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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악
우창의 봉기로 신해혁명이 시작했을 당시, 주더가 있던 운남의 군대에도 혁명의 불꽃은 번지고 있었습니다. 동맹회 조직으로 뭉친 운남의 혁명파 군인들은 내심 봉기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미리 이 정보가 운남 총독에게 밀고가 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깜짝 놀란 총독은 신뢰하던 채악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채악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사가 평온하며, 사령관과 참모장은 저녁식사를 위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총독은 신식 군대 내에 혁명파의 혐의를 맡는 자들은 모조리 체포하여 인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채악은 다시 대답했습니다.
"한 시간 이내에 체포해서 대령하겠습니다."
일선 병사들은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밀고를 했다는 소문 때문에 분위기는 극도로 곤두서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사 계획은 조금 더 앞당겨져 바로 그날 9시가 되었고, 시간이 되자 모든 부대원들은 청나라의 예속을 상징하는 변발을 일제히 잘라내고 각기 예정된 장소에 집결했습니다. 9시 정각이 되어 동맹회의 지도자들이 나타났을때, 그들은 놀라운 얼굴을 보았습니다. 운남 총독의 측근이었던 채악이 있었던 것입니다.
채악는 단 한번도 그러한 티를 낸 적이 없었고, 총독이 신뢰하던 이유도 그때문이었던 만큼 운남의 병사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채악은 담담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자신이 동맹회에 의해 최고 사령관으로 선출되었으며, 이제 신식군은 청조의 운남성 지배를 전복시키고, 공화파 군사정부를 수립한 13개 성의 뒤를 따를것이라고 짤막하게 연설했습니다.
채악이 이끄는 혁명군은 곧바로 행동을 개시, 여러 구식 부대를 격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게중 혁명군은 총독이 보낸 기병연대와 부딫히게 되었는데, 채악은 그들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비적을 진압하라는 총독의 명령을 채악 장군에게 전하러 가는 길이다!"
이때 채악은 "내가 바로 채악 준장이다." 라고 대답했고, 놀란 기병들은 아무데나 총을 쏘면서 달아났고, 일부는 혁명군에 투신했습니다. 마침내 총독관저를 점령했을때, 총독은 도망치기 위하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품팔이 노동자 행색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혁명군은 총독의 변발을 잘라내고 채악의 지휘본부로 끌고 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채악이 혁명군의 지휘 책임자 임을 알게 된 총독은, 그대로 기절해버렸습니다. 채악은 그를 석방하여 베이징으로 돌아가게 해주었습니다.
이후 그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사천으로 진격하여, 4개월 가량 싸움을 벌이면서 사천을 해방시켰습니다. 청조가 몰락하고 원세개가 대총통이 된 4개월 후, 운남 혁명군은 복잡한 정세 속에서 다시 사천을 떠나 운남으로 귀환했습니다. 이 과정에 참여한 주더는 소령으로 진급했었는데, 채악과는 그다지 대화를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말 없는 우정을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가끔 채악이 주더를 불러 신상이나 가족의 안부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날, 주더는 채악의 얼굴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색이 별로 안 좋은것 같습니다."
그 말에 채악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더는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군의 건강상태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채악은 이번에도 대답 대신 담담한 미소만 지어보였습니다.
그러던 무렵, 1913년 12월 채악에 대한 베이징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원세개가 채악을 군사고문으로 초빙하겠으니, 베이징으로 오라는것입니다. 이 무렵 원세개는 채악이라는 인물의 존재에 대해 알아차렸고, 그가 성가신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여겼기에 주변에 두려고 했던 것입니다.
의논이 있었지만, 채악은 베이징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가 원세개의 명령을 거부한다면 운남성은 원세개의 군대에 짓밞힐 것입니다. 좋지 않은 몸에 대한 사람들의 걱정을 뒤로 하고, 그는 "반혁명" 이라는 적의 수괴가 있는 마굴로 스스로 걸어들어갔습니다.
그 무렵의 원세개는 독재에 대한 야욕을 유감없이 보이며 이에 대항하는 2차 혁명도 분쇄하고 있었던 참입니다. 1913년 말, 원세개는 중앙정치회의에서 이러한 내용이 포함된 훈시를 했습니다.
"내정과 외교의 좋교 나쁨은 그 정부의 강고함에 달려 있으며, 국체, 즉 군주제나 민주제냐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이 연설은 바로 군주제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원세개의 황제 즉위로 가는 복선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는 외몽골을 둘러싼 중국과 러시아의 문제, 티베트 문제에서 영국과의 문제 등 당시의 외교적 상황을 늘어놓은 뒤,
"현재 우리 나라의 내정이 이렇게 문란하므로, 외교 면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 요컨대 모든 것이 정부 권력의 약체가 초래한 결과임은 자명한 이치다."
라고 말했습니다. 원세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국회와 정당, 그 밖의 기관을 설치해, 자신의 권력을 약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외국의 침략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원세개의 권력을 지금 보다 더 강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합니다. 그가 황제가 되면 됩니다.
한때나마 중국에서 가장 근대적인 인물이자, 근대화의 선두자이자 중국의 희망으로 여겨졌던 원세개가 룰모델로 삼고 있는 사람은 일본의 메이지 덴노도 있었지만, 독일 황제의 철권 정치와 비스마르크의 군비 확장주의 역시 원세개가 굉장히 흠모하고 있던 룰모델 중 하나였습니다. 원세개는 중국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본과 독일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군대를 훈련시킬 때도 초빙한 교관들은 거의 독일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독일의 군주 빌헬름 2세(Wilhelm II)는 알게 모르게 원세개의 내심에 있어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독일 주재 중국 공사 양돈언(梁敦彦)에게 이러한 의견을 전했던 것입니다.
