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최후의 순간
구스타프 카민스키 병장은 독일군 제60 차량화 보병사단 통신대대에 소속되어 있었다.1942년 가을에 떠났던 휴가 후 나는 치르에 위치한 철도 환승역에 도착했다. 도처에서 정확한 이유를 모르는 체로 불안함과 대혼란 만이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노력 끝에 나는 제60 자동차화 보병사단 담당 장교를 발견했고 휴가병 집결소로 향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여기로부터 많은 수의 우리 휴가 복귀병들은 대형 군용트럭에 올라타 스탈린그라드 방향으로 이동했고, 한밤중 무렵 피톰닉에 도착했다.
나는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도착 즉시 바로 인근에 있는 통신대대를 향해서 도보로 이동했다. 이튿날아침 나는 중대 선임하사에게 복귀 보고를 했고, 그가 나에게 그 전날 우리가 포위 당했다고 알려줬다. 한낮이 되어서 그가 전방에 있는 내 소속 통신대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정기 무선통신은 엄격한 제한 규정에따라 실시되었고 특히, 포위 상황이 일으키는 보급 문제에 관한 언급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 신년 첫날 사이 있었던 어느 날 아침 우리는 집합을 했다. 중대장은 우리 중대원 중 필수 인원을 제외한 전원은 보병 중대로 전속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나를 포함하여 1중대, 2중대 및 수송대에서 차출된 14명은 곧바로 우리가 보유한 여분의 장비를 넘겨줘야만 했다. 정오 무렵 우리는 사단의 포병연대 중포 진지에 도착했다. 15cm 곡사포에는 탄약이 전혀 없었고 우리에게는 짧은 기관총 사수 집체 교육만이 실시되었을 뿐이었다.
다음날 오후-우리는 식사로 희멀건 수프 한 그릇만 배식 받았다- 비상 상황이 발생했다. 우리는 즉시 차량에 탑승하여 주전선으로 곧장 이동했다. 내가 제120 보병연대의 한 중대에 배속되었을 때 주위는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다음 며칠 내내 전선은 상대적으로 매우 조용한 상황이었다. 1943년 1월 14일 늦은 오후 지난 밤사이 우리 위치로 매우 가깝게 접근해 온 소련 놈들을 밀어내기 위해서 제한적인 반격 명령이 하달되었다. 우리의 반격은 소련군이 갑자기 맹렬한 포격을 퍼붓기 직전까지 매우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포탄 파편 하나가 내 발의 앞부분을 찢었다.
나는 그냥 그곳에 쓰러졌고, 그 이후 부상당한 발의 나머지 부분이 동상에 걸렸고 엄청난 어려움 속에서 후방을 향해 기어갔다. 밤 10시를 향해갈 시각-나는 주둔지에 도착을 했었다-발의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니 거의 전부가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 어떤 처치도 불가능했다. 1월 15일 저녁, 여전히 치료를 받지 못한 채로, 부상당한 발을찢어 놓은 담요 한 조각에 감싸고, 절뚝거리며 중대 본부로 향했다.
이곳에서도 군의관은 거즈나 종이 붕대 도 보유하고 있지 못 해서 어떠한 처치도 해줄 수가 없었다. 나는 썰매에 실려서 부상병 중앙 치료소로 옮겨졌다. 여기에서 의무대원들은 나에게 파상풍 주사 한 대와 담요 한 장을 건네주었다. 1월 16일 아침 소련군 등이 진격하는 바람에 중앙 구호소도 즉시 철수해야만 했다. 걸을 수 없는 사람들은 트럭에 실린 채로, 나머지는 도보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출발하기 직전에 희망자에 한해서 원대로 복귀해도 좋다고 통보받았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아마도 더 이상의 치료도 불가능하고, 또한 의약품이나 식량이라고부를만한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저녁 무렵, 굼락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트럭에는 나를 포함하여 두 명이 있었고, 다른 모두는 그곳으로 향하는 도중에 차에서 내렸다. 원래 나 역시도 그렇게 할 의도였지만, 눈폭풍이 몰아치고 있었고 그 상황 속에서 나의 중대를 향해서 5~6 킬로미터를 기어가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으며 그곳에 가더라도 그들이 그곳에 여전히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굼락 비행장에서 트럭이 떠날 때 우리는 군병원이 어디에 있는지 질문을 했다. 운전병은 대략적인 방향만을 몸짓으로 알려줬다.
