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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토쿠지(大德寺)는 임제종 다이토쿠지파(臨済宗大徳寺派)의 대본산이다. 산호는 류호우잔(龍寶山)이고, 본존은 석가여래이며, 개산조 슈호묘쵸(宗峰妙超, 大燈国師, 1282-1338)로, 1325년에 창건된, 교토에서도 굴지의 선종 사찰로, 경내에는 불전과 법당을 비롯한 중심 가람 외에도 20여 개의 탑두가 줄지어 있으며, 근세 사찰의 분위기를 잘 보존하고 있다. 다이토쿠지(大德寺)는 많은 명승을 배출하였고, 차(茶) 문화와도 깊은 연관이 있어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경내에는 건축물, 정원, 장벽화, 다구, 중국 전래의 서화 등 많은 문화재들이 남아 있다.
다이토쿠지(大德寺) 의 개조인 선승 슈호묘쵸 (宗峰妙超)는 1282년 하리마노쿠니(播磨国, 현재의 효고현)에서 아카마츠 가문(赤松氏) 가신인 우라카미 쿄쿠(浦上一国)와 아카마츠 노리무라(赤松則村, 円心, 1277-1350)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나, 11세 때 지역의 대사찰인 엔교지(圓教寺)로 입산하여 천태종을 배웠으나, 후에 선종에 눈을 뜨고, 가마쿠라(鎌倉)의 고호 켄니(高峰顕日, 1241-1316)과 교토의 난포죠묘(南浦紹明, 1235-1309)에게 참선하였다. 난포죠묘(南浦紹明) 가 가마쿠라(鎌倉) 건장사(建長寺)로 옮기자 슈호묘쵸 (宗峰妙超) 도 가마쿠라(鎌倉) 로 갔고, 1307년에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교토 히가시야마(東山)에서 수련을 계속하던 슈호묘쵸 (宗峰妙超) 는, 1315년 또는 1319년에 숙부인 아카마츠 노리무라(赤松則村)의 귀의를 받아, 락북(洛北) 무라사키노(紫野)에 다이토쿠안( 大徳庵 )을 세웠는데, 훗 다이토쿠지(大德寺) 의 기원이 되었다. 하나조노 상왕(花園上皇, 1297-1348)은 슈호묘쵸 (宗峰妙超) 에게 귀의하고 1325년에는 다이토쿠지(大德寺) 를 기원처로 하는 인선(院宣)을 내렸다. 사찰로서의 형태가 정해진 것은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고다이고 일왕(後醍醐天皇, 1288-1339)은 다이토쿠지(大德寺) 를 보호하고, 1334년에는 다이토쿠지(大德寺) 를 교토 5산의 상위로 위치시키는 훈지(綸旨)를 내렸다. 또한, 하나조노 상왕(花園上皇, 1297-1348) 과 고곤 일왕(光厳天皇, 1313-1364) 등 여러 일왕과 나카미카도 츠네츠구(中御門経継, 1258-?), 모리요시 친왕(守良親王, ?-?),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 1301-1338) 등 유력 귀족으로부터 기부받아, 1333년경에는 하리마(播磨), 세츠(摂津), 키이(紀伊) 등 교토 인근의 7,600석의 사유지를 점했다.
그러나, 건무(建武)의 신정(新政)이 무너지고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가 세워지면서 고다이고 일왕(後醍醐天皇)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다이토쿠지(大德寺) 는 아시카가 쇼군가(足利将軍家)로부터 무시되었고, 교토 5산에서 제외되었다. 1386년에는 그마저도 10석의 최하위인 제9위까지 추락했다. 이에 제26대 요소우소이(養叟宗頤, 1376-1458)는 1432년 아시카가 정권의 보호 하에 점차 세속화되었던 5산 10석에서 이탈해, 좌선 수행에 전념하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5산 10석의 사찰을 소우린(叢林)이라고 부르며, 같은 임제종 사찰이라도 다이토쿠지(大德寺) 나 묘신지(妙心寺)처럼 민간적 위치에 있는 사찰을 린카(林下)라고 불렀다.
