 그 자체에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무수상행식도 마찬가지. 그 느낌 생각 행위 의식 세 속에서 작용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도 그 자체에는 그 모든 것에 고정된 자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첫 번째 문을 현상은 공허하다는 분입니다. 두 번째 문은 공 즉 또 그 자체에는 현상이라는 고정된 자성이 없다는 문입니다. 이 두 문을 함께 알아야 반야심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물 세간에 공과 출세 간의 공으로 구분해서 설명하는 곳은 내가 운영하는 이 괴로움은 허구다. 채널이 유일할 것입니다.
육부 다음
구절입니다. 무한이비 설신의 무색 성향 및 촉법 닐슨 이렇습니다.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혀도 없고 몸도 없고 뜻도 없다. 경색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도 없고 감촉도 없고. 법도 없다. 여기서 반야심경은 오운을 넘어 감각 세계 전체를 비웁니다. 눈 귀 코 겨 몸 뜻은 육근입니다. 즉 우리의 감각기관입니다. 경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은 육경입니다. 즉 외부의 감각 대상입니다. 노는 형색을 보고 귀는 소리를 듣고 코는 냄새를 맡고 혀는 맛을 보고 몸은 감촉을 느끼고 뜻은 법 즉 마음의 대상을 인식합니다. 여기서 다시 세계의 뜻을 정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앞에서 색즉시공의 색은 고온 가운데 색입니다. 즉 즉 인간의 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무색 성향 및 촉법의 색은 육경 가운데 색입니다. 눈이 대하는 대상 곧 형체와 색깔입니다. 우리 눈은 두 가지를 봅니다. 첫째는 형체를 보죠. 둘째는 색깔을 봅니다. 쉽게 예를 든다면 개를 볼 때 개의 형체와 개의 색깔을 봅니다. 이해하기 쉽죠?
그러므로 오운의 색은 몸이고 육경의 색은 형색입니다. 이 구분을 놓치면 반야심경의 뜻이 흐려집니다.
이제 이 구절의 깊은 뜻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무한이비 설실 이 말은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이 세속적으로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속적으로는 눈이 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봅니다. 현실적으로는 귀가 있습니다. 우리는 귀로 들으니까요. 코아혀와 몸과 뜻도 있습니다. 우리는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감촉을 느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야심경이 말하는 자리는 제 속의 감각기관을 단순히 분석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리는 공중의 자리입니다. 공 가운데 즉 공 그 자체입니다. 꿈을 말하는 것입니다. 열반의 공이며 법칙 도 그 자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고절은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공중 즉 또 그 자체에는 논이라는 고정된 자성이 없다. 귀라는 고정된 자성도 없고 코어라는 고정된 자성도 없고 결하는 고정된 자성도 없고 몸이라는 고정된 자성도 없고 뜻이라는 고정된 자성도 없다. 또한 도 그 자체로 책 즉 형체와 색깔이라는 자성도 없고 조리라는 자성도 없고 냄새라는 자성도 없고 맛이라는 자성도 없고 감촉이라는 자성도 없고 뜻의 대상인 법이라는 자성도 없다. 이것은 도의 관점에서 세속 세계를 분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또 그 자체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또 그 자체에는 제 속에서 말하는 눈 귀 코 겨 겨 몸 뜻이라는 구분이 고정된 자성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도 그 자체에는 경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이라는 대상의 구분도 고정된 자성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체 속에서는 눈이 있고 보이는 대상이 있습니다. 세 속에서는 귀가 있고 들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채 속에서는 몸이 있고 감촉이 있습니다. 하지만 도 그 자체를 말하는 자리에서는 그 모든 이름과 구분과 자성이 본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돈은 눈이라는 범주로 제한될 수 없고 귀라는 범주로 제한될 수 없고 색성향 및 촉법이라는 감각 대상의 범주로도 가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 열반 돈은 다 같은 의미입니다. 열 번 즉 돈은 감각기관도 아니고 감각 대상도 아니고 분별하는 의식의 대상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도 그 자체에는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혀도 없고 몸도 없고 뜻도 없습니다. 경색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도 없고 감촉도 없고 법도 없습니다. 이것이 무한이비 설신이 무색 성향 미초법의 깊은 뜻입니다.
