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석의 축구스타 클래식 2.
과거(7~80년 대)축구와 현대 축구를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선수들의 '뛰는 양(量)'이 아닐까 싶다. 당시는 지금 처럼 전원 공격, 전원 수비의 개념이 그다지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선수들은 각자 자기 포지션에서만 제 몫을 다하면 됐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요즘 선수들 처럼, 아니 요즘 선수들 보다 오히려 더 많이 더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선수가 한 명 있었다.
그렇다. 바로 이영무다! 이영무는 '지구력의 화신'이란 별명답게 매 게임 종횡무진 뛰어다녔고, 게다가 탁월한 발재간과 번뜩이는 재치를 발휘해 축구 팬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았다. 신장 165cm의 공격형 미드필더 이영무는 신체적 조건의 불리함을 발군의 지구력과 기동력으로 커버한 것이다.
현역 시절 이영무가 대표팀에서 뛰었던 시합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시합이 있다면, 필자는 두 시합이 떠오른다. 하나는 77년 아르헨 월드컵 아시아 예선인 대 이란전이고, 또 하나는 80년 쿠웨이트에서 벌어진 아시안컵 준결승전인 남북 대결이다.
아르헨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은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치루어졌는데 한국이 홈게임(장소: 부산)에서 이란과 0대0으로 비겼기 때문에 어웨이(테헤란)게임 에서 절대 패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란은 그리 녹녹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 이름도 찬란한 GK 헤자지가 이끄는 이란은 당시에도 한국에게는 벅차고 껄끄러운 상대였기 때문에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이 날 한국은 이란과 치열한 난타전을 펼치며 결국 2대2 무승부를 이루었는데 두 골 모두 이영무가 터뜨렸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필자는 그 날 밤 심한 감기 몸살로 인해 거의 그로키 상태에서 TV 우주 중계(그 시절엔 위성 중계를 '우주 중계' 라고 표현했다.)시청을 했던 관계로 사실 시합 내용은 선명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렇지만, 이영무가 골을 터뜨리고 난 뒤 무릎을 꿇고 열화와 같이 기도하는 모습 만큼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너무도 감격적이고 가슴 뭉클한 장면이었기 때문에...
80년 쿠웨이트에서 벌어진 아시안컵 준결승전은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였다. 지금이야, '남북 대결'이 축제 분위기로 치루어지고 있지만 그 당시 남북 대결은 '너 죽냐! 나 죽냐!'의 대결이었기 때문에 양 팀 선수들이 죽기살기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됐다. TV를 시청하는 국민들도 똑같은 심정이었고...
그 날 경기장 관중석에는 쿠웨이트에 진출한 한국 근로자들과 교민들이 자리를 잡고 '때려잡자! 김일성! 처 부수자! 공산당!'을 외치면서 응원을 하는 등 그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경기 초반 한국의 오른 쪽 풀백인 12번 최종덕이 그만 핸들링 반칙을 범해 북한에게 페널티킥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 후 한국은 이상하리 만큼 경기를 풀어나가지 못하면서 후반 종반까지 북한에게 1대0으로 끌려갔다. 후반 중반이 지나면서 북한 선수들의 체력 저하가 눈에 띄었으나.....거의 패색이 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후반 34분이 지날 무렵, 레프트 윙인 16번 정해원이 동점골(헤딩골)을 터뜨렸고, 종료 3분 전에 또 다시 정해원이 왼 발 강슛으로 역전골을 터뜨려 극적인 2대1 역전승을 거두었는데 두 골 모두 9번 이영무의 어시스트였다. 특히 두 번 째 골 어시스트는 이영무의 장기인 화려한 개인기와 번뜩이는 재치가 유감 없이 발휘된 멋진 장면이었다. (축구 협회 사이트 '한국 축구사(한국 축구 명승부)'코너에 가 보시면 협회 송기룡 차장님께서 이 시합 내용을 자세하고 또 재미나게 실어 놓으셨으니 참고 하시길....)
젊은(혹은 어린)축구 팬들이라도 76년 박대통령컵 국제 축구 대회에서 한국이 말레이 시아에게 4대1로 뒤지고 있다가 종료 7분을 남겨 놓고 차범근이 3골을 터뜨려 4대4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다는 소설과 같은 '실화'는 소문을 통해 익히 잘 알고 계실 거다.
당시 차범근의 골이 들어갈 때 마다 말레이시아 골문 안으로 달려 들어가 볼을 주워서 전력 질주로 센터 서클에 갖다 놓은 선수가 이영무라고 한다. 이 얘기는 필자가 몇 일 전, 어느 신문에 실린 고원정 선생님 컬럼을 읽고 알게 된 것이다. 이영무가 이런 선수였다!
