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계불학(Systematic Buddohology)
부제 : 신념체계로서의 불교학 -김성철 著 -
◆ 조직신학에 비견되는 체계불학의 필요성
(p24~p29 에서 요약 발췌)
불교학자의 역할 중 하나는 현대의 문헌학적 연구성과에 토대를 두고 대소승을 망라한 불전의 모든 내용을 유기적으로 조직함으로써 수미일관한 하나의 신앙체계로 구성해 내어 불교신자에게 제공해 주는 불교학의 정립에 진력하는 일일 것이다. 이는 기독교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체계신학)에 해당되는 불교학이다.
♣기독교 신학의 네분야
1.성서신학.....문헌학에 토대를 두고 연구
2.실천신학... 사회과학이나 역사학과의 조우를 통해 계속 변모
3역사신학....사회과학이나 역사학과의 조우를 통해 계속 변모
4조직신학....계시된 신앙의 진리를 인간 이성의 수단으로 보고 신학을 전체적인 관련하에서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기독교 신학으로서 기독교 신학의 구심점 역할
조직신학의 내용....①신론(神論) ②인죄론(人罪論) ②기독론 ④구원론 ⑤교회론 ⑥종말론
기독교 신자의 경우 이런 여섯 가지 주제에 대한 조직신학적 조망을 토대로 매일 매일의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불교학에서 이러한 조직신학에 비견되는 불교학이 연구되지 않았던 원인에 대해 추적해 보자.
서구의 불교학 연구자들 중 많은 사람은 불교도가 아니었다.
뿌생 (Louis de La vallee Poussin, 1869~1938), 뚜찌(Giuseppe Tucci), 라모뜨 (Etienne Lamott, 1903~1983) 등은 카톨릭 신자이거나 신부였다.
서구문화가 세계의 보편적 문화인 상황인 현실에서, '기독교 신학자'로서 평생을 살고자하는 '독실한 불교신자'는 거의 없을 것
♣만일(if)....동양의 문화가 전 세계의 보편문화가 되어 있다면, 미개한 서구인들의 종교인 기독교에 대해 연민과 우월감을 가지고 연구하고 계몽하려는 많은 불교신자가 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서구인들 중에도 지배자들의 종교인 불교에 귀의한 후 동양으로 유학을 떠나 동양식 문헌학을 도구로 기독교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불교를 신앙으로 갖고 있으면서 기독교를 연구하는 신학자의 연구는 네가지 신학 분야 중에서 '성서신학'과 역사신학'의 단계에 멈출 것이다.
철저한 불교적 조망하에 이 세계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진정한 불교신앙인이 조직신학의 주제( ①신론(神論) ②인죄론(人罪論) ②기독론 ④구원론 ⑤교회론 ⑥종말론)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나온 신학적 조망을 구성할 의사도 없고 구성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기독교 신학자로서의 삶을 마감하는 임종의 순간에는 아미타불을 염하며 극락왕생을 발원하든지, 보살의 서원을 상기하며 인간 재생을 기원하게 될 것이다.
서구학자들의 불교연구는 문헌학적 연구,역사적 연구,비교철학적 연구,...좀 더 나간다고 하면 환경문제, 정신치료에 대한 해답을 모색해보는 응용불교적 연구에 그치고 있다
서구에서 시작된 현대적 불교학이 히라카와가 말하듯이 문사수(聞思修) 삼학 중 전통에서 소흘했던 정확한 문혜(聞慧)를 제공하려는 노력에서 소중한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현대적 불교학에는 '신앙으로서의 불교학'이 결여되어 있다. 개인적인 신념을 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불교학을 공부하는 현대의 많은 불교신자들은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으로서의 불교학,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중시되는 '조직신학'에 대응되는 체계불학(Systematic Buddohology)을 구성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
........감사합니다.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_((()))_
첫댓글 교수님 저서 '체계불학'의 머릿글에서 "불교를 신앙으로 갖는 불교학자는 불교에 대해 객관적으로 연구할 수 없다."
