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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백두대간☆]의 앞표지(우)와 뒤표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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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다니는 백두대간]
조남익 시집 / 인간과 문학사(2016.05.30) / 값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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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다니는 백두대간
조남익
꿈이 아니예요
살찐 호랑이가 대륙을 꽉 물었거들랑요
적도에서 온 한반도, 지구는 거대한 전자석이었거든요
태초, 태초에 우주의 기원은 한 씨앗이었고
시간의 구름 타고 지구는 돌았거든요
백두에서 금강산 거쳐 지리산까지
아니 지리산에서 두류산 거쳐 백두산까지
국토의 큰 줄기 타고 용솟음치는 핏줄
백두대간은 곧 호랑이의 척추였거들랑요
암석에 속삭이는 깊은 소리 들으며
나는 풀이 되고 새가 되고
한반도의 대간과 정맥의 흙이 되고 물이 되고
먼 지평선에 나직한 황소의 울음
나의 유전자, 우리 몸은 가장 큰 자연이었거들랑요
산이 분수령으로 나뉘고, 물은 모여 수구로 나갔거든요
나는 삶을 등뼈로 삼고 섰거든요
산 줄기 타고 오는 용의 숨소리, 나의 정기
수억 년 이 땅의 하늘과 바다와 다람쥐의 눈과
꿈이 아니예요
머리에서 등골 거쳐 발 끝까지
아니, 발에서 허리 거쳐 머리 끝까지
나는 걸어다니는 백두대간이었거들랑요
우리는 걸어오는 이 땅의 겨레이며 문화였거든요
별에서 온 영혼, 땅에서 일어서는 정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기고
번영은 국난에서 비롯되는 것, 우리의 역사였거든요
살아 있는 것, 숨어 있는 것, 기다리고 있는 것
걸어다니는 백두대간의 뿌리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곧 하나였거든요
아무리 큰 일도 함께 쪼개가면 되었거든요
노래하며 춤추고, 강한 스포츠 즐기며
이 땅은 나를 생겨나게 한 어머니 품
나는 언제나 어린 아이로 돌아가 잠들거들랑요
그리곤 다시 밝은 얼굴로 일어나거든요
우린 본래 걸어다니는 백두대간이었거든요
나의 왕관
조남익
어찌 번개가 없었으랴
구렁져 간 굴곡들이 박힌
나의 왕관.
보낼낼 것 보내고
녹을 것 녹고
멀리 한 그루 해바라기 서다.
꽃샘추위 내리면
곤충들은 겨울 잠 깨고
두 손바닥에 받은 나의 이슬.
더도 말고
흔적을 지우는 나의 왕관
가을에 소소한 쭉정이로 뒤웅거려라
대지의 젖내
조남익
조그만 흙에 옮겨 심은 꽃
새 흙에 곧 뿌리내리고 이내 생기 오른다
논과 밭, 머릴 섬에서도
부드러운 흙덩이 갈아엎으면
구수한 흙내 뙤약볕 속에 익어난다.
자연과 천연이 숨쉬는 땅에
만상을 품고 있는 향긋한 젖비린내.
나는 메뚜기의 파란 눈망울을 닮았다.
흙들이하여 지력을 보존하면
야초 한 포기의 생명에도
신의 그림자 텃밭을 안마당 지나간다.
바다 건너온 해풍의 거친 울음들
청정한 대지의 젖내를 맡고
새까맣게 내려앉는 새떼를 보라.
누국도 삶이 다하고 나면
과일은 땅에 떨어져 다시 묻힌다.
감나무집
조남익
그 집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7남매를 거느리신 어머니는 잠시도 나앉을 새가 없었습니다
산 너머 세상이 저만치 앞서 갔어도
지금은 풀과 돌멩이에 파묻힌 감나무 집
바늘 귀로 엿보이는 보석이 새처럼 지저귑니다
조약돌
조남익
바윗돌이 깨어져 나가 반들반들할 때까지
선연한 나비의 무늬 펄럭일 때까지
수천 번 혼절에서 깨어날 때까지
비로소 내 작은 맹수 은모래 금모래 될 때까지
아하, 요염한 한 방울의 푸른 바닷물 소리!
거북이의 변명
조남익
나는 도무지 서둘 일이 없었지요
딱딱한 등딴지 때문에 수억 년을 버틸 수 있었지만
또한 그 무게로 지느러미 같은 내 발은 천생 느림보였거든요
동해와 서해, 또 남해까지 우리 나라
짧은 머리와 꼬리, 네 다리까지 모두 등딴지 안에 움추려
넣으면
나는 도무지 서둘 일이 없었지요
나는 이가 없어요. 나라 망한 치욕의 역사도 다 씹지 못해요
파도에 앞서오는 풍운
물속으로 들어가고 나면, 나는 도무지 바다가 낯설지 않았지요
내 타원형의 등에는 나도 모르는 험한 지도가 그려졌어요
그것도 백년이나 지나고도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요
우리 나라, 나는 도무지 서둘 일이 없었지요
군무도群舞圖(1)
- 겨울새들
조남익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V자를 옆으로 돌려놓은 모양새인데, 그 꼭지점의 선두라 2열 횡대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청둥오리들의 정연한 대오.
사람에게는 흰 이가 있고, 새에는 검은 이가 빛난다. 배와 가슴에 불규칙한 흑색 가로무늬를 두른 쇠기러기를 보면, 은연 중 천적 방어의 검은 이가 날카롭다.
깊은 겨울에 잠시 봄볕이라도 날 듯한 금강 하구의 저녁 무렵.
수십만 마리의 새들이 일제히 솟아올라 온 하늘을 뒤덮을 듯하지만, 두어 갈래로 길게 휘어지며 또는 바로잡히며, 방향전환을 거듭하는 장엄한 군무를 보라. 한참이나 계속된다.
새는 엽전이다. 엽전이 굴러 수평선에 이르듯 새는 물위에 떠 물고기 사냥에 급하다. 그 옆에 이은 새들, 그러나 뼈가 가벼워야 하고, 몸무게도 줄여 놓아야 다시 먼 길을 가게 된다. 겨울새들은.
철새는 오가고 지구는 돌고
밤하늘에 새들이 높이 떠가며 꺼이꺼이 울 때면, 공허한 그 삶의 끈에서는 콩팥 타는 냄새가 난다. 생의 절규에서는 꿈이 터지고, 꿈은 족사足絲로 모래나 돌에 붙어사는 바지락조개처럼 지구의 젖을 물렸다.
지구를 뒤집어 입고, 금강하구의 겨울새로 날아오르는 나는 지금 짐짓 수면 중이다.
군무도群舞圖(5)
- 씨나락
조남익
아무리 흉년 들어도 우리 집 씨나락은 두 섬이다
씨나락 골라 소독 먼저 하고, 물 담가 놓기 며칠
눈 뜨는 나락에서는 생명의 군무가 처절하게 펼쳐 올랐다
줄달음도 숨바꼭질도 일제히 살아나는 숨소리
못자리에 뿌려진 나락들은 싹이 크며 푸르를 때
머지 않은 풍년을 향해 수많은 씨나락은 죽어 잠들었다
나도 잠들었다. 새로 피어날 꽃 위한 씨앗 속에는
다시 먼 바다의 절규를 밟으며 달려오는 먼동의 빛이 숨었다.
