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강경삼가해 무각스님 법문 (33)
2019년 05월 09일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생사(生死)를 준비해야 합니다. 이게 가장 급한 일입니다.
내일 죽음이 닥칠지, 언제 닥칠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앞에 무슨 일이 버티고 있는지 전혀 모르면서 무조건 갑니다.
이런 부분에서 지금이나, 내일 죽게 된다면 가장 급하게 무엇을 해야 할것이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으면 지금을 잘 살게 됩니다.
우리가 죽음을 생각한다고 하면 염세적으로 받아들이는데, 그게 아니라 항상 죽음을 머리에 이고 살면 순간 순간 후회없는 삶을 결정하고 그에따라 가장 중요한 일부터 하게 됩니다.
가정 중요한 일이 뭐냐! 마음 닦는 것입니다. 이것 말고 또 뭐가 있습니까?
죽으면 재산을 가지고 가기를 하나요, 명예를 가지고 가나요, 아무것도 못 가져갑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가져가는 것은 닦은 마음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가져갑니다.
제일 급한 일이 이것이라는 사실을 다 아는데 실감이 안 나지요. 남의 일처럼 여겨지고, 그래서 생사가 어디에 있느냐? 그러면 호흡지간에 있다고 하잖아요.
호흡! 한생각 나는 것, 한생각 스러지는 것. 이게 호흡입니다.
들고 나는 것, 들숨 날숨, 그래서 생사라는게 호흡지간에 있다.
한생각 일어나는 것 이게 생이고, 한생각 스러지는 이 순간이 멸이다. 이것이 바로 생사입니다.
생사를 멀리 모습이 무너지는 것만을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생사(生死)문제를 항상 이야기하니까 염세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갖게 되는데, 그게 아니라 이런 부정적인 면을 생각해야 가장 긍정적인, 후회하지 않는, 회한이 남지 않는 결정을 할 것이라는 것에 귀착이 되잖아요.
그래서 가장 활발발한 공부라는 겁니다.
생사라는 두 가지 문제를 쥐게 되면 진짜 활발하게 됩니다.
선은 활발발하고 생동감 있는 것이고, 이것이 불교 공부입니다.
불교가 염세적인 이야기를 하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는 자기 마음가운데 있다고 하지요. 이렇게 들어서 말하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건데, 좀 더 실감나게 우리 일상에서 낱낱이 실천하면 오즉 좋겠냐 이겁니다.
우리 삶 속에서 호흡지간에(순간 순간) 한생각 일어나고 한생각 멸하는 이 속에서, 여러분이 후회 없이 걸어갈 수 있다면 걱정할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한생각에 달려있는 겁니다.
다른건 없습니다. 관념놀이에 불과합니다.
관념적인 것을 철저하게 놓아버리면 지금 이 삶이 생생합니다. 경에서는 실답다고 하는데 실답다는 것은 허망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번 시간에 '전삼삼 후삼삼'(前三三後三三)에 대해서 참구해 보셨습니까?
참구해서 깨달은 것은 단지 심천(深淺)이 있겠지요, 지혜가 밝은 사람은 밝게 해석해서 알아챌 것이고 지혜가 부족하면 부족한 만큼 알겠지요.
이게 바로 공부의 단계없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봐야 겠지요.
어떤 것을 보더라도 우리는 부처님 법문으로 봐야 하므로, '전삼삼 후삼삼' 이것도 부처님 법문이거든요. 앞도 삼삼이요 뒤도 삼삼이다.
그래서 이 공안을 다시 한번 말하는 겁니다.
벽암록(碧巖錄)35칙의 무착 대사와 문수보살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남방에서 일보일배 하면서 몇 년에 걸쳐서 오대산에 온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과정은 생략해 버리고 만난 것만 이야기 합니다.
육조 스님도 마찬가지로 남쪽에서 오조 홍인 대사를 만나러 갔는데 하루아침에 간게 아니지요. 가면서 법문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 과정은 생략해 버렸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부분이 중요한 겁니다.
내가 중국의 소림사에 갔는데, 거기서 소림굴까지 걸어서 2-3시간은 걸리겠더라고요.
달마 대사가 소림굴에 있으니까 공양을 드셔야 되겠지요.
옆에 누군가가 거기에 있었으니까 거기서 9년 면벽을 할 수 있었겠지요, 그래서 혜가 스님이 9년간 시봉했다고 합니다. 하루에 한 끼 드셨지만, 항상 소림사에서 소림굴까지 걸어서 간겁니다.
소림굴 가보면 별로 크지도 않아서 한두 사람 앉아 있으면 꽉 차더라고요.
그렇게 9년간 공양을 갖다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큰 스님(달마 대사)이 인도에서 양자강을 건너서 소림굴에 왔다고 했잖아요.
