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충으로 본 세상욕망 (계 9:7-12)
7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8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으며 9 또 철 호심경 같은 호심경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10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11.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 12.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
요한이 시간에는 “황충으로 본 세상욕망”이라는 제목입니다.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일까요? 약1:15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한 것처럼 모든 죄의 시작이요, 시험의 원인이요, 세상의 모든 흉악한 일의 원인이며, 우리를 지옥에까지 끌고 가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끝없는 무저갱 같은 욕심의 문을 다 열어젖힌다면 그 죄인을 감당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화가가 '세상욕망'을 주제로 추상화를 그린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본문이 바로 세상욕망에 대한 추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황충인데 이 황충은 보통 황충이 아닙니다. 말 같기도 하고, 사람 같기도 하고, 왕 같기도 하고, 사자나 전갈 같기도 한 온갖 이상한 괴물연합체와 같은 모습입니다. 이처럼 세상욕망은 인간의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을 뿐 아니라 고통스럽게 하는 괴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세상욕망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1. 건장하고 일사불란합니다.
7절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고” 황충의 모양은 잘 훈련된 기병대나 전차부대를 연상시킵니다. 이처럼 세상욕망처럼 강력하고 일사불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욕망의 힘은 어떤 훈련받은 군대보다 투철하고 진심이고 진지하고 피로감조차도 없습니다. 세상의 법이 아무리 강해도 마음의 욕심까지 간섭할 수 있나요? 그래서 무수한 사람들이 욕망의 노예가 되어 달려가고 있습니다.
2. 마음에서 왕 노릇합니다.
“그 머리에 금 같은 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두 번째 황충의 모양은 머리에 금관을 쓴 것을 보니 왕을 연상시킵니다. 이처럼 욕망은 왕처럼 좌지우지 인격의 주도권을 쥐고 흔듭니다. 먹고 싶다 하면 먹어야 하고, 놀고 싶다 하면 놀아야 하고, 갖고 싶다 하면 가져야 하고, 싸우고 싶다 하면 싸워야 하고, 그런데 욕망은 왕의 수준을 넘어 신의 위치까지도 넘봅니다. 그래서 빌3:19에 “그들의 신은 배요” 그랬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육에 속한 사람이나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3. 가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7절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사람도 아니면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욕망의 가면성을 뜻합니다. 가면성이란 안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겉으로는 말쑥하고 교양 있는 신사 숙녀들이지만 마음에는 온갖 욕망들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종교인인 물론 믿음 좋다는 신앙인이라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욕망에 관한한 아버지라도 어머니라도 자녀라도 믿지 마세요. 사람의 외모만 보고 대하면 안 됩니다.
4. 절대 헌신을 강요합니다.
8절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여자의 머리털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 포인트입니다(아7:5). 그리고 머리털은 몸과 마음과 힘과 정성까지도 드리는 헌신의 상징입니다(눅7:39). 그만큼 사람들이 세상욕망에 매이고 헌신적입니다. 욕심에는 다들 진심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자존심과 물질과 가족과 신앙까지도 버리기도 합니다. 가룟유다나 데마(딤후4:10)나 에서와 같은 사람들입니다(히12:16-17). 계시록에서 이걸 다루는 것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는 걸 알려 주는 것입니다.
5. 무서운 탐욕성이 있습니다.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으며” 사자는 무는 치악력이 얼마나 강하든지 굶주렸을 때는 뼈까지도 부숩니다(단6:24, 욥38:9). 새는 이빨은 없지만 욕심이 얼마나 강하든지 어떤 새는 자기 덩치만한 동생을 꿀꺽 삼켜 버립니다. 탐욕의 이빨만큼 강한 것은 없습니다. 이처럼 못 먹을 것이나 안 먹어야 할 것들을 꿀꺽 삼킵니다. 천사의 타락이나 아담의 타락도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6. 목적을 위해서는 양심조차 없습니다.
