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산의 공기가 달콤하면서 차다. 건너편 산에 소나무들이 빽빽하다. 열병식이라도 하는 듯 곧게 선 모습이 같은 원(願)을 가진 사람들을 닮았다. 오른쪽에서 바람이 휙 불자, 모두 맞은편의 해를 향해 고개를 수그린다.
대문 앞까지 왔던 봄이 멈칫 섰다. 한겨울에도 눈 구경이 어려운 부산인데, 입춘이 지난 2월에 눈이 내렸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움직여 볼까 하다가 다시 움츠러들어 소파 깊숙이 몸을 묻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아프기 전에 같이 골프를 했던 사람이다. 자주 운동하던 내가 허리 수술 후 몇 년 동안 집안에만 있는 게 안타깝단다. 움직이지 않으면 건강이 더 나빠질 거라며 울주군의 등억온천 옆 실내 골프장으로 가서 운동해 보자 한다.
막내를 대학에 보낸 후 골프를 시작했다. 큰아이와 둘째의 연속된 입시 뒷바라지로 지친 마음을 풀기 위해서였다. 초록 잔디 위에서 하늘을 가로지르는 하얀 공은 환상적이었고, 동반자들과의 연결 고리도 좋았다. 몇 년 동안 신나게 빠져들어 더 잘하려는 욕심이 생기면서 몸에 무리가 왔다. 운동을 쉬고 허리를 아껴야 하는데, 미련스럽게 계속하다 디스크에 문제가 생겼다.
나의 겨울이 시작되었다. 허리 치료를 잘한다는 병원과 한의원을 다녔지만, 몸은 얼어붙기만 했다. 주위 사람들의 ‘수술은 절대 안 된다, 침을 맞아라, 물리치료를 하라.’ 등 넘치는 처방에 나는 미로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스스로 몸을 풀겠다고 척추에 좋은 운동을 하고, 마사이 신발을 신은 채 걸음 수를 세어 가며 평지를 걸었다. 그러나 허리는 점점 더 굳어져 몇 발짝 못 가 주저앉게 돼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수술을 받고, 그제야 인터넷을 뒤지고 책을 구해 읽으며 척추에 대해 공부했다. 전문가가 일러준 바른 방법으로 앉고 서고 생활했다. 걸을 때도 옆 사람에게 물어 가며 자세를 고쳤다. 인대와 근육 운동을 꾸준히 하며 허리가 건강해지기를 기다렸다.
멤버들과 같이 스크린 골프장으로 가던 길에 벚나무 터널을 만났다. 봄의 전령을 볼 수 있을까 눈을 크게 떠봤지만, 아직 일러 은은한 자색 기운만 뿜어낸다. 오랜만에 잡아 보는 골프채는 반가움에 가슴을 뛰게 했지만, 쉬이 감이 오지 않는다. 자세를 잡고 공을 쳐 보니 거리가 너무 짧거나 길고, 이쪽저쪽으로 정신없이 날아간다. 한심하고 부끄러워서 그만둬야 할 게 아닌가 싶다. 옆에서 동반자들이 오래 쉰 셈 치고 잘한다며 입을 모아 용기를 준다. 꺾어지던 마음을 추슬러 천천히 스윙하니 그제야 볼이 더러 맞기도 했다.
운동을 마친 후에도 심한 통증 없는 허리가 대견했다. 내친김에 욕심을 부려 등산길에 따라나섰다. 산속은 아직 겨울이다. 멀리 하얀 눈을 덮어쓴 봉우리를 보며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눈길을 내달렸더니 몸이 굳어 버렸다. 꽁꽁 언 공기까지 어깨를 무겁게 눌러, 허리와 다리가 욱신거린다.
부축을 받으며 힘들게 숙소로 내려왔다. 걱정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느끼며 굳은 몸을 따뜻한 온천 물속에 푹 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리가 펴지고 딱딱하던 몸이 차츰 풀어졌다. 허리를 좌우로 비틀어보니 통증 없이 돌아간다. 모두에게 감사하며 푸근한 등억 온천의 밤에 몸을 눕힌다.
“꼬끼꼬 꼭, 꼬끼꼬 꼭”
수탉이 홰치는 소리에 단잠을 깼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그것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허리는 가뿐하지 않았지만, 산골 마을의 새벽 기운에 끌려 방을 나섰다. 얼굴에 닿는 공기가 산뜻하다. 정신이 맑아진다. 건너편 집에서 새벽부터 수탉이 열심히 소리치고 있다. 맞은편 계곡에서도 산새가 화답한다.
“삐익, 삑삑, 삐익, 삑”
온천 주변의 나무들은 봄을 맞을 채비로 열심히 몸을 뻗는다. 바지런한 청매화가 흰 꽃 몇 송이를 피우고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다. 길모퉁이 백목련은 손가락 마디만 한 하얀 보송이들을 달고 수줍게 웃는다. 벚나무도 꽃이 필 날을 기다리며 자주색 운무를 휘감아 덮고 있다. 밥풀만 한 망울 속에 보드라운 꽃잎들을 꼭꼭 개켜 안은 채 봄을 머금은 산천이다.
수탉과 산새의 대화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된다. 봄을 기다리는 나무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저희들도 한마음으로 비는가 보다. 어서 따뜻해져서 봄 치장에 여념이 없는 매화와 목련, 벚나무의 꽃을 활짝 피우게 해 달라고.
산 기운을 들이마신 나도 그들을 따라 두손을 모은다. 내 몸도 지루한 겨울을 밀어내고 가뿐한 봄날이 되기를 간곡히 열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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