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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찬공파(參贊公派)의 유래(1派)
참찬공파의 뿌리인 판서공파
순흥안씨 판서공파(判書公派) 파조는 판서공 휘(諱)종약(從約)이시다. 고려명현(名賢) 문성공 향(諱 珦) 선조의 5대손(孫)이다. 문성공의 증손인 경질공(景質公 諱 瑗)과 영양군부인(英陽郡夫人) 남(南)씨의 장자(長子)로 1355년(乙未 공민왕4)에 출생하시고, 1388년(戊辰)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셨다.
조선 초에 이조참의(吏曹參議 正三品)에 선발(選拔)되었으나 즐거워하지 않았고, 해주목사(海州牧使)를 끝으로 관직을 물러나서 서원(瑞原 지금의 파주)의 농막(農幕)에 머무셨다.
파주의 농막은 공(公)의 조부 문숙공(諱 牧) 대에 황무지였던 파주 일대를 개간하여 농장을 만들고, 부친이신 경질공(諱 瑗)대에 창성(昌盛)했다. ‘t순흥안씨 파주농장’은 넓기가 수만 경(數萬 頃 약 일억 평)에 달하고 노비가 사는 집이 백여 채가될 정도로 큰 농장이었다. 조선 태조가 한양의 경복궁이 완공될 때까지 6개월여를 거처했다는 기록(조선왕조실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단히 큰 집이있었을 것이다.
파주 농장에서 금주(琴酒)와 시서(詩書)로 자적(自適)하며 세간사(世間事)를 멀리 하시다가 향년(享年) 70인 세종6년(1424년) 3월 8일에 일생을 마치시니, 장지(葬地)는 교하(交河) 아곡방 야동(阿谷坊 冶洞 지금의 파주시 야동동)이었다.
이후 증손(曾孫) 침(琛 판서)과 당(瑭좌의정)의 귀현(貴顯)으로 증직(贈職)이 되니 이조판서(吏曹判書)이다. 겸하여 경연(經筵)과 춘추관(春秋館)과 성균관(成均館)과 의금부(義禁府)의 지사(知事),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과 예문관(禮文館) 대제학(大提學)을 추증(追贈) 받으셨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양도공(良度公) 양생(봉원부원군 良生)의 여(女)이다.
판서공은 4남2녀를 두셨다. 장남은 구(玖)로 직제학에 증직(贈職)이 참찬(參贊正二品)이고, 2남은 경(璟)으로 판윤(判尹)에 증직이 찬성(贊成 從1品)이며, 3남은 수(琇)로 직장(直長 從七品)이며, 4남은 리(理)로 군수(郡守 從四品)이다. 장녀는 성염조(成念祖 판서)와 혼인하였고, 2녀는 박수지(朴遂智 현감)에게 시집갔다.
세상이 칭(稱)하기를 ‘구․경․수․리(玖․璟․琇․理)’t라 하는 판서공 종약(從約 10세)파 자손은 순흥안씨 순수 혈통(血統)을 이어왔고, 장자가 11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하는 대기록을 세운 문성공 자손의 적손(嫡孫)이다. 순흥안씨 최초의 족보 병오보(丙午1546년) 이래로 ‘문성공자손(文成公子孫)’으로 기록되다가, 자손이번성하여 여러 지파(支派)로 갈라지면서 판서공을 파조(派祖)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가 되었다.
☞. 파주 농장 또는 서원 별서는 신재 성현(1439~1504)이 쓴 수필집 『용재총화』에서 자신의 외가인 순흥안씨집안과 안목(1290~1360)에 의해 시작된 농장에 관한 기록과 외조 판서공 종약(1355~1424)과 가계기록이 나온다. 농장의 형성과 규모, 노비의 수, 신흥사대부 가문의 토지확대 과정을 볼 수 있다.
후손이 더욱 번성하여 종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므로 다른 지파와 비교가 되니, 무오보(戊午1918년)부터 판서공의 아드님 넷이 모두 파조가 되어 분리되었다.
곧 참찬공(玖)파, 찬성공(璟)파, 직장공(琇)파, 서파공(理)파이다.
판서공의 이복형제(異腹兄弟)인 종례(從禮 감찰공), 종의(從義 첨추공), 종렴(從廉 도정공), 종신(從信 참판공), 종검(從儉 참의공) 등 5형제도 모두 파조가 되었으니, 이들은 경질공의 계배(繼配)인 파평군부인(坡平郡夫人) 윤(尹)씨 소생이다.
