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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화 체육복을 읽는 아침 15. 그저. 잘. '살아' 있기를 240711
“수진아! 어디냐? 오늘 일요일 저녁인데 아직 기숙사에 안 들어왔다며?”
“네, 쌤. 가는 중에 어제 오늘 먹은 것 다 토해서 집으로 도로 왔어요. 내일 아침에 병원 갔다가 학교로 바로 갈게요.”
“그래? 방광염 때문에 그런가?”
“모르겠어요. 암튼 내일 봬요.”
“그래 알았어. 병원에 꼭 다녀와.”
강원도는 참 넓다.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막연하게 심심산골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인구가 30만 명을 넘나드는 도시도 세 개나 있고 산뿐만 아니라 호수도, 강도, 바다도, 심지어 평야도 있다. 지형 환경이 그러한데도 넓은 도로가 적어서 시군 사이를 이동할 때 강원도 안에서만도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는 강원도의 최남단이자 강원랜드가 있는 정선군 사북 고한 지역에서 강원도 최북단 철원군까지는 자동차로 약 네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그런 지역의 제약을 굳이 감수하고도 가정을 떠나려고 하기도 한다. 수진이가 그랬다.
“고정된 틀에 얽매이거나 매일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즐기는 성향임. 특히 창업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미래에 자신의 회사를 설립하고 CEO로서 유망하게 키워내겠다는 진로 목표가 매우 뚜렷함. 창업 관련 자율 동아리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아 각종 창업 관련 활동에 다양하게 참가했으며 많은 성과를 거둠으로써 실제 시장 진입 가능성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음. 희소한 재료를 구하기 위해 서울까지 직접 다녀오기도 하고, 시제품 제작을 위해 기숙사에서 매일 새벽까지 작업을 하는 등의 열의를 보였으며 이러한 솔선수범을 통해 동아리 구성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었음. 구성원들의 장단점을 파악하여 각자에게 적합한 역할을 배분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특히 주어진 자원과 시간이 제한적일 때 더욱 빛을 발하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지니고 있음. 학급에서 교우관계의 문제로 소외된 친구의 마음을 적극 대변하여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줌. 쾌활하지만 어른다운 성격으로 친구들의 고민을 진지하게 함께할 줄 알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교우관계가 원만하여 학급 내 남학생과 여학생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데 크게 기여했음. 사회적으로 합의된 권위에 대한 존경심이 있음. 어버이날에는 자신이 직접 제작한 효도상품권을 부모님께 드리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학급 커뮤니티에 게시함으로써 학급 구성원 모두가 부모님께 감사하는 하루를 보내는데 기여함. 결과와는 별개로 학업 성적을 향상시키기 위해 매우 많은 노력을 함. 그러나 개인의 발전만을 목표로 하지 않고, 학습 내용을 정리한 유인물을 친구들과 공유하고 자신보다 성적이 낮은 친구들이 포기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독려하는 리더의 자질을 보임.”
학교 생활기록부. 흔히 학생부 또는 생기부라고 불리는 그것의 제일 끝에는 행동 특성 및 종합의견이라는 작성란이 있다. 담임 교사가 1년 동안 아이를 관찰한 것을 토대로 내리는 총평과도 같은 것이다. 수진이의 2학년 말 행동 특성 및 종합의견란에다가 당시의 나는 위와 같이 적어두었다.
“쌤. 저 임신했어요.”
내가 만약 내 땀구멍의 개폐를 조절할 수 있어서 스트레스 때문에 쌓이는 몸의 노폐물을 분출할 수 있다면, 아마 그 말을 듣는 순간에 내 온몸의 땀구멍을 개방해서 그 몹쓸 것들을 몸 밖으로 내보내느라 아마도 젤리 같은 모습이 돼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엄마 아빠는 모르시고요. 언니랑 언니 남자 친구, 그리고 효은이만 알아요. 지금은.”
“어… 어어…”
“근데 저 수술하려고요.”
“어? 아. 그…”
“임신한 줄도 모르고 방광염약도 계속 먹고, 감기 걸렸을 때 항생제 다 먹었거든요. 인터넷에 찾아보니 그러면 기형아가 될 확률이 높대요.”
“어… 그건 저 의사…”
“선생님, 저 자격증도 없고 성적도 엉망이에요. 그리고 선생님은 저희 집 사정도 잘 아시잖아요. 제가 백번 양보해서 독한 맘 먹고 아기를 낳아도 결국 이 가난을 대물림할 게 확실해요.”
“어…그러니까 이거를……”
“저희 아빠 성격 장난 아니에요. 이거 아시면 분명히 칼부림이든 뭐든 무슨 사단이 나도 날 거예요. 제가 조용히 알아서 할 테니까 선생님을 그렇게 아세요.”