인도에서 와서 황제 양무제가 크게 대접을 했는데도 팽개치고 소림굴로 와버렸으니 중국천하에 소문이 다 났겠지요.
양무제가 극진히 환영식을 하기 위해서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달마 대사가 타고온 배에 연단을 차려서 환영식을 대대적으로 열었는데 어땠습니까?
거기서 양무제가 묵사발 됐지요. 만조백관과 백성들 앞에서 달마대사가 단숨에 무시해 버렸거든요, 겉으로 보기에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무시한게 아니고 법을 제대로 대답해준 것인데 그걸 모르는 거지요. 아직 깨닫지 못했으니까요?
사실 양무제도 대단한 분입니다. 보살 황제라고 했습니다.
가사를 하고 법상에 올라가서 법문을 설한 분입니다.
그리고 금강경을 32분으로 분류한 사람이 소명태자(昭明太子)인데, 이 사람이 양무제의 아들입니다. 이 정도면 보통 안목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양무제도 보통 안목이 아니겠지요, 그런데 선지식이 인도에서 배타고 온다니까, 대대적으로 환영을 하고 만조백관 앞에서 질문을 했는데, 겉모습으로만 보면 황제가 완전히 무시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달마 대사가 소림굴로 들어가서 면벽만 하고 있었습니다.
혜가 스님도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까 그분에게 뭔가 바라는게 있고 자기 공부가 부족하니까, 소림사에 가서 9년간 공양 시봉을 했는데 쳐다보지도 않고 말 한마디도 안 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 했다면 말도 하고 공부도 가르쳐 주고 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어록에는 안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는 무착대사가 남방에서부터 일보일배하고 오대산까지 갔다는데 얼마나 걸렸겠습니까? 우리 한국땅도 남쪽에서 여기까지 일보일배 하고 오면 1년은 걸릴텐데 중국이라는 큰 땅하고는 상대가 안되지요. 그렇게 가서 문수보살을 만났지요.
만났는데 안목이 없으니까 눈앞에 있어도 몰랐지요.
그런데 근기는 뛰어나지요. 그 정도 행할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습니까?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런 스승을 알아보려면 사실은 자기 안의 스승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스승을 밖에서 찾으려 하는데, 스승은 자기 안에 있습니다.
자기 안의 스승을 먼저 믿고 거기에 의지해야 밖에 있는 스승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는 눈앞에 부처님이 나타나도 못 알아봅니다.
무착 대사도 문수보살이 나타나서 어디서 왔는가? 하고 물어도 모르잖아요.
남방에서 왔습니다. 라고 말하지요.
거기는 어떻게 공부하는가?
말법시대에 비구가 계율을 조금 받드는 정도입니다. 계율도 다 못 지킨다는 거지요.
조금 받드니까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지도 못한다는 거지요. 항상 말세니까 지금도 그렇게 계율을 완전히 못 지키잖아요.
그리고 대중은 얼마나 되는가?
그런 사람들이 법회를 열어도 삼백명 내지 오백명 정도 모입니다 라고 하지요.
말법시대에 비구가 계율을 조금 받드는 정도에도 삼백 명에서 오백 명이 모인다고 하는 소리지요.
무착대사가 문수 보살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여기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수행하는지요? 물으니, 문수보살이 대답하기를,
범부와 성인이 함께 있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다.(凡聖同居 龍蛇混雜이라)
여기는 어떻게 수행하는지요?
문수 보살이 이미 범부와 성인이 함께 있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다. 이렇게 대답해 줬는데도 대중이 얼마나 되는지요? 라고 물었지요.
벌써 범부와 성인이 함께 있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다고 하면 알아야 하는데, 거기는 적정(寂靜)인 청량산(오대산)이지요. 즉 정토(청정한 국토)거든요. 그런데도 범부와 성인이 함께 있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범부와 성인, 용과 뱀이 다 청정한 국토에 있다는 것이니 알고 보면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대중이 얼마나 되는지요? 라고 묻는 것이 잘못된 겁니다.
무착 대사가 삼백명 내지 오백명 모인다는 대답에 원오 극근(圓悟克勤) 선사가 착어(着語)를 붙였는데 뭐라고 했냐면, “모조리 여우들의 정령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우란 귀신을 뜻합니다.
무착 대사가 다시 범부와 성인이 함께 있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다는 뜻을 물으니 완전히 졌다. 즉 정신없이 허우적거린다고 착어(著語)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대중이 얼마나 되는가? 라는 말에 나에게 화두를 돌려다오 말해놓고, 그래도 용해 줄 수 없지! 했는데,
왜 용서해줄 수 없다고 했을까요? 이미 범부와 성인이 함께 있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다고 했는데 또 필요없이 물으니까 용서할수 없다는 겁니다.
‘앞도 삼삼이요 뒤도 삼삼이다.’ 라고 했거든요.