판서공의 증조인 문숙공의 이복형제 신(愼)은 군부인(郡夫人) 이(李)씨 소생으로 판관공(判官公)파의 파조가 된다. 또한 경질공의 아우이자 판서공의 숙부가 되는 조동(祖同 양공공)과 수(垂 한림공)도 파조가 되어 순흥안씨 일파(一派)를 이루니, 이들은 모두 ‘문성공자손’이다.
순흥안씨 일파(一派 또는 추밀원부사공파) 곧 문성공자손이 14개로 분파된 다음에도 판서공파 종회(宗會)가 유지되고, 종원(宗員)들은 파주(坡州市 冶洞) 판서공의 묘소를 수호하는 일과 오공팔배위(五公八配位) 망배제(望拜祭)를 모셔왔다.
5공(五公)은 판서공의 부친이신 경질공(景質公 諱 瑗), 조(祖)인 문혜공(文惠公 휘 元崇), 증조(曾祖)인 문숙공(文淑公 휘 牧), 고조(高祖)인 문순공(文順公 휘于器)과 문성공(文成公 諱 珦)이시다. 8배위(八配位)는 영양군부인 남(南)씨․파평군부인 윤(尹)씨(경질공), 진한국부인 원(元)씨(문혜공), 화평군부인 김(金)씨(문숙공), 철원군부인 최(崔)씨․ 이(李)씨(문순공), 한남군부인 김(金)씨․ 서원군부인 염(廉)씨(正一品)이시다.
아! 뿌리 깊은 나무에 잎이 무성하고 샘이 깊은 물은 흐름이 긴 것이니, 오 공(五公)은 ‘뿌리 깊은 나무’요 팔 배위(八配位)는 ‘샘이 깊은 물’이라 할 것이다.
문성공의 자손은 선조를 길이길이 추모하여야 한다. 이는 문성공의 후예(後裔)로 살아야 할 고귀한 자긍(自矜)이요, 한국의 명문(名門) 순흥안씨(順興安氏)를 영원히 이어가고 빛내야 할 자존(自尊)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참찬공파의 파조
안공 휘 구(玖)는 영락(永樂) 정유년(1417)에 진사(進士)에 오르고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으며, 얼마 안 되어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에 제수되고,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과 교리(校理)로 전직하였으며, 예조(禮曹)와 이조(吏曹)의 낭관(郞官)으로 옮겼다가 특별히 홍문관과 예문관(藝文館)의 제학(提學)으로 승진하였으며, 통정대부 판군자감사(通政大夫判軍資監事)로 올랐다.
뒤에 가선대부 이조참판(嘉善大夫吏曹參判)에 추증되었으니 이는 아들 지귀(知歸)가 귀히 되었기 때문이었고, 뒤에 다시 가정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동지경연춘추관 성균관 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嘉靖大夫議政府左參贊兼同知經筵春秋館成均館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에 추증되었으니, 이는 손자인 침(琛)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 문간공(文簡公) 유관(柳寬) 같은 여러분들이 모두 마음을 울여 공을 장려하여 공경의 큰 인물로 대우하였으며, 성상께서도 또한 장차 크게 등용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하찮은 병으로 별세하니, 정통(正統) 신유년(1441) 6월 26일이었다. 이에 9월에 광주(廣州)의 돌마방(突馬坊) 율리(栗里) 영장산(靈長山) 남쪽 간좌 곤향(艮坐坤向)의 땅에 장례하였다.
공은 문성공(文成公) 회헌선생(晦軒先生) 휘 향(珦)의 6대손이다. 부친의 휘는 종약(從約)이니 이조참의(吏曹參議)로 판서(判書)에 추증되었고 정직한 도(道)로 중망(重望)을 받았다. 조부 휘 원(瑗)은 형조전서(刑曹典書)를 지냈고 시호가 경질공(景質公)인데, 고려가 망하자 충절을 지켰다. 증조와 고조 이상은 대대로 여러 공경(公卿)이 이어져 유명한 분과 덕 있는 분이 많이 있다. 판서공은 동래정씨(東萊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그 부친은 봉원군(蓬原君) 양도공(良度公) 휘 양생(良生)이다. 부인은 정숙하고 규중의 법도가 있었다.
공은 홍무(洪武) 아무 해에 출생하였는데, 출생하면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일찍 학업을 이루었으며 장성하자,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하여 근원을 탐구하고 실제를 터득하여 진수(眞髓)를 얻었다.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이씨(李氏)는 공의 배필이었는데, 유순하고 착하였다. 장례는 노(魯)나라의 예(禮)를 사용하여 합장하였다. 부인은 종실(宗室)인 완천군(完川君) 숙(淑)의 따님인데,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의 손녀이다.