*씨나락 : 나락은 벼의 방언(충청, 전라, 경상). ‘씨나락’은 못자리에 뿌리는 볍씨. 씨벼, 씨나락, 씻나락.
아버지 산
조남익
큰 산 위에
또 다시 큰 산
햇빛이 들지 않는 아버지 산.
누구도 범접할 수 없게
어딘가 선 그어진 아버지 침묵.
그런데도 평생을 덮어 주시는
아버지의 이불은
항상 중심을 잡아주고
때로는 푸른 별이 와서 박힌다.
― 얘야, 불을 켜야 어둠이 사라진다.
고비 잇을 때마다 정을 먼저 보냐주시고
뜨악해 하시는 말씀으로 멀리서 오시는 나의 큰 산
아버지 산.
지리산
조남익
마법의 머릿결로 뒤덮힌 산
푸르륵 신록이 되고 구름이 된다
요령을 흔드는 푸른 산록
단풍이 북에서 내려 왔듯이
신록은 태백산맥을 타고 북상한다
구름은 잡히지 않는다
지긋한 강철로 뻗어내린 산
지리산의 끝에서는 땅이 운다
울음의 굽이굽이 꽃이 피어나고
자욱한 안개에 이슬이 떨어진다
아무도 없는 그 곳, 반딧불이 살짝
백두대간의 자명종을 치는가, 폭포물 소리.
맷돌
조남익
보이지도 않는 민심의 깊은 바다에
누군가 쉴 새 없이 돌리며 숨겨놓은 맷돌.
심판대의 불 켜질 때마다
자지러질 듯 맷돌이 전율한다
때로는 느긋하게 돌기도 하지만
세상의 악을 여지없이이 분쇄하는 맷돌
일반인은 거의가 알지도 못하는 것인데
허욕의 지능 손톱 자라면
맷돌의 그림자 기웃거린다
― 우물 바닥에 떨어뜨린 달이여
길은 가도가도 지남침이 서 있는 것을.
꿀벌 공화국
조남익
여왕벌은 로열젤리를 먹고
수벌은 빈둥거리고 게으른 편이지만
수만 마리를 헤아리는 일벌은 쉴 새가 없다.
나이 따라 다양한 분업노동의 일벌들
보모, 시녀, 건축, 청소, 경비, 조각, 시체 운반, 꽃꿀 수집꾼
이 벌집에서는 고유직업이 모두 공화국에 흡수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것인 양
꿀벌들은 모도무지 불평이란 없다
순응의 길, 그 물방울들이 큰 바다에 이른다.
일벌들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시작하지만
육각형 방이 저욕하게 들어선 호아금빛 궁전
규칙적인 이하학적 형태는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분열과 전쟁이란 아예 없었다
집단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정연한 사회성
가을이면 자연의 심지는 슬픔처럼 잠들고.
꿀벌은 시인이다
조남익
조그만 몸속에 숨어 있는 비밀
꿀벌은 여름의 영혼이다
꿀벌 공화국에서는 명령이 없다
선거도 없다
둥지라기보다는 너무도 심오한 벌집
밀랍으로 10만 개의 방을 만들 수 있고
방 하나에 알 하나씩 낳는다
지유를 타고 나는 꿀벌들
사람이 인공벌집을 만들어놓고
꿀 빼앗아 가도
그들의 지유는 여전히 살아 있다
아카시아. 밤나무, 사과나무, 헛개나무, 싸리
민들레, 산딸기, 금관화, 토끼풀, 메일 꽃,
꽃에서 살고 꽃에서 춤추는 꽃시인들
적응력과 창조성이 뛰어난
지혜의 가락들이 몸속에 흐르고
홀로 대자연의 시를 쓴다.
부웅 부웅 부웅 꿀벌은 시인이다.
삽시도
조남익
허연 치열을 번쩍이는 바다의 큰 입을
아무도 맞설 수 없었습니다
수평선에 떠도는 자유와 평등
아무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큰 활에서 화살을 꽂고 파도보며
조용히 늙는 야성의 섬 삽시도
밀물이 오고 썰물로 빼는 곳
부족하면 채우고 채우면 성숙합니다
적을수록 더 많이 얻습니다
찢기고 타락도 파도는 다시 채워 갑니다
누구도 맞서지 마라, 저는 비워져 있을 뿐입니다.
* 삽시도挿矢島 : 충남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리에 속하는 섬. ‘삼시도’는 섬의 샹김새가 화살을 꽂은 활과 같아다는 데서 유래. 해안선의 길이 13.5km
무인군도
조남익
나라도 체통이 있을 터인데
섬 하나 가지고 다투는 일 보게 되면
차라리 나는 차라리 머언 무인도로 가리.
지구 박의 끝
하늘이 내려 앉아 잠든 곳
사람들 좀처럼 오지 못하고
오십여 개의 섬이 흩어져 있는 무인 군도
해안에는 안개 자주 끼어 있고
위험한 암초들이 곳곳을 둘러싸고 있었다.
엄마섬 아빠섬 그냥 널려 있는 아들 손자의 섬들
여기서는 소유의 근성은 이예 없었다.
나이 먹어 홀로 무인도 되었듯이
나는 차라리 바다 보이는 곳의 묘지에 묻히리
나의 묘에는 몇 삽의 흙을 덮어라
종려나무 오렌지나무 레몬나무들 우거져 졌을 뿐
섬들은 원시의 전조에 젖어 황폐한 땅이었다.
바닷물이 모이곤 또 뒷걸음치다 오고
수평선에 쫒기는 무량한 시간이 울었다.
바다와 하늘이 철부지로 만난 곳, 아니지
부활의 섬 지키며 우주의 중심을 나는 돌으리.
부표처럼 떨어지는 허공의 매혹
그것을 감출 듯 고양이 울음이 들렸다.
어데였을까, 돌섬 하나 가지고도 목 메이는 사람들
아주 머언 무인군도로 가서 나는 숨으리.
상어
조남익
상어는 언재나 알맞은 속도로 혼자 다니지요
칼 모양의 꼬리지느러미는 급하지 않습니다.
드넓은 바다의 색깔이 곱게 농축된 청회색
날렵한 방추형 몸이 작은 지구처럼 유연하지요.
며칠을 먹지 않은 식욕이 눈을 떴어요.
머릴 굵직한 고등어 떼가 가득 흔들립니다.
아무리 달아나도 여지없이 먹히는 포식
선혈이 낭자한 바다에 피냄새가 뜹니다.
누가 어찌하랴, 절대 강자의 잔인한 먹이
상어는 그의 존재를 몰고 하무로 들어가 숨습니다.