이랬다 저랬다 하는군, 말해 보아라, 무엇이 얼마나 될까?
그래놓고는 천수대비로도 셈할 수 없다.
즉 대비로써도 셈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어서 설의【說誼】에서는 하늘과 땅, 해와 달(天地日月), 삼라만상(參羅萬像), 성상(性相) 성품과 모양, 공유(空有) 없음과 있음, 명암(明暗) 밝음과 어둠, 살활(殺活) 죽음과 삶, 범성(凡聖) 범부와 성인, 인과(因果) 원인과 결과 등 온갖 이름의 숫자가 이 한 구절에서 모두 설했구나. 이렇게 함허 득통 선사가 '전삼삼 후삼삼'에 대해서 자상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이것이 어디로부터 나왔느냐! 이겁니다. 자기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이게 바로 자기이고, 이게 우리들의 본래면목(성품)이라는 겁니다.
'전삼삼 후삼삼'을 현상적인 모습으로 말하면 앞에 세 명 있고 뒤에 세 명 있다는 뜻인데, 그런데 그 이야기가 아니니까 참구해 볼 점입니다.
자기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이겁니다. 이걸 자기에게 깊이 물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도 자기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수보살이 말했지만 자기 마음에서 나온 겁니다. 이게 바로 참구하는 방법입니다. 알음알이를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참 자기 속에서 답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전삼삼 후삼삼'은 여러분 가슴속에서 해답이 흘러나오게 하는 마중물과 같은 것입니다.
왜 대중은 얼마나 되는가?
“앞도 삼삼이요 뒤도 삼삼이다.” 왜 하필이면 이렇게 말했을까?
이걸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저번 시간에 강의를 끝냈습니다.
머리를 싸매고 그것만 생각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해서 공부가 될 문제도 아니고, 그냥 잡아다가 한 번 생각해 보고, 걷다가 생각해 보고, 이렇게 계속 자기 마음에다 놓고 생각해 보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그러면 자기 마음속에서 참다운 지혜 광명이 흘러나옵니다.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가슴속에 그 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중이 얼마나 됩니까?
“앞도 삼삼이요 뒤도 삼삼이다.”
그래놓고 함허 득통 선사가 자세하게 설명까지 했잖아요.
그러니 자기가 한 번 꺼내서 맛을 보세요. 그러면 맛을 못 보더라도 참구하는 것 자체가 공덕이 됩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이게 문수 보살이 하신 말씀이니까요.
이러다 보면 자기 마음 가운데서 지혜가 나오고, 지혜가 자라고, 자라다 보면 흘러 나오고, 흘러나오게 되면 조금씩이라도 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쥐꼬리만큼이라도 맛을 봐야,
아! 이런 맛이로구나 하고 알아지는게 있습니다. 확정지어 지는 겁니다.
그냥 그렇겠거니 하면 공부는 항상 그 타령입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것은 전부 가짜다! 이겁니다.
즉 자기 속에서 낱낱이 흘러나와서 직접 맛을 봐야 이게 진정으로 자기 살림살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려면 이런 마중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없이 자기 속에서 안 나오거든요, 이런 말씀을 통해서 자기 속에서 흘러나오잖아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것도 아니고 내가 한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즉 부처님과 나의 마음이 둘 아니게 합쳐지면서 맛을 보게 된다는 거지요.
마중물이라는 표현이 적확(的確)한 말입니다.
마중물이 내가 마시는 물과 같은 물인데, 자기 속에서 흘러나오는 신선한 물맛과는 틀리지요. 자기 속에서 흘러 나와야지 진짜 생생한 맛이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지혜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지금까지는 배워서 알았지만, 앞으로는 창조적이고 새로운 것이 나와야 살 꺼리가 생기잖아요. 남이 하던 걸 하면 살기가 급급합니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앞선 아이디어가 나와야 세상살이가 편해지거든요!
음식점 하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점이 널려 있는데 다른 곳과는 다른 맛을 만들어내야 그 집이 맛집이 되고, 구석에 있어도 찾아가듯이, 그런 지혜가 어디서 나오느냐 이겁니다.
자기 가슴속에서 나와야지 다른 곳에서 배워 하는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점점 그런 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불교 공부를 하게 되면, 이 세상에 뒤떨어져 사는 게 아니라 앞질러 가는 것이고,
선도해 가는 겁니다.
이런 부분이 불교입니다. 남이 하는 것 뒤쫓아 가고 누가 하면 우리도 따라가자는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지혜는 자기속에 있으니까 그 자기속에 있는 참 지혜를 어떻게 이끌어 내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엊그저께 국세청장의 공양 대접을 받았는데, 그 사람이 공부에 관심이 많습니다.
고위직에 있으면서 관심있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는데.
그래서 내가 좋아합니다.