공은 2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 지귀(知歸)는 대사성(大司成)이고, 지석(知碩)은 전서(典書)이며, 사위는 목사 허인(許認)과 직장(直長) 이경창(李景昌), 성문치(成文致), 남성군(南城君) 홍석(洪錫)이다. 지귀의 아들 호(瑚)는 참판(參判)이고, 선(璿)은 부정(副正)이며 침(琛)은 판서이고, 종(琮)은 군수이며, 기(璣)는 전적(典籍)이다. 지석의 아들 위(位)는 현감이다.
참찬공파의 연혁
참찬공(參贊公 諱玖)은 시조(始祖) 휘 자미(諱子美)의 9대손(九代孫)이요, 문성공(文成公)의 6대손(六代孫)으로 우리 순안(順安)의 장파(長派)이다.
부친은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인 휘 종약(諱從約)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동래정씨 봉원부원군 양도공양생(貞夫人東萊鄭氏蓬原府院君良度公良生)여(女)요 외조(外祖)는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근재 안축(謹齋安軸)이니 오안(吾安)의 외손(外孫)이기도 하다.
공이 조선 태종(太宗) 17년 정유(丁酉 1417)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하고 동년(同年) 경회루(慶會樓)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올라 한림원(翰林院)에 보임(補任)되고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과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및 교리(校理)로 전직(轉職)하였으며 예조와 이조의 낭관(郞官)으로 옮겼다가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으로 승진하고 이어 통정대부(通政大夫)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에 올랐다. 뒤에 가정대부(嘉靖大夫)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 겸동지경연춘추관(兼同知經筵春秋館) 성균관의금부사(成均館義禁府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추증(追贈)되니 이는 손자 침(琛)의 귀함 때문이다. 공(公)이 성명(聖明)한 세종의 특별한 총애(寵愛)를 받아, 치화(治化)에 업적을 많이 남겼으며, 당시 저명(著名)한 문경공 허조(文敬公許稠)와 문간공 유관(文簡公柳寬) 등이 공을 큰 인물로 공경하였는데, 50여 세를 일기(一期)로 일찍 졸(卒)하니, 모두 애석히 여겼다. 묘는 성남시 분당구율동(栗洞) 영장산 귀봉(靈長山龜峰) 간좌(艮坐)이다. 배 정부인 전주 이씨(配貞夫人 全州 李氏)는 완천군 숙(完川君淑)의 따님이니, 묘는 공조합묘(公兆合墓)이다. 10월 5일에 세사(十月初五日歲祀)한다. 동강 김영한(東江金寗漢)이 묘갈(墓碣)을 찬(撰)하고 해관 윤용구(海觀尹用求)가 서(書)하였다. 2남 4녀를 두셨으니, 장(長) 지귀(知歸)는 세종 임자(世宗壬子)(1432) 문과(文科)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가 수선교리(修善校理)와 필선보덕(弼善輔德)을 역임(歷任)하였다. 뒤에 성균관대사성 겸 경연춘추관(成均館大司成兼經筵春秋館)에 제수(除授)되고 전주부윤(全州府尹)을 역임하였으며 좌참찬 겸 양관대제학(左參贊兼兩館大提學)에 추증되었는데, 뒤에 아들 판서공 침(判書公琛)의 귀(貴)함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2남 지석(知碩)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공조전서에 이르렀으나, 사육신(死六臣)과 동류(同類)라 하여 안주(安州)에 유배(流配)되니, 그 곳에서 일생을 마친 사실이 안주읍지(安州邑誌)에 기록되어 있다. 따님은 하양인 목사 허인(河陽人牧使許認), 우계인 직장 이경창(羽溪人直長 李景昌), 창녕인 성문치(昌寧人成文致), 남양인 남성군 홍석(南陽人南城君洪錫) 등에게 출가하였다.
지귀(知歸)는 5남 3녀를 두셨으며, 장 호(長 瑚)는 문과(文科)하여 참판(參判)이요, 차(次) 선(璿)은 부정(副正)이요, 차(次) 침(琛)은 18세에 생원 진사 양시(生員進士兩試)에 합격하고, 또 문과에 올라 온 세상을 영광스럽게 여겼으며 판서(判書)에 올랐다. 차(次) 종(琮)은 군수(郡守)요, 차(次) 기(璣)는 문과전적(文科典籍)이요, 사위들은 상주인 현감 김수억(尙州人縣監金守億), 남원인 문과부정 양자첨(南原人文科副正楊子瞻), 전의인 이순형(全義人李順亨)이다. 지석(知碩)이 생(生)1남 위(位)하니, 현감(縣監)이다.