이후 다이토쿠지(大德寺)는 귀족, 대명, 상인, 문화인 등 폭넓은 계층의 보호와 지지를 받아 번창했으며, 무로마치 시대 이후에는 잇슈소쥰(一休宗純, 1394-1481)을 비롯한 명승들을 배출했다. 와비차(侘茶)를 창시한 무라타 쥬코(村田珠光, 1423-1502) 등 히가시야마(東山) 문화를 담당한 사람들이 잇슈(一休)에게 참선하면서 다이토쿠지(大德寺)는 다도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한 국보인 료코인 밋탄(龍光院密庵) 등 문화재 지정 다실도 많이 남아 있다. 이로 인해 교토의 아이들 사이에서는 묘신지(妙心寺)의 소로반즈라(算盤面), 도후쿠지(東福寺)의 가란즈라(伽藍面), 겐닌지(建仁寺)의 가쿠몬즈라(学問面), 난젠지(南禅寺)의 부케즈라(武家面)와 함께 다이토쿠지(大徳寺)의 챠즈라(茶面)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1453년 화재와 오닌(応仁)의 난으로 처음의 가람을 잃었으나, 잇슈소쥰(一休宗純)이 사카이(堺)의 거상인 오와 소린(尾和宗臨, ?-1501) 등의 후원으로 복구했으며, 각지 슈고다이묘(守護大名)에 의해 여러 암자가 지어지기도 했다. 1582년 6월 2일의 혼노지(本能寺)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가 자살한 후 같은 해 10월 15일,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1537-1598)가 노부나가의 장례식을 다이토쿠지(大德寺)에서 성대히 치렀다. 다음 해에는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원찰로 소우켄인(総見院)을 창건했다.
다이토쿠지(大德寺)는 이후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 및 여러 다이묘(大名)들로부터 깊은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졌으며, 1589년에는 센노리큐(千利休,1522-1591)의 주도하에 산문(山門)과 킨모카쿠(金毛閣)이 완공되었는데, 센노리큐는 문 상부에 누각을 덧붙여 누문(樓門) 형태로 조성하고, 이를 금모각이라 명명하여 기증하였다. 이후 리큐는, 당시 주지였던 슌오쿠소엔(春屋宗园, 1529-1611)에게 산문의 공양문을 작성하도록 하였는데, 이로 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샀다고 전해진다. 급기야 센노리큐는 자결을 명받기까지 했다.
에도 시대 초기, 다이토쿠지(大德寺)는 에도 막부의 통제를 받게 되어, 특히 전 주지였던 타쿠안소호(沢庵宗彭, 1573-1645)는 자의 사건(紫衣事件)으로 인해 유배형에 처해지는 탄압을 받았으나, 제3대 쇼군(将軍) 도쿠가와 이에미쓰(徳川家光, 1604-1651)가 타쿠안소호(沢庵宗彭)에게 귀의하면서 막부와의 관계는 점차 회복되었다. 근세에 이르러 다이토쿠지(大德寺)는 "이십사 탑두(塔頭), 육십 요사(寮舎)·자암(子庵)" 혹은 "이십사 탑두, 준탑두(准塔頭) 오십구 우(宇)(또는 육십오 우)"라고 불릴 정도로 번성하였으며, 말사(末寺)는 25개국에 걸쳐 280여 개에 달했고, 탑두(塔頭) 또한 130여 개에 이르렀다. 또한, 대덕사의 경제적 기반은 2,011석(石) 이상의 슈인치(朱印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상지령(上知令)에 따라 많은 토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사찰 유지에 어려움을 겪게 된 대덕사는 1878년에 암자 13개 사찰을 통합(사실상 폐지)하고, 4개 사찰을 축소하며, 20개 사찰을 영속적인 암자로 지정하는 등의 축소 조정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개편에도 불구하고, 대덕사는 여전히 존속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경내에는 쵸쿠시몬( 勅使門), 산몬(山門), 부츠덴(仏殿), 핫토우(法堂)가 남북으로 정렬되어 있고, 이를 중심으로 북, 남, 서에 거의 20개 암자가 운집하여 있다.