포교부장 소임을 하면서 고위직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는데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래도 자신이 불자라고 하니까 귀하게 대접하는 거지요.
그렇지만 진짜 귀한 사람은 그런 가운데서도 공부에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불교책을 많이 읽어서 집에 있는 6, 7백 권의 책을 다 읽었다고 합니다.
나는 100권도 못 읽었습니다. 집에 앉아서 항상 그런 책이나 보고 있으니까 사실 부인 입장에서는 재미가 없지요. 같이 놀러도 가고 해야 하는데 집에서 항상 책이나 보고 있으니 좋아하는 마누라가 있겠습니까?
본인도 청장이 된지 2년이 넘어서 은퇴를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언제 할 지는 모르지만 그런데 큰 문제 없이 국세청 안에서도 신망이 깊거든요, 사람이 아주 바르고 사사롭게 행하지 않으니까. 불교 공부를 열심히 하니 복입니다.
자기 어머니 아버지가 불자라고 합니다. 특히 어머니가 그랬다고 하니, 어머니의 공덕인 거지요.
어머니 나이가 90세 가까이 됐다는데 지금도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서 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수십년을 했다고 합니다.
그 공덕으로 본인이 어디 못가지요.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하게 된 겁니다.
그러면서 이번에 다리 관절이 안 좋아져서 언덕도 못 올라가게 됐답니다. 본인이 매일 강화 보문사에 다니셨다고 했는데, 혼자서 갈 수가 없으니까, 이제는 직접 1년에 한 번 모시고 간다고 합니다.
본인도 은퇴하게 되면 1년 정도는 절에서 공부하겠다고 하면서 예전부터 수행장소를 알아봐 달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법문을 제일 많이 들어본 스님은 나에게 제일 많이 들었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한적한 절이 있으면 그곳에 가서 전심전력으로 공부하겠다고 이야기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지금 한생각 속에서 해야한다. 우리는 지금 순간순간 결정해야 할 일이 많고, 누구에게 물어볼 계급이 아니고.
우리는 자기가 결정해야 할 일이 태산같이 많습니다.
이 순간순간 어떻게 결정할 것이냐, 자기에게 물어라. 그러려면 관(觀)해서 어떻게 하는게 옳은지, 자기 생각을 놓고 생각하는게 공부이고, 그게 바로 참선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안 되고 나중에 은퇴해서 제대로 공부하겠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니 지금 하라고 했습니다.
1시간 30분 동안 밥먹으면서 내내 공부 이야기만 했습니다.
그 사람이 다른 이야기 들으러 왔겠습니까? 다른 지식이야 나보다 훨씬 많을 것입니다. 여러 방면을 다 꿰고 있는 사람인데 나에게 뭘 물으러 왔겠습니까?
결국은 마음 공부 마음 닦는 것, 이걸 묻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계속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바쁜 가운데서도 열심히 공부를 해야한다. 그러면 나중에 은퇴를 하고나서도 저절로 열심히 공부가 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자기 삶을 잘 사는 겁니다.
이런 불자들을 스님들이 옛날에는 이끌어 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들이 더 똑똑하고 스님을 우습게 여겨버리니까 엉망이 되었지요.
그러니까 나라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물으러 와야 하는데 오히려 종교인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면 되겠습니다.
스님이 앞서가서 이끌어 줄 수 있고 한마디라도 들으려 해야 나라가 잘 되고 사사롭게 안 되고, 공심을 가지고 일을 하고, 그러므로 모든 국민이 편안해지면 좋은데,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혼탁해 지지요.
우리 불자들이 그런 역할을 해줘야 하고, 얼마든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 설의에서 말했던 그 내용입니다.
하늘과 땅, 해와 달(天地日月), 삼라만상, 성상(性相) 성품과 모양, 공유(空有) 없음과 있음, 명암(明暗) 밝음과 어둠, 살활(殺活) 죽음과 삶, 범성(凡聖) 범부와 성인, 인과(因果) 원인과 결과 등 이 모든 이름들이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 이 한마디 속에 간파했더라는 겁니다.
그 '전삼삼 후삼삼'이 자기 마음 가운데서 나온 말이잖아요. 이 화두가, 다른데서 온 적이 없으니 여기다 물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주 조금이라도 빛이 나와서 아! 이런 말씀이구나!
이 정도는 그래도 어림잡아서 알아야 나중에라도 참으로 믿어지고, 믿어지면 체험이 되고 깨달아지는 겁니다.
깨달아지는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되는건 아니잖아요.
이미 이걸 가지고 있으니까 얼마든지 공부가 익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冶父】
一二三四數河沙여 沙等恒河數更多로다 算盡目前無一法하야사
일이삼사수하사 사등항하수갱다 산진목전무일법
方能靜處薩婆訶하리라
방능정처살바하
<번역>
하나, 둘, 셋, 넷 등 항하의 모래 수여, 그 모래 수와 같은 항하는 얼마나 많을까.