호(瑚)의 양자(養子) 처선(處善)은 선군(先君)에 이어 문과좌랑(文科佐郞)이요, 선(璿)의 자(子) 처직(處直)은 부사(府使)요, 처관(處寬)은 감역(監役)이요, 침(琛)의 자(子) 처명( 處明)은 부사(府使)요, 처성(處誠)은 군자감정(軍資監正)이요, 처신(處身)은 빙고별제(氷庫別提)요, 종(琮)의 자(子) 처중(處中)․처화(處和)는 모두 참봉(參奉)이며, 기(璣)의 자 처경(處經)은 장수현감(長水縣監)이요, 처권(處權)은 성균생원(成均生員) 처상(處常)은 성균진사(成均進士)요, 처건(處健)은 직장(直長)이요, 처순(處順)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박사 겸 경연전적춘추관기사관(弘文博士兼經筵典籍春秋館記事官)으로 걸양(乞養)하여 구례현감(求禮縣監)을 겸직하였는데,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사직하였다.
위(位)의 장자(長子) 종선(終善)은 보공장군(保功將軍)으로 부사직(副司直)이요, 차(次) 순신(舜臣)은 무과(武科)하여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위(位)와 종선부자(終善 父子)가 부조(父祖)의 유배지(流配地)에 우거(寓居)하였으며, 이후 10대를 지남에 후손이 번창하고 부귀가 이어, 관서지방(關西地方)의 명문가(名文家)가 되었다.
전적공(典籍公)이 늦은 45세에 문과(文科)하고 47세에 졸(卒)하니 배 의인조양 임씨(配宜人兆陽林氏)가 남원(南原)에 연상(連喪)하여 장사(葬事)하고 이곳에 선대문호(先代門戶)를 유지하였으니, 최초의 낙남선조(落南先祖)가 되었으며, 홀로 5남3녀를 양육함에 아마도 풍파가 끊이지 않은 서울보다 일찍이 현령(縣令)을 역임하였고, 당시 대재력가(大財力家)인 생정부친(生庭父親) 국헌(菊軒) 임옥산(林玉山) 세거(世居)한 남원이거(南原移居)를 택(擇)했으리라 추측된다. 조양 임씨(兆陽林氏)가 출가전(出嫁前) 장수동헌(長水東軒)에서 자랐고, 노후엔 역시 아들이 현감(縣監)으로 있는 장수동헌에서 졸(卒)했다는 가전(家傳)이있다.
참판공 호(參判公 瑚)․부정공 선(副正公 璿)․판서공 침(判書公 琛) 3형제는 형제동년사마시(兄弟同年司馬試)하였는데, 각 10대 안에 수보(修譜)가 안 되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군수공 종(郡守公 琮)은 임실현감(任實縣監)을 거쳐 1504년 통천군수(通川郡守)를 역임하였는데, 연산군(燕山君)의 정사(政事)가 혼란함에 벼슬을 그만두고 해주(海州)로 낙향하여 일생을 마쳤다. 묘소가 해주 서쪽으로 10리 쯤되는 면세동 자좌(免稅洞子坐)에 있으며, 매 10월 1일에 자손이 모여 행사(行祀)하니 숭조(崇祖)돈목(敦睦)의 표상(表象)이라 하겠다.
전적공(典籍公)을 흑성산(黑城山)에 모시고 기묘사화로 오안(吾安)이 화(禍)를 입자, 장수현감(長水縣監)인 처경(處經)이 벼슬에 뜻이 없어 송동면(松洞面) 흑성산(黑城山) 선영하에 은거하였다. 13세손 병직(秉直)이 1850년경 순창군(淳昌郡) 동계면(東溪面) 이동리(理洞里)에 이거(移居)하고, 이보다 앞서 장수공손(長水公孫) 광업(光業)이 1550년경 남원군 송동면(松洞面) 백평(白坪)부터 곡성군(谷城郡) 승법리(承法里)에 입향하였다가, 1770년 경을 전후하여 다시 동면(同面) 오지리(梧枝里)에 이거 설기(移居設基)하여 현재에 이르니, 장수공 자손(長水公子孫)의 집성촌이 되었다. 또 광양(光陽)은 장수공(長水公)의 증손 거(璩의 자(子) 신덕(愼德)이 1600년 경을 전후하여 승법리(承法里)에 입향하여, 지금에 이름이 아닌가 사료된다.
