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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부산은 과거 경상남도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1963년 이후 별도의 행정구역(직할시->광역시)으로 분리된 것입니다.
동래스파시티, 스파 윤슬길, 동래온천 노천족욕탕…. 스파(spa)는 온천.
지금 걷는 거리에선 엔간하면 온천이다. 행정 지명도 온천, 도시철도 역명도 온천이다.
상점이든 식당이든 상호에 온천이 들어가는 가게도 수두룩하다.
녹천탕, 금천파크온천, 벽초온천….
거리 이쪽저쪽 목욕탕 역시 엔간하면 온천을 내세운다.
온천수는 뜨거운 지하수.
열을 가해서 뜨거워진 물이 아니라 원래 뜨거운 지하수다. 원래 뜨거운 물,
원래 온천수를 쓰는 목욕탕은 간판 마크부터 동네 목욕탕과 다르다.
자세히 보면 보인다.
육교 홍보판 문구도 온천이다. 그것도 ‘천년 온천’이다. 육교 있는 곳은 도시철도 1호선 온천장역 3번 출구. 3번 출구에서 육교를 건너면 온천시장이 나오고 그 너머가 동래스파시티며 스파 윤슬길이며 노천족욕탕이다. 이 일대는 온천1동. 하나에서 열까지는 아니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일대는 엔간하면 온천이고 엔간하면 천년이다.
‘천년 온천’은 어떻게 발견됐을까. 어떻게 발견되고 어떻게 알려졌을까. 전설이 전한다. 백록(白鹿) 전설과 백학(白鶴) 전설이다. 자세한 전말은 ‘동래온천소지(小誌)’에 나온다. 허심청 전신 동래관광호텔에서 1991년 펴낸 소책자다. 허심청은 1907년 온천 휴양시설로 지은 봉래관 자리에 들어섰다.
또, 천년의 근거는 뭘까. ‘동래온천소지’, 그리고 부산근대역사관이 펴낸 ‘동래온천’ 책자에 해답이 있다. 동래온천을 처음 기록한 역사책은 ‘삼국유사’. 고구려·백제·신라 역사와 설화를 담아 1281년과 1283년 무렵 펴낸 이 책에 동래 온천이 처음 나온다. 신라 재상 충원공이 682년 목욕했단다.
동래란 지명이 생긴 지는 75년 후인 757년. ‘동쪽의 내산’이라서 동래(東萊)였다. 내산은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蓬萊山)을 줄인 말. 동래, 내산, 봉산을 같은 말로 썼다. 682년이든 757년이든 어쨌거나 천년이 훨씬 넘는다. 그 옛날 동래 사람, 부산 사람은 어질고 겸손해서 자기를 내세우지 않았다. 천년이 훨씬 넘어도 이천 년이 되지 않으면 “천년, 천년” 그랬다. 그래서 지금도 ‘천년 동래’고 ‘천년 온천’이다. 아무리 겸손하고 아무리 낮추어도 우리나라 최초의 목욕탕이란 역사적 진실은 영구불변이다.
온천 목욕탕 역시 조선시대 공공의료였다. 아무나 아무 때나 가서 때 미는 남탕·여탕이 아니라 몸 아픈 병자가 지병을 다스리는 공공의료의 현장이었다. 1481년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병자들이 목욕하면 바로 나아’라는 기록을 비롯해 동래온천에 30일 머물면서 신병을 치료한 한강(寒岡) 정구 선생의 욕행(浴行) 행장을 담은 1617년 ‘한강봉산욕행록’, 1740년 편찬한 부산의 백서 ‘동래부지’ 같은 조선시대 고문헌은 동래온천이 병자를 위한 공공재였음을 가늠하게 한다.
1766년 세운 온정개건비 비석 역시 동래온천이 단순한 온천이 아니라 공공의료였음을 입증한다. 비석은 노천족욕탕 오른편의 고색창연한 용각(龍閣) 안뜰에 있다. 비석 바로 앞에는 화강암을 깎아서 만든 조선시대 석조 욕탕이 하나 있다. 남탕으로 전한다. 여탕도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관공서를 지으면서 주춧돌로 빼갔다고 한다.
재미있는 부산,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때밀이 수건을 한국에서 처음 만든 데가 동래온천을 품은 부산이다. 그때가 1967년. 이탈리아 수입 원단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이태리 타올’이라 했다. 비닐 포장지 선전 문구는 1960년대 아날로그 티가 폴폴 난다. ‘힘 안 들이고 때 벗기는’이다. 1960년대와 70년대 최고의 신혼여행지, 가장 가고 싶은 관광지가 동래온천이었다. 전통적 사우나와 현대적 목욕탕을 결합한 복합 레저시설도 일찍부터 발달했다. 한국 찜질방 원조라고 봐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