부츠덴(佛殿)은 사찰의 본당으로, 1665년 교토(京都)의 부유한 상인 나바 죠유(那波常有, 1597-1664)의 기부로 재건되었는데, 본존은 석가여래좌상이다. 본존 석가여래좌상은 간분 연간(寛文年間, 1661-1673)에 재건된 호코지(方広寺) 대불(京の大仏)를 1/10 크기로 본따 조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호코지를 관리하던 묘호인(妙法院) 측의 사료(史料)인 낙동대불전수복병석가대상조영기(洛東大仏殿修覆並釈迦大像造営記)와 다이토쿠지(大徳寺) 측의 사료인 용보탑두위차(竜宝塔頭位次)에 따르면, 본존 석가여래좌상은 대불을 제작한 불사(佛師) 겐신(玄信)이 대불의 시제품(試作品)으로 만들었다가, 당시의 쇼군(将軍) 도쿠가와 이에쓰나(徳川家綱, 1641-1680)를 거쳐 다이토쿠지 (大徳寺) 에 기부되었다고 한다. (호코지 대불의 재건에 에도 막부(江戸幕府)가 관여하였다.) 쇼헤키가(障壁画)는 가이호 유쇼(海北友松, 1533-1615)의 작품이며, 텐죠가(天井画)는 카노 모토노부(狩野元信, 1476-1559)가 그린 비천도(飛天図)로, 1479년에 사카이(堺)의 부유한 상인 오와 소우린(尾和宗臨, ?-1501)이 기부하여 재건된 이전 불전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핫토우(法堂)는 1636년 오다와라번(小田原藩) 번주 이나바 마사카츠(稲葉正勝, 1597-1634)의 유지를 받들어 아들 마사노리(正則, 1623-1696)가 재건하였다. 천장에 그려진 운룡도(雲龍図)는 카노 탄유(狩野探幽, 1602-1674)가 35세 때 그린 것이다.
호죠(方丈)는 1635년에 재건된 건물로, 선종(禅宗) 양식 건축인 핫토우(法堂)나 부츠덴(佛殿)과 달리 일본식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정면 29.8m, 측면 17.0m의 규모로, 이리모즈쿠리(入母屋) 지붕에 산카와라부키(桟瓦葺) 양식의 지붕이 얹혀져 있고, 원래는 히와다부키(檜皮葺)였으나 바뀐 것이라고 한다. 호죠(方丈)는 개조(開祖)인 슈호 묘쵸(宗峰妙超, 1282-1338), 혹은 다이토고쿠시(大燈国師)의 300주기 기념으로 지어진 것이다. 원래는 주지(住持)의 거처를 의미했지만, 이후 주지의 거처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조정의 칙사(勅使)나 막부 관리의 접대 공간, 종교행사 등을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일반적인 호죠(方丈) 건축은 전후(前後) 2열, 좌우(左右) 3열로 총 6실(室)의 구조로 지어지지만, 다이토쿠지(大徳寺)의 방장은 특이하게도 전후 2열, 좌우 4열로 총 8실로 되어 있다. 건물의 정면에서 볼 때 오른쪽에서 두 번째 열의 전후 2실은 묘쵸(妙超)의 탑소(塔所, 무덤), 운몬안(雲門庵)이 있는데. 그 일부는 방장의 북측 툇마루를 넘어 북쪽으로 돌출된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는 생전 묘쵸(妙超)가 생전에 "내가 죽은 후 따로 사찰을 세워 무덤을 만들 필요없다."라고 유언을 남겨 이에 따로 조성하지 않고 호죠(方丈) 한 켠에 조성한 것이다. 쇼헤키가(障壁画) 84면(面)은 카노 탄유(狩野探幽 , 1602-1674)의 작품이다. 호죠난테이(方丈南庭)는 국가 지정 사적·특별 명승으로 가레산스이(枯山水) 양식으로, 텐유(天祐) 화상이 조성한 것이다.
겐칸(玄関)은 1636년 부유한 상인 고토 마스카츠(後藤益勝)의 기부로 지어졌고, 규모는 가로 6칸, 세로 1칸, 단층 구조이며, 가라하후(唐破風) 지붕 구조에 산카와라부키(桟瓦葺) 지붕을 얹었다. 중심 가람(伽藍)의 북쪽에 위치하며, 토담(土塀)으로 둘러싸인 구역 안에 자리하고 있다.