너무도 의젓한 상어가 깊은 잠을 잡니다.
날마다 발효되는 지상의 삶에는 누구가 따로 없습니다.
운현궁의 세 식구
-역사의 돋보기.1
조남익
용마루에 햇볕 째고 있는 기다란 비애
식민지의 개밥을 핥고 있었다.
― 얘야, 과거는 상상하고 미래는 기억한다
권력이 그랬지, 어디 사람이 그랬냐?
세 식구가 그래도 만나 잠깐 들른 듯
운현궁안채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비애가 도통 그들의 밥그릇이었다
*운현궁雲峴宮 :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저택.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있다.
이순신의 묘
-역사의 돋보기.5
조남익
충남 아산시 운봉면 어라산
이슨신의 묘에 가면
조선 사람 냄새만 있고
사람의 흔적은 순식간에 없어졌다
그것이 나의 혼이었다
부끄러운 혼이 정신을 잃었다
행주대첩
-역사의 돋보기.9
조남익
한강에 돌출한 덕양산의 절벽 3면
명장 권율이 선택한다.
행주산성
조총의 총알받이 언덕을 쌓고
이중 목책에 화차포, 물차석포, 진천뢰,
강궁, 재 담은 주머니까지 차게 한 배수진
한강이 좋은 까닭이다
아홉 차례 접전 끝에 무려 2만 4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왜군은 마침내 패퇴한다.
물러나며 시체를 네 군데로 모으고 불질렀는데
그 냄새가 몇 리까지 풍겼다.
침략의 불꽃은 끝이 없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강이 흐른다.
우금치의 불꽃
-역사의 돋보기.16
조남익
사노가 강의 천연요새지 공주를 장악해
장차 본거지로 웅거하려고 진군한 우금치
한 발 앞서 높은 곳에 포진한 일본군의
일제 사격의 사냥감이 된 동학군이었다
기어오르고 또 오르고 쌓이는 시체
1만여 명의 병력이로 3천 명으로
다시 5백 명으로
전봉준의 주력군이 끝내 돌파하지 못한 우금치
모두 타버리고 정신만 남은 불꽃
― 바람이 크게 불었다
일본의 시국 2제
-역사의 돋보기.17
조남익
1. 독도 영유권 감상
원래의 주인이 제것을 챙겨갔을 뿐인데
굳이 아니라며 떼쓰는 꼴!
2. 일본군 위안부
― 그거 미안하게 되었다고 하면 될 것을
조금은 치사하지 않은가
― 뭐? 보상문제가 있다고
대일본국이 그렇게 옹졸한 나라였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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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서시
햇빛 고운 날이면
하늘 오르는 신선이 하나 둘 셋
그것도 대도시의 숲 보문산 속
문화동 산기슭에 숨어 50여년 살았다.
멀지 않은 부여의 성흥산성
백제산성 밑에서 태어난 사람
굽이굽이 땅의 역사
내 숨결 타고 오는 선녀
아무도 모르게 외서는 가는 그림자
호랑나비의 천년 햇살에
나는 아직 신선의 잠을 자는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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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익 詩集 [※걸어다니는 백두대간※]
[ 조남익의 시계계 ] -
조남익 시인의 초기시에 나타난 실존의식
- 삶의 본래성 탐색을 중심으로
김석환 시인. 명지대학교 문창과 교수
1. 서론
조남익(1935~)시인은 1965-1966년에 걸쳐 ≪현대문학≫지로 등단한 이후 왕성한 시작 활동을 하며 시집 8권과 시선집 3권 및 시전집 1권을 발간하였다. 본고는 조남익 시인의 초기시인 첫 시집 ≪산바람 소리≫와 7년 후에 발간된 제2시집 《풀피리》에 게재된 시들의 시적 특질을 연구하고자 한다. 2권의 시집은 반복되는 일상적 삶에 대한 절망과 허무감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탐색하려는 의식을 형상화하고 있다. 즉 어떻게 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뇌하는 ‘실존(Existenz)'에 대한 치열한 의식을 일관성 있게 보여준다.
그런데 실존주의의 비조라고 꼽히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말에 의하면 ‘현존재(Dasien)'인 인간은 어느 순간에 ’세계-내(In-der-Wert)'의 모든 존재자(Seiendes)들이 유의의성(Bedeutsamkeit)을 잃고 자신의 존재도 무성無性에 침몰하여 단독적으로 자기의 실존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경험을 한다. 이 순간에 세계에 의존해 살아가는 현존재인 인간이 ‘불안(Angst)’을 느끼는데 그것은 오히려 “현존재의 근원적인 존재 전체성을 파악하기 위한 현상적 토대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불안’은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잡담의 다양한 애매함의 소동”에 몰입해 있던 현존재로 하여금 그러한 삶의 비본래성을 떠나 자기의 본래성(Eigentlichkeit)으로 돌아가게 하는 ‘양심’의 부름을 듣게 하기 때문이다. 본고는 그러한 하이데거의 실존에 관한 이론을 원용한 실존주의 비평의 한 시도로서 조남익 시인의 초기시에서 시인이 어떻게 비본래적인 일상에서 삶의 본래성으로 돌아가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논하고자 한다.
2. 등단 시에 대한 고찰
시인이 ≪현대문학≫지에 투고하여 등단작으로 당선된 시는 그 이전까지 습작해 온 시의 경정체이자 장차 창작하는 시세계의 원형이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특히 첫 번째 추천작인 시 <수고리>는 자신의 시작의 방향을 결정지어 주고 “내 작품의 성격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는 고백은 그런 추측을 더욱 가능하게 한다. 그런 가능성을 고려하며 등단 시 3편에 나타난 실존 의식의 특징을 고찰하여 장차 전개될 시세계를 조명하는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푸짐하게 열린 얼굴들, 그 맑은 웃음들이 서로 부딪혀 恩惠로운 波紋을 잉그리는 땅 위에서, 흘러가는 저 바람소리는 지금도 나의 귀에 들려오고 있네.……아무 것도 보이지 않네. 그러나 그 億萬가지마다 휘엉청 늘어져서는 구르길 두어 번, 깃을 벌린 당신들은 쉬쉬 山嶽을 뛰어넘어 왼 山 왼 들을 다 채운 다음, 다시 돌아올 듯 가시네//집이 본시 水古里에서도 上水古里인 나는, 천리고개 사흘, 또 바늘고개를 사흘, 그리고 물 한 바다 건너길 사흘, 아흐레를 눅눅히 젖어내야 하는지라, 아흐레를 또 누워서 가을을 볼밖엔 없네. 구릿빛 왼 몸뚱일 부끄럼없이 뻗고, 하늘을 지붕삼아 바위에 누울 양이면 山제비는 배 위에 똥을 깔겨 달아나고, 벌레처럼 늙어가는 가을이 덮이네
-<水古里> 일부
세상과 차단되고 하늘로 열려 있는 “수고리땅”은 문명을 건설해 온 현대인에게 은폐되어 있는 과거의 거주지이다. 모든 존재자들이 진실을 담지 못한 말보다 침묵과 몸으로 서로 교섭하며 존재의 의미를 갖고 있는 곳이다. 시인은 문명의 이기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여 살아오는 동안 과거로 사라진 고향이라는 거주지를 탈은폐하고 있다. 통속적인 시간, 즉 과거 현재 미래라는 계기적 차원에서 과거적 공간인 ‘수고리’는 실존론적 ‘시간성(Zeitlichkeit)’의 차원에서 볼 때, 본래적 존재 전체가능성의 세계를 상징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로서 인간의 존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존재가능성을 찾아가는 존재이기에 “존재해오며-현전화 하는 도래로서 통일적 현상”을 내포한 시간성을 바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삶의 구조와 같으며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존재자)안에 있음”이라는 ‘현존재의 존재전체성’과도 같다. 따라서 ‘기존, 현전, 도래’라는 세 시간성의 탈자태(脫自態,Ekstase)들은 등근원적等根源的이며, 그런 실존의 시간성을 바탕으로 할 때 과거의 공간인 ‘수고리’는 장래에 도래할 본래적 존재가능성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런 ‘수고리’를 그림으로써 조남익 시인은 계기적 시간을 벗어나 자신이 존재하던 그곳을 장래에 도래할 세계로서 현전화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중을 돌고 있는 ‘돌부처’는 ‘수고리’를 성의 공간으로 승격시키며 본래적 존재의 가능성을 회복하려는 시인의 실존을 대신한다.
