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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이사야(115)/회복
제목 : 예루살렘과 함께 기뻐하라!
성경 : 사 66:1~14
찬송 : 73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40612 낙양교회 수요예배
사 66: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사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사 66: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사 66:4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사 66:5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아 그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사 66:6 떠드는 소리가 성읍에서부터 들려 오며 목소리가 성전에서부터 들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에게 보응하시는 목소리로다
사 66:7 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사 66:8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
사 66: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사 66: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
사 66:11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
사 66: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성읍의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사 66:13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사 66:14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
여호와의 종들과 패역자들의 운명이 대조되며, 핍박당하고 있는 여호와의 종들이 위로를 받습니다. 여호와의 종들과 패역자들은 똑같이 여호와의 심판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종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반면, 패역자들은 종교적 의식과 성전 건축을 통해 여호와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예배의 형식을 보시지 않고 여호와 앞에 선 자들의 심령을 보십니다. 여호와께서는 겉으로는 여호와를 예배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자신들의 마음의 가증한 것을 택하는 자들을 원수로 여기시고, 그들에게 보응을 선고하십니다. 그러나 핍박 중에서도 여전히 여호와를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위로와 평강과 풍성함을 약속하십니다.
이사야의 결론 부는 처음 1~5장에서 선지자가 제시했던 문제가 하나님에 의해 해결되리라는 선언으로 나타납니다. 헛되게 예배드리는 이스라엘을 향해 소돔의 관원, 고모라의 백성 같은 자라고 질타하면서 예언을 시작했던 이사야는(1:10~12), 참된 성전은 무엇이며 누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선포하며 예언을 마칩니다.
누가 하나님의 참된 백성인가(1~6절)
사 66: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사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본문은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누릴 복과 패역한 자들이 받을 심판을 다룹니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라는 여호와의 선언은 성전이 여호와의 보좌요 발판이라는 관념에 대한 논박을 담고 있습니다.
왕상 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시 103:19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에도 바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하늘이 하나님의 의자이고 땅은 하나님이 발을 올려놓으시는 발판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보좌 밑에 왕의 발을 올려놓는 발판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발등상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마 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 5: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즉 하나님은 온 우주를 가득 채우실 정도로 크신 분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두 개의 수사학적 질문도 마찬가지로 성전이 여호와께서 거하실 집, 안식하실 처소라는 인식을 반박합니다.
왕상 8:13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 하고
시 132:8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시 132:14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지상 성전에 대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 이유는 2절에 암시되고 있습니다. 즉, 창조주 여호와께서 인간이 지은 성전 안에 갇혀 통제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마음이 가난하고 상한 자, 여호와의 말씀에 떠는 자’, 즉 자기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살피십니다.
사 66: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사 66:4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본문에 언급된 네 개의 제사는 여호와를 향한 경외가 결여될 때 제사가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를 예시하고 있습니다. 소를 잡고, 어린양으로 제사하고, 소제를 드리고, 분향하는 것은 형식적으로는 율법에 부합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여호와께서 받지 않으시는 가증한 제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사 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사 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 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사 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자기의 길을 택하고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했다.’는 ‘내가 기뻐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와 더불어 그들의 영적 상태를 극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 55: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사 55: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 55: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 65:2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사 65:12 내가 너희를 칼에 붙일 것인즉 다 구푸리고 죽임을 당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으며 내가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니라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심을 잘 드러냅니다.
사 65:7 너희의 죄악과 너희 조상들의 죄악은 한 가지니 그들이 산 위에서 분향하며 작은 산 위에서 나를 능욕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먼저 그들의 행위를 헤아리고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사 66:5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아 그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사 66:6 떠드는 소리가 성읍에서부터 들려오며 목소리가 성전에서부터 들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에게 보응하시는 목소리로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떠는 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패역한 자들에게 핍박을 받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패역한 자들은 경건한 자들을 미워할 뿐 아니라 쫓아내면서 그들이 받은 약속(65:13~15)을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약속대로 패역한 자들은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성읍으로부터 나오는 요란한 소리’는 ‘성전으로부터 나오는 소리’, 나이가 ‘그의 원수에게 보응하는 여호와의 소리’로 점차 구체화되며, 여호와의 심판이 점차 분명하게 다가옴을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직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며 악으로부터 떠나는 신실한 성도를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십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며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실한 성도들을 핍박합니다. 주위를 살펴 볼 때 불신자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사람들이 신앙의 걸림돌이 될 경우가 꽤 있습니다. ‘나도 교회 다닌다. 그런데 왜 너만 유난스럽게 믿느냐?’는 식으로 우리의 믿음 생활을 공격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을 살펴보시며,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위로하고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에게 옳고 그름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믿음을 지키는 삶을 계속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회복되는 예루살렘의 기쁨(7~14절)
이사야는 시온 곧 예루살렘을 임산부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 자녀로 비유합니다. 여인이 출산한다는 것은 축복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을 인내할 수 있는 이유는 곧 태어날 생명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사 66:7 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사 66:8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
사 66: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능력으로 속히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은 의인화된 여인 시온의 출산에 빗대어 제시 됩니다. 시온의 출산은 ‘진통하기 전에’와 ‘산통이 오기 전에’로 규정됩니다.