눈 앞의 것을 다 세어 한 법도 없어야 바야흐로 고요한 곳이어서 사바하 하리라.
<해설> - 무각
하나, 둘, 셋, 넷 등 항하의 모래 수(數 셀 수)여, 즉 모래 알을 한 알, 두 알, 세 알 등 날마다 센다는 겁니다. 하나, 하나, 낱낱을 공부로 돌리는 겁니다.
그 모래 수와 같이 많은 항하 강이 또 있습니다.
그 강 속에 있는 모래를 다 합치면 얼마나 많겠습니까? 어마어마 하겠지요.
모래 하나가 한 개의 갠지스강이라고 합니다. 이게 상상이 됩니까?
그런데 부처님 입장에서 보면 부처님이 삼천대천세계를 손바닥 위에 과일 하나 놓고 볼 줄 안다고 하지요. 이게 천안통(天眼通)입니다.
이건 육신통(六神通)중의 하나인데 부처님은 육신통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능력 하나와 위의 이 말과 비유해 보면 지금 했던 말은 대단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를 보면 증명하고 있습니다.
은하계가 얼마나 많습니까?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항하강의 모래 수로 비유를 든 것은 대단하게 비유를 든 것이 아닙니다. 새발의 피일 뿐이지요.
그런데 현상세계에 집착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도 입이 벌어질 정도로 대단한 말인데 부처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부처님 입장에서 다 말한다면 우리가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법문을 할 때는 광명으로 법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다 저렇다 말로 하지 않고 방광을 하면 그것 자체가 법문입니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법문이 나오지요, 화엄경에 보면 무슨품 무슨품 하면서, 이런 품들이 알고보면 하나의 광명에서 쏟아져 나온 것을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각각의 보살들이 법문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보면 하나, 둘, 셋, 넷 등 항하의 모래 수를 세며, 그 모래 수와 같은 항하강의 모래수라는 것이니, 눈앞에 한 법도 없음을 헤아려 끝나야 (산진목전무일법算盡目前無一法하야사), 바야흐로 능히 적정한 곳에서 사바하(성취)하리라(方能靜處薩婆訶하리라)했습니다.
이것이 눈앞에 있는 것을 다 헤아려서, 즉 모래를 낱낱이 다 헤아리고. 헤아렸으면 이 모래의 법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헤아릴 수 없을 많큼 많은 법이겠지요.
그런데 이게 무일법(無一法)이어야, 즉 한 법도 없어야 적정처에서 사바하(성취)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선으로본 금강경>을 읽어 보면, 한 걸음 떼고 또 한 걸음 떼면 두 걸음이 아니라 한 걸음은 없어지고 다시 한 걸음만 남게 된다.
여러분이 집에서 여기까지 몇 걸음에 왔습니까?
걸음 숫자 다 포함해서 한 걸음에 뭉쳐있나요. 없잖아요. 그러니 수 만 걸음을 걸어도 한 걸음밖에 없지요. 즉 한 걸음이란 겁니다.
그런데 이 한 걸음도 떼고 서 있으면 없습니다. 즉 공(空)의 도리를 말한 겁니다.
그래서 누가 어떻게 왔는가 물으면 걸음을 더벅더벅 걸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라고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 걸음은 없어지고 다시 한 걸음만 남아 있게 되니 만 걸음을 떼도 한 걸음이고 이 한 걸음마저도 없어져 공(空)했으니 한 걸음도 얻을 바가 없는 것을 “하나, 둘, 셋, 넷으로 항하의 모래를 셈이다.” 하였다.
여러분이 수억 겁을 살아오면서 한 걸음 떼고 한 걸음 떼고, 이런 생, 저런 생을 사는 것에 대해서 예전에 만공스님이 삼생(三生)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삼생 전에 전주에 있는 치마팔아 먹고 사는 천한 기생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절에 가서 부처님께 공양 올렸고, 스님들은 그것을 먹고 수행을 했고, 다른 면으로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그야말로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 겁니다.
그 공덕으로 다음 생에 뭐가 됐냐면 큰 대장군이 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음 생에는 소로 태어났습니다. 축생계로 떨어진 거지요. 그런데 그게 나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소를 통해서 인내아닌 인내(인욕바라밀)을 배운 거지요. 참는 것, 참을 수밖에 없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야말로 채찍을 맞아가면서 나중에 죽고 나면 하나도 버려지는 것 없이 다 보시를 하잖아요. 그리고 나서 만공스님이 된 것이다.
우리는 축생계등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기를 학수고대 하는데, 꼭 이것도 맞는 소리가 아닙니다.
만공스님도 전생에 소가 되었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삼악도도 겁낼 필요가 없고, 지금 내가 최악의 상황에 있더라도 이것도 더 좋은 계기가 될지 어떻게 아느냐 이겁니다.
