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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칼럼] 네가 가져간 나의 반쪽
저는 소싯적에 물리학을 전공하던 자연과학도였습니다. 제 과거를 듣고 열에 일고여덟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곤 합니다. “신부님, 저는 학창 시절에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 물리였어요.”
많은 사람들이 물리를 어렵고 까다롭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물리보다 더 보편적으로 어려움과 싫어함의 대상이 되는 과목이 있습니다. 바로 수학입니다. 물리가 어려운 이유는 수학이라는 도구로 자연현상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어려운 수학을, 심지어 자연현상에 적용하고 분석해야 한다니 이렇게 난감할 데가 없지요.
하지만 어디나 예외는 있기 마련입니다. 극소수의 사람들은 그 어떤 과목보다 수학을 좋아하고 나아가 수학으로 자연을 분석하는 것을 즐기기도 합니다. 그 흔치 않은 사람들 중에 오늘날 우리가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칭하는 데카르트(R. Descartes, 1650)가 있고, 시계처럼 정확한 철학자로 유명한 칸트(I. Kant, 1804)도 있습니다. 수학 시간에 우리를 그토록 힘들게 하던 x-y 좌표계를 처음으로 고안한 사람이 바로 데카르트였습니다. 칸트는, 말만 들어도 아득하고 복잡할 것 같은 천체 물리를 심도 있게 연구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썼지요. 오늘날 윤리 교과서나 철학 강의에서 만날 법한 이 사람들은 실상 뛰어난 수학자이고 물리학자이기도 했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유명한데, 이 말은 확실한 지식, 분명한 참됨(眞理)을 찾기 위한 그의 출발점입니다. 데카르트에게 끊임없이 생각하는 ‘나’는 모든 확실성의 출발점이고, 이 ‘생각하는 나’가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얻는 지식 중 하나가 바로 수학 지식입니다. 데카르트는 수학이야말로 모든 종류의 확실한 참됨(眞理)의 모범이고 기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칸트는 여기에 물리학을 덧붙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수학과 물리학, 그리고 물리학의 방법론을 본뜬 다른 자연과학 분과들만이 엄밀한 의미에서 학문(science)이라고 선언합니다.
칸트 이후, 원래는 학문 일반을 가리키던 ‘science’는 점차 특정 학문, 곧 자연과학을 주로 지칭하는 말로 굳어집니다. 과거에는 철학이 학문 전체를 다루고 숙고하는 일을 했는데, 거기서 과학이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유일하게 참된 ‘science’라 일컫게 된 것이지요.
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에 점차 어렵고 수준 높은 수학이 사용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 심해집니다. 오늘날 우리가 위대한 물리학자로 알고 있는 뉴턴(I. Newton, 1727)은 원래 스스로를 철학자로, 특별히 자연에 대해 고민하고 탐구하는 자연철학자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철학자’ 뉴턴 이래 물리학은 저 악명 높은 미적분과 다른 복잡한 수학으로 인해 더 이상 철학으로 이해하기 힘든 그 무엇이 되고 말았습니다.
보편에 대한 동일한 관심으로 출발한 철학과 과학은 그렇게 서로 멀어졌습니다. 예전의 한 유행가 가사처럼 과학은 철학의 품을 떠나면서 그 ‘반쪽’을 가져가 버렸고, ‘반쪽’을 내준 철학은 점차 위축되고 초라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인간학 칼럼] 의미를 찾는 인간
인간을 서사적 존재라고 하는 까닭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이야기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물론, 경험하는 수많은 사건에 대한 나 자신의 이해가 담겨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스스로 이해하고 해석한 것이 바로 나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그 이야기는 곧 내 삶이자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를 서사라고 하는 까닭은 어렵게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는 일정한 의미 체계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이를 통해 다가올 삶과 내일의 우리 존재에 대해 기획합니다. 그것이 내 삶의 모든 것이며, 내 존재 전부가 그런 서사를 통해 해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의 서사가 곧 나 자신입니다. 서사를 바꾸면 내 삶과 그 안의 관계가 바뀌게 되고, 다가올 삶도 새롭게 이루어집니다. 내 삶에 담긴 객관적 사실과 무관하게 그 안의 의미는 이 서사를 통해 거듭 새롭게 드러나게 됩니다. 서사의 새로움은 내 존재의 새로움이니, 나의 서사가 바로 나 자신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삶의 서사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의미입니다. 의미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나의 이해이며 나의 해석입니다. 인간은 경험하는 모든 것, 만나는 모든 사람, 살아가야 할 모든 삶에 거듭거듭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 의미가 곧 서사의 본질이며, 내 삶의 모든 것입니다. 단순한 이야기를 서사로 드높이는 것은 바로 그 안에 담긴 의미입니다. 이 의미는 내 삶의 진실이며 내 존재의 의미입니다. 그 의미 전체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은 그 의미 안에 담겨있으며, 그 의미를 통해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무의미한 일을 참지 못합니다. 삶이 지겨운 까닭은 그 안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의미가 있으면 어떻게든 이겨내게 됩니다. 마침내 불가능한 것들이 이루어지고, 전혀 새로운 삶이 다가오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의미가 깊을수록 삶은 드높아지고, 더 높은 존재로 도약하게 됩니다. 