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UNESCO)지정 대한민국 세계 유형문화유산(世界有形文化遺産)
해인사 장경판전 / 종로 창덕궁 / 수원 화성 성곽
<3> 경남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海印寺 藏經板殿)-1995년 지정
경남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에 있는 장경판전(藏經板殿)은 우리나라 국보(國寶) 32호로 지정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보관하고 있는 전각(殿閣)이다.
이 건물은 고려 시대(13세기)에 제작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전각(殿閣)으로, 조선 초기에 건립된 아름답고 특이한 양식의 목조건물이다.
팔만대장경은 몽골(蒙古)의 침입으로 혼란에 빠져있던 중, 몽골의 침략을 격퇴하고자 하는 민족의 염원(念願)을 담아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판각(板刻)하였는데 강화도로 피난하자 강화에서도 상당량이 판각되었다. 당시 고려 23대 고종(高宗)은 강화 읍내로 피신하여 기거하였던 고려궁궐지(高麗宮闕址)도 있고 마니산(摩尼山) 뒤쪽에는 당시 세워졌던 흥왕이궁(興王離宮)과 접연화앙산정(蝶然花仰山亭)이라는 누각 터(址)도 있다. 강화 사찰에서 판각(板刻)된 이 대장경판을 경남 합천(陜川)의 해인사(海印寺)로 옮기느라 엄청난 고난을 겪기도 한다.
<4> 서울 종로 창덕궁(昌德宮)-1997년 지정
조선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한양(漢陽)으로 천도하면서 짓기 시작한 궁궐(宮闕)이 경복궁(景福宮)으로 태조(太祖) 3년(1394)에 짓기 시작하는데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궁궐로 꼽힌다.
그런데 3대 태종(太宗)은 마음에 들지 않아 근처에 다른 궁(宮)을 짓기 시작하여 태종 5년(1405)에 완공된 것이 창덕궁(昌德宮)이라고 한다. 창건 당시, 창덕궁(昌德宮)의 규모는 외전(外殿) 74칸, 내전(內殿) 118칸 규모였는데 이후, 돈화문(敦化門) 등 증축(增築)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창덕궁은 임진왜란(壬辰倭亂/1592), 인조반정(仁祖反正/1623) 등을 겪으며 수차례에 걸쳐 불탔는데 흥선대원군(1868/고종 5년)이 다시 중건(重建)하여 오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건물의 현재 모습은 경복궁(景福宮)이 훨씬 나아 보이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창덕궁(昌德宮)이 곱절의 역사와 옛 모습의 원형(原型)이 잘 보존된 궁궐이라고 한다.
<5> 경기도 수원화성(水原華城)-1997년 지정
수원 화성(사적 제3호)은 조선 정조(正祖)가 왕권을 강화하는 목적으로 화성(華城)을 쌓게 되었는데 당시 최첨단 과학과 건축술이 빗어낸 역작(力作)으로 동양 성곽(城郭)의 백미(白眉)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조선 시대 건립된 성곽으로 한국 성곽문화(城郭文化)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화성은 팔달산(八達山)과 그 동쪽의 낮은 구릉과 평지를 감싸며 쌓은 평산성(平山城/평지와 산을 이어서 쌓은 성)으로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성의 전체둘레는 5.744km이고 높이는 4.9~6.2m이다.
당시의 문신(文臣)이자 실학자였던 정약용(丁若鏞)의 설계를 바탕으로 채제공(蔡濟恭)을 비롯한 박지원(朴趾源), 홍대용(洪大容), 박제가(朴齊家)와 같은 유능한 실학자(實學者)들의 젊은 패기와 거중기(擧重機), 녹로(轆轤/도르래)와 같은 과학기술이 접목되어 만들어졌다. 당시 건설된 주요시설물로는 문루(門樓)와 옹성(甕城)을 갖춘 4대 문과 행궁(行宮), 암문(暗門), 수문(水門), 연못(池), 장대(將臺), 공심돈(空心墩), 각루(角樓), 포루(砲樓), 봉돈(烽燉), 궁대(弓臺), 치성(雉城), 용도(甬道), 적대(敵臺) 등 48개소이다.