갓싸기로 갈까나/깃 달린 풀씨로 날아서 갈까나//잠은 자다가 꿈이나 꾸지/나무며 풀이며, 저 山바람조차도/내 肉身은 비어서 살아온 痕迹이 없다//落落長松/一天年 처마 밑에/晦冥을 두드리는 소나기 비켜서서/五尺 短身이 坪 남짓 그루를 내렸다//갓싸기로 갈까나/깃 달린 풀씨로 날아서 갈까나/어두면 어둔대로/北方 二萬里, 길이 冥府로 벋어서/잠시 서인 자리에, 이삭은 새삼 짓누래졌다//돌로 치며는 소리라도 울려날 듯이/肉身을 고스란히 비워놨는데/지금은, 저 山바람 속에서 휘뚜루 치는 石鐘, 石鐘아…
-<山바람 소리> 전문
시인은 어느 목적지를 제시하지 않고 “갓싸기”나 “깃달린 풀씨로 날아서 갈까나”라고 사물화의 욕망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향성을 드러낸다. 그것은 “육신은 비어서 살아 온 흔적이 없다”는 구절이 암시하듯 실존에 대한 회의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즉 비본래적인 일상을 사는 동안 ‘흔적’이 상징하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호기심’이라고 하며 현존재인 인간은 배려되는 세계에 몰두해 있다가 그 세계로부터 자유로워져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멀고 낯선 세계로 뛰어 들고자 한다는 것이다.
특히 ‘갓싸기’와 ‘깃달린 풀씨’는 화자에게 모두 이동성을 부여하며 퇴락한 일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새로운 존재 가능성을 찾으려는 실존의식을 효율적으로 암시한다. 그렇게 호기심을 갖는 시인은 먼저 ‘세계 내’에서 ‘오척 단신’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자신의 실존을 발견한다. 그리고 퇴락의 일상에서 여러 존재들과 맺고 있던 모든 관계를 버린 빈 육신으로 자신처럼 속이 빈 채 ‘석종’의 울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는 일상적 삶의 세계에서 자신의 삶을 좌우하던 말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양심의 소리’를 상징한다. 거듭 그 석종을 부르는 것은 곧 일상적 삶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 존재가능성에 다가가 본래섲 삶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흙이었다가, 손탐 없이 그대로 바위였다가/저 山 안에 호젓이 한 나무일 뿐이다//아침에 珠簾을 걷어/애기 손바닥만한 날을 받아놓고/고지식, 다시 헹구는 茂盛한 微動을 보라//휘어지도록 커나서/배부른 아낼 서워있는데/숲처럼 어울러서 風樂이 은은한 마을……//춤 아니라도 새끼는 새끼대로 저의 귀염을 떨고/彌勒같은 아내라야, 구기잖은 어미 노릇이라/나는 호젓이 이대로 한나무였을 뿐이다//허구헌 長霖이 kr고/모두 다 털고 떠나는 가을이라도 오면/그때는 내 마음도 짜르르 밤도와 울겄다
-<北村理 打令> 전문
시인을 대신하는 나무는 성장성과 확산성이 있으며 수평적 공간인 대지의 흙과 바위와 변별성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세계-내’에 존재하는 자신이 여러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으며 세계를 열어 갈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런데 나무는 아침이 되어 자신이 존재하는 실내와 실외의 경계인 주렴을 걷고 “애기 손바닥만한 날”을 받음으로써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으며 일상을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헹구는 미동”은 반복되는 일상 중에 실존의 세계를 넓히고 실존을 실행하려는 행위이다.
한편 아이를 잉태하여 “배부른 아내”, “저의 귀염을 떨고” 있는 새끼, 어미 노릇을 하는 “미륵같은 아내”는 던져진 세계-내에서 실존적 관계를 맺고 교섭하는 존재자들이다. 그렇게 시인은 가족이라는 세계-내에 던져진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수직적 또는 수평적으로 성장과 확산을 하며 세계를 열어 간다. 그리고 “허구헌 장림, 즉 긴 장마가 상징하는 삶의 고난을 겪으며 존재자들과 맺은 관계를 모두 다 털고 떠나는 가을”을 그린다. 그리고 ‘죽음’의 계절인 가을을 맞이할 자기 존재를 상상하며 “밤도와 울겄다”라고 만족과 아쉬움을 드러낸다. ‘죽음’은 현존재가 태어나 세계에 던져지는 순간부터 “떠맡는 그런 존재함의 한 방식”(하이데거)인데 가족이라는 세계-내에서 존재자들과 교섭하고 몰입하며 그 방식을 현전화 한다.