인간을 ‘그 이상의 존재’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의미를 통해 결단으로 다가옵니다. 낯설었고 미웠던 그 사람도 다른 존재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 안에 내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 의미를 통해 자신의 삶과 존재를 만들어가는, 로고스(logos)적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이 의미는 어떻게 주어지는 걸까요? 현대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체제를 보통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정치와 경제를 포함한 사회 체제로서 자본주의와 사물을 해명하고 지식을 설정하는 체제로 과학주의를 말합니다. 그와 함께 정치와 사회 체제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런 체계들은 이 존재론적 의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 문제를 개인의 자유와 결단으로 돌려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의미 체계는 인간 존재의 근본입니다. 이 체계가 없다면 인간은 깊은 공허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을 존재론적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그것이 인간의 존재 전체를 결정하는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이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며, 우리 삶의 전부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나는 어떤 의미 체계 위에서 살아가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그를 부둥켜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공허의 심연을 벗어나 그 이상의 존재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인간학 칼럼] 로고스적 존재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의 핵심 물음입니다. 철학은 인간이 관계되는 모든 주제를 해명하는 학문이지만, 그 과제는 인간에 대한 이해로 모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지만, 그 이해가 또한 인간이 접하게 되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토대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철학의 핵심이며, 그에 따라 세계의 모든 사물과 사건이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이를 철학에서는 해석학적 순환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 자기 이해이면서 또한 이 자기 이해가 인간이 이루는 모든 활동의 토대가 된다는 말이지요. 문화와 과학기술, 학문과 예술 등 모든 것은 이 자기 이해 위에 자리합니다.
고대 철학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자기 이해를 ‘로고스를 지닌 존재’라고 표현합니다. 로고스(logos) 개념은 다양한 의미를 지닙니다. 인간이 가진 ‘말’을 가리키거나 또는 인간의 본성적 능력인 이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나아가 세계를 이루는 근본 원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한 단어가 여러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한 단어로 이 모든 것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을 로고스적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해명하는 지성적 능력을 지녔으며, 그것이 말/말씀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 핵심적 원리가 세계의 근본 이치이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이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유럽 철학의 핵심적 주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철학의 질문이 결국 인간에 대한 자기 해명에 있다면 이 전통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인간에 대한 정의에 가장 잘 부합한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근대에 이르러 유럽의 계몽주의는 이런 전통을 바탕으로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해명합니다. 그래서 칸트는 이성을 인간의 본질로 이해하고, 이를 실현하는 계몽을 인간의 본질적 의무로 강조합니다. 계몽이란 자신의 이성을 스스로 사용하지 못하는 미성숙함에서 벗어나 이성을 토대로 해서 외부적 권위가 아니라 ‘감히 스스로 행동’하도록 촉구합니다. 계몽은 인간의 의무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 되는 결정적 원리입니다. 계몽은 밖으로는 현대 세계의 모든 것은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면서 또한 안으로는 인간다움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이성의 빛을 내면으로 비추어 성찰하는 것이 인간이 인간인 까닭이란 말이지요.
오늘날 많은 철학이 이런 전통을 비판하는 까닭은 이 안에 담긴 인간중심주의 때문입니다. 과연 인간은 세계의 주인이며 모든 존재의 중심일까요? 아니면 인간은 그저 세계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생명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일까요?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철학은 인간은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 생명이 이루는 거대한 그물망의 한 코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그 안에는 현재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현실적이며 문화적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일면적인 인간 중심과 로고스 중심의 철학을 비판하는 흐름이 자리하고 있지요.
