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적인 균형미는 없다. 머리부분이 지나치게 크고 면상이 평범하며 의상의 수법이 간결하다"(세키노 다다시)
충남 논산 관촉사에 있는 대형 불상 '은진미륵'에 대한 평가였다.
일제 강점기 시대 학자인 세키노 다다시는 우리 문화를 더욱 저평가해야 했기에 이렇게 싸늘한 평가를 내렸다손 치더라도 한국 고고 미술사학을 열었던 김원룡 전 서울대 교수 또한 은진미륵에 대해서는 냉혹한 평가를 내렸다.
"3등신에, 전신의 반쯤 되는 거대한 삼각형 얼굴은 턱이 넓어 일자로 다문 입, 넓적한 코와 함께 가장 미련한 타입으로 만들고 있다. 한국 최악의 졸작이다"
한국 최악의 졸작이라니! 아마도 이런 악평을 받는 문화재는 흔치 않을 것이다. 그동안 은진미륵은 '못난이 불상'이라는 억울한 오명을 받아왔다. 그나마 국내에서 가장 큰 불상이라 보물로 지정이 됐지만, 오랜 세월 빛을 보지 못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2018년 반전이 일어났다.
"중후하고 역강한 힘을 느낄 수 있는 조형미를 갖췄고 통일신라와는 완전히 다른 파격과 신비의 미적 감각을 담은 가장 독창성 짙은 불교조각"이라는 평가를 받고 국보 제323호로 승격된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흘렀다고 해도 도대체 같은 불상을 어떻게 이렇게 극과 극의 평가가 내려진 걸까. 그러던 찰나 최근 은진미륵에 관한 심도깊은 한 기사를 읽고 호기심이 샘솟았다. 실제로 봐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논산으로 향했다.
은진미륵은 논산 관촉사에 있다. 넓직한 공용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일주문에 도착했다. 사람들의 발길이 많지 않은 걸까. 으례 사찰 주변은 산채비빔밥 식당이라던가, 산에서 직접 캐온 산나물을 파는 동네 어르신들이 많이 있는데 관촉사 주변은 폐허처럼 고요하고 스산하기만 하다.
관촉사 일주문
마치 폐허처럼 한적한 관촉사 입구
관촉사에 도착하면 화려한 단청이 새겨진 2층짜리 대광명전이 방문자를 맞는다 '두루 빛을 비추는 존재'인 비로자나 부처님을 비롯해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관촉사 대광명전
오른쪽에는 연필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특이한 건축물이 있었는데 윤장대라고 한다. 안에는 불교경전이 들어있는데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한번 읽는 것과 같다고 한다. 마치 티베트 불교의 마니차와 같다. 나도 한번 돌려보려고 손잡이를 잡았지만 생각보다 무거워서 쉽사리 움직이질 않았다. 하긴 심오한 불교를 이렇게 쉽게 읽을 수는 없겠지.
윤장대 돌리기를 포기하고 관음전으로 향했다. 관음전 안쪽 법당에는 길게 유리창이 있는데, 무릎을 끓고 앉으면 바로 은진미륵의 얼굴이 보인다. 아마도 은진미륵의 자비를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리라.
윤장대
관음전에서 보이는 은진미륵
은진미륵을 보기 전 천천히 음미하듯 관촉사를 둘러봤다
드디어, 관촉사의 주인공 은진미륵으로 향했다. 사실 관촉사에 도착해서부터 은진미륵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파트 6층 높이에 해당하는 18.2m나 되는데 어떻게 눈에 안뜨일 수가 있으랴. 도착한 순간부터 은진미륵으로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마치 아끼는 보물을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것처럼 뜸을 들이며 이곳의 분위기를 천천히 음미했던 것이다. 이제 은진미륵의 차례다.
실제로 본 은진미륵은 정말 거대했다. 사람이 앞에 서 있으면 겨우 발목까지밖에 안왔다. 그리고 혹평대로 사실 잘생긴 불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단지 잠깐의 외형일 뿐이고, 은진미륵은 찬찬히 볼 수록 우아하고 근엄하고 아름다운 불상이었다.
도대체 그동안 은진미륵에 대한 저평가의 이유는 무엇일까. 조성시기가 조금 앞선 경주의 석굴암 본존불과의 비교 때문이다. 우아함의 극치라는 통일신라시대 양식으로 만든 석굴암과 비교해 은진미륵은 얼굴이 지나치게 길고 넓적한 생소한 양식이었다. 신라말 고려초라는 혼란기에 부처님의 자비로 백성들의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조형미는 생략하고 거대하게만 만든 불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은진미륵은 2천년대에 들어서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긴 눈에는 위엄이 넘쳤고, 깊게 파인 인중에서는 씩씩한 기상이 느껴졌다. 발가락과 옷주름은 섬세하고 정교했다. 마치 중국 <삼국지>의 조조에 대한 평가가 '간웅'에서 현대에는 '인재를 아끼는 유연한 리더'로 변한 것과 비슷하다. 외모로만 평가하던 시대에서 개성과 창의성이 인정받는 시대에, 은진미륵은 재평가 된 것이다.
특히 은진미륵의 독창성은 새까만 눈동자에 있다. 보통 석불의 까만 눈동자는 돌을 까맣게 색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놀랍게도 홈을 파고, 흑색 점판암에 눈동자와 주름을 제작한 뒤 정교하게 끼워 맞췄음을 볼 수 있다. 단순히 크기로만 밀어붙이며 대충 만든 석불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흑색 점판암을 정교하게 끼워맞춘 새까만 눈동자
은진미륵에는 다음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려 광종때 한 여인이 산에서 고사리를 꺽다가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갔더니 아이는 없고 큰 바위가 땅속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신기하다고 여겨 광종이 혜명스님에게 그 바위에 불상을 조성하라고 명했다. 그렇게 해서 은진미륵이 탄생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건 은진미륵은 한개의 돌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발가락부터 허리까지, 그리고 상체, 면류관 까지 총 4개의 거대한 석재로 이뤄졌다. 도대체 4개의 거대한 석재를 어떻게 붙였을까.
네개의 석재를 정교하게 이어붙였다
혜명스님은 어떻게 큰 석재들을 옮길까 고민하던 중 두 동자가 탑쌓기 놀이를 하는 걸 보게 된다. 한개의 돌을 놓고 주변에 흙과 모래를 채운 뒤 다른 돌을 돌려 기존의 돌 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혜명스님은 깨달음을 얻고 은진미륵을 완성했다. 두 동자 스님은 그리고 사라졌는데, 사람들은 이를 두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화신이라 했다.
비록 오랜 시간 오해와 편견속에 지내왔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묵직한 진가는 어느 순간에는 드러나게 마련이리라.
은진미륵 앞 석등.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