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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트 콘트롤
짙은 새벽안개가 점령한 도시의 보이지 않는 신경망을 통해 누군가 원격조종의 스위치를 누른다. 일시에 폭발하는 자명종 시계의 종소리. 피투성이의 꿈 속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사내의 눈꺼풀이 찰칵, 자동카메라의 조리개처럼 한 번 닫혔다가 다시 열린다. 누군가의 모니터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피사체, 다시 시작되는 현실게임.
하얀 치약 거품을 물고 있는 입 속으로 위층의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가 쏟아져 들어오고 사내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목울대를 통과해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힘겹게 항문을 통과하는 숙변처럼 동맥경화의 배수관을 타고 아래로 내려간다. 아파트 지하 정화조에서 만나는 그대 누추한 삶의 흔적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숨기지 못한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그대 내밀한 삶을 엿볼 수 있는 거울 저편 너머, 원격조종의 얼굴없는 손.
짙은 안개가 가로막는 올림픽대로를 안개등을 켜고 내달리는 저 무수한 차량들의 행렬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한 번도 거역하지 않고 출근하는 사내의 차는 입력된 코스를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무모하게 탈선을 시도하다 여지없이 단죄당한 차들의 어지러운 잔해, 무심코 올려다보는 룸미러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두 눈동자를 사내는 미처 보지 못한다. 그대 삶에 동승한 저 검은 시선.
사내의 삶에 부여된 코드는 64XXXX-10XXXXX 빌딩 출입구의 검색대를 통과한 사내를 고속 엘리베이터는 사무실까지 운반한다. 책상 위에 놓인 모니터가 사내에게 오늘의 업무를 시달하고 간밤에 도착한 전자우편들이 그의 답신을 요구한다. 반송된 미결 서류들이 쌓여있는 전자결재함, 대 답 하 라 대 답 하 라 커서는 사내의 머리 속에서 쉴 새 없이 깜빡거리고 메인 컴퓨터로 연결되는 검은 케이블은 벽 속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다. 수시로 검색당하는 그대의 머리 속.
거리에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하면서 사내의 머리 속은 점점 어두워진다. 오늘도 수화기 너머 낯선 음성들이 몇 차례 사내의 이름을 호명하였고 얼굴 없는 빳빳한 명함 몇 장이 사내의 손을 방문하였을 뿐 그대 기억은 아직 감광되지 않은 필름처럼 어둡다. 모두 퇴근한 늦은 시간, 공복의 위장을 파고드는 형광등 불빛 아래 문득 외롭다고 중얼거리는 사내의 입술을 보안용 감시카메라는 줌인으로 기록한다. 비디오 화면으로 판독당하는 그대 삶에 내려지는 판정 - 유효기간 만료.
지친 사내가 불안한 꿈을 꾸고 있는 동안, 누군가 사내의 출생코드를 삭제한다. 5장의 크레디트 카드와 3장의 백화점 카드로 유지되는 사내의 경제를 봉쇄한다. 빌딩 출입구의 검색대에서 책상 위에 놓인 모니터에서 사내의 패스워드는 이제 차단당한다. 아직 자고 있는 사내의 머리 속에서 사력을 다해 깜빡거리는 커서, 누군가 리모트 콘트롤의 파워 버튼을 누르고 사내를 주시하던 모니터는 까맣게 암전된다. 게임아웃, 모니터 밖으로 영원히 추방당한 그대.
<시작 노트>
짙은 안개 속을 걸어갈 때, 그 짙은 안개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느낄 때, 그러나 그 모습의 일부만이 보일 뿐 안개 속에 가려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을 때, 나는 안개 저편 너머 어떤 거대한 손이 있어 우리를 조종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어찌 안개 낀 날에만 그러하랴.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삶의 곳곳에 우리의 내밀한 삶을 감시하는, 심지어는 우리의 머리 속과 마음 속까지도 감시하는 눈길이 얼마나 많이 산재해 있는가. 전율할만한 대중관리사회 속에서 점차 익명화되고 부호화되고 코드화되는 우리의 삶이 이 시 속에 등장하는 사내의 삶처럼 삭막하지만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첫댓글 회색 도시의 회색 인간이 실현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컴퓨터와 뇌의 연결이 눈앞에 왔다는
기쁜 뉴스를 접하며, 내 머리통에 있는 파일들이 모두 밖으로 전송되고 나면 빈 깡통이 된
육신만 남은 호모 사피엔스.
섬짓한 뉴스를 저도 오늘 봤습니다. 환호하는 이들도 있더군요.
영화 터미네이터가 현실이 되는 날이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