이상에서 조남익 시인의 등단 시 세 편에서는 현존재로서 자기가 처함 ‘세계-내’의 존재자들과의 관계 맺고 생활하며 실존에 대한 고뇌를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실존의 영역을 확장시키며 존재의 불안을 경험하고 ‘양심의 소리’를 들으며 새로운 세계로의 이행을 꿈꾸기도 한다. 특히 ‘죽음’등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성에 앞질러 다가가는 ‘결의’를 함으로써 그것을 인수하여 새로운 삶을 기획한다. 등단 시 시편에 나타난 실존의식의 특징이 이후의 작품에서 시정신의 원형이 어떻게 구체화 또는 심화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3.‘소리’, 그‘양심’의 부름
현존재로서 인간은 어떤 상황 속에 놓여서 그곳에 있는 인간과 사물과 관계를 맺는 중에 이해하며 이를 위해 말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하이데거는 그런 인간의 삶의 양식을 세 가지 실존틀로서 규정하며 즉 ‘처해-있음(Befindlichkeiy), 이해(Verstehen), 말(Rede)’에 의해 삶의 의미를 열어 헤치며 실존을 보장 받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조남익 시인의 시에서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데 그 ‘소리’는 내면에서 울리는 ‘양심의 소리’를 상징한다. 시인은 그 ‘소리’를 들음으로써 타자의 말에 따라 살아가는 일상적 삶의 퇴락을 벗어나 독자적인 존재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일어섰거나, 누웠거나/소리는 소리를 실어서 가고/아침은 아침을 태워서 가고/우리는 숲속/낡아빠진 홍길동의 의자에서/늙어버린 전봉준의 의자에서/하얀 가을을 의식한다
- <攝理> 일부
위 시에서 ‘소리’는 거역할 수 없는 타자로서 우주적 또는 자연의 ‘섭리’를 상징한다. 그 ‘소리’는 현존재인 시인에게 자신의 실존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죽음으로 이끌어간다. 그런데 누구나 그 ‘소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에 실려서 오가는 게 “일상의 나라”라는 것이다. 그 일상 속에서 기대를 갖고 “밤이 주는 아침의 호두”를 깨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이전의 인간들이 앉아 있다가 떠난 “의자”라는 현사실적인 삶의 자리에 머물고 있다. 그 ‘의자’는 이미 앉아 있던 인간들이 비우고 떠난 것이며, 우리가 앉아 있는 것이자 비우고 떠나야 할 현존재의 시간성의 탈자태들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 그 의자에서 시인이 들리지 않는 ‘소리’, 곧 ‘양심의 소리’를 들으며 곧 타자의 말에 이끌린 채 일상에 몰입해 있는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 무의의성을 감지하는 것이다. 그 순간 시인은 모든 색이 무화되는 ‘하얀 가을’이 상징하는 ‘죽음’에 앞질러 다가가 보면서 “본래적이고 전체적인 확실성을 획득한다.”
산맥을 넘어오는/소리가, 하늘 가득히 살아있었다/쉽없이 흘러가고 흘러오고/아침마다 싱싱히 얼굴 씻는 嶺峰/우리들은 그 아래를 지나왔었다/칙칙한 어둠을 서로 부비며/대화도 없이, 뗏목이 밀리듯/우리들은 흔들리며 지나왔었다/길가에는 청청한 산천초목 우러러 서서/왼 산, 왼 들이 기립을 하고 공중에는/푸른 신화가 빛나고 있었다
- <素描> 일부
이 시는 세상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역시 ‘소리’가 등장한다. 산맥을 넘어 오며 하늘 가득 살아 있었고 쉼 없이 흘러가고 흘러온 ‘소리’는 천상으로부터 전해오는 우주 자연의 말이다. 그 소리에 ‘영봉’은 아침마다 얼굴을 씻으며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데 시인은 그 소리를 들으며 그 아래를 지나온 “우리들”이 서로 단절된 채 배려하며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들’이 듣고 있는 생동하는 우주의 소리는 곧 자신들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인데 그 “양심의 부름을 이해함은 ‘그들’ 속에 상실되어 있음을 드러내 보”이며 자신이 처한 세계의 비본래성을 깨닫게 한다. 즉 눈앞에 있는 존재자들에게 맞닿아 있지 않고 “뗏목처럼”사물의 존재가 되어 계기적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겨두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 인간과 달리 길가의 산천초목과 왼 산과 들 등은 오히려 수직적인 자세로 기립하고 있으며 그 위의 “공중에 푸른 신호”, 그 천상의 기호가 응답을 하는 등 우리들과 대조적으로 서로 소통을 한다. 그것을 본 ‘우리들’은 그 인간화된 사물들을 대상으로 실존의식을 회복하여 흩어져서 서로 배려하며 인사를 하고 사랑을 한다. 그러나 이내 “기인 혀를 내두르며” 곁에 있는 존재자들에게 서로“생채기들”을 입혀 주고 밀어내고 밀려나가는 동안 “환호와 노호”를 한다. 그것은 세계 속에서 비본래적 삶을 거부하고 본래적 존재 가능성으로 다가가기 위한 “거대한 참여”이며 “회한한 의지”의 실현이다.
또한 시 <이튿날>일부에서 시인은 이미 “이름 없는 꽃”이 되어 죽어간 아가의 앓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시인은 아가를 잃었으나 또 어제나 다름없이 아침을 맞이하며 “생자의 일상”에 처하여 “생자의 찬란한 빛”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아가가 떠난 “빈 자리”에 빛이 춤을 추는 것과 “세상은 순식간에 위대해”지는 것을 발견한다. 이러한 변화는 죽은 아가의 앓는 소리가, 상징하는 ‘양심의 소리’가 시인을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기능에로 불러 세우”는 작용을 했기 때문이다.
흔들리지 않는 體軀이신데/어쩐 일로 여기 울리십니까//소리로는 들리지 않습니다/苦惱를 타는 나의 등 뒤에서/가늘게 떨리며 울리십니다//물같이 흐른다는 당신의 말씀/외려 老松의 그늘에 자리 두시고/年輪을 아로새긴 손바닥에는/어쩐 일로 바둑을 놓으십니까
- <歲月> 일부
시인은 “흔들리지 않는 체구”인데 흔들리며 자신이 처해 있는 “여기”까지 울리는 까닭을 묻는다. 시인은 그 가는 울림을 통해서 소리로는 들을 수 없으나 삶의 문제로 “고뇌를 타는 나의 등 뒤”로 전해 오는 “물 같이 흐른다는 말씀”을 수신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해 주는 당신이 노송의 그늘에서 손바닥에 바둑을 놓는 것을 상상한다. 그런 ‘당신’은 순간마다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어떤 초월적인 대타자(Big Other)이며 그의 ‘말씀’은 곧 침묵으로 말하는 ‘양심의 소리’의 상징이다. 그리고 당신의 ‘손바닥’은 곧 시인이 처해 있는 세계이며 ‘바둑’은 세계-내에 던져진 채 사는 존재자들의 상징이다. 시인은 자기가 대타자 안에 구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오고가는 사람들은 그 삶의 운명을 좌우하는 대타자의 힘에 의해 어디인지로 흘러가는 “구름”이라고 여긴다.