만공 스님이 어디서 깨달았느냐면 전주(봉서사)에서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삼생 전 천한 기생이었을 때 공양을 올렸던 절이 봉서사라는 겁니다. 인연이라는 것이 이렇게 알 수 없이 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겁니다.
경허 스님 밑에서 견성할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라, 거기에 있다가 어떤 스님에게 화두를 듣고 그 뜻을 모르니까 갑자기 분심이 생겨서 경허 스님 몰래 도망쳐서 전주 봉서사에 갔답니다.
거기서 법당을 관리하는 노전 스님이 돼서 공부하다가 어느 날 그 법당의 서쪽벽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면서 처음 성품을 체험(見性)했답니다. 그런데 봉서사가 삼생 전 천한 기생이었을 때 스님들에게 공양 올렸던 그 절입니다.
우연이라는게 세상에 있습니까? 생각해 보면 기가 막히게 맞습니다.
결국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수억 겁이 지나도, 이게 뭐냐면 아까 말한 원인과 결과(因果)로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삼라만상 모든 것이 어디로부터 나왔느냐 이겁니다. 자기 마음으로부터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삼삼 후삼삼'도 자신의 마음에 물어봐야 하는 겁니다.
이 한 구절로 모든 것을 설파했다고 함허 득통 선사가 설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시라는 거지요.
선으로본 금강경을 다시 보면, 한 걸음 떼고 또 한 걸음 떼면 두 걸음이 아니라 한 걸음은 없어지고 다시 한 걸음만 남아 있게 되니 만 걸음을 떼도 한 걸음이고 이 한 걸음마저도 없어져 공(空)했으니 한 걸음도 얻을 바가 없는 것을 ‘하나 둘 셋 넷으로 항하의 모래를 셈이다.’하였다.
또 셈을 다하여 눈앞에 한 법도 없어야 한다는 것, 이 말은 내가 써 놓고도 처음 듣는 것 같습니다.
항하 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번뇌 망상이 모두 자기 마음을 떠나 있지 않은 까닭에 셈을 다한다 하고, 이래야 셈이 다 되는 거지요.
일체 모든 법은 본래 공한 까닭에 눈앞에 한 법도 없다 하고, 한 법도 없음으로써 일체법이 곧 불법이 된다.
이렇듯 본래 공(空)하여 한 법도 없음을 요달하여 찰나의 삶을 살면 고요히 성취했다 이름 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썼지만 내가 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게 꼭 옳은 말은 아니지만 이것도 하나의 마중물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마중물을 통해서 자기 속의 참다운 지혜의 말이 나올 수 있게 관(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정확히 바른 말은 아니지요. 그렇다고, 틀렸다! 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옳고 그름을 따지는게 아니고, 참으로 옳고 그른 것(상대성)을 떠나서 참다운 지혜의 샘물이 나오게 하는 마중물 이라는 겁니다.
세상에 옳은게 어디 있고 그른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옳은 것도 거기서 나왔고 그른 것도 거기서 나왔는데요.
【說誼】
一二三四等恒河여 一恒河沙로 以爲數하니 一恒河沙가 猶未足이라
일이삼사등항하 일항하사 이위수 일항하사 유미족
沙等恒河數更多로다 諸法이 無邊數難窮하니 窮盡諸法無異法이로다
사등항하수갱다 제법 무변수난궁 궁진제법무이법
了得法法無異法하야사 方能靜處薩婆訶하리라
요득법법무이법 방능정처살바하
<번역>
하나, 둘, 셋, 넷 등의 항하여 하나의 항하사처럼 많은 항하에서 그 항하의 모래들도 부족하여서 모래 수처럼 많은 항하의 수가 크구나.
모든 법이 가이없이 수를 다하기 어려우니 모든 법을 궁구하여도 다른 법이 없네.
법과 법에 다른 법이 없는 줄 알면 그 곳이 고요한 곳이어서 참으로 사바하가 됨을 깨달을 것일세.
<해설> - 무각
하나, 둘, 셋, 넷 등의 항하여 하나의 항하강의 모래처럼 많은 항하에서 그 항하의 모래들도 부족하여서 모래수처럼 많은 항하강 수가 크구나.
모든 법이 가이없어 수를 다하기 어려우니 모든 법을 궁구(窮究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하여도 다른 법이 없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법이 있다 하여도, 그 법 또한 눈앞에서 다 계산해보고 알아야(산진목전 무일법 算盡目前無一法하야) 법과 법이 궁구하여 다른 법이 없네.