앞에서는 몸과 느낌과 생각과 행위와 의식이 인연화합이므로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간의 공입니다. 파도를 보며 그 본질이 바다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도 그 자체에는 파도라는 이름도 파도라는 자성도 파도의 높고 낮음이라는 구분도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다 그 자체를 말할 때 이 파도 저 파도 큰 파도 작은 파도라는 구분이 본질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또 그 자체를 말할 때 눈 귀 코 혀 몸 뜻이라는 구분은 본질이 아닙니다.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이라는 구분도 본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감각 세계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또 그 자체가 감각 세계의 이름과 구분 안에 갇히지 않음을 명확히 밝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무한히 비설신이 무색 성향 및 촉법의 핵심입니다. 다음 구절입니다. 무한개 내지 무의식계 뜻은 이렇습니다. 눈의 인식 요소도 없고 나아가 의식의 인식 요소도 없다. 이 구절은 18개를 말합니다. 지 팔 개란 육근 육경 육식입니다. 육근이란 나의 감각기관을 말하고 육경이란 나의 감각기관으로 접하는 외부 대상들을 말하고 육식이란 그 대상들을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G8개에서 개를 씌운 단어로 표현하면 인식 요소입니다. 눈 귀 코 혀 몸 뜻 경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눈의 의식 귀의 의식 고의 의식 겨의 의식 몸의 의식 뜻의 의식 이 여덟 가지가 바로 18개입니다. 이렇게 감각기관 감각 대상 감각 이식이 합쳐져 우리가 경험하는 인식 요소가 만들어지죠. 지속적으로는 눈의 인식 요소가 있습니다. 눈이 있고 눈이 대하는 대상이 있고 보는 의식이 있죠. 계속적으로는 귀 인식 요소가 있습니다. 귀가 있고 소리가 있고 듣는 의식이 있습니다. 지속적으로는 글쎄 인식 요소가 있다. 뜻이 있고 뜻의 대상이 있고 분별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수많은 인식 요소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은 말합니다. 무한계 내지 무의식계 눈의 인식 요소도 없고 나아가 의식의 인식이 요소도 없다. 여기서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 말은 눈으로 보는 경험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귀로 듣는 경험이 없다는 뜻도 아니죠. 생각하고 분별하는 의식이 세속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은 공중 즉 또 그 자체에는 눈의 인식 요소라는 고정된 자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또 그 자체 어떤 특정한 자성이 있다면 그것 말이 전혀 안 되는 겁니다. 그건 더 이상도가 아니게 됩니다. 도 그 자체에는 귀의 인식 요소라는 고정된 자성도 없습니다. 코의 인식 요소 인식 요소 몸의 인식 요소 뜰새 인식 요소라는 고정된 자성도 없습니다. 도 그 자체에는 눈의 의식이라는 고정된 자성도 없고 귀의 의식이라는 고정된 자성도 없고 나아가 의식의 인식 요소 전체가 고정된 자성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도의 관점으로 세속의 인식 요소를 분석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열반 즉 도 그 자체에 대한 설명입니다. 도 그 자체를 말할 때 눈의 인식 요소라는 이름도 붙일 수 없습니다. 귀인식 요소라는 이름도 붙일 수 없고 의식의 인식 이요소라는 이름도 붙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돈은 세간적 인식 요소의 어느 한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돈의 인식 요소 안에 들어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귀의 인식 요소 안에 들어 있는 소리가 아니고 의식의 인식 요소 안에 떠오르는 생각도 아닙니다. 돈은 감각 인식 요소의 어떤 한 조각이 아닙니다. 그래서 또 그 자체에는 눈의 인식 요소도 없고 나아가 의식의 인식 요소도 없습니다. 이 고절은 우리에게 아주 깊은 통찰을 줍니다. 우리는 자기 경험을 절대화합니다. 내가 본 인식 요소 내가 들은 인식 요소 내가 겪은 인식 요소 내가 기억하는 인식 요소 내가 해석한 인식 요소 이것을 모두 묶어서 내 인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인생 이야기를 절대적인 나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반야 심경은 그 인식 요소 전체를 비워 버립니다. 지속적으로는 경험 인식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도 그 자체에는 그 경험 인식 요소라는 고정된 자성이 없습니다. 지속적으로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자체에는 과거라는 고정된 자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기억으로 인한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는 나의 상처가 있죠. 하지만 도 그 자체에는 상처라는 고정된 자성이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여러분의 본성은 본래 상처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무한계 내지 무의식계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우리를 자기 경험의 감옥에서 풀어줍니다. 경험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경험 인식 요소가 나의 본질은 아닙니다. 장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처의 인식 요소가 돈은 아닙니다. 기억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의 인식 요소가 나의 첫 모습은 아닙니다. 이걸 정말 안다면 마음에 무슨 괴로움이 있겠습니까?