장수공 손(長水公孫) 계종(繼宗)은 무과(武科)하여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순절(殉節)하고, 계종(繼宗)의 자 인의(仁義)는 무과하여 선전(宣傳)을 지내고, 인의(仁義)의 자 영길(永吉)은 무과(武科)하여 권관(權管)을 지내고, 영길(永吉)의 자 숙(䃤은 문과하여 좌랑(佐郞)을 지내고, 숙(䃤의 손 준흥(俊興)이 또 무과하니, 한 대(代)띄어 연(連) 5대가 문․r무과급제(文武科及第)하였다. 상(上) 11대 문과(文科)에 이어 가상(嘉賞)한 경사(慶事)로다. 7대손 홍망(泓望)은 무과(武科)하여 호조참판(戶曹參判)하고, 8대손 익기(益基)는 무과하여 판관(判官)이요, 익하(益厦)․익후(益垕도 무과하여 익하(益厦)는 주부(主簿)요, 익후(益垕는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9대손 복화(復和)는 무과하여 곡성현감(谷城縣監)하고, 복화(復和)의 자 범성(範成)은 무과하여 사과(司果)를 지냈으며, 복명(復明)은 무과하여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장수공(長水公)의 증손 혼(琿)의 자 호덕(好德)은 군자감정(軍資監正)으로 임진난(壬辰亂)에 어가(御駕)가 도성(都城)을 떠날 때 호위하였으며, 손(孫) 건(王建)과 종손(從孫)
진(璡) 또 증손(曾孫) 시직(時稷)․시설(時卨)은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창의(倡義)하여 호위하였다. 건(王建)은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추증되고, 시직(時稷) 시설(時卨)은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었다. 현손(玄孫) 호(琥)는 숙종 무오(1678년)에 도내사림(道內士林) 최동강 시옹(崔東岡是翁)․황운계 신구(黃雲溪臣龜) 등과 더불어 승법리(承法里)에 도동묘(道東廟)를 준공하고, 동년 10월 20일 선조 문성공 진상(先祖文成公眞像)을 봉안 향사(奉安享祀)하다가 정조 40년(1790년) 오지리(梧枝里)에 이안(移安)하고 정미(1907년)에 주자상(朱子像)을 함께 봉안(奉安) 현재에 이르고 있다. 7대손 효천(孝天)은 효우특출(孝友特出)하여 4대동거(四代同居)하니, 이서구(李書九) 전라감사(全羅監司)가 특천(特薦)하여, 제(弟) 효인(孝仁)과 함께 명정(命旌)하고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었으며, 9대손 제원(濟遠)은 생양 양친(生養兩親)을 모시는 심려(深慮)로 참구의술(參究醫術)하여 묘리(妙理)를 통하고, 친환(親患)을 구하여 의술(醫術)을 베푸니, 명성을 듣고 원근에서 환자가 몰려와 유족(裕足)한 자에게는 화제(和劑)로,
형편이 어려운 자에게는 약으로 치료하다가, 종내에는 유숙 치료(留宿治療)하여 수많은 사람을 구제하였다. 뿐만아니라 인근 압록촌(鴨綠村)이 전소(全燒)하여 복구시에 원근 수혜자(遠近受惠者)와 함께 재난 구제(災難救濟)하여 수일에 완료하니, 향리 장보(鄕里章甫) 여항서(閭巷庶) 및 행로자(行路者)가 칭송하였다.