그렇게 시인은 현조재가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근거존재’로서 자기의 독자적인 존재를 근본적으로 결코 좌우하지 못한다는 것을 감지한다. 그러나 비본래적인 현존재로서 무력성을 안고 있는 현존재이지만 자기의 존재를 스스로 기투企投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라는 것을 의식한다.(하이데거 381면) 즉 자신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계-내에 던져져 존재기능의 근거로 있으면서 그 ‘근거존재’를 책임져야 하는, 즉 “탓이 있음”(하이데거)의 존재라는 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바람의 형해를 흐느낄 때”현존재의 극단인 죽음의 순간을 의식한다. 그렇게 시인은 타자들의 힘에 이끌리고 그들의 말대로 이해하며 일상을 살다가 아가의 ‘죽음’을 경험하며 존재의 전체적 가능성에 앞질러감으로써 본래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
잉잉 바람이 짐승이 되어 우는데/억만의 숨소리가 거기 있는데/성숙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성숙을 기다리며 늙은 사람들//물같이 흘러/마을에 化主僧이 내려오거든/올 굵은 삼베옷에 육신을 내어주고/카랑카랑 쇳소리를 冥漢에 담으리라
- <가을에> 일부
시인은 알밤이 익고 풀이 시들어버리는 “가을을 나서서” 죽음의 계절인 “삼동을 건너가는” 환절기를 맞이한다. 그러한 자연물의 변화를 보며 “겹겹이 싸인 삶”의 애환과 “구겨진 멍울”, 즉 상처들을 치유하고 아직도 잊지 못한 “어두운 망령들”을 씻어 보내고자 한다. 그리고 뜨락에서 풀벌레의 풍악이 울리고 “억새처럼 시퍼런 반주를 흔들어 몸을 헹구는” 요요한 시간이 이어지며 실존에 대한 성찰에 몰입하게 한다. 그 풍경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위협하며 짐승이 되어 우는 바람 소리가 들리고, 그에 맞서서 자신의 존재를 지키려는 억만의 숨소리와, 성숙을 기다리며 살다가 늙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것은 곧 일상적 삶의 풍경이며 세계-내에서 존재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평균적인 현사실성이다.
그렇게 퇴락한 삶이지만 시인은 자신의 실존을 의식하며 삶의 터전인 마을에 ‘화주승’이 자신의 장례를 집행하기 위해 내려올 때를 상상한다. ‘화주승’은 속과 성, 삶과 죽음의 세계를 매개하는 종교적 인물이다. 시인은 그가 내려올 때를 상상하며 그에게 육신을 내어주고 살아온 과정과 존재의 의미를 묻는 “카랑카랑한 쇳소리”를 어두운 사막과 같은 마음에 담으리라고 한다. 그 ‘쇳소리’는 시인의 내면에서 울리는 ‘양심의 소리’를 상징하는데 시인은 그것을 들음으로써 현존재인 시인이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고 파악함으로써 존재의미의 ‘본래적 전체성(eigentliche Ganzheit)’을 확보한다.
4. ‘절망’과 실존의 본래성 탐색
현존재인 인간은 세계-내에 던져진 채 다른 존재자들과 교섭하며 자신의 존재의미를 스스로 이해하고 찾아가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현존재는 다른 존재자들과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세계는 유의의성을 갖지 못하고 자기의 존재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세계와 자기의 존재의미가 무화되면 현존재는 의지할 대상을 찾지 못하며 절망을 한다. 조남익 시인의 시에서도 ‘절망’은 빈번히 등장하는데 시인의 실존의식을 살피는 주요한 관건이 된다.
손이 없습니다/귀가 없습니다/발이 없습니다//검은 땅에 누운 白骨/지금은 虐殺된 새떼가 떴습니다//들어가도/다시 들어가도/나는 없습니다/아무도 없습니다
- <切望>
시인은 세계-내의 존재자들과 교섭하며 배려하는 데 필요한 손과 귀가 없고 말이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현존재인 시인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여 “검은 땅에 누운 백골”, 즉 죽음의 상태가 된 자기에 대해 절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절망은 “현존재를 그의 가능성으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가능성을 향한 존재의 한 양태일 뿐”(하이데거)이라서 존재의 전체가능성으로 다가가는 기초가 된다. 시인은 다시 존재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대신하는 “학살된 새떼”를 목격하며 “죽음에로의 선구先驅와 본래적 존재가능을 위한 결의성”을 실행하는 것이다. 시인이 ‘나’를 찾아 거듭 “들어가”는 것은 곧 그 실행을 위한 실존론적 성찰을 구체적으로 암시한다.
나는 누워서 보았다/새벽이 오는 창가에/바야흐로 만물은 저마다 대야를 끌어당기며/새 아침의 축복에 머리를 풀어도/어제에 쓰인 그 물이여/나는 일상에 진저리를 내고/머언 들녘으로 신음소리를 내면서/뜻밖에 매일 앓고 있었다
- <나는 누워서 보았다> 일부
시인은 일상적 삶을 살아가다가 멈추고 휴식을 취하기 위한 자세로 “누워서” 자신의 실존을 성찰한다. 그리하여 존재자들과 자신의 존재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며 사는 “사람 사이”, 그 “황량한 들”같은 일상에 “쓰레기”를 붓고 오는 자신의 현사실성을 의식한다. 그 ‘쓰레기’는 구체적으로 “혐오”와, “감정의 조각”과 진실을 내포하지 못한 “깨어진 북소리”등 비본래적인 일상을 구성하는 요소들과 세계를 둘러보던 “눈동자”등이다. 비본래적 삶의 구성 요소들이 “페물로 나둥그러진 거기”, 즉 일상적 삶의 세계에 대하여 절망하며 “진저리를 내고” 앓고 있던 자신의 신음소리를 들을 뿐이다.
그러한 성찰은 이어지며 세계-내의 만물은 각자가 새롭게 다가오는 “새 아침의 축복”을 맞이하여 일상을 시작하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대야에 담긴 물, 즉 세계-내의 존재자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존재의미를 새롭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비본래적인 삶을 반복하며 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절망과 아픔을 안고 앓고 있는 자신의 실존을 발견한다. 특히 “매일 앓고 있다”는 것은 “자신을 선택하고 장악하는 자유에 대해서 자유로운 존재”로 살고자 시도하는 불안과 절망의 징후이다. 그것은 또한 현존재가 던져진 세계-내에서 존재자들과 교섭하며 사는 일상적 삶은 늘 세계로부터 선택 또는 해석되는 대로 사는 비본래적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보여 준다.