의식은 분별합니다. 하지만 분별의 인식 요소가 궁극의 진리는 아닙니다. 도 그 자체에는 그 모든 인식 요소의 자성이 없습니다. 이것을 알 때 사람은 에고의 이야기에서 풀려나기 시작합니다.
8부 무무명 영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 사진 다음 구절입니다. 무무명 역무무명진내지 무노사 역무노 사진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음도 없으며 나아가 늙고 죽음도 없고. 늙고 죽음이 다음도 없다. 이 구절은 12연 기법에 관한 내용이죠. 12연기는 괴로움이 어떻게 일어나고 괴로움이 어떻게 소멸되는지를 보여주는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무
있으므로 행위 있고 행이 있으므로 식이 있고 식이 있으므로 명색이 있고 명색이 있으므로 유입이 있고 유입이 있으므로 족이 있고 족이 있으므로 수가 있고 수가 있으므로 애가 있고 애가 있으므로 쥐가 있고 쥐가 있으므로 유가 있고 유가 있으므로 생이 있고 재미있으므로 늙음과 죽음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이것이 12연 기법입니다. 지속적으로는 무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공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집착하죠. 몸을 나라고 착각합니다. 느낌을 나라고 착각하고 생각도 나라고 착각하며 의식도 나라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그 착각 때문에 갈 만하고. 잡고. 두려워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므로 세속의 수행에서는 무명을 반드시 보아야 합니다. 무명이 어떻게 괴로움을 만드는지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반야심경은 여기서 다시 더 깊은 자리로 들어갑니다. 무무명 무명조차도 없다. 말을 세속적으로 무명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명이. 없으니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뜻도 아니죠. 이 말은 공중 즉 도 그 자체에는 무명이라는 고정된 자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여러분 정체가 바로 도이며 도회는 본래 무명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죠. 중생들은 그런 사실을 완전히 까먹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일깨워 주는 경전이 바로 반야심경입니다. 그래서 반야 심경이 위대한 거죠 아셨습니까?
또 그 자체에는 무명이라는 실체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또 그 자체에는 어리석음이라는 고정된 성질이 없습니다. 또 그 자체에는 무명의 시작과 끝이라는 범주도 고정된 자성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무면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영무 무명직 무명이 다음도 없다. 이것도 매우 깊습니다. 세 속에서는 해탈한 사람을 보고 무명이 다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출세간 즉 도 그 자체를 밝히는 자리에서는 무명이 다한다는 말조차 고정된 자성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도 그 자체에는 처음부터 무명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명이 본래 실체가 아니므로 무명의 소멸도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붙잡을 수 없습니다. 어둠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두운 방이 있습니다. 불을 켜면 어둠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어둠이 없어졌다고 말하죠. 하지만 어둠은 처음부터 방 안에 들어 있던 어떤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빛이 없던 상태를 우리가 어둠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빛이 드러나면 어둠이라는 이름은 힘을 잃습니다. 무명도 이와 같습니다. 무명은 도 그 자체 안에 들어 있는 어떤 실체가 아닙니다. 진리를 보지 못하는 상태를 무명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 그 자체에는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음도 없습니다. 이 말은 수행을 무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수행의 마지막 집착을 끊는 말입니다.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어둠을 없앴다. 