어사(御使) 심동신(沈東臣)이 계천(啓薦)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증직되었다
직장공(直長公)은 9세에 부친을 여의고, 백부 참판공 호(伯父參判公瑚)․숙부판서공 침(叔父判書公琛)의 가르침과 종백 장수현감 처경(從伯長水縣監處經)의 우애로 학문과 덕행(德行)을 닦아 조정에 천거(薦擧)되어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에 제수되었다. 얼마 아니하여 모궁(某宮)에 승진천직(昇進遷職)되었는데 기묘사화로 우리 안씨(安氏)가 화(禍)를 입자 승평(昇平: 순천(順天))의 귀곡(龜谷)에 은거하니, 이 때가 1520년대인 듯 싶으며, 이것이 순천낙향(順天落鄕)의 처음으로 간주된다. 자손이 독자이고, 증손이 용․광․성․우(瑢․珖․珹․瑀) 4형제이나, 무안공(務安公) 용(瑢)의 자(子) 수양(壽亮)이 무자(無子)하여 사제당 5대손 규(思齊堂五代孫珪)가 입양하였는데 또 독자였으나, 다행히 근․집(瑾․王集) 형제를 생(生)하여, 집(王集)의 후예가 번성하고 중씨 광(仲氏珖)은 16세 이후 수보(修譜)가 되지않아 애석하다. 숙씨 성(叔氏珹)도 자(子) 수익(壽益)․수형(壽亨) 형제에 수형(壽亨)이 1남 석(王奭)을 낳으니, 양가일자(兩家一子)라. 백부 수익(壽益)에 입양하였으나, 무자(無子)로 사제당 6대손(思齊堂六代孫) 후상(後尙)이 입양하였으니, 첨지공 여(僉知公璵)까지 5대가 독자이다. 계씨 우(瑀)는 3남 수장(壽長)․수천(壽千)․수억(壽億)을 낳으니, 수억(壽億)이 순천(順天)을 거쳐 제주도에 이거 설기(移居設基)한 것으로 간주되며, 6대손 종혁(宗赫)이 무과(武科)하고, 11대손 병학(柄學)이 철종 신유(1861년)에 역시 무과 급제하였다. 우(瑀)는 배 광산 김씨(配光山金氏)와 순천 서면 압곡 선영국내(順天西面鴨谷先塋局內)에 합장되었다. 신묘(2011년) 5월 여수 순천 관내에 산재한 태국(泰國) 이하 석(王奭)까지의 선영을 동면건천 계족산(同面乾川鷄足山) 직장공묘하(直長公墓下)에 가족산(家族山)으로 모두 이안(移安)하였다. 직장공 자손이 한때 이처럼 침체하였으나, 순천거주(順天居住) 10대에 세칭(世稱) 8대만석(八代萬石)이라는 부를 누렸고, 남원 복귀후에 자손이 다시 번창하여 13대손 병탁(秉鐸)이 고종갑자(高宗甲子: 1864년)에 문과급제하여 정언지평(正言持平)에 이르고, 종제(從弟) 춘강․r병호(春江秉鎬)는 세칭 남원4걸(南原四傑) 한 분으로 송자대전 발간(宋子大全發刊) 도유사(都有司)를 맡았고, 1936년 병자보(丙子譜) 발간을 주관하였다.
질 균섭(均燮)은 1950년 남원에서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순흥안씨전국대종회 7대 회장으로 안자묘 건립(安子廟建立)의 시급을 통감하고, 일파 대동보(一派大同譜)인 경신보(庚申譜)를 수보(修譜)하면서 어렵게 자금을 조성하여 부곡(富谷)에 안자묘(安子廟)를 건립하고, 서울 중구(中區) 필동(筆洞)에 대종회 사무실 건물을 마련하였다. 춘강의 손(春江 孫) 재준(在準)은 서울대학을 나와 한학에 정진한 바, 신구학문을 겸비하고 문필이 출중하여, 동아일보 논설실장을 역임하였고, 자유당시절이후 정치가 어지럽던 시기에 동아일보의 “s횡설수설”난을 담당 집필하여 일세를 풍미하기도 하였다.
첨지공(僉知公) 여(璵)의 선군 극량(先君克良)이 취 전주이씨(娶全州李氏) 유시녀(惟時女)하여, 41세에 졸(卒)하니, 유인 이씨(孺人李氏)가 미혼(未婚)의 첨지공(僉知公)을 데리고, 남원보절 신흥생정(南原寶節新興生庭)에 이거(移居)하니, 이때가 1770년대로 추정되며 가세 빈한하였다. 어초 용임(漁樵傭賃)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그 당시 전재산인 처재(妻財)받은 논․십두락(十斗落)으로 당시 극히 희귀(稀貴)하여 구하기 어려운 사서 삼경(四書三經)을 옆 논두렁에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있는 서상(書商)으로부터 즉석에서 구득(購得)하였던 바, 이후 그 자손이 대(代)를 이어 공부하여 그의 증손 병탁(曾孫秉鐸)은 대과(大科)에 오르기도 하였다. 7서(七書)는 현재 남원시(南原市) 역사박물관에 소장(所藏)되어 있다. 첨지공은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겸 오위장(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兼 五衛將)에 배수(拜受)되었다.