고창 고인돌(전북) / 화순 고인돌(핑매바위/전남) / 강화 고인돌(경기) / 마애석불(磨崖石佛)(경주)
<6> 전북 고창(高敞), 전남 화순(和順), 인천 강화(江華)의 고인돌 유적(支石墓)-2000년 지정
고인돌(支石墓)은 기원전 1,000년 무렵,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墓) 형식으로, 받침이 있는 고인돌과 받침돌이 거의 보이지 않는 고인돌, 받침도 2개와 4개의 형태로 구분된다.
전 세계의 고인돌이 5만기 정도라는데 2만기가 한반도(韓半島) 일원에 분포되어 있다니 신기하다.
전북 고창(高敞) 고인돌군(群)은 고창군 죽림리(竹林里) 일원에 500여 기(基) 이상의 고인돌이 밀집 분포되어 있어 단일구역상으로는 우리나라 최대 밀집도(密集度)를 보이는 곳으로, 인근의 고인돌을 합치면 이 지역에 있는 고인돌만 총 1,600여 기(基)나 된다고 한다.
전북 화순(和順) 고인돌군(群)은 화순 남쪽 산기슭을 따라 도곡면(道谷面) 효산리(孝山里)와 춘양면(春陽面) 대신리(大薪里)를 잇는 보검재(寶劍峙) 계곡 일대 약 4km 범위 안에 분포되어 있는데, ‘괴바위 고인돌군’(47기), ‘관청바위 고인돌군’(190기), ‘달바위 고인돌군’(40기), ‘핑매바위 고인돌군’(133기), ‘감태바위 고인돌군’(140기), ‘대신리 발굴지’(46기)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창(高敞) 고인돌과 화순(和順) 고인돌은 덮개돌이 바닥에 거의 닿아 있는 전형적인 남방식(南方式)이라 얼핏 널찍한 바위들이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세히 보면 바닥에는 굄돌이 반드시 있어서 덮개돌은 조금이나마 지상에 떠 있다.
경기 강화(江華) 하점(河岾)에 있는 고인돌군(群)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고인돌로 꼽히는 ‘강화지석묘(江華 支石墓)’를 비롯하여 강화 고려산 북쪽을 중심으로 157기가 흩어져 있다.
이 지석묘는 덮개의 무게 약 53톤으로 추정되고 두 개의 받침돌로 상당히 높게 설치된 탁자식(卓子式) 모양으로 북방식(北方式) 형태이다. 경주시 배반동 남산 보리사(菩提寺) 뒷산에 있는 마애석불(磨崖石佛)도 너무나 아기자기하다.
세계 고인돌 유적의 40%가 한국에 있다고 하는데(전국에 약 3만여 基) 북방식(北方式)은 밑을 받치는 고임돌이 2개이고 남방식(南方式)은 고임돌이 4개이다.
고인돌(支石墓)은 기원전 1,000년 무렵,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墓) 형식인데, 받침이 있는 고인돌과 받침돌이 거의 보이지 않는 고인돌, 받침도 2개와 4개의 형태로 구분된다.
<화순 고인돌(핑매바우) 설화>
옛날 전남 화순 운주골에서 전국의 내로라하는 바위들을 초청하는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마고(麻姑) 할매는 치마에 돌을 싸 들고 한달음에 운주골로 달려갔다.
그런데 일하기 싫어하는 동자승(童子僧)이 꼬끼요~ 하고 닭 울음소리를 내는 바람에 마지막 1000번째 불상(佛像)을 못 세운다는 소식을 들은 마고할매는 허탈한 마음에 치마폭에 있던 돌을 발로 차 버렸다고 한다. 그래도 화가 안 풀렸던지 바위 위에 올라 오줌을 쌌는데 사람 머리 크기만 한 돌구멍이 생긴다.
그 구멍에 돌을 던져서 구멍 안에 돌이 들어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내려오면서 여인들이 아들 낳기를 바라며 돌팔매질을 하던 곳이라고 하여 핑매바위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