이런 생각마저 마지막에는 내려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도 그 자체에는 무명을 끄는 나라는 자성도 없고 끊어진 무명이라는 자성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반야 심경의 깊은 지혜입니다. 이어지는 말은 무노사 영문호 사진입니다. 늙고 죽음도 없고 늙고 죽음이 다음도 없다. 세속적으로는 늙음이 있습니다. 몸은 늙어 가니까요. 세속적으로는 죽음이 있습니다. 몸은 언젠가 죽으니까요. 이런 현실을 부정하면 안 됩니다. 불교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중 도 그 자체에는 늙음이라는 고정된 자성이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고정된 자성도 없죠. 늙음이 다한다는 고정된 자성도 없고 죽음이 다한다는 고정된 자성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 그 자체는 2년 화합으로 생겨난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정체가 바로 도입니다. 여러분의 본질 본성은 몰래 완전하고 무한 그 자체입니다. 이걸 잊지 마십시오. 돈은 생겨난 물건이 아니므로 늙어 가는 물건도 아닙니다. 도 그 자체는 결혼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죽는 존재도 아닙니다. 이것을 영혼이나 아트만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돈은 영원히 존재하는 어떤 개인 격차가 아닙니다. 돈은 모든 자아적 실체감이 쉬워진 자리입니다. 생멸의 분별이 쉬워진 자리입니다. 여러분의 정체가 바로 무한하며 완전한 도입니다. 이거라는 게 깨달음입니다. 구부 무고진 멸도
무고집 멸도는 고집멸도 사성제를 부정하는 그런 단순무식한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엔 단순무식한 사람들이 많은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스님들은 이 무고진멸도라는 단어 때문에 반려심경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다라는 망언까지도 서슴없이 하는 겁니다. 반야 심경의 전체적인 구조를 짧게 다시 설명드리죠. 먼저 사물들의 공함을 설명합니다. 그게 바로 조겨 놓은 계공이죠. 그 이후에는 공 그 자체를 설명합니다. 그게 바로 시구공 중에서 그 공중입니다. 공중이란 공 그 자체를 말하죠. 이게 바로 열반이며 도이고 진정한 단마 즉 진재입니다. 0즉 도다시 말해 열반 그 자체에는 돈도 없고. 요건도 없고 육경도 없고 육식도 없고 집이 연기도 없고 고집멸도 사성제도 역시 없습니다. 공 또 열반 그 자체에는 그 어떤 고정 불변의 실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뭔가 있다면 그건 공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도 역시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음이기 때문이죠. 공도 열반도 역시 마음입니다. 이미 해탈되어진 마음이기에 이것을 진실로 여유한 마음 즉 진여심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무고집 열도 뜻은 이렇습니다. 고도 없고. 집도 없고 멸도 없고 도도 없다. 이 구절은 사성제를 말합니다. 고성제는 괴로움이고 집성제는 괴로움의 원인인 가래와 무명입니다. 멸성제는 괴로움의 소멸이며 이것이 곧 도이고 이것이 곧 열 번입니다. 두 번 여러분
고진멸도 사성대에서 뭐가 가장 중요할까요?
그것은 멸성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성제가 가장 중요하다 말을 하는데
그건 완전히 틀린 얘기입니다. 자성제에서 핵심은 멸성제입니다. 멸성제가 곧 재탈이고 열반이며 이것이고 또 그 자체입니다.
도성제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며
이것이 곧 수행의 길이고 이것이 곧 팔 정도입니다.
도성제인 팔 정도를 닦아 익혀서 결국 멸성제.
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성제는 원인이며 멸성제는 결과입니다.
왜 고진멸도 사성제에서 멸성제가 핵심인지 정확히 이해되셨죠? 자성제는. 부처님 가르침에 가장 기본입니다. 그러므로. 무고진멸 노래 자성제가 필요 없다는 말로 이해하면 큰 오해입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은 자성제마저 더 깊은 공중의 자리에서
비춥니다. 여기서의 공중은 공 즉 또 그 자체를 말.
그러므로. 무고진 멸도는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또. 그 자체에는 고라는 고정된 자성이 없다.
그 자체에는 집이라는 고정된 자성이 없다. 또. 그 자체에는 멸이라는 고정된 자성도 없다. 또
자체에는 주행의 길마저 고정된 자성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고진멸도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위대한 가르침
그러나 도 그 자체를 밝히는 자리에서는 고진멸도라는 이름과 구분마저
고정된 자성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열반 즉 돈은 고라는 개념 안에 갇히지 않고 집이라는 개념.