한편 상술한 바, 의인 조양 임씨(宜人兆陽林氏)가 오산생정(五山生庭)에 거(居)하며 인접한 영천(寧川)에도 자손이 거주하여 집성촌을 이룬 듯 싶다. 이것은 전적공 묘지(典籍公墓地)의 흑성산(黑城山)과 영천(寧川) 뒤의 감바위산 감암산(甘巖山)은 임씨 부인(林氏夫人)이 가져온 산(山)이라는 가전(家傳)이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사제당(思齊堂)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치사(致仕)하여 금릉(金陵)(남원군 금지면(南原郡金池面)안터)에 은거하고 8대손 극효(克孝)가 진주목사(晉州牧使) 퇴임후 1750년경 한천(寒川(구례군 산동면(求禮郡山東面)찬샘))에 설기(設基)하여, 현재에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제당(思齊堂)이 당금(黨禁)이 풀리어 다시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에 보임되고, 뒤에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에 옮기니 품계는 승훈대부(承訓大夫)라. 한양에서 졸하니 43세이다.
묘는 부친묘 후록(考兆後麓)이다. 영천서원(寧川書院)과 구례 죽연사(求禮竹淵祠)에 향사(享祀)하고, 자 전(瑑은 구원(邱園)에 은거하여 학문과 덕행을 닦고 선군묘(先君墓)와 상망거리(相望距離)에 영사정(永思亭)을 짓고 사모(思慕)하였으며, 하서 김문정공(河西金文正公)․송강 정철(松江鄭澈)․오은 윤두수(梧隱尹斗壽)․영천자 신잠(靈川子申潛)․고봉 기대승(高峰奇大升) 등과 교우하고,명(明)나라 사대수(査大受) 주지번(朱之藩) 등도 내왕하였다. 특히 주지번(朱之藩)은 영사정(永思亭) 현판을 썼다. 남원 유천서원(南原楡川書院)에 모시고, 손창국(昌國)은 효우독실(孝友篤實)하여 선조 경인(宣祖庚寅) 1590년에 천거되어 김천 도찰방(金泉道察訪)에 임명되었으며, 역시 선군(先君)과 함게 유천서원(楡川書院)에 향사하고, 손 선국(善國)은 선무랑 용양위사과(宣務郞龍驤衛司果)를 지냈으며, 증손 영(瑛)은 세칭 호왈청계(號曰淸溪)라. 임진난에 제봉 고경명(霽峯高敬命)․월파 유팽노(月波柳彭老)와 더불어 창의(倡義)하고 금산전투(錦山戰鬪)에 순절하여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에 증직되고, 남원 정충사 광주 포충사(南原旌忠祠光州褒忠祠)․금산 종용사(錦山從容祠)에 향사하니, 4대가 서원에 배향되었다. 지난 경진 2000년에 국비로 사제당 기념관(思齊堂紀念館)이 개관되었으며 동산문화재(動産文化財)로 지정된 기묘제현수필(己卯諸賢手筆)제1197호와 기묘제현수첩(己卯諸賢手帖) 제1198호 등 귀중한 문화유산(文化遺産)
이 보관되어 있다.
전대(前代)에 참찬공 현손(參贊公玄孫) 참봉공(參奉公) 증(王曾)은 하서(河西)김선생문(金先生門)에 수업하여 문학이 위세추중(爲世推重)하고, 장수공 증손(長水公曾孫) 진사공(進士公) 황(璜)․혼(琿) 형제와 사제당 손(思齊堂孫) 찰방공 창국(察訪公昌國)은 일재(一齋) 이선생문(李先生門)에 수업하였으며, 증손 고봉공(羔峰公)은 이괄난(李适亂)에 창의(倡義)하고, 7대손 백천공(白川公) 민(琝>)은 검암 박선생문(黔巖朴先生門)에 수업하고, 8대손 백강공(栢岡公) 극효(克孝)․창애공(蒼崖公) 극권(克權)․덕암공(德岩公) 극관(克觀) 삼형제는 도암 이선생문(陶庵李先生門)에 수업(受業)하여 백강공(栢岡公)은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이르고, 창애공(蒼崖公)은 회헌실기(晦軒實記)․죽계세승(竹溪世乘)․고금통편(古今通編)을
저술하였다. 근세 장수공(長水公) 15세손 분암공(憤庵公) 훈(壎)은 면우 곽선생(俛宇郭先生)의 고제(高弟)로 완계정사(浣溪精舍)에서 천여제자를 기르고, 재종형(再從兄) 재창(在昶)과 의병장(義兵將) 이석용(李錫庸)을 후원하였는데, 후에 이 사건여파로 왜경에 감찰되어 옥고를 겪었던 바 독립유공자로 표창되었으며, 직장공(直長公) 15세손 희당공(喜堂公) 재직(在稷)은 동강 김선생문(東江金先生門)에 수업하여 문장을 떨쳤다.