있는 듯 없는 듯/파묻혀간 생활은/소리도 나지 않게 頃刻에 떴다//세 끼 菜食/몸이야 가지를 늘이워서/蒼生의 四苦를 앓을지라도/내 은혜는 이 萋萋로운 공간……
- <打令調> 일부
시인은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기 위해 “있는 듯 없는 듯 파묻혀간 생활”을 되돌아본다. 세끼를 채식으로 채운 몸이지만 “가지를 늘이워서” 다른 존재자들과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중에 “사고四苦”를 앓아 왔다. 시인은 자신이 처해 있던 세계를 대신하는 “처처로운 공간”을 은혜처럼 여겼는데, 그곳을 곁에 있던 이들과 교섭하며 살아온 “좁은 골목길”로 구체화하여 제시한다. 그곳에서 시인은 “하얀 얼굴”로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며 세계내의 존재자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흐르는 물이나 바람처럼 살아온 실존을 확인한다. 한편 그 ‘불안’은 “현존재를 그의 세계에 빠져 있으면서 몰입해 있음에서 되찾아”(하이데거)옴으로써 “미래를 한 손에 들고서”, “키 큰 장대 같이 머리를 숙”이게 한다. 즉 도래할 전체가능성에 다가가며 자기의 실존을 성찰함으로써 일상적 삶의 비본래성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능금일거냐/익기나 잘 익어볼 능금일거냐//위태한 나뭇가지 끝/存在조차 늘 뒤웅거리며/사는 일을/차라리 超然에 뒤웅거리며//---世襲의 땅을 지나는/부절한 바람소리여
- <果園의 詩> 일부
시인은 미래에 “잘 익어볼 능금”처럼 독자적이고 전체적인 존재의 가능성을 기획한다. 그러나 현존재인 인간은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중에 나뭇가지 끝에 미숙한 채 매달려 있는 과일처럼 ‘아직 아님’으로 위태롭게 “뒤웅거리”는 존재이다. 그리고 미숙한 과일이 잘 익어 성숙한 과일이 되면 그 삶이 완성되자 끝나는 것처럼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며 존재 가능성을 박탈당해야 한다. 그렇게 인간은 “종말을 향한 존재”(하이데거)라는 존재양식을 내포한 채 ‘아직 아님’ 상태, 미성숙한 비본래적 존재로서 살아가야 한다.
시인은 위태로운 존재양식으로부터 벗어나 “초연”하려 하지만 일상에 매몰된 채 살아온 인간들이 물려 준 “세습의 땅”에는 끊임없이 실존을 위협하는 “바람”이 분다. 그러나 자신의 실존을 흔드는 “바람”은 시인에게 불안을 야기하여 독자적으로 전체가능성을 실행하라는 자극이 된다. 그래서 시인은 “산빛을 먹고 구름을 먹고”, 즉 세계-내에 존재하는 존재자들과 교섭하고 마음을 쓰며 살아간다. 그러는 중에 “살이 오른 과육”처럼 실존을 유지하며 이후에 살아가야 할, 즉 아직 미제로 남아 있는 “천리길”의 끝, 즉 삶의 극단에 있는 “한 점” 잘 익은 과일, 존재의 전체성의 실체가 시야에 들어옴을 의식한다.
사람의 함성을 몰고도/우거진 절망을 목놓아 울고도/끝끝내 나타나지 않는 건 누구냐//세월이 죽은/시커먼 벌판//시대의 긴 노을이 잠기며/우리들, 무명한 해골이 떨어지는/奈落……
- <亡滅> 일부
시인은 조금은 따뜻하고 심심찮게 “결국은 흐르는 여울”을 미지의 “누구”가 “풀어서 먹이는” 시간의 흐름에 비유한다. 그렇게 ‘여울’이 대신하는 ‘시간’을 의식한다는 것은 곧 세계-내의 존재이자 시간 내의 존재인 현존재가 자신의 실존에 대하여 이해하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을 대신하는 여울이 현존재인 사람들의 “함성을 몰고”, “우거진 절망을 울고” 있는데 그것을 운행하는 ‘누구’는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지 않는다. ‘함성’은 현존재가 본래적 존재의 가능성에 닿고자 지르는 것이며 ‘여울’은 그 가능성에 다가가지 못한 현존재의 절망에서 비롯된 슬픔을 “목놓아 울고”있는 것이다. 시인은 “세월이 죽은/시커먼 벌판”, 즉 유의의성이 사라진 세계 속에서 잠기는 “시대의 긴 노을”을 보는데 그 일몰은 “무명한 해골”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죽음’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시인이 시간의 흐름에 이끌리어 온 자신에게 절망하고 비본래적 존재를 벗어나 본래성을 찾기 위해 죽음에로의 ‘선구적 결의’를 한다.
임에 닿으면//한 번 닿기만 하면 그만일/노오란 불길인데//나는 갑니다/몸이 달립니다/생명이 탑니다
- <熱望>
일상적 삶의 과정은 땀을 흘리며 기운이 달리더라도 스스로 방향을 선택하고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것이다. 시인은 그러한 자신의 실존을 돌아보며 나아가야 할 “물길”, 즉 아무런 안내 표지도 없는 그 위험한 미제의 인생길이 아직도 길게 남아 있음을 의식한다. 그런데 시인은 인생길의 끝에서 기다리는 삶의 목표이자 죽음인 “임”을 상상하며 자신의 실존은 그 ‘임’에 “한번 닿기만 하면 그만” 소멸되고 말 “노오란 불길”임을 의식한다. 그렇게 시인은 생의 종말인 죽음에의 ‘선구’로써 실존의 본래성에 도달하려 한다. 생명을 태우며 몸이 달리며 가는 것은 그러한 실존론적 노력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풀피리/보이지 않는/어둠의 땅/누우런 絶望의/끄트머리에서(…중략…)//하늘에다/아시아의 魂을/신나게 불곤 하였다
- <풀피리>
시인은 풀피리를 부는 “우리 동네 아이들”을 전지적 시점에서 묘사하며 ‘절망’을 벗어나는 실존론적 상황을 보여 준다. 그런데 현존재인 아이들이 처한 세계를 대신하는 ‘우리 동네’는 그 세계내의 존재자들의 유의의성이 사라져 “보이지 않는/어둠의 땅”이 되었다. 아이들은 그렇게 존재자들이 보이지 않아 자신의 존재가 무화되는, “누우런 절망”속에서 불안을 느끼며 그 “끄트머리”에서 “하늘에다” 풀피리를 분다. ‘하늘’은 지상적 존재가 끝나면서 이를 수 있는 새로운 세계의 상징으로서 지상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실존적 영역을 확대할 수 있는 곳이다. 하늘을 향해 “다시는/내려오지 않을 것처럼” 풀피리를 부는 아이들의 행위는 세계를 확장함으로써 본래적 삶으로 나아가려 하는 시인의 실존의식을 암시해 준다. 그렇게 시인은 지상의 삶에 절망하며 하늘을 향해 피리를 부는 아이들을 통하여 “비록 자기의 존재 근거를 자기 스스로 놓지는 못하지만 자기의 존재가능을 스스로 기투하는 자”라는 현존재의 실존을 보여 준다.