카라몬(唐門)은 국보로, 근세 초기에 지어진 요츠아시몬(四脚門)으로, 키리즈마즈쿠리(切妻造) 구조에 히와다부키(檜皮葺) 지붕을 얹었고, 앞뒤로 카라하후(唐破風) 장식이 달린 무카이카라몬(向唐門)이다. 이 문은 니시혼간지(西本願寺)와 토요쿠니 신사(豊国神社)의 카라몬과 함께 모모야마(桃山) 시대의 3대 카라몬으로 불린다.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자유롭고 웅장한 조각 장식, 용(龍), 잉어(鯉) 등의 조각이 많으며, 일부는 전통적인 건축 결구(組物) 대신 이러한 조각을 활용하고 있다. 부츠덴, 핫토우 등 중심 가람의 북쪽에 위치하며, 호죠의 남쪽 토담과 연결되어 있다. 과거 이 카라몬 자리에 아케치몬(明智門)이 있었는데, 혼노지(本能寺)의 변 직후,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 1528-1582)가 기부한 은(銀)으로 지어졌다가, 1886년 난젠지(南禅寺) 곤치인(金地院)에 매각되었고, 그 자리에 쥬라쿠다이(聚楽第)에서 대지인(大慈院)으로 통하는 길에 있던 가라몬을 다이토쿠지(大덕사) 방장 앞으로 이전하여 배치하였다. 한편, 곤치인(金地院)에 있던 문은 현재 토요쿠니 신사로 옮겨져 있다. 히구라시노몬(日暮門)으로도 불리며, 원래 있었던 쥬라쿠다이에 히구레도오리(日暮通)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것도 이 문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2003년 교토부 교육위원회가 해체·수리를 진행하던 중, 장식 금속에서 ‘덴쇼(天正, 1573-1592)’라는 각인이 발견되면서, 실제로 쥬라쿠다이의 유구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편 해체 수리 과정에서 발견된 "게이초(慶長) 8년(1603년)"이라 적힌 동판에서, "에치고(越後) 출신 무라카미 스오노카미 요리카츠(村上周防守頼勝, ?-1604)가 기부한 관문(官門)"이라고 적힌 명문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를 근거로 최근에는 원래 쥬라쿠다이 동대문 앞에 있었던 무라카미 요리카츠 저택에 있었던 오나리몬(御成門)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또한, 닛코 도쇼구(日光東照宮)의 요메이몬(陽明門)의 모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효죠토테이(方丈東庭)는 칠오삼의 정원(七五三の庭) 혹은 "십육나한의 정원(十六羅漢の庭)"으로 불리며, 고보리 엔슈(小堀遠州, 1579-1647)가 조성한 정원으로 전해진다.
산몬(三門)은 이층 구조로 되어 있으며, 킨모카쿠(金毛閣)로도 불린다. 이 문은 렌가시(連歌師)인 소쵸(宗長, 1448-1532)가 기부한 것으로 1529년 먼저 1층이 준공되었고, 1589년 센노리큐(千利休,1522-1591)에 의해 2층이 완성되면서 킨모카쿠로 불렸다. 센노리큐(千利休)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사찰에서는 2층에 셋타(雪駄)를 신은 센노리큐(千利休)의 목상을 안치하였는데, 문을 지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천리규의 발 아래를 지나게 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고 하며, 결국 이 사건으로 센노리큐(千利休)가 할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천리규가 할복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설이 존재한다. 텐쵸가(天井画)인 류즈(龍図)는 하세가와 하쿠(長谷川等伯, 1539-1610)의 작품이며, 킨모카쿠(金毛閣) 편액은 운에이소이(雲英宗偉, ?-1603)의 필체이다.