안에 갇히지 않고 멸이라는 개념 안에 갇히지 않고 주행의 길이라는 개념 안에도 갇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의 위대함입니다. 반이야 심경은 세상 집착만 끊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에 대한 집착도 끊고 주행에 대한 집착도 끊으며 깨
대한 집착도 끊습니다. 마침내. 내가 돈을 얻었다는 마지막 생각 생각까지도 끊어 버리죠
그때 법칙 돈은 개념이 아니라 자명한 현전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무고집멸도입니다.
다음 구절입니다. 무지영 모드
뜻은 이렇습니다.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다.
이 구절은 반야신경의 가장 날카로운 지혜의 칼날입니다.
우리는 수행을 하면서도 무언가를 얻으려 하죠. 지혜를
얻고 싶어 합니다. 지모한 경지를 얻고 싶어 하죠. 예달음을 얻고 싶어 하고 남보다 깊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아직 나 즉 에고가
깊숙히 숨어 있습니다. 내가 지혜를 얻겠다. 내가 깨달음을 얻겠다.
내가 높은 경제에 오르겠다. 내가 특별한 수행자가 되겠다. 이것이 수행자의 마지막 감정입니다.
그래서 반야신경은 말합니다. 이모지
지혜도 없다. 얻음도 없다. 이 말은 지혜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깨달음이 없다는 뜻도 아니죠. 주행을 하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은 공즉도 열반 그 자체에는 지혜라는 고정
자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또. 그 자체에는 어둠이라는 고정된 자성이 없다는 뜻이죠. 또. 그 자체에는
지혜를 얻는 나도 없고 얻어야 할 지혜도 없고 얻는 행위조차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돈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죠. 진리는 밖에서 가져오는 물건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내가 새로 만들어내는 소유물이 아닙니다. 법즉 돈은 내가 손에 쥐는 대상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없던 것을 얻는 사건이 아니라 가리고 있던 착각이 사라져. 원래부터 있던 진실이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구름이 거치면 하늘이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죠. 하늘은 본래 거기 있었습니다. 구름이 사라지자 하늘이 드러났을 뿐이죠. 마찬가지로 내 마음속에 차까지 사라질 때 진리가 내 안에서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있던 법즉 도가 스스로 자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깨달음에는 내가 얻었다는 마음이 없습니다. 얻은 나가 없습니다. 모든 대상도 없죠 얻었다는 행위도 없습니다. 또 그 자체에는 어둠이라는 자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은 이미 완전하기에 뭘 새롭게 얻을 필요가 없는 거죠. 이것이 무득입니다. 모득은 허무가 아닙니다. 모득은 완전한 자유입니다. 얻어야 할 나가 없으므로 조조함이 사라집니다. 증명해야 할 나아가 없으므로 비교가 사라집니다. 붙잡아야 할 경지가 없으므로 두려움이 사라지죠. 깨달음을 소유하려는 마음이 사라질 때 오히려 깨달음의 진실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무지역무득입니다. 이곳은 물교 전문 채널 괴로움은 허구다입니다.
11부
이무소득고 보리 살타 의바냐바라밀다고.
다음 구절입니다.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바냐 바라밀다고. 신무가에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다. 음 여기서 핵심은 의무 소득고입니다.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왜 얻을 것이 없을까요? 또 그 자체는 이미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실체 없는 허상이라. 본래 얻을 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 살은 무언가를 소유하려는 마음에서 풀려납니다. 사람의 마음은 왜 걸립니까? 뭔가를 얻으려 하기 때문이죠. 왜 중생들은 얻으려 할까요?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완전함을 모르기 때문이죠. 반야의 지혜는 얻을 것이 본래 없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보살의 마음은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습니다. 직무가요. 마음에 걸림이 없다. 이것을 세상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보살도 몸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느낌을 경험하고 생각을 사용합니다. 행위도 하고 의식으로 분별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자신과 동일시 하지 않습니다. 이게 중생들과 다른 겁니다.
파도는 일어나죠. 그러나 바다는 파도 하나에 갇히지 않습니다. 생각은 떠오르고 감정은 일어나지만 그것들에 묶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무가의 일입니다. 마음에 걸림없는 자유 이것이 바로 신무가애입니다.
반여 신경이 말하는 자유는 현실을 버리는 그런 엉성한 자유가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살면서도 현실에 어떤 이름과 대상에도 나를 고정시키지 않는 마음의 무한 대자유입니다.