나무와 바람/미움과 사랑의/경련에 떨어질 듯/떨어질 듯 솟구쳐서는/나는, 벌써 반 쯤은 모자를 벗었던가(…중략…)//살아온 그 만큼/섬처럼 무너져 내린/絶望어린 나의 帽子를
- <帽子> 일부
시인은 한밤에 지붕 너머에서 지워도 지워지지 않고 윤이 흐르는 “초롱별”을 본다. 그것은 “나무와 바람”처럼 세계-내의 존재잘들과 서로 교섭하는 중에 “미움과 사랑”의 감정에 경련하며 존재의 위태로움을 벗어나려는 행위이다. 그리고 “반 쯤은 모자를 벗었던가”라고 자신에게 물어 보는데 ‘모자’는 세계-내에서 타자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써야 하는 복장이다. 그것을 벗는다는 것은 곧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더욱 가치 있는 타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다. 그 타자는 곧 첫 연에서 등장하는 ‘초롱별’이며 이는 3연에서 파이프를 입에 물고 오는 회홀족의 눈망울, 즉 “까만 별빛”에 비유된다. 시인은 그 타자의 두리번거리는 눈망울 앞에서 경외하는 자세로 “조금은 일어서서” 모자를 벗었는가를 자문하며 자신의 실존을 성찰한다. 그리고 “살아 온 그만큼 섬처럼 무너져 내린 모자”처럼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자신에 대하여 절망한다. 그런데 실존적 세계인 지상을 떠나서 비로소 갈 수 있는 천상에 존재하는 “별빛” 또는 회홀족의 눈망울을 보며 모자를 벗는다. 그러한 행위는 시인이 전체적인 존재가능성을 내포한 죽음에 ‘앞질러 달려가봄’으로써 자신의 “본래적인 확실성(하이데거)”을 인수하려는 것이다.
조남익 시인은 반복되는 일상 중에서 살아온 자신을 되돌아보며 현실을 직시하는 중에 절망한다. 그 절망은 반복되는 삶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지 못하거나 유한성에 갇힌 자신의 실존을 발견할 때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절망의 순간 던져진 세계 너머 새로운 세계로 시선을 향하거나 죽음에로의 ‘선구적 결의’를 감행한다. 그리고 하늘이나 절대자의 존재를 의식하며 절망으로부터 벗어나 일상의 한계를 벗어나려 한다. 그것은 곧 절망을 발판으로 비본래적 삶에서 본래적 삶으로 나아가려는 실존적 노력이다.
5. 결론
이상에서 조남익 시인의 초기시를 대상으로 어떻게 비본래적인 일상적 삶에서 실존의 본래성을 탐색해 나가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실존의식을 고찰해 보았다.
먼저 등단시 중 <수고리>에서 나타난 ‘수고리’는 과거적 공간만이 아니라 도래할 본래적 존재가능성이 유지되는 세계의 상징이다. <산바람 소리>에서는 일상 중에서 ‘산바람 소리’가 상징하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다가가고자 한다. 시 <북촌리 타령>에서는 가족이라는 가족을 배려하며 살면서 죽음으로 ‘앞질러달려가’ 화주승의 소리를 듣는다. 양심의 소리를 상징하는 그 소리를 들음은 가족을 배려하며 사는 일상적 삶에서 본래성을 성취하려는 실존의식의 표현이다.
한편 등단 시 3편에서 나타나는 실존의식의 특징은 초기의 시편들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며 일관적으로 드러난다. 조남익 시인의 시에서 ‘소리’가 빈번히 등장하는데 이는 모두 내면에서 울리는 ‘양심의 소리’를 상징한다. 시인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불안을 느끼는데 그것은 시인으로 하여금 본래적 자기의 존재 앞에 불러 세우는 작용을 한다. 불안을 느끼면서 자기의 본래적 전체 가능성이 내재된 죽음으로 앞질러가는 선구적 결의를 함으로써 그것을 인수하며 현전화 한다. 또한 시에서 ‘절망’과 그 변이체가 빈번히 등장하는데 이 역시 전체적 본래성을 인수하게 하는 기초로서 작용한다. 시인은 반복되는 일상 또는 지상적인 존재의 유한성에 직면하여 절망하며 죽음이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절대적 존재를 의식한다. 따라서 절망 역시 비본래적 일상으로부터 본래성을 찾기 위한 토대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비현실적 또는 죽음의 세계에서 들리는 ‘소리’ 즉 양심의 소리를 듣고 존재의 전체가능성에 앞질러가 그것을 인수하려는 실존적 노력은 초기시 전체에 다양한 변주를 거치면서 이어지고 있다. 시인은 일상적 삶에서 허무와 불안 또는 절망을 느끼지만 그것을 토대로 세계에 몰입하여 자기와 독자적 존재를 망각한 채 사는 자신을 본래적 자기 앞에 불러 세운다. 그 실존의 역전이 조남익 시인의 초기시가 갖는 독자적 미학으로서 진정한 존재로부터 멀어진 채 퇴락한 일상을 사는 독자들에게 ‘양심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 본고는 한국현대문예비평학회의 ≪한국현대문예비평연구≫ 제48집(2015년, 창조문학사)에 수록된 논문을 요약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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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향토의 자연미,
땅과 인간의 실존과 절제 있는 역사의식을 거쳐
근원적 영생주의를 지향하는 시,
의미의 천착과 혼의 접맥으로 이어지는
언어적 훈풍이 그의 시의 힘이다.
그런데 그런 모티프를 시로 형상화하는데 동원되는 것이 자연과 토속이고, 그 일상으에 대한 해석과 자기인식의 방법이 노장적노장적인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동양적 허무주의와 그에 대한 극복의식이 언뜻언뜻 내비쳐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이 그의 시를 단순한 생활시가 아니라, 자연과 토속을 매개로 한 더 큰 사유의 경지를 언뜻언뜻 엿볼 수 있게 하고 있는 것이다.
- 임승빈(시인. 청주대국문학과 교수)
비현실적 또는 죽음의 세계에서 들리는 ‘소리’, 즉 양심의 소리를 듣고 존재의 전채 가능성에 앞질러가 그것을 인수하려는 실존적 노력은 초기시 전체에 다양한 변주를 거치면서 이어지고 있다. (…) 그 실존의 역전이 조남익 시인의 초기시가 갖는 독자적 미학으로서 진정한 존재로부터 멀어진 채 퇴락한 일상을 사는 독자들에게 ‘양심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 김석환(시인. 명지대학교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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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익趙南翼 시인∥
∙ 아호 백강白崗, 충남 부여 출생(1935)
∙ 국학대학(현 고려대) 문학부 국문학과 졸업
∙《현대문학》의 3회 천료로 등단(1966)
∙ 충남과 대전에서 고교 교사, 장학사, 연구관, 고교 교장을 역임했고, 공주대∙건양대 에 출강
∙ 시집에 첫시집《산바람 소리》이후 8권과
∙ 시전집《조남익 시전집》
∙ 시선집《눈빛의 말》《흙빛의 말》《아가의 탄생》등이 있다
∙시비평 활동으로는 《현대시해설(1977.4판 발행)》이 출간되면서《현대문학》《현대시학》에 월평을 쓰게 되었고,이어《현대시학》의 연재물이 편집된《한구현대시해설》상∙하권(상원 13쇄,하권 8쇄)과《향내나는 숲속의 시인들》등이 있다.
∙ 충남문학상, 정훈문학사으, 시예술상, 윤동주문학상 등 수상
∙ 충남문협 대전광역시 초대회장(현 고문) 및
∙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자문위원, 한국펜클럽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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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남익 스승님의 시집을 축하드립니다. 스승님의 시 스크랩하여 갑니다.
<걸어다니는 백두대간> 출간 하심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또 하나의 열매를 선보이셨군요
축하축하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