스쿼시 공을 홀로 두드려 맞는 벽이 된 것 같았다. 혼자서 내가 할 말을 다 안다는 듯 자기 대답을 순서대로 쏟아놓는 수진이 앞에서 나는 내 의지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일이야 어찌 되든 아이의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닌 걸로 보였으니 야간 자율학습에 들어가는 대신 일단 기숙사에서 쉬면서 몸을 좀 추스르도록 했다.
혹시나 생각이 변했을까 싶어 다시 이야기를 나누어보려고 했지만, 그것은 이미 내 설득의 영역이 아니었다. 언니를 통해 어머니도 그 사실을 알았고 벌써 남자 친구와 함께 병원에 예약까지 해 둔 상태라고 했다. 다음 날 수진이는 감기·몸살과 기존에 앓고 있던 질환으로 조퇴했고, 곧 병원에서는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으니 빨리 수술할 것을 권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통화하면서 언니가 함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청소년 임신과 중절이라는 상황 앞에서 나는 인간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선생으로서도 남자 어른으로서도 무척이나 흔들렸다. 결국 수술을 받고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도 친구들과 함께 출전했던 공모전 준비, 2회 고사 준비에도 발을 빼지 않고 꾸준히 무언가를 하는 수진이의 모습이 날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이 세상 같지 않던 주말이 지나고 수진이는 학교로 돌아왔다. 죄책감과 심한 감정 기복으로 힘들어하는 수진이에게 외부의 전문상담기관을 연계해 주기 위해 수소문했다. 지금은 거의 모든 학교에 Wee Class라고 해서 전문 상담 인력이 상주하며 아이들의 정서, 심리상담을 담당하지만, 당시의 학교에는 전문 상담교사도, 보건교사도 배치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몫 역시 학생부장에게로 돌아왔다. 다만 지역 교육청에 설치된 Wee센터에서 지속적인 상담을 통해 개입하고자 했던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수진이는 나에게 털어놓는 이야기와는 달리 교실에서는 전과 전혀 다름없는 모습으로 생활했다. 그러나 내 눈에는 수진이의 마음속 불안이 점점 더 커져가는 것처럼 보였고 결국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커터 칼로 제 손목을 그은 상처 자국을 내게 들이밀었다.
자해 시도와 자살 시도는 그 목적과 방법이 좀 다르다. 자살은 정말로 죽기 위해서 되돌릴 수 없는 방법을 선택한다. 뛰어내린다거나, 목을 맨다거나, 약을 왕창 먹는다거나 하는 방법들이다. 반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해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기 위한 목적이 크다고 한다.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무의미한 일상 속에서 그 순간을 파고드는 짜릿한 고통과 선명한 핏빛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해하는 사람들 사이에 묘한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하는 모양이었다. 페이스북이나 각종 익명 커뮤니티에는 자해를 하는 모습을 공유하거나 그것을 보고, 서로를 인정하고 위로하는 행태들이 늘어나기 시작할 때였다. 일반적인 학부모나 교사들은 자살과 자해를 죄나 잘못에 가깝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요즘은 인식들이 많이 바뀌었지만, 자살과 자해는 직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있는 그대로의 현상과 아이의 감정을 우선 인정하고 대화하면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수진이의 상처를 보았을 때 이런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이제는 확실하게 넘어섰다고 직감했다. 그래서 Wee센터를 통해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을 추천받고 약물치료를 병행하기로 했다. 다만, 보호자가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야 하지만 생업에 바쁜 수진이의 부모님이 일주일마다 한 번씩, 오는 데만 세 시간이 걸리는 이곳으로 오기는 힘든 일―이라고 내게 말했고, 매일 아이를 보는 것은 부모가 아닌 나였으므로―이었기에 수업이 비는 시간에 출장을 내고 아이를 병원으로 데리고 다니는 일 또한 자연스럽게 내 일이 되었다.
“이 선생님. 많이 힘드시죠?”
“어휴, 쉽지는 않네요. 사실 수진이 말고 다른 아이들도 있고 아시다시피 저희 학교에 상담 선생님이 안 계시잖아요. 학교생활이 빡세니까 저도 아이들도 멘탈 관리하는 게 참 힘들어요. 그나마 Wee센터에서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래도 일단 수진이랑 문장 완성 검사를 해 보니까 지금 가장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 담임 선생님, 친언니, 그리고 남자 친구라는 게 지속적으로 확인이 돼요. 그래서 이 사람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고요,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주는 일이랑 정서적인 지지가 제일 필요할 것 같아요.”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지 않으려 애썼다. 교장 선생님께 있는 대로 말씀을 드리니 치료비 지원, 수업 조정, 기숙사 사용 등 학교에서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지원을 해 주자는 답변을 주셨다. Wee센터를 통해 병원비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수진이와 가장 친한 아이부터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는 아이, 심지가 굳어서 마음에 의지가 되는 아이도 모두 얼기설기 엮어서 수진이를 혼자 두게 하지 말고 주말에도 페이스북 메시지, 문자 메시지, 카카오톡 메시지로 수시로 연락해 보라고 종용했다. 수진이의 친언니와도 아이의 상태를 공유하면서 무슨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했다. 타지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일용직 공공근로 일을 주로 하는 어머니 대신 친언니가 수진이의 실질적인 보호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나도 아이들도 전보다 관심을 더 많이 기울이고, 약물 치료도 병행하고 있었지만, 수진이의 상태가 극적으로 좋아지지는 않았다. 상담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던 기간도 2주에서 한 달로, 한 달에서 6개월로 점점 늘어만 갔다.