집이부 무가애공 무유공포 다음
구절입니다. 무가이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뜻은 이렇습니다. 마음에 걸림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고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 궁극의 열반에 이른다.
사람은 왜 두려워할까요? 잃을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죠. 두렵고. 젊음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사랑을 잃을까 두렵고. 돈을 잃을까 두렵고 평판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두려움의 중심에는 언제나 항상 나가 있습니다. 나를 지켜야 한다. 나를 보호해야 하고 나를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반야의 지혜는 그 나가 고정된 실체가 아님을 봅니다.
몸 느낌 생각 행위 의식 2년 따라 모여 작용하는 것을 잠시 나라고 이름 붙여 부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도 그 자체에는 나라는 고정된 자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에 뿌리가 뽑혀 버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두려워. 지켜야 할 고정된 나가 있다고 믿을 때 그때 생겨나는 감정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런 고정된 나는 없습니다. 이걸 할 때 마음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남 의욕이 얼마나 좋은가요?
음 우유 공포 두려움이 없다. 이어지는 말은 원리전도 몽상입니다.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난다는 뜻이죠. 전도몽상이란 거꾸로 보는 마음입니다. 쉽게 말하면 착각이죠. 무상한 것을 영원하다고 보는 것 괴로운 것을 즐거움이라고 보는 것 무어인 것을 나라라고 보는 것 공허한 것을 실체라고 보는 것 파도를 받아와 분리된 독립된 존재라고 믿는 것 이것이 전도 몽상입니다.
우리는 몸을 나라고 착각하죠. 느낌을 나라고 오해하고 생각을 나라고 착각합니다. 기억을 나라고 오해하고 상처를 나라고 착각합니다. 전공과 실패를 나라고 오해를 하죠. 그러나 반야 심경은 그 착각에서 깨어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삶을 부정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삶에 대한 착각에서 깨어나라는 뜻이죠. 그리고 그 깨어남의 끝을 구경열반이라 합니다. 열반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물이 완전히 꺼진 자리입니다. 나라는 착각의 물이 꺼진 자리 붙잡아야 한다는 가래가 쉬어진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열번이 바로 출세간의 공입니다.
공중에서의 공 또 그 자체 그 자리가 바로 열번의 자리입니다.
13부 3세제곱 리반이야. 바람일다고.
다음 구절입니다. 참새 제불 의바냐 바라밀다고. 그간 욕따라 삼락삼보리 뜻은 이렇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반야바라밀더에 의지하셨기 때문에 반역따라 삼략산보리를 얻으셨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를 불고 즉 부처님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보살들이 반야바라미를 닦아 안역 따라 삼맸산보리를 얻은 부처님이 되시기 때문이죠. 참새제불은 과거 견제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입니다. 안역따라 삼약 삼보리는 더 이상이 없는 최상의 바른 깨달음 무상 정등 정각입니다. 모든 부처님께서 무엇에 의지하여 깨달으셨습니까? 반야바라밀다입니다. 반야는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경전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을 잘하는 논리도 아닙니다. 많이 안 해. 제간의 공과 출세 간의 공을 함께 그에 뚫는 지혜이다. 세간의 공은 현상이 이년 화합으로 생겨났으므로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봅니다. 출세 간의 고문은 훨씬 더 깊습니다. 공이 곧 열반이며 도입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 바냐 바라밀에 의지하여 무상정등 정각에 이르셨습니다.
반야는 마지막 아산까지 끊습니다. 그리고 아상이 끊어질 때 거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죠. 원래부터 있던 진실이 드러납니다. 법즉 도가 드러납니다. 본래 광명이 드러나지요. 그래서 깨달음은 거짓의 붕괴이면서 동시에 진리의 현연입니다.
무명즉 작각이 무너지고 그 착각이 무너진 자리에서 도의 자명한 현전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께서 의지하시 반야바라밀다입니다.
집사부 고지반야 바라밀다 시대 신주 시대 명주. 다음
구절입니다.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 신주 시대 명주 지무상주 시무 등등 능재일체고 진실불허 뜻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알라 반야바람일다는 큰 신비의 주문이며 큰 밝음의 주문이며 위 없는 주문이며 견줄 것 없는 주문이다. 능히 모든 괴로움을 없애며 진실하여 헛되지 않노라.