이영무는 플레이 면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매너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선수였다. 경기 중, 상대 선수가 아무리 심한 반칙을 범하더라도 그 선수를 웃음으로 대했으며 간혹 자기가 과한 파울을 했다 싶으면 상대 선수에게 바로 사과의 제스추어를 보였다. 그라운드 밖에서 팬들을 대하는 태도 또한 경외감 마져 들 정도였다.
이영무의 훌륭한 인격과 성실성은 올드 축구 팬들에게는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예전에 축구협회 사이트에 올라온 오완건 선생님 인터뷰를 보니까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로 이영무 이름을 거론하셨는데 그 인터뷰에서 오완건 선생님이 이영무에 관한 일화를 말씀 하신 게 있어서 그 부분을 발췌해 봤다.
‘당시 이영무를 "재수둥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 선수가 대표팀에 합류해서 경기에 졌던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죠. 이영무는 정말 성실하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선수였고, 항상 책을 읽고 공부하는 선수였어요. 특히 성경을 애독했는데, 이영무의 적극적인 전도로 인해 많은 선수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죠.
그 때는 태능선수촌, 우리 숙소의 가운데에 화장실이 있었는데, 기도 소리가 흘러나와 같은 방을 썼던 김정남 감독에게 물어봤지요. “저 소리가 뭡니까?” 그랬더니 김 감독이 “들리시죠? 영무가 기도하는 소리입다”라고 말하더군요.
이영무는 새벽 1시, 2시에도 기도를 드리고는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새벽 훈련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 모습이었어요.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많이 뛰고, 열심히 훈련을 받는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아시아 각팀에 대해 조사한 것이 있었는데, 아시아 선수 중에 경기장에서 가장 많이 뛰는 선수로 이영무가 선정됐던 기억도 나는군요.
이런 일도 있었지요. 1973년에 이란에서 아시아 청소년대회가 열렸는데, 이영무 선수의 다리가 크게 부었었어요. 도저히 하루 이틀 쉬어서 될 문제는 아니었고, 당연히 코칭 스태프 에서는 다음날 출전 명단에서 제외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선수들 방을 돌아보는데 이영무가 안보이더군요. 당시 우리는 팀 사정상 의사를 데리고 가지 못했는데, 일본은 의사가 있었어요. 내 직감으로 혹시 밤중에 거기 가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찾아가봤더니 역시나 거기 있더군요. 말도 안통하면서 거기서 치료를 받고 있었던 거죠. 자기는 죽어도 경기에 나가야겠다는 거에요. 그 의사 말로는 모르핀 주사를 맞으면 경기는 뛸 수 있다라고 하더군요.
그 다리로는 도저히 안된다고 코칭스태프도 말리는 상황에서 죽어도 경기에 나가겠다고 의사소통도 안되는 일본 의사에게 찾아가 치료해 달라고 하는 이영무의 정신력에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도 청소년 시절에 말이에요.'
오완건 선생님의 이 말씀 하나면 이영무가 어떤 인격의 선수였고 또 얼마만큼 성실 하고 겸손한 선수였는지 더 이상 길게 논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필자는 혼자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보곤 한다. '세계 축구 선수(과거-현재 선수 모두 포함)마라톤 대회가 만일 열린다면 과연 누가 1위를 할까?'라는 상상을...... 이 대회에는 각국의 내로라하는 지구력의 화신들이 대거 참가할 것이다. 오베라트-토니뇨 세레조-둥가-키타자와-다비즈-시메오네-예레미스-카투소 등..... 한국 대표로는 두 말할 필요없이 이영무-박지성이 선발될 것이다. 나는 장담할 수 있다. 1위는 이영무가 차지할 거라고!
이영무 나이: 1953년생.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신장: 165cm 출신교: 경희고-경희대 소속: 포철(실업팀)-충의(육군)-할렐루야-임마뉴엘 대표경력: 74년-81년
주요 타이틀 1978년 방콕 아시안 게임 우승(북한과 공동 우승)
글쓴이 김유석은 '스포츠 커뮤니티의 전설'이라 할 웹사이트 <후추>에 서식하는 수많은 매니아 중에서도 단연 최강의 내공을 자랑하는 고수다. 30대 후반의 나이처럼 한국 축구의 격동기를 몸소 거쳐낸 그의 머릿속에는 한국은 물론 세계 축구계의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김유석의 [스타 클래식]은 우리가 세월속에서 잃어버린 흘러간 스타들에 관한 소중한 기억을 꼼꼼히 재복원해주는 소중한 코너가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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