[인간학 칼럼] 로고스적 존재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의 핵심 물음입니다. 철학은 인간이 관계되는 모든 주제를 해명하는 학문이지만, 그 과제는 인간에 대한 이해로 모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지만, 그 이해가 또한 인간이 접하게 되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토대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철학의 핵심이며, 그에 따라 세계의 모든 사물과 사건이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이를 철학에서는 해석학적 순환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 자기 이해이면서 또한 이 자기 이해가 인간이 이루는 모든 활동의 토대가 된다는 말이지요. 문화와 과학기술, 학문과 예술 등 모든 것은 이 자기 이해 위에 자리합니다.
고대 철학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자기 이해를 ‘로고스를 지닌 존재’라고 표현합니다. 로고스(logos) 개념은 다양한 의미를 지닙니다. 인간이 가진 ‘말’을 가리키거나 또는 인간의 본성적 능력인 이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나아가 세계를 이루는 근본 원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한 단어가 여러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한 단어로 이 모든 것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을 로고스적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해명하는 지성적 능력을 지녔으며, 그것이 말/말씀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 핵심적 원리가 세계의 근본 이치이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이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유럽 철학의 핵심적 주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철학의 질문이 결국 인간에 대한 자기 해명에 있다면 이 전통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인간에 대한 정의에 가장 잘 부합한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근대에 이르러 유럽의 계몽주의는 이런 전통을 바탕으로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해명합니다. 그래서 칸트는 이성을 인간의 본질로 이해하고, 이를 실현하는 계몽을 인간의 본질적 의무로 강조합니다. 계몽이란 자신의 이성을 스스로 사용하지 못하는 미성숙함에서 벗어나 이성을 토대로 해서 외부적 권위가 아니라 ‘감히 스스로 행동’하도록 촉구합니다. 계몽은 인간의 의무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 되는 결정적 원리입니다. 계몽은 밖으로는 현대 세계의 모든 것은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면서 또한 안으로는 인간다움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이성의 빛을 내면으로 비추어 성찰하는 것이 인간이 인간인 까닭이란 말이지요.
오늘날 많은 철학이 이런 전통을 비판하는 까닭은 이 안에 담긴 인간중심주의 때문입니다. 과연 인간은 세계의 주인이며 모든 존재의 중심일까요? 아니면 인간은 그저 세계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생명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일까요?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철학은 인간은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 생명이 이루는 거대한 그물망의 한 코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그 안에는 현재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현실적이며 문화적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일면적인 인간 중심과 로고스 중심의 철학을 비판하는 흐름이 자리하고 있지요.
[과학칼럼] 신앙과 과학은 조화될 수 있는가?
지난 연재까지 퍼즐 풀이 혹은 문제 풀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자연과학이 지닌 힘과 한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과학은 일종의 문제 풀이입니다. 특히 현대 자연과학은 자신의 문제 풀이의 영역을 좁히고 구체화하고 그 방법을 단순명쾌하게 가다듬었고, 덕분에 과학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성공은 아주 중요한 것을 희생함으로써 얻은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전체성, 통합성, 가치성입니다. 어떤 점에서 이는 당연합니다. 과학의 문제 풀이는 지극히 세부적인 전문분야 안에만 적용되고, 이를 무리하게 ‘전체’로 확장시키거나 서로 다른 문제 풀이의 방법과 결과들을 억지로 ‘통합’하려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과학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 맙니다. 또한 ‘가치’는 처음부터 양(量)이나 수(數)로 표현 · 측정될 수 없는 것이기에 과학에서 다루기에는 지극히 애매모호한 대상입니다. 그러니 ‘가치’는 과학에서 다룰 수 없고, 다루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전체성, 통합성, 가치성은 우리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는 과학이 아니라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이 주로 다루게 됩니다. 오늘날 자연과학의 눈부신 성공으로 말미암아 인문학이 힘을 잃고 주변으로 밀려난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인류가 존속하는 한 인문학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인문학은 자연과학이 일찌감치 내려놓고 간 것들, 곧 전체성, 통합성, 가치성에 대한 질문과 열망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도킨스와 같은 이들이 과학의 이름으로 과학을 넘는 차원을 이야기할 때, 인문학 특히 철학은 그 오류를 간파하고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다시 잡아 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 철학은 질문으로 시작하여 질문으로 끝나곤 합니다. 특히 인간과 세상의 궁극적 기원과 목적에 대한 질문 앞에서, 철학은 그 질문을 예리하게 가다듬기만 할 뿐, 확실한 답을 주지는 못하곤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점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훌쩍 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과학이 철학의 품에서 태어날 당시부터 간직하고 있었으나 ‘문제 풀이’의 효율성을 위해 결국 놓아버린 질문, 철학이 언제나 붙잡고 고민하였으나 끝내 ‘답’을 주지 못한 그 질문, 바로 인간과 세상의 궁극적 기원과 목적.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우리에게, 나아가 인류 전체에 길을 알려주고 빛을 밝혀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기에, 가톨릭 성직자이기에 너무 쉽게 말한다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신앙을 일종의 주관적 신념으로만, 심지어는 삶의 부차적인 ‘액세서리’로 여기는 이 시대에 감히 과학과 철학을 넘어 우리에게 궁극적인 답을 주는 무엇으로 신앙을 내세우다니,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시대야말로 더욱더 ‘객관적 진리’로서의 신앙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진리’로서의 신앙은 ‘사실들의 집합체’인 과학과 모순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상호 간에 커다란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그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고자 합니다.