"공화정은 중국에 맞지 않으니, 강력한 군주제를 세워야 하네."
이후 빌헬름 2세는 자신의 친필 밀서를 원세개에게 전하면서, 그가 신임하는 인물을 특사로 파견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원세개는 자신의 아들인 원극정을 독일에 보냈습니다. 당시 원극정은 말에서 떨어져 뼈를 다쳤는데, 요양을 하라는 명목으로 파견되어 빌헬름 2세를 만났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친서를 독일 군주에게 전했고, 빌헬름 2세는 별궁에서 연회를 베풀며 여러 차례 극정을 접견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이런 소리를 덧붙였습니다.
"중국은 군주제를 실시해야만 강해질 수 있네."
사실 원극정은 오래전부터 아버지가 황제로 즉위하기를 바라고 있던 처지였습니다. 그래야만 자신이 후계자가 되어, 황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차에 독일 군주까지 이러한 말을 하자 굉장히 감격하여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당시 걸리적거리는 여러 국회와 책임내각, 정당 정치에 실증을 내고 있던 원세개는 아들을 통해 이런 말을 듣자 여러가지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미 반대세력도 2차 혁명 전쟁을 통해 거진 소탕하고 난 뒤였기에, 원세개는 한결 편하게 여러 권력과 인사 - 행정권을 자신에게 집중시켰고, 1914년 12월 29일에는 "총통 선거법" 을 통과시켜 사실상 종신 총통의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선거법을 통해 총통직은 세습 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생겼습니다.
이쯤되자 주변의 측근들은 한발 앞서나가 원세개에게 황제로 즉위하라고 수시로 군주제를 들먹였고, 게중에 가장 열성적인 것은 아들 원극정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럴 수 없다며 발을 빼던 원세개는, 이후에는 내심 찬동하는 듯한 말을 하더니 종내에 이르러선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원세개의 야망 속에 불이 타오를 무렵, 일본은 갑자기 그 유명한 "21개조 요구"를 중국에 들이밀었습니다. 당시는 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기 때문에 세계의 눈은 전부 유럽을 향해 있었습니다. 도쿄에서는 이 기회를 놓치면 열강의 간섭을 초래할지 모른다고 여기면서, 이러한 점을 파고들어 노린 점이었습니다.
요구 조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러일전쟁의 포츠머스 조약(Treaty of Portsmouth)에 따르면 여순, 대련을 포함하는 관동주 조차지는 1923년이 되면 중국에 반환해야 했습니다. 만주철도 중에서 안봉선(安奉線) 역시 1923년, 그 밖의 철도는 1939년에 반홚을 해야 하는데 이제 그 기일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러한 이권들을 영구히 확보하기 위하여 99년의 연장 조약을 요구했습니다. 홍콩 역시 그렇지만, 당시 99년은 '반영구적' 임을 뜻했습니다.
반영구적으로 이권을 확보하려면 치안을 유지할 필요가 있으므로, 일본은 중국을 향해, 일본의 원조에 의한 내정의 개선을 요구했습니다. 일본인의 거주 및 영업의 자유, 이를 위한 토지 임차권 및 소유권의 승인, 외국에서의 차관이나 외국인 고문을 들일 때 일본의 승낙을 받을 것도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일본이 독점적, 배타적으로 그 지방을 세력권에 둠으로써, 동삼성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이였습니다.
산둥성에 있는 독일의 이권을 모두 일본에 양도하라는 요구 역시 포함되었습니다. 그 외 중국 최대의 근대적 철강 연합기업이었던 한야평공사(漢冶萍公司)를 중국과 일본의 합작 회사로 할 것 등도 요구했습니다. 요구의 방대함에 베이징 주재 일본 공사마저 난처해서 도쿄에 요구의 감량을 건의할 정도였지만, 오쿠마 내각의 가토 외무대신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원안대로 중국에 제출되었습니다. 원세개 정권은 요구를 수행했을 때 생길 문제를 우려하여 25회에 걸쳐 교섭했지만, 일본측의 최후통첩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중국 각지에서 거세게 일어난 배일 운동이라는 이 21개조 요구가 야기한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이행된다면 중국은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이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협상 과정을 들은 중국인들은 대단히 분노하여 일본과의 조약 체결을 강력하게 반대하였으며,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대규모로 일으켰습니다. 지식인들은 5월 9일을 국치일로 규정하고 매국노를 처벌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황제병에 걸린 원극정은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어째서 일본에게 굴복해야만 했는가? 우리 중국이 일본에 저항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일본에 저항 할 수 없는가? 육군이 작전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육군부에 책임을 지려느 사람이 없으므로, 정부는 어쩔 수 없이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 말은 황태자로서의 발언이고, '이 혼란을 막고 중국을 강하게 하려면 황제가 필요하다' 는 내심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원세개가 제위를 넘볼 무렵에 위협적인 대상은 그의 충실한 심복이었던 단기서였습니다. 원세개 본인이 섭정왕 때문에 잠시 낙향해 있을 무렵, 이인자인 단기서는 북양군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세개는 측근들도 견제해기에 단기서를 점점 배제했고, 혹시 그들이 군주제에 대해서 물으면 부정했습니다. 어느날 풍국장이 베이징에 와 군주제에 대해 묻제 원세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난 절대 황제가 될 생각이 없네. 원씨 집안에는 예순 살을 넘긴 사람이 없어. 내 나이 올해 쉰 여덞이야. 황제가 된다 해도 몇 해를 하겠나? 그리고 황제는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법인데 큰아들 극정이는 장애가 있고, 둘째 극문이는 엉터리 서닙고, 셋째 극량이는 도적인데 누가 대업을 이을 수 있겠나? 걱정 하지 말게."