“교장 선생님. 어제 수진이가 집에서 언니랑 싸우고 지 손으로 유리를 깼답니다.”
“아이고 …… 수진이가 마음이 여전히 진정이 잘 안 되나 봅니다.”
“네. 그 깨진 유리로 그은 데를 또 그었다는데요.”
“아이도 참 마음 아프지만 담임 선생님이 고생이 너무 많습니다.”
“아닙니다. 잘 버텨주면 참 좋겠어요. 결국 지나가는 폭풍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수진이에게 바라는 말이었지만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부터 수진이는 학교도 오지 않고 내 연락도 받지 않기 시작했다. 눈으로 상처를 보았으니, 부모님도 언니도 출근하고 없는 혼자 있는 집에서 혹여나 욱해서 목이라도 맬까 겁이 났다. 기다림은 하루를 온전히 채우지 못했고 수업을 교체해서 수진이가 있는 집으로 차를 몰았다.
“수진아! 수진아 인마! 집에 있냐?”
인기척이 들리더니 핑크색 극세사 수면용 바지를 입은 수진이가 창백한 얼굴로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오셨어요.”
헛웃음이 났다. 두 시간 반을 쉬지 않고 운전해서 왔는데 반가움도 귀찮음도 아닌 당연히 올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한 표정.
“밥은 먹었냐? 혼자 있다며.”
“그냥요”
나는 아직 안 먹었는데, 손목에 빨간 줄이 두 개쯤 더 늘어난 것이 눈에 띄었다. 못 본 척 무심하게 지나쳤다. 아무렇지 않게 수진이가 출전하기로 했던 창업경시대회의 소식 같은 반 아이들의 자질구레한 이야기, 오는 길에 만났던 군인들의 모습과 같은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언니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진이의 손목을 건네주고 돌아왔다. 조수석에 던져놓은 스마트폰에 메시지 알림이 하나 떴다.
“죄송해요. 걱정시켜서.”
“그래. 그렇게 정신 붙잡고 있으면 됐지 뭐. 내일은 꼭 학교 나와야 해!”
2학년 2학기가 시작되면서 수진이는 낮은 성적과, 지금까지도 전공 관련 자격증을 거의 취득하지 못했다는 객관적 사실로부터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감정 기복은 여전했고 말없이 학교에 나오지 않는 날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아이들의 취업을 준비해 나가야 한다는 그럴듯한 명분 뒤에 숨었던 나도 어지간히 지쳤던지 함께 병원에 가는 날 외에는 수진이에게 개인적은 일을 묻는 일도 줄어갔다. 그러다가 수진이는 11월의 어느 날, 연기처럼 사라졌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내 연락은 물론 부모님의 연락도, 친언니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 같은 반 친구들이 소나기처럼 수시로 보내주는 페이스북 메시지에만 아주 가끔 대답할 뿐이었다. 어디에 있는 건지, 수중에 돈이나 입을 옷은 있는 건지,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들어오는 정보는 없었다. 아이들이 자신에게 온 답장을 가지고 내게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상의를 해 왔을 때 역시 내게는 수진이의 부모님에게 실종 신고를 권할 뿐 달리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학교 그냥 가기 싫고… 아 솔직히 한 게 없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막막하고. 집에서는 아아 기대하는 거 같고 모르겠어. 솔직히 학교 다니는 거 겁나고 다니기도 싫어.”
“가출 신고당했어. 나는 가출하려고 한 게 아닌데, 맘 먹고 나왔으면 옷 다 챙기고 나올 텐데. 그래서 들어가고 싶어도 못가. 아빠도 상황이 안 좋대.”