과학칼럼] 과학에 대한 ‘믿음’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
“나는, 과학이 하느님의 존재를 반증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리처드 파인만, 196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지난 연재 때 과학의 ‘방법론적 무신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자연과학은 오직 양(量)으로 측정하여 계산할 수 있는 요소만 다루며,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은 과학의 대상에서 제외합니다.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유물론이나 무신론이 아니라, 단순하고 효과적으로 자연을 탐구하기 위해 임시로 하느님의 존재를 괄호 안에 넣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 어떤 이들은 이 ‘방법론적 무신론’을 말 그대로의 무신론으로 간주합니다. 그들은 과학의 이름을 빌어, 세상엔 오직 물질뿐이고 신(神)은 없으며, 종교와 신앙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그 하나는 ‘방법론적 무신론’과 진정한 무신론을 혼동하는 부류입니다. 그들은 과학을 찬양하고 맹신하지만, 실상 자연과학의 방법론적 특성을 잘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다른 한 부류는 과학의 방법론을 잘 알지만, 과학의 힘을 너무 과신하기에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모든 것을 거짓이요 허상으로 봅니다. 전투적 무신론자로 잘 알려진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즉, 두 부류의 사람들 모두 일종의 믿음을 갖고 있으며, 그들이 하느님이나 신앙을 부정하는 근거는 과학 자체가 아니라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는 그들의 믿음입니다. 오로지 과학만을 신봉한다는 뜻에서 ‘과학주의’라 불리는 이 편협한 믿음은 오늘날 대단히 강력해 보이는데, 이는 현대 자연과학이 이뤄낸 눈부신 과학문명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휘황찬란한 과학의 성취를 일단 괄호치고 차분히 따져보면, 과학으로 하느님이나 신앙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과학은 그 모두를 자신의 방법론에서 제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좀 더 정직한 과학자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인정합니다. 천재 물리학자로 유명한 리처드 파인만은, 과학으로는 신의 존재를 반증할 수 없으며, 오히려 과학에 대한 ‘믿음’과 신에 대한 믿음은 공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정직한 과학자는 뒤이어 고백합니다. 자신은 신을 믿지 않으며, 종교에서 가르치는 많은 교리들을 믿기 힘들다고 말입니다. 과학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에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고 설명할 수도 없는 영역으로 뛰어들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과학에 대한 건전한 ‘믿음’과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은 공존할 수 있습니다. 몇몇 무신론자들이 과학의 이름을 내세워 하느님과 그분께 대한 신앙을 한사코 부인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이거나 과학으로 포장된 본인들의 신념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두 ‘믿음’을 함께, 조화롭게 어우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과학에 깊이 몸을 담으면 신앙을 갖기 어려워합니다. 신앙은 과학을 거스르지는 않지만 과학을 훌쩍 넘어서는데, 파인만이 말하듯 과학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진 과학자가 그것을 넘어 하느님을 믿는 일은 하나의 커다란 도전이고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칼럼] 저에게는 그러한 가설이 필요치 않습니다
고등학생 때 일입니다. 당시 저희 학교에는 과학 이야기나 토론을 즐기는 괴짜(?)들이 많았습니다. 과학에 관련된 거라면 온갖 소재가 등장했는데, 한번은 우주의 창조와 신(神)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격한 논쟁이 될 법한 주제였지만,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자 장래 희망이 사제라는 저를 배려해서인지, 토론은 진지하지만 제법 점잖았습니다. 정확히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지금은 뚜렷이 떠올릴 수 없지만, 역시 천주교 신자였던 어떤 친구가 토론을 마무리하며 했던 말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좋아, 빅뱅부턴 과학이 설명할 수 있다고 쳐. 그런데 빅뱅 이전은? 그건 과학이 모르잖아. 그래서 나는 창조주를 믿어.”