그러나 양사이, 단지귀, 장진방, 뇌진춘, 원내관, 하수전 등은 비밀리에 군주제 논의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원세개는 자신의 황제 등극을 위해 외국 학자들을 정치고문으로 초빙해서 자신을 지지하게 하였습니다. 게중 미국의 행정법 학자인 프랭크 굿노(Frank Johnson Goodnow) 콜롬비아대학 교수는,
"중국에는 공화제보다 군주제가 훨씬 적합하다는것은 의문의 여지가 거의 없다. 생각건대 중국이 독립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입헌정치를 채택하는 수 밖에 없다. 그 나라의 역사, 관습, 사회, 경제 상황 및 열강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중국의 입헌은 공화제를 바탕으로 하는것에 비해 군주제를 바탕으로 하는 편이 훨씬 쉽다."
고 말해습니다. 이것을 그저 순수한 학문적 연구라고 변호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지간해서는 그런 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의 법학박사인 아리가 나가오(有賀長雄) 역시 정치고문으로 초빙되어 중국의 군주제에 대한 찬성의 의사를 내었습니다. 이러는 한편 원세개의 측근들은 주안회(籌安會)라는 조직을 탄생시켰는데, 연구단체를 표명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원세개의 황제 등극을 위한 단체였습니다. 그들은 선언문에 이렇게 썻습니다.
"신해혁명 당시 국민들은 감정에 사로잡혀 국정을 미처 고려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공화국을 세웠다. 중화민국 건립 이후 나라는 많은 위험을 겪어왔고, 국민은 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 이렇게 계속 나아간다면 고통은 끝이 없을 것이다. 미국의 대 정치학자 굿노우 박사도 군주제는 공화제에 비해 우수하므로 중국은 군주제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중국 국민은 눈앞의 일만 보고 나라가 망하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이러한 주안회의 활동은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양계초는 『이상하도다, 국체 문제여』 라는 글을 발표하여 이를 반박했고, 왕봉영, 서불소 등의 인물들은 편지를 보내 주안회의 이론을 비판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주안회를 사법기관에 고소했습니다.
이 시점에 이르러서도 원세개는 황제 즉위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단히 교활한 인물인 원세개가 황제 즉위가 가져올 부작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것이 더 말이 안될 것입니다. 원세개는 공무를 보면서도 베이징에서 중국어 신문인 순천시보(順天市報)를 즐겨 보았는데, 베이징의 다른 신문들은 위협을 받거나, 매수되어 감히 군주제에 비판을 하지 못하는 와중에서도 순천시보만은 올곧은 목소리로 애기를 하곤 앴습니다.
원세개 주변의 인물들이야 전부 이익을 노려 제위를 말하고 있으니, 그들을 통해 여론을 살피는것은 불가능 합니다. 원세개는 순천시보를 보면서 여론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문제를 일으킨 것은 황제병에 걸린 원극정이었습니다. 그는 온종일 군주제 시행을 위해 매달리고 있으니 순천시보가 거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원극정은 순천시보를 위조해서 찍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이 위조된 순천시보를 몰래 바꿔치기 하여 원세개에게 보여주었고, 여론 역시 군주제를 옹호한다며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이미 노욕이 가득했던 원세개는 이렇게 되자 최후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원세개국민의 간절한 바람을 차마 뿌리치기 어렵다며 마침내 제위에 올랐습니다. 이로써 한때 중국의 앞날을 비쳐줄것으로 여겨졌던 중국 제일의 근대화론자가,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비극이 완성된 셈입니다. 그는 전국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제위에 올랐습니다. 1915년 12월 12일, 그는 베이징의 회인당에서 고관들을 접견하고, 황제로 즉위했음을 알렸습니다. 또 이듬해 1916년을 흥헌(洪憲) 원년으로 개원하기로 했습니다.
"제위에 있으면 영구히 어깨를 펼 날이 없다. 그러므로 황제는 근심하고 노력하여,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자리이지 결코 안락한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리로 보아서는 안 된다. 또한 역대 황제의 자손이 선행에 대한 보답을 받는 일은 드물다. 평생 모든 학문과 직업이 자유롭지 못하니 황실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짐은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하는 대계를 위해 자손을 희생하는 것도 감히 피하지 않겠다."
이것이 회인당에서 원세개가 한 연설입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청조의 어린 황제에게 종언을 선언한 그 사람이 이제 스스로 황제가 되려 했으므로, 저잣거리의 무지렁이까지 괘씸하다고 분개했습니다. 국민당과 국회를 탄압하고,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추대운동을 했다는 것은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1915년 12월, 운남의 거리에서 주더는 비틀거리며 미쳐가는 세상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채악마저 원세개의 주구가 되었다는 씁쓸한 이야기가 전해졌습니다. 근거도 없고 출처도 없는 소리였지만 무언들 일어나지 못하랴 싶은 시국이었습니다. 그때, 주더는 잘 알고 지내던 국민당 동료 한 사람을 길거리에서 만났습니다.