왜 가장 위대한 주문입니까? 그 이유는 반야가 고통의 뿌리를 끊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고통은 사건 때문에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건을 나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몸이 늙는 것과 내가 무너진다는 것은 다릅니다. 느낌이 불쾌한 것과 내 인생은 불행하다는 것은 다르죠. 생각이 어두운 것과 나는 어두운 사람이다는 것은 다릅니다. 실패가 일어난 것과 내 존재가 실패다는 것은 전혀 다른 거죠. 짐 리저 고통은 일어난 사건과 현상을 자신과 동일시할 때 깊어집니다.
반야는 먼저 제간의 공으로 이것을 비춥니다. 뭐 느낌 생각 갱리 의식은 인연화합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고정된 내가 아니다. 이것만 보아도 고통은 그게 약해집니다.
하지만 반야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반야는 출세간의 공으로 더 깊게 들어갑니다. 공중 즉 또 그 자체에는 모음이라는 자성도 없고 느낌이라는 자성도 없고 생각이라는 자성도 없고 의식이라는 자성도 없습니다.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이라는 자성도 없습니다. 색 성향 미촉법이라는 자성도 없죠. 무명이라는 자성도 없고 고진멸도라는 자성도 없으며 지혜와 얻음이라는 자성도 없습니다. 이렇게 반해하는 모든 층위의 집착을 모조리 다 박살냅니다.
채소의 집착도 끊고 교리의 집착도 끊고 조행의 집착도 끊고. 깨달음의 집착도 끊습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큰 발금의 주문입니다.
어둠은 실체가 아닙니다. 빛이 없을 때 어둠이라고 부릅니다. 무명도 실체가 아닙니다. 진리를 모를 때 무명이라고 부르니까 말이죠. 반야의 빛이 드러나면 무명은 설 자리를 잇습니다. 그래서 반야바람이 일단은 능제일체고입니다. 능히 모든 괴로움을 없엡니다. 이 말은 세상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몸이 늙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죠. 감정이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은 괴로움의 뿌리인 무명과 집착과 아상을 끊는다는 뜻입니다. 몸은 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을 나라고 붙잡지 않으면 몸의 변화가 내 존재의 붕괴가 되지 않습니다. 생각은 떠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나라고 붙잡지 않으면 즉 생각을 자신과 동일시 하지 않으면 생각은 더 이상 감옥이 되지 않습니다. 상처는 기억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을 나라고 붙잡지 않으면 장처가 나의 본질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또 그 자체에는 상처라는 자성도 기억이라는 자성도 고통이라는 자성도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생각도 기억도 본래의 나를 괴롭힐 수 없는 허상인 겁니다. 이것이 진실불어입니다. 진실하여 헛되지 않습니다. 반야심경은 위로의 말만 하는 경전이 아닙니다. 사람의 고통을 뿌리째 해부하고 그 뿌리를 끊어내는 경전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것입니다.
지보부
이제 마지막 주문으로 들어갑니다. 고설번야바라밀다주 즉설주월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말하니 이와 같노라. 아재아재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 이 주문은 반여 신경 전체의 결론입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송아 제주바 저 언덕으로 가자. 완전히 저 언덕으로 건너가자. 깨달음과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재 아재 가자. 가자. 무엇에서 가라는 것입니까? 나라는 착각에서 가라는 것입니다. 나가 있다는 그 착각에서 벗어나서 배탈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잭수선행 씨고 오늘 자신과 동일시하는 그 착각에서 벗어나서 진리를 향해 가라는 뜻입니다. 5호는 인연화합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오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바라재 저 언덕으로 가자. 언덕은 어디입니까? 출세간직 열반입니다. 다시 말해 법칙 도입니다.