비슷한 이야기가 이백여 년 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물리학자 라플라스 사이에 오간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결말은 정반대입니다. 우주의 창조주에 대해 묻는 나폴레옹에게 라플라스는 답하길, “폐하, 저에게는 그러한 가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의 눈에 언뜻 오만해 보이는 이 말에는 실제로 과학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 있습니다. 우주의 모든 현상들은 다 자연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또한 이 말에서 전형적인 과학자의 태도, 나아가 자연과학 자체의 특성이 드러납니다. 나는, 과학자는, 자연을 탐구할 때 초월적이거나 초자연적인 모든 것을 다 배제하고, 오직 양(量)으로 관측하여 수학으로 계산하고 실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요소만 다루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따른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말하는 많은 것들, 곧 구원, 죄, 영혼, 천사, 거룩함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하느님마저 과학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어려운 말로 이를 ‘방법론적 자연주의’ 혹은 ‘방법론적 무신론’이라 합니다. 정말로 “신이 없다.”는 주장이 아니라, 과학 탐구를 위해 신이라는 존재에 일단 괄호를 치는 것입니다.
철학의 관점은 다릅니다. 철학은 인간과 우주 만물의 근거를 묻고, 그것을 계속하다 보면 결국 신에 대한 물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거의 모든 철학자들은, 그들이 신을 믿든 그렇지 않든 간에, 신에 대해 묻고 이야기합니다. 고대 철학자들은 물론이고, 수학자이자 과학자이기도 했던 근대의 철학자들, 곧 데카르트, 칸트, 뉴턴도 저마다 신에 대해 말했고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물론 신에 대한 철학자들의 물음과 말(言)이 언제나 신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근대 자연과학이 탄생하기 전부터 있어 왔던 무신론은, 이제 자연과학을 새로운 무기 삼아 많은 이들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과학적’이라는 말이 주는 힘 뒤에 숨어, 그들은 적극적으로 신앙과 종교를 공격하고 부인합니다.
하지만 존재의 근거, 궁극적 존재인 신에 대한 물음을 놓아두고 떠난 자연과학을 향한 그들의 철 지난 구애는, 어디까지나 과학 탐구의 방법으로서만 ‘무신론’을 전제하는 자연과학의 성격을 잘못 이해한 데서 옵니다. 혹은 철학의 ‘반쪽’을 가지고 떠난 과학에 대한 애절한, 그러나 잘못된 짝사랑의 발로일 수도 있겠습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이미 비판하고 반박한, 하지만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망령처럼 떠돌며 많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이 과학주의적 무신론에 대해 다음에 좀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과학칼럼] 과학, 철학 그리고 신앙의 말[言]
얼마 전 책을 읽다가 재밌는 글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종교는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철학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과학은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는 것입니다.
(조정래, 『황홀한 글감옥』, 36쪽)
저자의 의도를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제가 받아들인 뜻은 이러합니다. 과학은 엄격하고 명확한 범위와 방법론 안에서 자신이 풀어낼 수 있는 것만 말하며, 철학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는 것들을 굳이 끄집어내어 어렵게 말하는 것이고, 종교는 인간의 언어를 뛰어넘는 일종의 신비의 영역으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나름대로 종교, 철학, 과학의 특징을 단순화해서 절묘하게 표현한 이 말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종교와 철학, 과학에 대해 갖고 있는 피상적 ‘이해’와 ‘오해’를 드러내는 듯합니다. 확실히 과학, 특히 자연과학은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철저히 그 안에서만 움직이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한 엄격함과 명확함, 단순함은 한편으로 오늘날 자연과학의 눈부신 성공을 견인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과학의 시야를 대단히 좁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때로 어떤 이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그 강력하지만 제한된 도구를 이용하여 과학이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까지 말하려 합니다.