뭐라고 인사를 해보려고 주더는 했겠지만, 그 사람은 구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처음 만난 사람들 대하듯 주더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몇 마디 전갈을 재빨리 전하고 사라졌습니다. 그날 밤 가장 믿을 만한 공화파 장교들을 모아서 외곽의 어느 절로 나오라는 이야기 말이었습니다.
영문을 모른채 지시에 따른 주더는, 자신 외에도 한 떼의 청년 장교들이 모인 것을 보았습니다. 낮에 주더에게 전갈을 전했던 국민당 동료는, 거기서 조그만 헝겊조각을 내밀었습니다. 그 조각에는, 놀랍게도 채악의 서명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채악이 밀사를 보내 명령을 따르도록 지시한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명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2월 25일 새벽을 기해 채악이 운남부 일대의 병력을 이끌고 봉기하여 공화정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고, 또 전국민에게 총궐기하여 원세개를 타도하도록 요구할 터이니, 그와 동시에 여러 주요 도시의 공화파도 동일한 조취를 취하며, 주더가 있는 곳의 부대는 열차를 이용해서 운남부로 이동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운남군 8개 연대는 사천성으로 진격, 원세개의 통치조직을 타도할 예정이었습니다.
주더와 다른 공화파 장교들은 약속한 날짜가 되기까지 부지런히 군대를 훈련시켰고, 정해진 날짜가 되자 병력을 집결 시킨 후 공화정에 충성을 맹세케 하고, 열차를 징발하여 운남부로 출발했습니다. 그가 도착했을때, 채악은 회의 중이었습니다. 주더는 과거의 상관을 보고, 놀라움과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채악이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을 때……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 뺨이 움푹 꺼진 채 유령처럼 수척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눈만은 이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폐결핵으로 죽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목소리도 너무 작고 기력이 없어 가까이 가야만 그의 이야기를 알아 들을 수 있었어요. 그가 나에게 다가오자 나는 고개를 떨구고 눈물만 흘릴 뿐, 말 한 마디 할 수 없었습니다."
베이징에 있어야할 채악이 운남에 있었던 것은 실로 극적이었습니다. 2년간 채악은 베이징에서 원세개의 비밀 경찰의 감시를 받았고, 밤낮없는 경계 속을 간신히 따돌리고 천진으로 도주한 후, 일본으로 가는 배에 타서 다시 인도차이나를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프랑스 열차편을 통해 운남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주더는 채악이 죽움을 향해 서서히 다가가고 있음을 보았지만, 그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했습니다. 육체는 쇠약해졌더라도 정신은 과거와 다름없이 칼날처럼 예리했던 것입니다. 채악은 그 자리에서 전국적인 봉기계획을 설명했습니다. 그는 사천 원정군의 지휘관 겸 남부 3성 공화군의 최고사령관이 되었고, 운남군은 호국군(護國軍)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호국군의 제 1군은 사천으로 진격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채악이 사천 원정군의 지휘관이니 당연히 그 역시 사천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채악의 보고가 끝나자 주더는 일어나서 외쳤습니다.
"하지만 이번 원정에 장군님은 참여하실 수 없습니다! 장군님은 병환 중이라, 이번에 출정하시면 필시 목숨을 잃으실 겁니다."
채악은 주더를 잠시동안 말 없이 바라보다가, 눈길을 돌리면서 입을 열었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잖은가. 어차피 생명의 불꽃은 꺼져가고 있소."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렇다면야, 난 그 남은 불꽃을 공화국에 바치겠소이다."
꺼져가는 불꽃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던 채악은 군대를 이끌고 사천으로 진격했습니다. 그 움직임을 원세개가 알지 못할리 없었습니다. 원세개는 몹시 분개하였지만, 자신에게는 수십만의 군대가 있으니 반드시 호국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황제의 행보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묘한 일이 있었습니다. 원세개는 혹시 외국이 황제 즉위를 가지고 트집을 잡지는 않을까 두려워 중화민국의 연호 역시 사용하면서 외교시에는 총통의 신분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렇게 되어 중국은 제국과 민국이 공존하여 민국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며, 민국이기도 하고 제국이기도 한 이상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원세개 역시 황제이면서도 총통이었고, 황제도 아니면서 총통도 아니었습니다. 외국의 신문들은 그를 "황제 총통" 이라고 풍자했습니다.
하지만 호국군의 기세는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천을 점령하고 귀주의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게다가 기회를 엿보던 쑨원의 중화혁명군 역시 봉기하여 광동, 산동, 호남, 호북에서 연이어 일어나 원세개에게 반대하는 무장 투쟁은 계속 확대되었습니다.
원세개의 집안에서 마저 그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원세개의 사촌 여동생인 원서정은 편지를 보내 "민중의 뜻에 따랐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반역에 불과하다." 고 말했으며, 원세개의 동생인 원세동은 하남에서 베이징까지 올라와 따졌습니다.
"황제가 되었다 하더라도 형님은 청 황실의 반역자이며 불효자식입니다. 어서 그 명령을 철회하십시오."