선조들은 대대로 문․무과에 등과(登科)하여 보국헌신(保國獻身)함에 청렴(淸廉)하게 정사(政事)를 펴고, 인물(人物) 문장(文章) 충신(忠臣) 열사(烈士)가 많이 배출되니 명망(名望)과 지위(地位)를 겸한 국중 성씨중(國中姓氏中) 우리 순흥안씨(順興安氏)를 손꼽는다. 선조들이 기묘사화(己卯士禍)와 신사무옥(辛巳誣獄)의 화(禍)에 연좌(連坐)되었으나, 자손이 번창한 것은 선조께서 덕을 쌓은 음덕(蔭德)의 소치요, 석과불식(碩果不食)의 보답(報答)이 아니겠는가
☞. 기묘제현수필(己卯諸賢手筆)은 사제당(思齊堂)이 남원(南原)에 홀로 계신 어머니 봉양(奉養)을 걸양(乞養) 구례(求禮) 현감(縣監)을 제수(除授)받아 내려올 때, 당시 저명(著名)한 기묘제현 29인으로부터 받은 석별(惜別)의 시문(詩文)을 모은 문집(文集)이요, 수첩(手帖)은 서울을 떠나온 후 기묘제현(己卯諸賢)으로부터 받은 서간시문(書簡詩文)을 모은 문집임.
참찬공파의 상대(上代)
공의 휘는 종약(從約), 성은 안씨(安氏)이다. 그 선대는 순흥인(順興人)으로, 고려(高麗)의 유종(儒宗) 문성공(文成公) 회헌선생(晦軒先生)의 5대손이다. 고조는 찬성사(贊成事)로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순공(文順公)인 휘 우기(于器)이고, 증조는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숙공(文淑公)인 휘 목(牧)이며, 조부는 정당문학으로 순성군(順城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혜공(文惠公)인 휘 원숭(元崇)이다.
부친은 형조전서(刑曹典書)로 시호가 경질공(景質公)인 휘 원(瑗)이니, 조선조가 개국되어 한양(漢陽)에 수도를 정하고 여러 번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충절을 지켜 부임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영양군부인(英陽郡夫人) 남씨(南氏)로 전리판서(典理判書) 남휘주(南暉珠)의 따님이다. 계비(繼妣)는 파평군부인(坡平郡夫人) 윤씨(尹氏) 로 영평군(鈴平君) 윤척(尹陟)의 따님이다. 공은 공민왕(恭愍王) 을미년(1355)에 출생하여 총명하고 빼어났으며 학문을 독실하게 하고 행실에 힘썼다. 이른 나이에 문장이 성취되어 홍무(洪武) 무진년(1388)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성품이 정직하고 엄하였으며, 풍채가 뛰어나고 건장하며 용감하였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늘 준마를 타고 천 길 절벽을 달리고 내려가기를 평지와 같이 하였으며, 화살을 연발하여 맞히지 못하는 경우가 없어, 당시 대신들이 모두 공을 두려워하고 공경하였다.
나이 70세인 갑자년(1424) 3월 8일에 별세하였다. 뒤에 증손 판서 침(琛)과 의정(議政) 당(瑭이 귀하게 됨으로 인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겸직도 준례와 같이 내렸다. 장례한 곳은 교하(交河)의 아곡방(阿谷坊) 야동(冶洞) 서현(鋤峴) 신좌(辛坐)의 산이다.
배위는 동래정씨(東萊鄭氏)로 단성보리찬화공신(端誠輔理贊化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양도공(良度公) 정양생(鄭良生)의 따님인데,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으며 공의 묘 뒤에 부장(祔r葬)하였으니, 이는 지형에 따른 것이었다.
4남 2녀를 두었으니, 장자 구(玖)는 직제학(直提學)으로 참찬(參贊)에 추증되었고, 경(璟)은 판윤(判尹)으로 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수(琇)는 직장(直長)이고, 이(理)는 군수이다. 사위는 판서 성염조(成念祖)와 현감 박수지(朴遂智)이다.
☞. 석과불식(碩果不食)
큰 과일은 다 먹지 않고 남긴다는 뜻으로, 자기의 욕심을버리고 후손들에게 복을 준다는 말이다.
[출처] 참찬공파의 상대(上代) (순흥안씨문숙공파) |작성자 안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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