철학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당연하게,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들을 애써 끄집어내어 질문하고 고민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철학이 현실과 떨어진 고담준론으로 보이기도 하고 무의미한 말장난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이나 경험, ‘상식’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의 모든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좀 더 깊은 눈으로 바라보게 하며, 그리하여 일상 저 너머에 있는 그 무엇에로 우리를 인도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철학의 말(言)은 필요 없는 말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데 반드시 필요한 말(言)입니다.
종교는 초월적인 것, 저 너머의 세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인간의 말을 무한히 뛰어넘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말(言)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이 되신 말씀을 믿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감히 말로 담을 수 없는 분으로 우리의 언어를 무한히 초월해 계시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분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 오셨습니다. 심지어는 그분의 말씀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어, 하느님께서 누구이신지 남김 없이 들려주시고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이분, 곧 사람이 되신 말씀 덕분에 우리는 감히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일 년 동안 매달 한 번씩 이어질 열두 번의 연재를 통해 저는 신앙과 과학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진리를 향한 열망에서, 혹은 진리 그 자체에서 탄생하여 자라난 이 둘이 어떤 점에서 비슷하며 또 어떤 면에서 다른지 말해 보고자 합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철학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이야말로 온전하게,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유일하게 신앙과 과학을 이어주는 다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쉽지 않은, 그러나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말(言)의 여정을 조심스럽게 시작합니다.
[과학칼럼]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현재까지 물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우주가 탄생하고 바로 그 우주에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중력 상수 등 물리학의 30여 가지 기본 물리 상수들의 값이 ‘대단히 좁고 놀라울 정도로 한정된’ 범위 내에 존재해야만 합니다. 만일 이러한 기본 상수들이 아주 약간이라도 현재의 값과 달랐다면, 우주가 빅뱅 이후 현재와 같이 팽창하거나, 우주 안에서 원자 및 별들이 만들어지거나, 은하계 구조가 형성되거나,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의 생명체가 우주 안에서 생겨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라 많은 물리학자들은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물리학자들은 빅뱅을 통해 탄생하고 팽창하고 있는 우리의 우주가 “미세 조율되어 있다.”(fine-tuned)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30여 가지의 기본 물리 상수들이 마치 (누군가, 무언가에 의해) “미세하게/정밀하게 조율된” 것처럼 보인다는 뜻을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영국의 대표적인 천문학자인 마틴 리스(Martin Rees, 1942~ )는 우주의 미세 조율을 (단위가 없는) 단 6가지 물리 상수들로 설명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 설명은 미세 조율에 관한 대표적인 물리학적 설명으로 현재까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우주의 “미세 조율” 현상에 관해 과학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우연히 운 좋게 우리의 우주가 이러한 조건을 만족했다고 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주의 이러한 현상에 관한 궁극적인 원인·이유를 추구해온 여러 과학자들은 (이들의 대부분이 종교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공통된 주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구에 인간을 비롯한 복잡하고 다양한 생명체가 생존하기에 최적의 환경이 갖춰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의 생명체는 물리학적으로 현재와 같은 기본 상수들과 법칙들이 적용되지 않았다면 결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순하게 대폭발을 통해 만들어진 우주가 우연히 현재와 같이 생명체 생존에 걸맞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고 보기에는 30여 가지의 물리 상수들을 포함한 모든 조건이 ‘너무나 완벽해 보인다!’
생명체, 특히 인류가 우주에 생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미세 조율된 필연적 생명체 생존 조건’을 갖추어야만 한다는 주장을 과학자들은 “인류 원리”(anthropic principle)라고 부릅니다. 인류 원리는 학자들에 따라 여러 다른 버전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적어도 현재까지는 누구도 과학적으로 반박할 수 없는 ‘원리’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특히 존 배로(John D. Barrow, 1952~)와 프랭크 티플러(Frank J. Tipler, 1947~)는 ‘천문학, 양자역학, 화학, 지구과학 등의 여러 과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우리 은하계 내에 생존하는 유일한(!) 지적 생명체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함으로써 인류 원리에 관한 논의가 학문적으로 널리 활성화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지구상에 살아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유행가 가사가 있나 봅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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