원세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그만둘 수는 없다. 하느님과 백성들의 뜻이니 말이다. 나는 만백성의 뜻을 따랐을 뿐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것을 깨닫게 된 원세동은 원세개와 혈연 관계를 모두 끊어버리고, 하남에서 군대를 모집하여 원세개에 반대하는 깃발을 내걸었습니다. 원세개는 그 이야기를 듣자 탄식을 하더니, 하남 장군 조척을 시켜 원세동이 모집한 군대를 쫓아 버렸습니다. 국민의 반대, 그리고 혈육들의 반대는 원세개의 정신을 점점 피폐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식들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인 원극정은 다리를 저는데다 왼손에도 문제가 있어 황제가 되기 어려웠고, 둘째 아들 원극문은 원세개의 총애를 받았기에 장차 원극문이 후계자가 된다는 이야기가 퍼져나왔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원극정은 "둘째를 죽여버리겠다." 며 노발대발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원세개의 딸인 원숙정은 어느날 자신이 간식으로 즐겨먹던 콩을 사오라고 여종에게 시켰습니다. 여종은 콩을 '순천시보'에 싸왔는데, 원숙정이 우연찮게 집 안의 신문과 비교를 해 보니 내용이 전혀 달랐습니다. 하도 이상하여 날짜를 맞춰보았는데, 날짜만 같을뿐 내용은 역시 판이했습니다. 숙정은 그날 저녁 신문을 아버지에게 가져다 주었고, 원세개는 그 신문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습니다. 원숙정은 사실대로 대답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원세개는 원극정을 불러 심문했고, 진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격분한 원세개는 벌떡 일어나 채찍으로 아들을 후려 패면서 울분이 터진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버지를 속인 놈! 나라를 망친 놈 같으니!"
그 이후로 원세개는 극정을 보기만 하면 화를 내었고, 군주제 역시 어렵겠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전투에서는 무기가 부족한 호국군을 북양군이 밀어부치고 있었지만, 이제 북양군 내부에서도 원세개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복벽파였던 장훈 같은 경우 필요한 지원을 해주지 않고 원세개가 역적이라며 모욕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풍국장이 나라를 뒤엎으려 한다는 보고가 들려오자, 원세개가 유일하게 믿고 있는 북양군 마저 믿을 수 없게 되었다며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북양군 내부가 진퇴에 휩싸일 무렵 전열을 추스른 호국군은 다시 한번 재반격을 감행하여 노도와 같이 진격을 했습니다. 그런 마당에서도 원극정은 황제꿈을 못 버려 "아직 싸울 수 있다." 고 이야기했지만, 원세개는 마침내 군주제 철회 명령을 내렸습니다. 83일 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총통직은 아직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온 나라가 원세개를 성토했지만, 그는 최후의 발악을 하며 4월 21일 책임내각제를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원세개의 동지였던 서세창은 자신은 이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며 사임하는 등 난장판 그 자체였습니다.
장작림
원세개가 최후의 발악으로 한번 믿어본 사람은 봉천의 장작림이었습니다. 장작림은 1914년 6월 6일에 원세개를 알현했고, 그 자리에서 촌놈 흉내를 내며 어수룩한 사람으로 자신을 위장하면서 원세개가 군주제를 시행하는 동안 이를 적극 도왔습니다. 이를테면 원세개가 없으면 죽고 못사는 시늉을 하고, 봉천 국민 대표회의를 열어 주민들의 의사를 물어본다면서 투표장에 무장한 군인들을 깔아놓아 전원 군주제 찬성이 나오게 했으며, 전문을 보내 어서 제위에 오를것을 재촉하는 등 원세개의 엉덩이라도 햚을듯이 정말 두 눈뜨고 보기 힘든 수준이었습니다.
"어서 빨리 제제(帝制)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작림은 죽고 싶을 뿐입니다!"
이때 보여준 장작림의 태도는 원세개에게도 인상이 깊어, 사면초가가 되었던 원세개는 장작림을 급히 호출했습니다. 그의 군사력으로 자신을 도와주면 공후백작에 임명하겠다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장작림은 젊은 시절의 원세개, 그 자체였습니다. 원세개의 교활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던 장작림은, 원세개가 끝장났다는 사실을 깨닫자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그를 비난했습니다.
"봉천은 봉천 사람이 다스릴 뿐이다! 황제가 다 무어냐!"
그리고 동삼성에 남이 있던 원세개의 세력을 모조리 일소하며 만주를 자신의 판도로 완전히 굳혔습니다. 당시 중국 상황을 묘사한 동아일보의 기사 중에 하나는, 이렇게까지 표현했습니다.
"원세개가 망하자 손뼉 치고 좋아라 한것은 손일선(쑨원) 보다도 27사 사단장 장작림이었다."
평소에 온갖 보양식을 먹으며 건강 관리에 힘을 쏟은 원세개 였지만, 사태가 이렇게 되자 극히 초조해지고 부끄럽기도 하며, 분하기도 해서 병세는 급속도로 약화되었습니다. 심복인 탕향명(湯薌銘)의 배반은 그 결정타였습니다. 원세개는 방광결석에 시달렸는데,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해 요독증으로 변하여 먹지도 못하고 배뇨도 못하며 병석에서 일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누워서 의사가 소변을 뽑아주는 신세에 놓였습니다. 한때 위풍당당하게 중국을 좌지우지 했던 자신이 이렇게 변하자, 원세개 역시 최후가 머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6월 6일 새벽, 서세창과 단기서, 단지귀, 왕사진, 장진방 등은 원세개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병상을 찾았습니다. 원세개는 힘겹게 눈을 떠 서세창을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습니다.
"모두들 잘 왔네. 난 이미 다 된 사람이야."