료겐인(龍源院)은 다이토쿠지(大徳寺)의 산내 암자 중의 하나이며, 본존(本尊)은 석가여래(釈迦如来)이다. 다이센인(大仙院)이 본암(本庵)으로 간주되는 대덕사 북파(北派)에 대응하여, 남파(南派)의 본암으로 간주된다. 1502년 (혹은 1504년), 도케이소보(東渓宗牧, 1455-1517)가 열었으며, 노토(能登)의 슈고(守護)였던 하타케야마 요시모토(畠山義元, ?-1515), 분고(豊後)의 슈고 오토모 요시나가(大友義長, 1478-1518), 스오(周防)의 슈고 오우치 요시오키(大内義興, 1477-1529) 등이 창건하였다. 다이토쿠지(大徳寺) 암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암자이다. 명칭의 유래는 다이토쿠지(大徳寺)의 산호(山号)인 류호우잔(龍宝山)의 "용(龍)" 자와, 중국 임제종 송원파(松源派)의 조(祖)인 송원숭악(松源崇嶽, ?-1209)의 선(禅)을 올바르게 계승하여 임제종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송원일맥(松源一脈)이라는 뜻에서 "원(源)" 자를 따왔다고 한다. 메이지(明治) 시대 초기 오사카(大阪) 스미요시타이샤(住吉大社) 내의 지온지(慈恩寺)와, 기후현(岐阜県) 다카야마성(高山城) 성주였던 가나모리 나가치카(金森長近, 1524-1608)가 다이토쿠지(大徳寺) 내에 세운 킨류인(金竜院)을 흡수하였다.
경내의 호죠(方丈)는 본당에 해당하는데, 1517년경에 건립되었다. 이치쥬이리모야즈쿠리(一重入母屋造) 히와다부키(檜皮葺)의 건물로, 일본 방장 건축 중에서도 초기 사례이다. 쇼코쿠지(相国寺)의 화승(画僧) 셋슈(雪舟, 1420-1506)이 스승으로 모셨으며, 카노파(狩野派)와 하세가와 토하쿠(長谷川等伯, 1539-1610) 등으로부터 일본 한화(漢画, 唐絵)의 개척자로 인정받았던 죠세츠(如拙, ?-?) 문하인 슈분(周文, ?-?)의 제자인 토슌(等春, ?-?)의 후스마에(襖絵)가 있다.
호죠(方丈) 남쪽의 정원, 잇시단(一枝坦)은 1980년, 당시의 주지 카츠도우(喝堂)가 조성한 고산수 정원이다. 도케이소보(東渓宗牧, 1455-1517)가 그의 스승이었던 지츠덴 소신(実伝宗真, 1434-1507)으로부터 받은 "영산일지지헌(霊山一枝之軒)"이라는 실호(室号)에서 이름을 따았으며, 원형으로 조성된 커다란 이끼 섬과 돌이 서 있는 거북섬이 인상적인 독창적인 정원이다. 한편, 호죠(方丈) 북쪽의 정원, 류긴테이(龍吟庭)는 삼존석조(三尊石組)로 이루어진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의 고산수 정원으로, 아시카가(足利) 쇼군(将軍)에게서 도보슈(同朋衆)로 활동했던 소아미(相阿弥, ?-1525)가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며, 수미산(須弥山)을 형상화한 카레산스이 정원(枯山水庭園)으로, 가운데에 키가 큰 돌을 주석(主石) 삼아 좌우에 첨석(添石)을 배치한 삼존석배(三尊石組) 양식이다. 푸르게 정원은 덮은 이끼는 넓게 끝없이 이어지는 바다를 의미하고 석조는 땅을 나타내며 가운데 돌출된 바위가 수미산을 의미한다. 수미산 앞에 놓인 둥근 판석은 요하이세키(遥拝石)을 의미하는데,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 정진하기 위한 표현으로 해석된다. 토테키코(東滴壺)는 호죠(方丈)와 쿠리(庫裏) 사이의 협소한 공간에 조성된 호정(壺庭)으로, 1960년, 당대의 명 조경사 시게모리 미레이(重森三玲, 1896-1975)의 제자 나베시마 가쿠쇼(鍋島岳生, 1913-1969)가 조성한 현대 호정 (壺庭)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흰 모래 위에 다섯 개의 돌이 3·2의 조합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일본에서 가장 작은 정원으로도 알려져 있다. 코다테이(滹沱底)는 아운(阿吽)의 정원이라고도 불리는데, 종조(宗祖) 임제 선사(臨済禅師)가 머물렀던 중국 진주성(鎮州城) 남쪽을 흐르는 호타하(滹沱河)에서 이름을 따왔다. 흰 모래 위에 "아(阿)"와 "운(吽)"이라 불리는 두 개의 돌이 배치되어 있으며, 쥬라쿠다이(聚楽第)의 유구로 전해진다.
