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
1968년은 우리나라 안보정책 결정에 중대한 영향을 준 사건이 유달리 많이 발생했던 해다. 특히 4월1일은 우리의
총력안보태세를 확립하고 북한의 비정규전 도발에 대비한 침략 억제력으로서의 사명을 지닌 향토예비군이 창설돼 우리나라 국방 역사의 신기원을 이룩한
날이다.
향토예비군 이전에도 도(道)마다 후방지역 경계와 예비전력 자원관리 등을 해온 예비사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북한의 전략·전술, 특히 전후방 동시 전장화(戰場化)나 단기 속결작전을 강요해올 경우에 대비하는 데는 매우 미흡한 실정이었다.
즉
적이 미리 전선 가까이 포진해 있다가 기습공격을 해오면 기동공간을 고려할 때 아군이 후방에 예비전력을 갖고 있더라도 충분한 경고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전선으로 이동 투입시킬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해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정규전이 아닌 평시에도 적이 124군부대와
같은 고도로 훈련되고 정비된 부대를 후방에 투입할 때 당시 사정으로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북한은 소위
`전후복구사업'이 대충 마무리된 64년을 기점으로 전쟁준비를 강행해왔다. 예를 들어 총 예산 중 국방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64년에 1.9%까지
줄어들었으나 66년 10%, 67년 30%, 68년 32%로 점차 증가되고 계속 30%선을 유지했다. 국가예산 중 국방비가 30%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은 일종의 총동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적화통일'이라는 기본전략의 달성을 위해 소위 `3대 혁명역량'이라는 것을 내외에
선언, 결정적 시기가 오면 전면 남침공격을 한다는 식이었다. 북한은 여기에 더해 ▲전 인민의 무장화 ▲전 지역의 요새화 ▲장비의 현대화 ▲전군의
간부화 등 소위 `4대 군사노선'을 내외에 천명,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시대환경에서 나는 66년 육군본부
작전처장으로 부임했다. 지금도 한·미 간에 작전지휘권 문제를 놓고 조야(朝野)에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 당시는 더욱이 미군의 군사원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군본부의 작전지휘권은 사실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작전지휘권이 없다시피 해도 일단 유사시 국가흥망의 중대한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고 생각이 미칠 때 잠시도 모든 적의 도발 가능성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당시
베트남 파병군 중에서 1차로 귀국한 자원 가운데 유능한 장교 수명을 충원받아 유명무실한 작전처의 진용을 강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작전처에 가니
당시 작전참모부 근무 장교들은 진급이 잘 안됐다. 작전지휘권이 없는 군대이다 보니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우선 참모총장에게
작전참모부 출신 장교들을 진급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그랬더니 참모총장은 베트남 파병군 1차 귀국자 중에서 뽑아가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고(故) 강재구 소령의 이름을 딴 재구대대의 대대장으로 명성을 떨친 바 있는 박경석(朴慶錫)중령(육사생도2기·준장 예편)과
최병수(崔柄授)중령(종합1기·준장 예편)을 선발, 이들에게 북한의 노농적위대에 버금가는 향토예비군 설치 방안과 `사단 교대의 중지' 방안을
작성하라는 과제를 주어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착수케 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정기한만 되면 동서남북에 포진한 각각의 부대가
서로 교대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이는 낭비 요소가 많았다. 또 잦은 부대 이동으로 부사관 자녀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동안 학교를
9~10번씩 옮겨 다니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나는 최중령에게 맡긴 `사단 교대의 중지'에 관한 참모연구서를 붙여 작전지휘권을 가진
유엔사령부 사령관에게 보냈다. 참모연구서를 검토한 유엔사는 극찬했다. 부대 이동은 이때부터 중지됐다.
박중령은 당시 예비군 창설
방안을 연구하기 위해 군내뿐만 아니라 정부기관까지 뛰어다니며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작업했다. 이때 지침으로 제공한 것은 ▲북한의 노농적위대를
포함한 예비군제도 ▲스위스의 예비군 및 민방위제도 ▲이스라엘의 군사제도 등을 표본으로 참고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상당한 노력 끝에 성안,
참모차장이 위원장이되고 참모부장들이 위원으로 참석하는 정책회의에 회부됐다. 이에 대한 일부 위원들의 첫 반응은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 뒤로 몇 차례 정책회의 심의를 거쳐 지역·직장단위별로 예비군을 설치한다는 기본안이 정부에
건의됐다.
그렇지만 이 설치안은 자칫 야당으로부터 정치적 복선이 있는 것으로 오해 받아 평지풍파를 일으킬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햇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서랍 속에 잠자던 향군 설치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햇빛을 보게 됐다.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피랍이라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중대 사건이 연달아 터졌기 때문이다 |
첫댓글 내가 직업군인 31년 복무 중 존경하는 몇 몇 장군들을 기억한다. 애국심은 물론 리더십에 있어서도 내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장군이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모두 3성 장군이었다. 4성 장군은 없다.
김홍일 증장
이병형 중장
채명신 중장
이재전 중장
위 네 분 장군을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