"기독교인 중에는 불교학자가 많은데, 기독교를 연구하는 불교도는 거의 없다."..라는 말이 학계에 떠돈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저런 말들은 언뜻 들으면 객관적이고 그럴듯한 말로 들립니다. 저도 그런 생각에 동조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강자와 약자가 바뀌었을 때는 반대의 현상이 되는, 즉 조건이 바뀌었을 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말은 교수님 말씀처럼 세계사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말입니다.
무분별하게 수입되는 기독교문명 속에서도 꿋꿋하게 이어지는 불교전통의 새로운 발전을 위해 교수남께서는 인문학적 불교이론이 난무하는 가운데서 불자를 위한 체계불학의 필요성을 강조하시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회원님들 모두 건강하시고
평안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_((()))_
도반님, 오늘도 체계불학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처럼 도반님이 인용하신 두가지 현상은 입장이 바뀌면 똑같이 되는 것입니다.
교수님의 말씀처럼 그런 입장의 변화를 가정하고 불교신앙인이 신학자가 되어 연구한다면,
그 신학자는 기독교를 연구할 때 성서신학과 역사신학에 머물고 만다는 것입니다.
실천신학이나 조직신학을 연구하는 불교신앙인 불학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자명해졌습니다.
타종교인이 불학자가 되면 실천불학이나 체계불학은 기대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무신론자는 어떨까요?
여하튼 문화와 종교,
그리고 불교신앙인이 아닌 불교학자와 불교신앙인인 불교학자일 경우 어떤 연구가 어디까지 이루어지는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데...
오늘은 시간이 없어 다음에 이어서 적어보겠습니다.
덥지만 좋은 밤입니다. _((()))_
교수님께서 체계불학이 불자들을 위한 신행지침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체계불학이 얼마나 절실한가에 대한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불교 공부가 실천으로 이어지려면 이념,역사 등 시대적 조건도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막상 요약해보려니 제게는 좀 어렵습니다.
지루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1 ~2편 더 올려보겠습니다.
청정님 좋은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건강하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_((()))_
도반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불교가 초기 부파 대승 중관 유식 여래장 금강승으로 변화를 거듭해 온 것은
우리 개인과 마찬가지로 불교도 살아있는 것이라서 항상 내적 외적인 변화를 따르지 않을 수 없어서일 것입니다.
늘 안으로는 수행의 문제가 있지만, 밖으로는 소통 포교의 문제가 있기에,
도반님 말씀대로 이념 역사 사회 등 외적인 조건의 변화를 따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고 말겠지요.
불교철학사 사상사 등의 책들이 나와야 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 생각합니다.
그 흐름을 알아야 왜 이런 변화가 생겼나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 시대 역사를 알면 보다 진실에 가깝게 바라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물로부터 개인이나 국가나 종교나 우주나 변화하지 않는 것은 한가지도 없기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또 말이 길어지네요.
지금도 글을 쓰다가 도반님 글을 보고 댓글을 먼저 다는데, 쓰던 것이 또 말이 길어져 다음에 써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도반님, 아주 중요한 대목을 아주 잘 요약하셨다는 생각입니다.
저보다 훨씬 나으십니다.
쓰려던 글을 다음에 써야겠습니다._((()))_
“불교학자의 역할중 하나는
현대의 문헌학적 연구성과에 토대를 두고,
대소승을 망라한 불전의 모든 내용을 유기적으로 조직함으로써,
수미일관한 하나의 신앙체계로 구성해 내어
불교신자에게 제공해 주는
불교학의 정립에 진력하는 일일 것이다.”
도반님께서 올리신 이 말씀에 체계불학이 무엇인지가 다 담겨있다고 생각됩니다.
교수님은 연구불학에서 그치지 않고 체계불학의 정립에 진력함이 불교학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이것이 불교신앙인이 아닌 서구의 불교학자들과는 다른 불교신앙인으로서의 불교학자의 당연한 귀결일 것입니다.
다른 말로 문혜의 불교학자에서 나아가 사혜의 불교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제 졸견에도 사실 말은 쉽지만, 이것을 이루려면 일생을 다 바쳐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불학천재 교수님이나 꿈꾸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이런 꿈을 꾸겠습니까?