한편 경내에는 1583년명 다네가시마쥬(種子島銃)가 전해오는데, 당시 중국에서 표류해온 포르투갈인이 전해준 화승총으로부터 처음으로 자체제작한 조총으로 전해진다.
다이센인(大仙院)은 1509년, 다이토쿠지(大徳寺) 제76세 주지였던 코가쿠소코(古嶽宗亘, ?-1548)에 의해 창건되었다. 현재 22개의 다이토쿠지(大徳寺) 산내 암자 중 북파(北派) 본안(本庵)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명찰(名刹)이다. 코가쿠소코(古嶽宗亘, ?-1548)는 고카시와바라 일왕(後柏原天皇, 1464-1526), 이치조 후사후유(一条房冬,1498-1541), 산조 긴에(三条公兄,1494-1578) 등의 구게(公家)와 롯카쿠 사다요리(六角貞頼, 1495-1552) 등의 무가(武家)로부터 귀의하였던 고승이다. 이후로 다이린소토(大林宗套, 1480-1568), 쇼레이소킨(笑嶺宗訴, 1505-1584), 슌오쿠소엔(春屋宗園, 1529-1611), 고케이소친(古渓宗陳, 1532-1597) 등 여러 저명한 승려가 주석했고, 다도의 대성자로 알려진 센노리큐(千利休, 1522-1591)가 생전에 자주 참배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다이센인(大仙院)에는 무로마치 시대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정원, 방장 건축, 후스마에(襖絵) 등이 남아 있으며, 귀중한 문화재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후스마에(襖絵)는 소아미(相阿弥, ?-1525), 가노 모토노부(狩野元信, 1476-1559), 가노 유키노부(狩野之信, ?-?) 등 무로마치 시대의 거장들이 제작한 작품으로, 당대의 분위기를 오늘날까지도 훌륭하게 전승하고 있다.
호죠(ㅊ)는 1513년, 코가쿠소코(古嶽宗亘, ?-1548)가 자신의 은거처로 세운 건물로, 일본의 방장(方丈) 건축 중에서는 도후쿠지(東福寺) 료긴안(龍吟庵) 방장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유구(遺構)이다. ‘도코노마(床の間)’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이며, 대선원의 도코노마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례로 간주된다. 또한, 현관(玄関) 역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현관으로 평가받아 국보로 지정되었다.
호죠(方丈)의 벽을 장식했던 4점의 중요문화재 쇼헤키가(障壁画)는 레노마(礼の間)의 사계경작도(四季耕作図) 8폭이 전(伝) 가노 유키노부(狩野之信) 작품, 단나노마(檀那の間)의 화조도(花鳥図) 8폭이 가노 모토노부(狩野元信) 작품, 실내의 소상팔경도(瀟湘八景図) 6폭이 소아미(相阿弥) 작품, 그리고 16폭은 소아미(相阿弥) 작품으로 전하나 확실치 않다. 한편, 옛 호죠(旧方丈)의 에하츠노마(衣鉢の間)과 쇼인노마(書院の間)에 있었던 선종조사도(禅宗祖師図) 등 24폭은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소장되어 있다.
쇼인(書院) 슈운켄(拾雲軒)은 다쿠안 소호(沢庵宗彭, 1573-1645)이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 1584-1645) 간에 검도(剣道)의 극의(極意)를 전수한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고, 실제로 무로마치 시대를 대표하는 서원 건축이다.
쇼인정원(書院庭園)은 국가 사적·특별명승으로 무로마치 시대를 대표하는 가레산스이(枯山水) 정원이다. 호죠(方丈) 북동쪽 쇼인노마(書院の間) 북측에서 동측에 걸쳐 조성되었다. 학도(鶴島)와 귀도(亀島) 사이의 봉래산(蓬莱山)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대하(大河)가 되어 대해(大海)로 흘러드는 모습을 표현하였으며, 폭포, 다리, 배 등을 모두 석조로 형상화하였다. 좁은 공간에 광대한 경관을 담아낸 것으로, 개조(開祖) 코가쿠소코(古嶽宗亘, ?-1548)가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에는 정원이 이끼로 덮여 있었으나, 1953년에 흰 모래가 깔렸다.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한 에도 시대 후기 다이센인(大仙院) 석정(石庭)의 오코시에즈(起こし絵図)와 비교하면, 현재 정원은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도랑(渡廊)은 앞서 언급한 오코시에즈(起こし絵図)를 바탕으로 1961년에 복원된 것이다.