바라승 아제 완전히 건너가자. 조금 하는 데서 멈추지 말라는 뜻입니다. 몸이 내가 아니라는 것만 알고 생각은 여전히 나라고 붙잡으면 안 됩니다. 생각이 내가 아니라는 것만 알고 깨달은 나라는 아상은 못 잡으면 안 됩니다. 제속 욕망은 내려놓았지만 지혜를 얻은 나라는 생각을 못 잡으면 안 되는 거죠. 완전히 건너가야 합니다. 마지막에는 멋지다봐. 건너가는 나라는 생각까지 쉬어야 합니다. 그때 모지 사바 깨달음과 하나되게 하소서. 깨달음은 밖에서 새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거짓된 실체감이 무너질 때 원래부터 있던 진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라는 착각이 무너지고 그와 동시 법칙 도의 현연입니다. 이것이 반야심경 주문의 진짜 방향입니다.
가라. 오늘날하고 못 잡는 착각에서 가라. 가라. 감각 세계를 절대화하는 착각에서 가라. 깔아 조리와 수행과 깨달음마저 소유하려는 마음에서 가라. 완전히 건너가라. 표면적 공에서 근원적 곰으로 세간의 공에서 파도를 못 잡는 자리에서 바다 그 자체의 자리로 가라.
그것이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입니다. 이상으로 반야심경 원문 전체 해설이 끝났습니다. 두 번 여러분 어떠셨나요?
16 부 반여 심경이 우리 삶에 주는 실제 수행복 이제 이 가르침을 우리 삶으로 가져와 보겠습니다. 바냐심경은 법당에서만 외우는 경전이 아닙니다. 반야 심경은 괴로움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 써야 하는 지혜의 칼입니다.
먼저 세간의 공으로 보십시오. 화가 일어나면 그때 이렇게 보십시오. 나를 모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대한 해석이 내 마음에서 일어났다. 그 해석의 과거의 기억이 붙었고 기억에 자존심이 붙었다. 그리고 내가 모욕당했다는 생각이 생겼다. 이렇게 보면 분노는 고정된 실체가 아닙니다. 분노는 여러 조건이 모여 일어난 흐름입니다. 이것이 세간의 공입니다. 그다음 출세간의 공으로 더 깊이 들어가십시오. 도 그 자체에는 모욕당한 나라는 자성이 없습니다. 분노라는 자성도 없죠. 장철하는 자성도 없고 상대방이라는 고정된 자성도 없습니다. 또 그 자체에는 그 모든 세속적 범주나 붙잡을 수 있는 실체가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분노를 나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게 됩니다. 두려움이 일어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이 년화입니다. 우리의 근원이 바로 열반 즉 도이며 또 그 자체에는 두려움이라는 자성이 없습니다.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나라는 자성도 없습니다. 뭔가 손해 보고 일을 대상이라는 자성도 없습니다. 여기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반야 수행입니다. 이것이 반야신경을 삶에 적용하는 방법입니다.
반야심경 수행은 두 단계로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세간의 공으로 본다. 이것은 인연화합이다. 그러므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둘째 출세 간의 공으로 본다. 공중 즉 도 그 자체에는 그 어떤 고정된 자성은 없다. 이 두 단계가 함께 가야 합니다. 세간의 공만 알면 현상 분석에 머물 수 있습니다. 출세 간의 공무원 말하면 현실을 무시하는 허무주의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둘을 함께 함께 알아야 합니다. 현상은 이년 화합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또 그 자체에는 그 모든 현상의 자성이 없다. 이것이 반야심경의 실제 수행입니다. 자랑하는 도반 여러분 이제부터는 더 이상 속지 마십시오. 자존심이 상할 때 이렇게 마음속으로 외치십시오. 자존심에 속지 말자. 자존심 상할라 자 영혼은 없다. 속으면 계속 자존심 상해서 나만 괴롭지. 정신 차리고 속지 말자. 화날 때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십시오. 분노에 속지 말자. 내 안에는 손해 보고 피해 보는 나 자 영혼은 없다. 속으면 계속 화난다. 정신 차리고 속지 말자. 두려울 때 이렇게 마음속으로 외치십시오. 두려움에 속지 말자. 내 마음 안에는 죽어서 소멸될라. 자 영혼은 없다. 본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조금은 두려워지고 긴장하게 된다. 정신 차리고 속지 말자.
몸에 속지 말자. 몸은 나가 아니다. 느낌에 속지 말자. 느낌은 나가 아니다. 생각에도 속지 말자. 생각은 나가 아니다. 이 세상에 속지 말자. 이 세상은 진짜가 아니다. 나의 생각 나의 고정관념에 더 이상 속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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