아마도 국내 아니라 전세계를 통털어도 없을 것 같습니다.
비난 아닙니다.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도반님께서 요약하신 글에는 세가지 키워드가 보입니다.
하나는 문화이고, 하나는 종교이며, 다른 하나는 불교학자입니다.
지금 쓰는 것은 그냥 두드러지는 하나의 요소만 갖고 말해보는 것이니, 현실을 반영하지는 못합니다.
그냥 공부적 측면에서만 말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참고사항이고 읽을꺼리입니다.^^
먼저 문화와 종교입니다.
제가 알기로 문화는 주로 지식으로 이루어지고, 종교는 주로 지혜로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그래서 문화인은 지식을 주로 추구합니다.
지식을 추구하여 지식을 얻으면 쌓이게 됩니다.
추구하면 할수록 쌓이게 됩니다.
그런 지식쌓기를 하느라 문화인은 온종일 바쁨니다.
반면 종교인은 지혜를 주로 추구합니다.
지혜를 추구하여 지혜를 얻으면 버리게 됩니다.
추구하면 할수록 버리게 됩니다.
그런 지혜얻기를 하느라 종교인은 온종일 바쁨니다.^^
문화는 세상의 일이고, 세상의 일은 지식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지식이 쌓일수록 고수입니다.
종교는 구도의 일이고, 구도의 일은 지혜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지혜가 높을수록 고수입니다.
지금 서구의 문헌연구는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니 쌓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쌓인 엄청난 지식은 첨단의 기술에 힘입어 교수님 말씀대로 전에 못하던 것을 여러모로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하나가 초기불교 대승불교 금강승불교의 세가지로 전승된 삼장교학의 온전한 연구입니다.
그래서 일차 문헌연구의 공적은 서구불교학자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지식쌓기인 문혜의 고수이기에 그렇습니다.
문혜는 모르는 것을 배워 아는 것입니다. 그 아는 것은 지식이라 배워 알수록 쌓입니다.
한마디로 자연과학에 기반한 문혜의 지식쌓기가 방대한 자료의 연구와 집성을 해낸 것입니다.
이것이 서구불교학자들의 업적입니다.
지식 추구로 얻는 지식쌓기가 그들의 잘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불교연구에 있어 연구불학으로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문사수 삼헤로 말해보겠습니다.
지식쌓기는 문사수 삼혜가운데 문혜라 할 것입니다.
지식쌓기는 문혜이니, 이같이 지식쌓기에 그치는 학자는 문혜의 학자라 할 것입니다.
문혜의 학자는 지식을 추구하므로 문헌학자라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종교학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배울 때는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니 아는 것이 쌓이게 되면 그것이 문혜입니다.
들어서 모르던 것을 아는 지식이 쌓이면 문혜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식이 쌓여 아는 것이 많아진 것이지, 지혜가 밝아진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지혜는 지식과 달리 쌓는 게 아니라 버리게 합니다.
문혜가 지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스스로의 사색 즉 곰곰이 생각하여 얻는 바가 생겨야하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앎입니다.
앎이 생기면 견해가 생깁니다.
이게 사혜입니다.
그래서 사혜를 정견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혜의 학자를 정견의 학자라 하고, 종교학자라 하고, 나아가 정견이 전체의 정견이 되면 체계불학자라 할 것입니다.
체계불학은 불학의 최고봉입니다.
어렵습니다.
비유로 말하면,
정견을 추구하는 사혜의 불교학자는 금채취자이고, 문혜의 불교학자는 광석채취자입니다.
광석은 연구불학에 비유되고, 금은 체계불학에 비유됩니다.
광석에서 정련하여 금이 나오듯, 문혜의 연구불학에서 사혜로 연찬하여 체계불학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구불학 없이 체계불학이 안나옵니다.
연구불학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정밀한가에 따라 체계불학도 그와 같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연구불학의 중요함이 있습니다.
하나도 소홀할 수가 없는 이유입니다.