서세창은 원세개가 며칠만 지나면 나을 것이라 이야기하면서도, 혹시 할 말이 있으면 미리 해두는것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원세개는 입술을 약간 움직이지니 "약법" 이라고 둘 글자를 말했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의사는 원세개에게 강심제(强心劑)를 놓았고, 원세개는 다시 깨어나 아주 힘겹게 마지막 말을 내뱉었습니다.
"'그' 가 나를 해쳤어!"
그리고 원세개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나이 58세였였습니다. 정확히 '그' 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원세개의 가족들은 원극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원극정은 장례기간 내내 상복을 입고 몇 번이나 영전에 무릎을 꿇으며 울부짖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정말 미안해요!"
그 무렵, 채악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최악이었던 채악의 몸 상태는 치열한 전쟁을 겪으며 도리가 없는 지경으로 망가졌고, 두 눈은 충혈되었으며 목소리는 한층 쇠잔해졌습니다. 몸에 걸친 군복은 마치 수의처럼 보였습니다. 어느정도 사태가 진전이 되자 채악은 주택으로 옮겨졌지만, 의사는 그가 기력이 회복될 때까지는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채악은 의사의 지시대로 병상에 누워있긴 했지만 부관과 참모들을 끊임없이 불러들여 사천성의 부흥 계획을 부지런히 논의했습니다.
주더는 그런 채악을 계속해서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채악은, 죽어가는 사람의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한 의지로 대답했습니다.
"내가 죽을 날은 얼마 남지 않았소.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이 중국 서부와 서남부, 어쩌면 중국 전체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지도 모르는 일 아니오."
원세개가 몰락하고 난뒤, 채악은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 감투들을 모두 내던지고 요양을 위해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요양' 을 하러 간다기 보다는, 마지막을 준비하기 위해 가는 셈이었습니다. 주더는 떠나는 그를 보자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채악은 이미 유령이나 다름이 없었고, 너무나 쇠잔해서 제대로 걸을 수 조차 없었으며, 허리를 굽이고 귀를 가까이 대야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도 작아졌습니다.
채악은 자신의 일본행이 쓸데 없는 일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두려운것은…… 내 죽음이 아니라 중국의 장래요."
호국군 내의 야심만만한 인물들, 탐욕스러운 협잡꾼들, 모래알 같은 조직들, 그 모든것을 하나로 묶고 있던것은 그저 채악이라는 개인의 힘과 헌신적인 노력이었습니다. 이 인물이 사라질 경우, 혁명을 위해 싸웠던 인물들이 별도의 군벌놀이를 하게 될 것은 너무나 뻔해보였습니다.
복잡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주더를 뒤로 하고, 채악은 배에 올라탔습니다. 주더는 나루터에 멍하니 서서 멀어져가는 채악의 배를 바라보았습니다. 배는 양자강의 안개 속으로 빨려들어가듯이 사라져갔습니다. 배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주더는 하염없이, 하염없이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습니다.
2개월 후, 주더는 예상은 했던, 그러나 비통한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채악의 사후,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한때 "반혁명" 을 타도하기 위해 기치를 세웠던 호국군의 지휘관들은, 혁명의 전사에서 탐욕스러운 군벌로 변모하며 사천과 운남의 여러 지역에서 왕 노릇을 했습니다. 주더 역시 한동안 한 지역의 군벌로 군림하며 아편에 쩔어 지내며 인생을 낭비했습니다. 원세개는 몰락했지만, 그 후계자인 북양의 군벌들은 오히려 더 활개를 치며 중국의 전역을 지배하여 총을 들고 전쟁을 벌이고 수탈을 일삼았습니다. 사회는 안정되기는 커녕, 더욱더 혼란해졌습니다.
쑨원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그가 기대를 걸었던 군벌 체제는 그가 죽는 순간까지 쑨원을 배신했습니다. 장제스는 국민당을 장악하며 대두했지만 그 역시 모든것을 바꾸지 못했고, 곧이어 중국은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이라는 참극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공산당은 승리자가 되어 분란을 종식시키고 통일을 이루었지만, 곧 이어 내부적인 문제에 직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점에 이르는것 조차도 수십년은 걸리는 이야기입니다.
청나라 말기의 혼란에서부터 이를 해결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려는 사람들은 무수히 많았지만, 시대가 지나도 사회의 혼란은 해결되지 않았고, 굶어죽는 사람들 역시 수두룩 했으며, 정치적인 분열은 종식되지 않았습니다. 맨 처음 백련교도들이 난을 일으켰지만 나아진 것은 없었고, 태평천국이 기치를 걸었지만 죽어가는 사람들은 오히려 늘었습니다. 청나라를 전복하기 위한 혁명가들의 시도는 마침내 성공했지만 그 결과는 원세개의 통치였으며, 제왕병자를 무너뜨린 후에도 다가온것은 군벌의 시대였습니다. 북벌은 군벌의 시대를 종식시켰지만, 북양 군벌이 몰락한 후에도 중국의 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생 처음으로 나는 이곳에서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보낸 악몽 같은 여러 시간 동안 굶어 죽어가는 수만 명의 남자, 여자, 어린이를 끊임없이 목격해야만 했다.
한 남자가, 그것도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서 열심히 일만 했지 남에게 큰 해라고는 끼친 적이라곤 없는 정직하고 훌륭한 한 남자가 한 달 이상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때의 모습을 본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정말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참혹한 모습이었다. 생명을 잃어가는 그의 살은 쭈글쭈글하게 주름져 쳐지고, 그의 몸에 있는 뼈라는 뼈는 남김없이 드러났다. 그의 눈에서는 초점이 사라졌다.