이제는 내 전화에 이골이 났을 법한 수진이 어머니는 수진이가 친구들에게 이렇게 보낸 메시지를 보시고도 찾고는 있는데 경찰도 못 찾고 있으니, 부모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나갈 때 나갔더라도 어디에서 뭘 하면서 살 건지 계획이라도 세워뒀길 바라는 데까지 이르렀다. 은행 대출이 그러하듯 걱정에도 한도가 있는지 그와 나를 잇고 있던 어떤 근이 결국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런 보장도 약속도 없으면서 그저 막연하게 고등학교 졸업을 해야 한다는 그 명분만 붙들고 있을 순 없었다. 오히려 학교에 머무는 것이 그 아이를 더 힘들고 아프게 한다면 학교 밖으로 보내주는 것이 그에게는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을 실행으로 옮겼다. 학교에서는 학생이 무단으로 일정 기간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 징계를 줄 수 있다. 교내 봉사, 사회봉사, 특별교육 이수, 출석정지 그리고 퇴학의 순서다. 경찰에 잡혀들어가거나 선생님의 죽빵을 열 대쯤 때리는 흉악한 짓이 아니면 전단계를 한 번에 뛰어넘어 퇴학시킬 순 없기 때문에 학생선도위원회를 열어 교내 봉사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밟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절차를 진행하는 학생부장이었다. 수진이가 만약 선도위원회의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 조치 결과를 이행하지 않은 것이 되므로 그것은 다시 상위 징계를 부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아마도 그렇게 될 것이었다.
선도위원회가 열린다는 통지서가 등기로 수진이네 집에 보내졌다. 아이와 얼굴도 못 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서류가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마는, 어머니는 첫 번째 교내 봉사를 이행하지 않아서 두 번째 선도위원회가 열린다는 통지서를 받을 즈음 나와 같은 생각을 하시게 된 것 같았다.
학교에 억지로 계속 적을 두게 하는 것이 무의미한지도 모르겠다고. 아무리 새엄마라고는 하지만 갓난아이일 때부터 자기 딸로 알고 가슴으로 키운 자식이 그렇게도 지독시리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존재라는 허망한 깨달음을.
학교를 그만두는 게 차라리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어머니에게 내가 해 드릴 수 있는 마지막 배려는, 혹시나, 정말 만에 하나 학교로 다시 돌아올 마음이 생기면 그리할 수 있도록 퇴학 대신 자퇴를 권하는 일이었고, 자퇴원서에 친권자의 확인을 받기 위해 학교로 오시라고 하는 대신 내가 그 댁에 직접 찾아가 도장을 받아오는 일이었다. 처음으로 수진이 어머니와 마주 앉은 그 댁의 마룻바닥으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쳐 들어오며 거실이 어둠에 삼켜지는 것을 힘겹게 밀어내고 있었다. 내게 미안해하는 듯도, 생의 괴로움을 느끼는 것도 귀찮아진 듯한 수진이의 어머니에게서는 술 냄새가 났다. 어머니의 지난 삶의 회한이, 지금 짊어지고 살아가는 생의 신산함이, 거실 밖으로 밀려나는 힘없는 햇빛 같은 희망 없는 삶에 대한 체념이 술 냄새와 함께 내게 불쑥 밀려들었다. 어머니의 도장이 찍힌 문서를 교무부에 제출하고 나자 이제 수진이는 내 핸드폰 속에 저장된 사진과 전화번호로만 남았지만, 미친 바람 속 섞여드는 몇 알의 모래처럼 건너 건너 어렴풋이 들려오는 수진이의 소식은 여전히 마음을 따갑게 했다. 충북 어딘가에 살고 있다더라. 연상의 남자와 동거하고 있다더라. 다시 임신했다더라. 그러고 이번엔 낳는다더라.
선택을 한 것인지 도망을 친 것인지 구분하기 힘든 그 아이의 삶에 조금 더 함께하지 못한 마음속 흔적은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내 딸아이를 보며 매일매일 새롭다. 임신한 청소년들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드러워져서 청소년이 아이를 낳아도 국가에서 지낼 수 있는 시설도 제공해 주고 학업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수진이가 아이를 낳겠다고 했으면 그런 방법을 백방으로 함께 찾았을 것 같다. 하지만 아이는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 가난을 끊으려고 특성화 고등학교에 와서 일찍이 돈벌이를 시작하려 했지만, 수진이는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그 경쟁은, 수진이에게 경쟁에서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패배감, 친구보다 못하다는 열등감, 결국 나의 삶도 부모의 그것이 되풀이될 거라는 불안감을 넘치도록 채워주었다. 내가 수진이와 함께 하고자 했던 학교라는 공간은 그렇게나 무섭고 견디기 힘든 공간이었다는 것을 수진이가 끝모르고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고 나서야 글자가 아닌 촉감으로 느끼고 말았다.
기깔나는 아이템을 만들어서 내 회사를 차리고 그걸로 부모님 집도 사드리고 언니 해외여행도 보내주고 자기는 멋진 남자와 끝내주는 사랑을 할 거라던 수진아. 어디에서든 언제든 그저 잘, 살고, 있기를 바란다. 끝까지 함께 걸어주지 못한 이 선생님은,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에 무슨 말을 더 붙일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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