다시 말하면, 쌓인 지식인 연구불학에서 지식이 아닌 실천가능한 앎인 체계불학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신행자가 아니면 위에서 보듯 지식쌓기의 불교학자밖에 되지 못하니,
그런 자는 아무리 노력하고 연구하여도 지식추구의 문혜의 불교학자밖에 안됩니다.
불교신행자야말로 지식을 버리고 지혜를 얻는 불교학자가 될 수 있으니,
지혜추구의 사혜의 불교학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계불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학자는 지혜를 추구합니다. 그것은 앎을 추구함이고, 그것은 정견을 추구함입니다.
광석을 정련하여 금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금을 얻으면 금은 무엇이든 만들어 쓸 수 있듯이 사혜로 얻은 정견은 금과 같은 것이라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체를 정견합니다.
전체를 정견하기에, 교수님의 말씀대로 현대의 문헌학적 연구성과에 토대를 두고,
대소승을 망라한 불전의 모든 내용을 유기적으로 조직함으로써, 수미일관한 하나의 신앙체계로 구성해 냅니다.
불교학의 정립에 진력하여 하나의 거대한 실천가능한 체계를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와같은 체계불학의 온전함은 문혜의 연구로 가능해진 광범위한 현대의 연구불학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체계불학은 초기 부파 대승 금강승에 이르기까지 망라하여 유기적으로 이룬 하나의 실천가능한 신행의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정말 모든 나라에서 그 나라의 특성에 맞게 체계불학을 연구할 수 있고, 전세계에서 공히 체계불학을 연구할 수 있는 고무적인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체계불학의 성공여부는 이 시대 불교학자들의 손에 달려있다는 생각입니다.
간접적으로는 이 시대 모든 불교신앙인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넓게는 불교신앙인이 아니라도 이 시대 모든 뜻있는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도 할 것입니다.
가차이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더 가차이는 나의 손에 달려있다는 생각입니다.
끝으로 세 가지 측면으로 말을 정리하여 봅니다.
1) 문화의 우위룰 누가 점하고 있는가?
이 말은 지식쌓기를 누가 잘했나일 것입니다.
지식쌓기 잘한 나라가 문화의 우위를 점한다 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알아야 면장을 하는 것입니다.
2) 불교학자가 불교신앙인, 타종교신앙인, 무신론자일 경우 어떠한가?
타종교인은 물론 무종교인도 불교인이 아니므로 불교를 연구함에 지식추구는 할지언정, 지혜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연구하여 쌓인 지식을 갖고 신앙과 수행을 하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혜의 학자는 될지언정 사혜의 학자는 되지 못합니다.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문혜의 불교학자의 학설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광석을 그냥 쓰는 것과 같아서 부작용이 속출합니다.
반드시 사혜로 연찬하는 과정을 거쳐 금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불교신앙인은 쌓인 지식을 갖고 신앙과 수행을 하려하기에 사혜로 지혜를 추구하여 실천가능한 앎을 얻습니다.
이와 같기에 비불교신앙인은 문혜로 지식쌓기까지 연구가능하고, 불교신앙인은 사혜로 지혜얻기까지 연구가능합니다.
3) 체계불학이란 무엇인가?
마침내 얻은 정견 전체의 유기적 집성이 체계불학이라 할 것입니다.
제가 체계불학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쓴 글이니, 그저 읽을꺼리로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안읽으셔도 괜찮습니다.
마도로스님께서 귀한 교수님의 글을 잘 요약하셨는데, 어줍잖고 장황한 글로 횡설수설하여 도반님들의 번뇌에 일조한 느낌도 듭니다.
그래도 체게불학에 대한 귀한 글을 접하여 생각하여보았습니다.
읽으실 분들은 바로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저도 한번 생각하여 본 것입니다.
도반님, 그리고 오시는 모든 도반님, 오늘도 공부하기 좋은 귀한 하루입니다._((()))_
문화(문명)는 지식을 쌓는 것이고 종교는 지혜를 추구한다.
학자는 지식을 쌓는 문혜를 추구하고, 나아가 곰곰이 생각하여 정견을 얻어 앎이 생기면 사혜의 학자가 된다.