비록 20세의 청년이었지만 그는 기력이 쇠한 노파처럼 이곳에서 저곳으로 몸을 질질 끌며 가까스로 움직였다. 재수가 좋은 사내라면 이미 오래 전에 자기 마누라와 딸들을 팔아먹었을 것이다. 어찌됬든 그는 그가 가진 모든 것, 심지어는 집의 서까래와 옷까지도 팔아 버렸다. 어쩌면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의 위엄마저도 팔아 버렸는지, 그는 그 뜨거운 뙤약별 아래 드러누워 시든 올리브 열매 같은 불알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뒤척거렸다. 이 최후의 음산한 웃음거리를 보고서야 비로소 그가 한때 남자였음을 겨우 떠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어린이들은 이보다도 더 비참했다. 그들의 조그만 등뼈는 기형으로 굽어 있고 그들의 양 팔은 나뭇가지 같았으며, 나무 껍질과 풀뿌리로 채워진 그드의 자주색 배는 혹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죽음을 기다리며 구석에 쓰러져 있는 여자들은 궁둥이가 바짝 말라 뼈만 날카롭게 튀어나왔고, 가슴은 쭈그러진 자루 같았다. 그러나 부인과 여자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죽었거나 팔려갔기 때문이다.
이상은 나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기근 때문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갔고,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살납제의 거리에서 막 목숨이 끊어진 시체를 보았으며, 촌락의 얕은 웅덩이에 기근과 질병의 희생자들이 죽어 겹겹히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이 가장 충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더욱 청격적인 것은 이런 마을을 대부분에서 아직도 부자와 쌀 매점상인과 밀 매점상인, 그리고 고리대금업자와 지주들이 무장병력의 보호를 받으며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도시에는 관리들이 기생들과 어우려저 노래하고 희롱하는 사이에 식량이 산처럼 쌓이기 시작한것도 벌써 여러 날 되었다는 것이다."
에드가 스노우는 중국의 서북 지역을 둘러보고, 절망에 찬 어조로 참상을 기록했습니다. 그가 중국 공산당에 우호적이기에 사태를 과장하여 표현할 수는 있으나, 윌 듀란트 역시 1930년 대 무렵의 중국에 대해, 동일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로서 '문명 이야기' 에서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오늘날 중국이 처해 있는 모든 표면적인 여건들을 관전자 입장에서 보자면 중국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고 결론짓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가뭄으로 줄기마름병이 들거나 홍수로 망가진 논밭의 황폐함, 목재의 낭비, 기진한 농부들의 망연자실, 자녀들의 높은 사망률, 공장 노예들의 혹사, 도시의 질병에 시달리는 빈민촌과 세금에 시달리는 가정, 뇌물에 시달리는 상업과 외국인이 지배하는 산업, 정부의 부패, 방어력의 허약함, 국민들의 심한 파벌 의식등을 생각하면 잠시 과연 중국이 다시 위대해질 수나 있을 것인지, 다시 정복자들을 흡수하여 자신의 창조적인 생활을 영위할수 있을지 의심하게 된다."
'중국의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하여, 지난 100여년의 가까운 세월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싸워오고, 투쟁했으며, 죽어나갔습니다. 그러나 1840년대에도, 1890년대에도, 1920년대에도, 1940년대에도, 어쩌면 현재에 이르러도 그것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 입니다.
중국은 결코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 할 수 없는것인가?
그러나, 이 거대한 하나의 대륙은 태고의 시대부터 그 땅에 발자취를 남긴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여기에는 기나긴 사막의 행로를 지나 봇짐을 들고 오던 상인의 기억이 있고, 천지를 뒤흔들던 백만의 대군이 지나간 기억이 있습니다. 달이 비치는 강가를 젖게 하던 여인의 비파소리가 있고, 그 가락에 취해 세상을 몇마디 말로 풍자하던 시인의 기상이 있습니다. 조용한 벌판을 딛고 나아가는 말들의 발굽 소리가 들리울때, 비분강개를 못 이겨 강에 몸을 던진 충국의 선열이 있습니다. 난세의 절망으로 가득찬 세상에서도, 미래를 위한 기록을 남기는 문인이 있습니다.
그 너무나 거대한 빛 앞에서는 몰락이라는 이름의 어둠조차 그 그림자를 오래 가누기 힘들 것입니다. 그림자는 때로는 부패한 조정이 되고, 제국주의의 압력이 되고, 미몽을 버리지 못한 제왕병자가 되고, 부패한 군벌이 될 것이며, 압제적인 정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상처 속에서도 전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영원히 패배자로 머물 일은 없을 것입니다. 쑨원의 말처럼,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1930년대, 절망과 고통 밖에 남지 않은 중국에 대하여 윌 듀란트는 저서 '문명 이야기' 에서 앞서와 같은 부정적인 언급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책은 거기서 끝을 맺지는 않습니다. 당대 무너져가고 병들어서 썩어가고 있던 '중국' 에 대한 마지막 발언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표면 밑에는 다시 회복하여 부활할 수 있는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땅은 크기도 엄청나며... 이 나라는 화려함과 몰락, 죽음과 부활을 되풀이하며 300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가장 창조적이던 여러 시대에서 볼수있는 모든 물리적 정신적 활력을 지금도 보이고 있다.
