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4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6-20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17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8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19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맹꽁이 같은 놈
우리가 어려서 선생님들이나 어른들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면 “이 맹꽁이 같은 녀석아!”하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문득 어느 날인가 아무리 맹꽁이를 살펴보아도 나하고는 하나도 닮지 않았는데 왜 맹꽁이라고 야단을 치실까 생각하고 참 궁금하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참으로 재주가 많으신 분인데 특히 얘기를 아주 재미있게 해 주셨습니다. 아버지를 닮았다면 나도 그런 얘기를 아주 재미있게 할 것입니다. 어느 날 술에 취하시어 늦게 집에 돌아오셨는데 기분이 정말 좋으신지 맹꽁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맹꽁이가 왜 소리 내서 우는지 또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하필 ‘맹꽁이’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얘기해 주시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맹꽁이가 “맹꽁 맹꽁”하고 울었는데 지금은 맹꽁이를 관찰해보면 어떤 놈은 ‘맹, 맹’하고 울고, 어떤 놈은 ‘꽁, 꽁’하고 울지 어떤 맹꽁이도 ‘맹꽁 맹꽁’하고 우는 놈이 없다는 것이 이유랍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 221년경에 진의 영왕은 첫 황제가 되어 진시황(秦始皇)이 됩니다. 진시황이란 말은 진나라의 첫 황제이며 그 때부터 황제가 생겼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는 권력을 잡은 다음에 각 나라의 성곽을 재정비하느라고 무척 많은 사람들을 혹사시키고,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각 나라가 축조한 장성을 잇고 정비하여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만리장성의 실제 거리는 5,000km가 넘으니 만 리가 넘는 거리이죠. 전해오는 옛날 얘기에 의하면 그 장성을 쌓기 위해서 진시황이 채찍을 들고 무지하게 큰 바위를 보고 산위로 가라 하면 모든 바위들이 엉금엉금 기어서 산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진시황이 무서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서운 진시황이 하루는 낮잠을 주무시는데 주책도 없이 맹꽁이란 놈이 “맹꽁, 맹꽁”하고 기세 좋게 울어댄 것입니다. 그러자 진시황이 “시끄럽다, 낮잠을 잘 수가 없다.”하고 야단을 쳤더니 맹꽁이가 얼마나 무서웠던지 ‘맹’한 놈은 ‘꽁’을 잊어버리고, ‘꽁’한 놈은 ‘맹’을 잊어버려서 그 뒤로 맹꽁이는 ‘맹, 맹,’, ‘꽁, 꽁’하면서 울어댈 수밖에 없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지금도 맹꽁이들은 제 목소리를 내고 울지만 서로 화음을 일으켜 ‘맹꽁, 맹꽁’하고 우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혼자서는 한 가지 소리밖에 내지를 못 한답니다. 그래서 가르쳐 준 것도 금방 잊어먹고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을 ‘맹꽁이’라는 말이랍니다. 아버지는 그 얘기를 어린 우리들을 보시고 재미있게 해 주셔서 6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그 표정이나 말씀이 잊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보여달라고 예수님에게 졸랐던 필립보에게 틀림없이 예수님도 필립보를 보시고 “이 맹꽁이 같은 필립보야, 맹꽁이 같은 제자들아,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며,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모든 권한을 다 주셨다고 그렇게 많이 설명하였어도 매일 잊고 사는 제자들이어서 분명 맹꽁이라고 나무라셨을 것 같습니다. 사실은 우리는 더 말할 나위 없이 맹꽁이로 살고 있습니다. 세상의 쓸데없는 것에 마음이 가득하여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답니다. 우리는 정말 주님을 멀리 떠나보내고, 우리의 마음에는 세상의 온갖 헛된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삶을 살고 있어 주님은 언제나 뒷전입니다.
매년 대림절이 되면 교구장님은 사목지표를 발표하십니다. 그러나 그 짧은 사목지표의 말씀도 기억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주님의 말씀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주교님의 말씀을 다 기억하고 살 수 있느냐고 오히려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대할 때나 미사에 참례할 때 혹은 청원을 간절히 올릴 때만 주님이 내 안에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런 사람들을 ‘아모르 수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하느님이 하나임을 잊고 따로 따로 생각하면서 우리의 믿음도, 신앙생활도, 복음 선교도, 진리의 말씀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맹한 꽁이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인간에게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근본적인 삶의 태도가 있다고 합니다. 성인은 우리의 삶을 꿰뚫어 보시고 그렇게 지적하신듯 합니다. 성인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 적으며 정말 내 삶의 태도는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잠시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아모르 수이’(Amor Sui), 곧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하느님을 밀쳐냅니다’ 곧 이들은 하느님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을, 자신의 것을 앞세웁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 자신의 판단, 자신의 뜻, 자신의 가족, 자신의 지위가 더 소중하기 때문에 이들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회피하려 하고, 자기가 필요할 때만 하느님을 찾고, 언제나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을 청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아모르 데이’(Amor Dei), 곧 하느님 중심적인 삶, 타인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밀쳐냅니다.’ 곧 이들은 자기 자신보다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언제나 하느님을 앞세웁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 그리고 자신의 뜻이나 자신의 지위, 심지어는 혈연관계마저도 뛰어넘어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면서 하느님을 더욱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언제나 하느님을 찾고, 언제나 자신에게보다는 타인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청하고, 자기에게 주어지는 작고 큰 십자가들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