9절 “또 철 호심경 같은 호심경이 있고” 호심경은 가슴을 보호하는 흉갑인데 철 호심경이라 했으니 양심에 철판 깐 사람입니다(단7:7). 이스라엘이 가나안인을 쫓아내지 못한 것은 철병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목적을 위해서라면 도덕도 법도 체면도 양심도 없습니다. 권력욕 같은 것은 부모도 자녀도 형제도 없습니다. 권력에 장애가 된다면 수천 수만 명이라도 죽입니다. 이렇게 탐심이 무서운 것입니다.
7. 온 세상이 거기에 미쳐 있습니다.
9절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누에가 부드러운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도 비오는 소리가 나는데 황충 떼가 날아가는 소리라면 어떤 소리가 나겠습니까? 날아가는 소리는 전쟁터로 달려가는 병거와 마병대와 같습니다. 이처럼 온 세상이 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8. 그 길은 사는 길이 아닙니다.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죽는 길인 줄도 모르고 달려갑니다(약1:15, 잠7:21-23). 유1:11에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했듯 온 세상이 목적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미친 듯이 달려갑니다. 이 행렬은 아담 이래 한 번도 멈춰본 적이 없고 온 세상이 가담된 거대한 것입니다.
9. 세상욕망의 결과는 고통스럽습니다.
10절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전갈에게는 가위 달린 우람한 팔이 있고 뒤의 치켜든 꼬리는 무서운 독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힘 있는 앞 팔로 붙잡고 뒤꼬리로 쏩니다. 이처럼 세상욕망에 붙들리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세상욕망을 이길 수 있을까요?
1. 하나님께서 가만 두지 않으십니다.
10절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다섯 달 동안이라는 시한에 복음이 있습니다. 다섯 달 후에는 고통이 끝납니다. 다섯 달이란 시간적 개념이라기보다 5가 환난수나 고통수(5절)요, 달은 세속의 상징으로 악이 지배하는 기간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세상욕망이 극성을 부려도 고난의 연단 앞에서 그칠 날이 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이길 장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119:71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징계만 주시나요? 고난 중에 부르짖을 때 성령을 주십니다(갈5:24). 마12:18에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한 후에 20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이처럼 주님의 의로운 심판은 먼저 성도를 괴롭히는 악을 처리하시는 것입니다.
2. 배후의 사탄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11절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잠30:27에 메뚜기는 임금이 없다 했는데 여기 황충은 무슨 일인지 임금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욕망이 세상임금인 사탄에게서 왔다는 것입니다(요일2:16, 벧5:8-9).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어준 것이 사탄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의 문제려니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사탄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탄을 능히 이길 만큼 충만한 삶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고질적인 시험이라고 낙심하지 마세요. 많은 이들이 사탄을 이기려다가 능력을 받고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3. 세상욕망은 예수 안에서 그칠 수 있습니다.
11절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 이름은 그 본질을 나타내는 것인데 특이한 것은 사탄의 이름을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알려줍니다. “히브리어로는 아바돈”으로 ‘파괴, 멸망’이라는 뜻이요, “헬라어로는 아볼루온”인데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는데 사탄이 뭐가 대단하다고 더구나 같은 의미인데 이렇게 신구약적으로 가르쳐 주실까요?
신구약적인 두 언어로 이름을 알려준 것은 사탄은 신구약을 막론하고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파괴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탄을 이기셨지만 지금도 사탄의 활동이 계속됩니다. 하나님께서 악도 필요해서 나두신 것입니다. 난감한 생각이 듭니까? 그러나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안에서는 꼼짝 못한다는 힌트를 줍니다. 그러므로 정신 차려 신앙생활하셔서 승리하신 예수 떠나지 말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4. 자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12절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 이 말씀대로 황충재앙 말고도 2개의 화가 남았습니다. 아직도 남았다는 것은 아직도 처리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황충재앙부터 잘 하십시다. 우리가 황충재앙에서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은 세상을 사랑함이 고통인 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렘2:19에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했고, 시16:4에도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욕망이 바로 탐욕의 신 바알입니다. 그러므로 섰다 자만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죄와 상관 없을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4:12-13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한 것처럼 성경이 인간의 욕망을 해부하는 것을 보면 놀랍습니다. 하나님을 더 열심히 경외하십시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십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이 모든 것을 다 이기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기고 또 이기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