.... 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이란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전체의 정견이 생기면 비로소 체계불학자가 될 수 있다.
비유하자면,
금광석채취자는 문혜의 불교학자이고 거기서 불순물을 제거하여 금을 제련하는 자는 사혜의 불교학자이다.
광석을 그냥 쓰면 불순물에 의한 부작용이 생긴다.
순도의 금은 변질이 없으니 쓸모가 무궁무진하다.
비유가 참 재미있고 적절한 것 같습니다. 잘 읽어 보았습니다.
정말 곰곰이 생각을 많이 하시고 잘 풀어주십니다.
”체계불학의 성공여부는 이 시대 불교학자들의 손에 달려있고
간접적으로는 이 시대 모든 불교신앙인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까이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습니다.더 가까이는 나의 손에 달려있다는 생각입니다.“
청정님의 이 말씀이 참 좋습니다.^^
비록 학자도 출가자도 아니지만 불자로서 미약하나마 힘을 보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_((()))_
도반님, 말은 쉽지만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담론이라고 한 것은 이것이 현학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관을 떠나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인데, 서양학문의 특징이고 동양의 현학의 특징입니다.
공부는 이런 것 할수록 멀어짐을, 저는 교수님의 나혼자 산다는 말씀을 듣고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현학과 거리가 먼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데, 왜 현학이 안되는 것인가? 하면, 바로 나혼자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절대주관인 나혼자 산다에서 공부하느냐? 그렇지 않은가? 가
끝없는 길로 가느냐 끝나는 길로 가느냐?
공부의 길로 가느냐 학문의 길로 가느냐가 나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끝없이 밖으로 치닫게 되고, 하나는 끝장을 보는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교수님께서는 부처님의 가르침가운데,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의 가르침의 공통된 것이, 바로 나혼자 산다는 절대주관의 관점이라는 것을 자각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교수님의 이 나혼자 산다는 말씀듣고 그런 줄 알았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자각이라 생각합니다.
또 이것이 공부하는 이와 학문하는 이의 갈림길이라 생각합니다.
교수님은 학문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공부를 하신 분이기에, 부처님의 가르침속에서 이런 정견을 하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아시는 것인데도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저도 익숙하지 않아서 잘 잊고, 도반님도 그렇고, 또 오시는 도반님들께서도, 다시 교수님의 가르침을 한번 더 새겨보자는 의미입니다.
이런데서 담론을 한다면 객관에는 떨어지지 않으니, 괜찮을 것도 같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니, 도반님도 그렇고, 모든 도반님들께서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제가 걱정이 지나친 것도 사실입니다.
공부가 얕아서 그렇습니다.
너그러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_((()))_
교수님의 저서 체계불학은 400페이지에 달하는 비교적 두꺼운 책입니다.
제가 지금까지요약한 부분은 약 30페이지 정도입니다.
체계불학의 배경을 소개해드리려는 의도로 저서의 일부를 요약해 몇 번에 나누어 올려보았습니다.
부족하지만 교수님의 뜻은 충분히 전달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체계불학에 토대를 둔 실천불교학의 필요성**
**현대 불교학과 체계불학의 과제**
두 꼭지는 제목만 소개해 드려도 대충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체계불학 공부에 약간의 도움이라도 되셨기를 바랍니다 ^^
_((()))_
.
도반님, 덕분에 저는 체계불학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보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분들께서도 요약하신 교수님의 귀한 말씀을 듣고,
도반님 말씀대로 체계불학이 왜 나오게 되었고,
왜 필요하고,
어떤 것이 체계불학인지에 대해 저와 마찬가지로 대략은 아셨을 줄 압니다.
도반님, 귀한 시간 내서 올리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_(((()))_
ps) 사실 나혼자 산다를 놓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올리셔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 근기가 다르니,
도반님은 도반님대로, 저는 저대로, 다른 분은 다른 분대로, 도움이 됨이 다 다르기에,
말씀대로 각자 알아서 올리고 싶으시면 뭐든지 올리시고,
안올리고 싶으시면 또 그렇게 하고, 알아서 하시는 것이 맞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도반님, 의견 주시면 감사히 듣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