사 26:17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 앞에서 그와 같으니이다
사 26:18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
8절에 소개된 첫째와 둘째 수사학적 질문은 모두 부정적인 대답을 전제합니다. 즉, 시온의 출산은 지금까지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해 모든 여인이 겪어야 했던 해산의 고통을 전제하는 듯합니다(창 3:16).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본문이 염두에 둔 시온의 회복은 단순히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중단을 넘어 창조질서의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셋째와 넷째 질문은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들을 출산했다’로 제한되면서, 긍정적인 대답이 도출됩니다. 즉 시온의 경우에는 나라가 하루에, 민족이 한 순간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이를 갖도록 했다.’와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라는 표현으로 시온의 기적적인 출산이 여호와의 능력에 기인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 66: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
사 66:11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은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여호와를 쉬지 못하게 한은 파수꾼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62:6~7, 10~12), 14절은 그들을 여호와의 종들이라고 밝힙니다. 또한 11~13절에서 예루살렘을 그들에게 젖을 물리는 어미로 묘사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그들은 시온이 출산한 자녀들(7~9절)이라고 여겨도 무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회복된 예루살렘의 기쁨을 함께 나누도록 명령을 받습니다. 그들이 즐거워할 이유는 어미 예루살렘으로부터 충분히 젖을 빨아 만족을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복된 예루살렘은 풍요와 기쁨이 넘치는 성읍이 될 것입니다(65:18~19,21).
사 66: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성읍의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사 66:13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사 66:14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
예루살렘에서 풍요와 기쁨을 누리게 될 근거는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에 있습니다. 여호와는 예루살렘에 굽이쳐 흐르는 ‘강물 같은 평강’과 ‘넘쳐흐르는 시내’ 같은 이방들의 영광을 약속하십니다.
‘강물’로 번역된 단어는 유브라데강을 지칭하는 단어이고(창 15:18; 31:21), ‘넘쳐흐르는 시내’는 폭우로 인해 범람하는 골짜기의 물길을 지칭합니다. 이 은유들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주실 평강과 영광의 풍성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너희가 빨리라’는 표현을 이 문맥에서 사용함으로써, 예루살렘의 자녀들이 먹을 젖이 결코 메마르지 않을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어미 예루살렘의 옆에 안기고 그의 무릎에서 놀며 그의 사랑을 누릴 것을 약속받습니다. 무엇보다 예루살렘의 백성이 기뻐할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예루살렘에 임재하실 여호와께서 친히 그들을 위로하시리라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뼈를 무성히 자라는 연한 풀에 비유함으로써, 심판 중에 피폐했던 그들의 삶이 풍성하게 회복되리라고 예시합니다. 여호와는 또한 ‘여호와의 손’ 즉 그의 능력을 자기 종들에게 드러내시며, 그의 원수들에게는 진노하시리라 선언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가르침은 구원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공로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구원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음이 가난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서기 보다는 우리의 종교적인 노력으로 복을 얻으려는 착각 속에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회칠한 무덤이라고 정죄 받았던 바리새인의 모습이 우리 안에 있어 때로 다른 성도를 정죄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 살면서 세상에서 미움과 핍박을 받는 것이 당연한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보다는 세상과 타협하며 세상의 안위를 좇아 살아가기를 택하기도 합니다. 과연 어떤 삶이 우리에게 합당한 삶일까요?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롬 8:17). 비록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이 믿음으로 주님만 바라보고 인내로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