우리는 병원을 찾아냈다. 그곳은 지붕도 창문도 없는 그냥 폐허였다. 우리가 이 ‘병원’이라고 불리는 곳의정면과 그 안에서 본 것은 그야말로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죽은 병사들이 눈 속에, 마루 혹은 여러분들이 뭐라 부르든 간에 그 위에 쓰러져 있었다. 병원 내부에는 부상병들이 울부짖고, 기도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거나 그냥 그곳에 누워 있었다. 내 동료에게 나는 여기 이 안에 누워 있지 않겠다고, 차라리 그냥 바깥에서 죽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을 떠났고, 건물에서 30미터 정도 멀어졌을 무렵 갑자기 소련군의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몸을 숨길 곳을 찾느라 나의 동료를 놓쳤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지 못한 채로 혼자 남겨지고 말았다. 내가 알고 있는 전부는 노천에서 밤을 보내는 것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게 남겨진 모든힘을 끌어모아 전력을 다해 기어서 마을로 혹은 한때 마을로 불렸을 폐허 속으로 기어갈 수 있었다. 기차역을 제외한 모든 것이 파괴되어 있었다. 그곳이 나의 안식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그곳으로 갔을 때 본 것은 군병원에서 것과 마찬가지로 그곳 역시 폐허였다.
이곳에서도 죽은 독일 군인들이 눈속에 쓰러져 있었다. 내가 그 직후 생각했었던 것을 기억할 수는 없었다. 다만 나는 지붕이 될 만한 것을 발견할 필요가 있었고 그 폐허 속에서 내가 열 수 없었던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문 뒤에서 나는 울음과 고함소리를 들었다. 헌병이 다가와 내 팔을 잡고 그곳으로 내려갈 수 없다고 말할 때까지 집요하게 지하로 내려가기 위해서 문을 잡고 씨름하고 있었다. 내려가지 못한다면 그냥 저 안에 있는 이들처럼 얼어 죽기를 바래야 한다는 말인가? 헌병은 나에게 지상에 있는 참호를 찾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조언해 주었다.
이제 나는 이 지옥 한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 부상과 배고픔으로 인하여 나는 점점 약해져 갔지만 야전 헌병의 조언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참호를 찾아보다 2인용 참호이지만 누워있다고 말하기보다는 웅크린 것에가까운 11명의 병사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항공기에 몸을 싣고 탈출할 희망 속에서 몸을 움직일 수있었던 두 명의 병사들 중 한 명의 도움으로 이후 며칠 동안 두 차례 약 500미터 떨어진 활주로 쪽으로 기어갔었지만, 비행기는 오지 않았다. 이 마녀의 솥 가마 같은 지옥에서 빠져나갈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1월14일 부상 이후, 나는 점점 더 약해져 갔고, 아마도 다른 모든 이들처럼, 비스킷과 눈 녹은 물로 연명할 수 있었다. 1월 21일 아침 홀로 활주로로 이동해 봤지만 여전히 가능성은 전혀 없어보였다.