오바이인(黃梅院)은 다이토쿠지(大徳寺)의 산내암자로, 본존은 석가여래(釈迦如来)이다. 1562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가 부친 노부히데(信秀, 1510-1551)의 추선공양(追善供養)을 위해 슌린 소슈쿠(春林宗俶, ?-1564)를 초청하여 창건한 것이 시초이다. 처음엔 오바이안(黃梅庵)이라 불렸으며, 이름은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황매현(黃梅県) 파두산(破頭山)의 동선사(東禅寺)에서 유래한다.
1582년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으로 인해 노부나가가 자결하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1537-1598)에 의해 다이토쿠지(大徳寺)에서 성대한 장례가 거행되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탑소(塔所)로 황매암을 개축하였으나, 주군의 탑소로는 협소하다는 이유로 다이토쿠지 산내에 새롭게 소켄인(総見院)을 창건하였다. 이후, 오바이인(黃梅院)에는 슌린의 법사(法嗣)인 교쿠추 소슈(玉仲宗琇, 1522-1605)가 이어받았으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1533-1597)가 귀의하면서 사찰 건물들이 정비되었다. 1588년 다카카게의 지원으로 본당이 건립되었고, 1589년 오바이인(黃梅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근세를 통해 오바이인(黃梅院)은 고바야카와 가문(小早川氏)의 종가인 모리 가문(毛利氏)의 보호를 받았으며, 교토에서 모리 가문의 보제사(菩提寺) 역할을 하였다. 사찰 내에는 모리 가문과 오다 가문의 묘소 외에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1533-1597),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 1556-1595) 등의 묘탑이 있다.
갸쿠덴(客殿)은 1588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1533-1597)의 지원으로 건립된 건물로, 선종(禅宗) 양식의 호죠(方丈) 건물이다. 내부의 후스마에(襖絵)는 모리 가문의 화가였던 운코쿠 토간(雲谷等顔, 1547-1618)의 작품으로, 실내에 죽림칠현도(竹林七賢図) 와 단나노마(檀那の間)의 서호도(西湖図) 등 44면이 남아 있다. 1977년 약 400년 만에 해체 보수가 이루어졌다. 갸쿠덴(客殿) 전면에는 간소한 고산수(枯山水) 정원인 하토테이(破頭庭)가 있으며, 이는 천정 연간(1573~1592년)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가라몬(唐門)은 1586년에 건립되었으며, 쇼인(書院)인 지큐켄(自休軒)은 1652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자휴(自休)" 편액(扁額)은 다이토쿠지(大徳寺)를 연 슈호 묘쵸(宗峰妙超, 1282-1338)의 필적이며, 이를 이름으로 삼았다. 챠시츠(茶室)로는 다케노 조오(武野紹鴎, 1502-1555)의 기호(好み)로 전해지는 사쿠무켄(昨夢軒)이 있으며, 4.5조(畳) 크기의 다실이다. 현재는 지큐켄(自休軒)에 포함되어 있으나 원래는 독립된 건물로 경내 동남쪽에 있었으며, 쇼인이 건립될 때 이전된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ㅊ보다 시대적으로 앞서는 조오(紹鴎)의 기호(好み)로 보기에는 시대가 맞지 않아, 에도 시대 후기 복원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서원 남쪽 정원인 지키츄우테이(直中庭)은 센노리큐(千利休, 1522-1591)가 62세 때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는 이끼로 덮인 지천회유식(池泉回遊式) 정원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청에 따라 표주박 모양의 연못이 전면에 배치되었으며,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1562-1611)가 조선 출병 시 가져온 조선 등롱이 설치되어 있다. 이외에도 1999년에 건립된 다실 잇시안(一枝庵), 본당 북쪽 후면에 위치한 고산수 정원인 사부츠테이(作仏庭), 본당과 쿠리(庫裏) 사이의 정원인 칸자테이(閑坐庭) 등이 있다. 쿠리(庫裏)는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1589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1533-1597)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선종 사원 쿠리(庫裏) 중 하나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