어떤 군대의 승리나 외국 자본의 횡포도 자원과 활력이 그토록 풍부한 나라를 오래 억누를 수 없다. 중국이 활력을 잃기 전에 침략자의 자금이나 인내심이 먼저 바닥나게 될 것이다... 온갖 혼란은 잠시의 과도기적 현상일 뿐이다. 결국 무질서는 호전되어 강력한 정부의 지도력과 스스로 균형을 이루게 될 것이다. 옛 장애물은 대체로 사라지고 새로운 성장이 자유롭게 이루어질 것이다. 혁명이란 죽음과 유행처럼 폐물을 제거하고 쓸데없는 것을 도려내는 것이다. 혁명은 많은 것이 죽을 준비가 되어있을때만 일어나기 마련이다. 중국은 이미 여러 번 죽었다."
"그리고 여러 번 다시 부활했다."
참조 문헌 :
중국을 말한다 ─ 석양의 노을, 포성 속의 존엄(신원문화사)
천추흥망 ─ 중화의 황혼 청나라(따뜻한 손)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살림)
중국의 서진 ─ 피터 퍼듀(도서출판 길)
강희제 ─ 조너선 스펜스(이산)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 ─ 등예쥔(시아출판사)
강희제 평전 ─ 장자오청(민음사)
옹정제 ─ 미야자키 이치사다(이산)
건륭제 ─ 마크 앨리엇(천지인)
해적왕 정성공 ─ 조너선 클레멘츠(삼우반)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 르네 그루세(사계절)
중국의 전통시장 ─ 윌리엄 스키너(신서원)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 신성곤(서해문집)
반역의 책 ─ 조너선 스펜스(이산)
신의 아들 ─ 조너선 스펜스(이산)
홍수전 ─ 고지마 신지(고려원)
위대한 길 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 ─ 아그네스 스메들리(두레)
만주군벌 장작림 ─ 쉬처(아지랑이)
중국의 붉은 별 ─ 에드가 스노우(두레)
손문평전 ─ 시프린(지식산업사)
문명이야기 ─ 윌 듀란트(민음사)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 구범진(민음사)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중국사 ─ 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시공사)
청사, 만주족이 통치한 중국 ─ 임계순(신서원)
현대 중국을 찾아서 ─ 조너선 스펜스(이산)
원세개 ─ 허우이제(지호)
신해혁명 ─ 장밍(한얼미디어)
리훙장 평전 ─ 양계초(프리스마)
청 황실의 마지막 궁녀가 직접 들려주는 서태후와 궁녀들 ─ 룽얼(글항아리)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 김호동(사계절)
만주족의 청제국 ─ 마크 C. 엘리엇(푸른 역사)
건건록 ─ 무쓰 무네미쓰(범우사)
중화 유신의 빛 양계초 ─ 서강(이끌리오)
자금성의 황혼 ─ 레지널드 존스턴(돌베게)
청대 정책 결정 기구와 정치 세력 ─ 송미령(혜안)
만주족의 역사 ─ 패멀라 카일 크로슬리(돌베게)
192년대 동아일보
人蔘과 疆域 : 後金-淸의 강역인식과 대외관계의 변화 ─ 김선민
淸 中期 민남의 械鬪 盛行과 그 背景 ─ 원정식
談遷의 崇禎帝 評價 ─ 김택중
사르후(薩爾滸, Sarhu)戰鬪와 누르하치 ─ 유지원
淸 入關前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의 宗敎政策 ─ 유지원
준가르부 침공기간(1728-1733) 중 청조의 티베트 지배의 실상 ─ 유정하
옹정년간(1723-1728) 티베트지배像에 대한 재고찰 ─ 유정하
16, 17세기 明淸交替와 한반도 : ‘再造之恩’, 銀, 그리고 쿠데타의 변주곡 ─ 한명기
明末 遼東 沿海 일대의 '海上勢力' ─ 정병철
18세기 초 청·준가르몽고 관계 연구 : 『청내각몽고당당』중 체왕랍탄[tsewang labtan]관련 기사 중심으로 ─ 조병학
청대 불교 세계의 여행 ─ 김성수
미곡을 통해 본 청대 중국사회의 시대상 : 糧價 자료 정리 및 糧價 연구의 회고 ─ 문명기
康雍乾시대 '大一統' 정책과 시각 이미지 ─ 정석범
대청회전(大淸會典) :명문화된 만주인의 중국지배 ─ 이영옥
淸 康熙帝 東巡의 목적과 의미 ─ 송미영
康熙帝의 淸 帝國 구상과 滿洲族의 정체성 :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 송미영
부베와 라이프니츠 ─ 안종수
천하태평 (天下太平)의 이상과 현실 : <강희제 남순도 권 (康熙帝 南巡 ? 卷)>의 정치적 성격 ─ 장진성
淸 康熙帝의 皇太子 결정과 그 位相 ─ 송미영
첫댓글 지금까지 정말 잘 봤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잘 보았어요. 정말 수고하셨네요.
어휴 드디어 끝이군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감동적인 결말입니다. 진짜 책으로 쓰셔도 될듯...
PS. 노래도 좋군요.
잘 봤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만주족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지켜보았습니다.
좋은 글 정말 감사드립니다
중국의 문제는 너무나 거대한 대륙을 하나의 정부가 통치하려다보니 생기는 문제인듯.
중국에는 인간사의 모든 문제가 있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