그날 저녁 한 전우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으로 나의 운을 시험해 보고 싶었지만, 그 즈음 나는 열이 있었고 다리도 엄청나게 부어올라 더 이상 서있을 수 없었다. 나는 이제 끝장난 것이었다! 비행기를 발견하려는 시도를 했었지만 성과 없이 돌아왔었던 다른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 다시 나가보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 상황 아래서 우리 모두는 누워 있었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열이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밤중이 되어 갈 때쯤 우리 동료 중 한 명이-그가 나에게 말한- 너무나도 배가 고파 뭔가 먹을 것을 찾기 위해서 참호를 떠났다. 그동안 내내 참호 바깥은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함처럼 죽은 듯한-사격음도 포격음도, 박격포의 소음조차도 없이- 적막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항공기의 엔진 소음이 들려왔다. 그소리는 마치 야간 폭격 임무를 위해서 날아오는 ‘재봉틀’이라는 별명의 소련군 야간 폭격기 소음처럼 들렸다. 잠시 후 다시 조용해지고 말았다. 그러다 갑자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누군가가 참호로 내려오는 계단으로 내려와 ‘일어나서 바깥으로 빨리 나와, 저기에 하인켈 111기 1대가 2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데려가기 위해서 도착해 있어!’ 소리치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그 참호에서 튀어나올 수 있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나는 고열에 시달리며 비틀거리고 구르면서 밤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활주로주위에 쌓여있는 잔해들 한가운데 사이에 비행기 한 대가 서있는 것을 보았고, 비행기의 엔진은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 비행기가 잘 닦여 있지만 지난 며칠 동안 항공기 이착륙 시 무시무시한 장면을 보여주었던 정규 활주로가 아닌 여기 이곳 잘못된 지점에 착륙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었다. 따라서 정상적으로 비행기가 착륙하던 지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우리는 이 근처에 머물러 있었던 거의 유일한 그룹이었다. 우리 일행 중 첫 번째 무리는 비행기가 싣고 온 화물을 지적하는 동안에 탑승할 수 있었다. 나는 비틀거리고, 쓰러지면서 나의 탑승 기회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이 순간 나는 비행기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엔진 소음이 더 커졌다-이제 곧 출발하기 위해서 출력을 올렸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끝장났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전우애가 보여준 기적이 일어났다. 비행기의 기관총 사수가 뛰어내리더니 나에게 달려와 나를번쩍 들어 그의 어깨에 걸치고 비행기 하부의 통로 해치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비행기 안으로 쑥 밀어 넣었다 - 그 행동은 비행기의 엔진이 최대출력으로 작동하면서 동시에 비행기가 앞으로 움직이는 동안 계속되었다.
활주로에 쌓여있던 눈이 흩날리는 동시에 비행기 기관총 사수는 기체 하부의 통로 속 으로 상체를 쑤셔 넣어 밀고 들어왔다- 우리가 이륙하는 순간에도 그의 다리는 여전히 기체 밖에서 매달려있었다! 우리가 전진하는 동안 정규 활주로 쪽에서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유령처럼 흐릿한 전우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도 늦었지만 이 비행기 속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는 비행기가 이륙하는 그 순간이 우리 인생 중 최고 행운의 날이었다.
내가 아는 한 가지는 비행기가 상승하는 동안 “신이여 감사합니다!”라고 외쳤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내가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도 여전히 그 이름을 알수 없는 비행기 기관총 사수가 한 명의 불구자에 불과했던 나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비행기 속으로 옮겨주었던 자기희생적 행동 때문이었다. 굼락 비행장에서 벌어졌던 생존을 위한 끔찍한 다툼의 비극이 알려지지 않았던가!
나는 노보체르카스크로 날아가 이동 병원에서 8일 전 부상당했던 이후 처음으로 의학적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제 동상에 걸린 이후 처음으로 나의 발 절단된 나머지 부분이 이완되면서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같은 날 저녁 구급 항공기를 타고 스탈리노로 이동했고 거기서부터 열차 병동을 타고 렘베르크로 이동했다. 1943년 2월 렘베르크에서 내 발의 앞부분이 절단되었으며, 발 전체는 1944년 7월에 절단되었다
첫댓글 당시엔 볼고그라드가 아니라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이라고 불리던 전투였죠.
스탈린이란 이름만 아니었어도 히틀러가 그토록 집착하지 않았을테고 어쩌면 소련을 함락했을 수도 있었다는 평도 있고요
모자란 최고 지휘관의 집착이 수많은 젊은 이들을 사지에 내몬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몰락할 인생의 구원자가 있다면 감사한 일이겠죠
나의 운명이, 모든 인간의 운명이 무덤 화장터보다 더 끔찍한 지옥에서 영원히 못나오는 운명이 실제라는 걸 아는 순간 구원을 전속력으로 갈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 덕분에 구원의 비행기에 탔을때 비로소 안도했고, 타고가는 지금도 평안하고 감사합니다.
^^ 미투^^
독일은 동진 공격한게 잘못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