법과 법에 다른 법이 없는 줄(아닌 줄) 알면 그 곳(적정처 寂定處)이 참으로 사바하(성취)이다. 이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금강경>
須菩提야 我今實言으로 告汝호리니 若有善男子善女人이 以七寶로
수보리 야금실언 고여 약유선남자선여인 이칠보
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界하야 以用布施하면 得福이 多不아 須菩提가
만이소항하사수삼천대천세계 이용보시 득복 다부 수보리
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하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若善男子善女人이 於此經中에
언 심다 세존 불 고수보리 약선남자선여인 어차경중
乃至受持四句偈等하야 爲他人說하면 而此福德이 勝前福德하리라
내지수지사구게등 위타인설 이차복 승전복덕
<번역>
“수보리야, 내가 이제 실다운 말로 너에게 이르나니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있어 칠보가 항하사 수와 같은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한 것을 가지고 보시를 하면 그 복이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기를 “참으로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만일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를 받아 가지고 남을 위하여 설하여 주면 이 복덕은 앞의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한 칠보로 보시한 복덕보다 승하리라.”
<해설> - 무각
“수보리야, 내가 이제 실다운 말(진실한 말)로 너에게 이르나니,
이렇게 이야기하는 까닭은 뭘까요? 범부들의 안목은 항상 물질과 모습(色相)에 끄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본체를 보지 못하고 저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이 삼천대천 세계의 가득한 칠보로써 보시한 복덕만 크게 여기고 있는 까닭이다.
사람이 항상 이 세계를 대할 때 즉 대통령이든 국세청장이든 색과 이름일 뿐이라는 겁니다.
무시하라는게 아니라 그것을 알고서 대해야 평등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서로 만날 때는 도(道)로 만나는 것이 좋습니다.
부부간에도, 부모자식 간에도, 친구 간에도요. 더군다나 스님하고 재가자는 도로 만나야지 개인적으로 가까운 것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꼭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니까 오로지 도로써 만나야 합니다.
그게 성공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도반(道伴)이 되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성공하게 됩니다.
입만 벌리면 도를 이야기하고, 그러면 도가 따로 있고 일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근본인 도에서 일상(參羅萬像)이 나왔습니다.
즉 뿌리가 따로 있고 나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도를 닦는데 우리의 일상은 제쳐버리고 닦는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건 이승(聲聞,緣覺)의 공부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삼승(三乘)을 뛰어넘어서 일불승(一佛乘)으로 공부를 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도 버리는게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도 잡지 않습니다. 본래 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고 그렇다고 하나도 버리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일불승의 공부입니다.
선(禪)공부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 그래서 더 생동감 있는 겁니다.
도 닦는 것을 따로 찾고 우리 삶을 따로 찾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국세청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순간순간 결정해야 할 일이 태산같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계속 자신에게 물어서 자신의 마음이 밝아야 밝게 실천하고 살 수 있지 여기서 조금만 잘못 결정하면 자신으로 인해서 큰 문제가 발생한다고요.
한생각의 착각과 욕심, 즉 탐진치(貪瞋痴) 세 가지를 부렸다 하면 파급이 얼마나 큼니까? 여러 사람 죽이는 겁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밝게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그러려면 항상 자기 마음을 닦아야 하고 자기에게 물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홀히 하면 큰일 나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 인생 망치는 겁니다.
나중에 국세청장에게 문자가 왔길래 스님 말씀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열심히 정진하겠다는 문자가 왔습니다.
그와 같이 지혜가 많으면 세상을 밝혀서 얼마나 좋습니까?
밝지 않고 어두우면 서로 으르렁거리고 고통스럽고 힘듭니다.
그래서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고 하는데 ‘자비’는 따로 붙는 것이고, 불교는 지혜의 종교입니다. 불을 밝히면 거기서 밝게 작용이 나가는데 이게 바로 자비로 둘 아니게 나가거든요, 불이법(不二法,緣起法)으로.
그러니 여기서 실답다는 소리가 이말입니다.
수행자의 분상에서 보면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있어 칠보가 항하사 수와 같은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한 것을 가지고 보시하면 그 복이 얼마나 많겠느냐.” 이러니까,
수보리가 대답하기를 “참으로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만일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를 받아 가지고 남을 위해 설해주면(爲他人說) 그 복덕은 앞의 삼천 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 보시한 복덕보다 수승하리라.”
스님들은 입만 벌리면 법문 하지요. 사구게를 만나는 사람마다 읊어대지요. 내가 수억 겁을 거쳐서 어떤 은혜에 의해서 이렇게 존재합니다.
내가 뭔가를 먹어서 생명을 취했으니까 지금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고 억겁부터 그래왔고, 그 빚을 어떻게 갚을 것이냐 이겁니다. 결국은 법(無爲法)으로 갚는다 이겁니다.
칠보로 갚는게 아니라 사구게(四句偈)로 갚는 중입니다. 이렇게 나는 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잘했다 못했다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누구에게 해주었느니 하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나의 일이니까. 자기 공부하는데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내가 잘났고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당신은 이렇게 해야 한다 이러면 맞지 않는 소리입니다.
즉 진리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분상에서 이렇게 마음을 쓰는 것이지 내가 착해서 가 아니고, 다만 나는 나의 일을 하는 것이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를 내세우지 말라는 겁니다.
수행자의 분상에서 보면 복이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 말을 무비 스님이 하셨는데, 복을 짓느라 한 생을 보내고, 그 복을 쓰느라 한 생을 보내고, 복을 다 쓰고 나면 다시 박복하게 한 생을 보내니 삼생을 복 때문에 헛되게 보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최상승 수행인의 분상에서 보면 복을 지음이 없이 지어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풍요로움을 체험하게 하기 때문에 복을 베풀어서 보시를 하여 체험하게 한다 이겁니다.
최상승의 공부에서 복을 짓거나 쓰는 것은 따지지 말고 복을 짓더라도 지음이 없이 지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행에 있어서 하나의 모습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최상승의 수행에는 복을 지음에 지음이 없이 지어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풍요로움을 체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공부입니다.
베풀면서 기뻐하는 사람 많이 보는데 단순히 그것에 머물러 버리면 유위복에 속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둘이 아닌줄 알기 때문에 내가 했다는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이때 평등을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복을 다 쓰고 나서 박복(薄福)한 환경이 되면 또한 청빈(淸貧)을 체험하여 수행으로 돌아오니 하나하나가 버릴 것 없는 수행의 재료일 뿐이다.
살면서 부딪치는 모든 경계를 하나하나 남김없이 수행의 재료로 삼는 것을 이름하여 경 가운데 사구게(四句偈)라고 합니다.
【說誼】
施寶는 終感生死일새 所以爲劣이요 持經은 當趣菩提일새 所以爲勝이니라
시보 종감생사 소이위열 지경 당취보리 소이위승
<번역>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한 칠보로 보시한 공덕이 많지마는 마침내 생사를 감득하기 때문에 열(劣)한 것이요. 경을 가진 공덕은 마침내 보리를 이룬다.
그러기에 승(勝)한 것이 된다.
<해설> - 무각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한 칠보로 보시한 공덕이 많지마는 마침내 생사를 받기 때문에 하열한 것이요, 즉 칠보로 보시한 공덕에만 머물러 버리면 결국에는 생사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생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생사를 뛰어넘는 것이 공부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함이 없는 도리(無爲法)와, 불이법(不二法)으로, 무주상 행어보시(無住相行於布施)를 하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깨달음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보시를 해도 무주상 행어보시를 하면 경을 가진 공덕이 되어 마침내 보리(깨달음)를 이룬다. 그러기에 수승한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六祖】
布施七寶는 得三界富貴報요 講說大乘經典은 令諸聞者로 生大智慧하야 成無上道니
보시칠보 득삼계부귀보 강설대승경전 영제문자 생대지혜 성무상도
當知受持福德이 勝前七寶福德也니라
당지수지복덕 승전칠보복덕야
<해설> - 무각
칠보를 보시한 복은 삼계의 부귀한 과보를 얻을 뿐이고, 대승 경전을 강설한 복은 들은 자들로 하여금 큰 지혜를 내서 무상의 도를 성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경을 받아 가지는 복덕이 앞의 복덕보다 수승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冶父】
眞鍮로 不換金이로다
진유 불환금
<번역>
유기(鍮器)는 아무리 참되어도 금과 바꾸지 아니한다.
<해설> - 무각
여기서 유기(鍮器 놋쇠)라고 했는데 진유(眞鍮 진짜 놋쇠)라 하더라도 금과는 바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짜 놋쇠란 유위법을 비유한 것이고, 금은 부처님의 법문(사구게)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유위법이 아무리 커도 부처님의 법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놋쇠를 그냥 놋쇠로 두지 않고 근본을 알아 무주상행어보시로 바꾼다면 놋쇠가 금이되는 것입니다.
오늘 강의에서 알음알이로 이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지요,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전삼삼 후삼삼'을 잘 모르니까 참구가 되는데 다른 내용은 아니까 참구가 안되거든요.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일체 모든 존재가 자기 마음을 쫓아서 나왔는데 왜 '전삼삼 후삼삼'이라고 했을까? 자기 마음에 깊이 물어보세요.
확연히 가르쳐주는 것도 말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에다 추구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우는 아이 젖 준다고 가만히 있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거기는 본래 부동(不動 적정처)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아무 소리도 없이 가만히 있으면 그곳은 아무 가치 없이 하나로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거기다 물어야 합니다. 아기처럼 울라는 거지요. 이게 대의정(大疑情)입니다.
네가 있으니까 대답 좀 해봐라! 답답해 죽겠다. 이렇게 하라는 겁니다.
즉 본래 부동한 그 자리와 하나가 돼서 물어보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