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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산림 대법회 제12강 -2 (2011. 1. 31.)
世主妙嚴品-八,師子座의菩薩-4,右遶世尊(우요세존)~5,歎德(탄덕)
6,偈頌讚歎(게송찬탄) - (1)海慧自在菩薩의 讚歎(해혜자재보살찬탄)
(2) 雷音菩薩의 讚歎(뇌음보살찬탄)
右遶世尊이라. 오른 쪽으로 世尊을 돌다. 그랬습니다.
4, 右遶世尊(우요세존)
現是雲已(현시운이)에 右遶世尊(우요세존)하사
經無量百千帀(경무량백천잡)하시며 隨其方面(수기방면)하야
去佛不遠(거불불원)에
化作無量種種寶蓮華師子之座(화작무량종종보연화사자지좌)하고
各於其上(각어기상)에 結跏趺坐(결가부좌)하시니라
現是雲已(현시운이)에, 이러한 구름을 나타낸 뒤에
右遶世尊(우요세존)하사, 오른쪽으로 세존을 도시사,
右繞三帀(우요삼잡)이니ㆍ右遶世尊이니 이런 말이 많은데, 이것이 제가 생각하기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부처님이 계시면 말하자면 내[我]가 보는 입장으로 도는 것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도는 것이 맞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또 “시계 방향으로 도는 것이 맞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한데요. 제 생각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도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돌아보니까 그것이 맞는 것 같아요.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을 위시해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右遶世尊이라고 그랬어요. “오른 쪽으로 世尊을 돌았다.” 라고 했지 世尊을 중심으로 해서 오른 쪽으로 돌았다는 그 글로서는 도저히 안 나오는 겁니다. 오른 쪽으로 도는 사람을 중심으로 “오른 쪽으로 世尊을 돌았다.” 그러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도는 것이 맞는 것이지요. 이것은 여러 스님들도 각자 연구에 맡기겠습니다.
經無量百千帀(경무량백천잡)이라, 한량없는 백 천 바퀴를 돌았다.
隨其方面(수기방면)하야, 그 方面을 따라서
去佛不遠(거불불원)에, 부처님과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아니한 곳에
化作無量種種寶蓮華師子之座(화작무량종종보연화사자지좌)하고,
변화해서 만들었다. 무엇을요? 자기들이 부처님의 사자좌에서 나와 가지고 부처님을 돌았으니까 이제 자기들도 앉아야 되지요.
無量種種寶蓮華師子座를 化作해서, 변화해서 만들고
各於其上(각어기상)에, 각각 그 위에 結跏趺坐(결가부좌)하시니라.
결가부좌하고 앉았더라. 그 다음에 보살들의 歎德인데요? 보살들의 덕을 찬탄하는 내용입니다. 이 보살들은 어느 정도 수준이고ㆍ그 교양과ㆍ그 지식과ㆍ그 행동과ㆍ그 법력은 어떤가? 이런 것을 이 단락에서 표현하는 것이 歎德입니다.
5, 歎德(탄덕)
是諸菩薩(시제보살)의 所行(소행)이 淸淨(청정)하야
廣大如海(광대여해)하며 得智慧光(득지혜광)하야
照普門法(조보문법)하며 隨順諸佛(수순제불)의
所行無碍(소행무애)하며
能入一切辯才法海(능입일체변재법해)하며
得不思議解脫法門(득부사의해탈법문)하며
住於如來普門之地(주어여래보문지지)하며
已得一切陀羅尼門(이득일체다라니문)하야
悉能容受一切法海(실능용수일체법해)하며
善住三世平等智地(선주삼세평등지지)하며
已得深信廣大喜樂(이득심신광대희락)하며
無邊福聚(무변복취)를 極善淸淨(극선청정)하며
虛空法界(허공법계)를 靡不觀察(미불관찰)하며
十方世界一切國土(시방세계일체국토)의 所有佛興(소유불흥)을
咸勤供養(함근공양)하시니라
是諸菩薩(시제보살)의 所行(소행)이 淸淨(청정)하야,
이 모든 보살들의 소행이 청정하다. “하는 행이 청정하다.”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깨끗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는 행이 텅 비었다.” 하는 행이 텅 비어... 텅 비어야 廣大如海(광대여해)입니다. 광대하기가 바다와 같다. 또
得智慧光(득지혜광)하야, 지혜의 빛을 얻어가지고서
照普門法(조보문법)한다. 普門法을 비춘다. 그랬습니다. 普門法.
여기서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말 할 때, 普門示顯(보문시현)하는데 그것은 자비의 모습을 뜻하는 법화경의 뜻이고, 화엄경에서 普門法은 다릅니다.
一門(일문)에서 일체문을 다 攝(섭)하는 것. 한 문만 가지고도, 예를 들어서 “보시 바라밀” 하면 보시 바라밀에서 나머지 아홉 바라밀이 다 그 속에 포함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이 결국은 一微塵中含十方(일미진중함시방)입니다. 한 먼지 속에 시방세계가 다 포함되는 것을 普門法이라 그렇게 합니다.
요즘 근래에 제가 페이스 북 을 배워서 요즘 하고 있는데, 페이스 북 을 하다 보니까 이 一微塵中含十方하고 여기 普門法하고 너무 맞아떨어지는 겁니다.
이것은 또 다른 말로 하면 인다라망경계문. 우리가 저 앞에서 십현문 배웠는데요. 인다라망경계문하고 같아요. 인다라 그물의 그 구슬 하나하나마다 전부 서로서로를 서로 비추고ㆍ비춰주고 하는 것과 같이, 페이스 북 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가 거기 딱 가입해서 누구를 한분 초대해요. A라는 사람을 초대해서 “제가 당신과 친구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서로 이야기도 좀 나누고 정보도 주고받고 합시다.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연결되고ㆍ또 다른 사람에게 연결되고ㆍ이 세상 사람이 다 그 속으로 딸려 와요. 싹 딸려옵니다.
그 아주 신기한 기술이 요즘 세상에 아주 유행하고 있는데, 스님들도 그런 것 알아야 됩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一微塵中含十方이고, 여기 普門法이라고 하는 것하고 똑 같은 도리입니다. 한 문에서 일체 문이 다 벌어지는 겁니다. 한 사람에게서 일체사람이 다 딸려 와요. 세상 사람이 다 딸려 와버려요. 그럼 그 사람 알려면 그 길을 찾아서 가면 다 알 수가 있어요 전체. 뭐라고 이야기 해 놓은 것 다 볼 수가 있고ㆍ사진 올려놓으면 사진도 다 볼 수가 있고요. 이 普門法이라는 것이 화엄경에서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것을 다 갖추고 있다.
隨順諸佛(수순제불)의 所行無碍(소행무애)하며,
諸佛이 행한 바 걸림이 없는 도리를 다 隨順하며 또,
能入一切辯才法海(능입일체변재법해)하며, 일체 辯才의 法의 바다에 능히 들어가며, 또 得不思議解脫法門(득부사의해탈법문)하며, 불가사의한 해탈법문을 얻었으며, 이 보살들은...
住於如來普門之地(주어여래보문지지)하며, 여래의 普門地에 머물고, 그랬습니다. 부처님은 이미 일체입니다. 우주 삼라만상입니다. 깨닫게 되면 그 한 사람만이 아니고, 이미 普門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일체삼라만상과 하나가 된 경지에 이르렀다ㆍ이 보살들도 이미 그런 경지에 머물고 있다.” 이 뜻입니다.
그래서 已得一切陀羅尼門(이득일체다라니문)하야,
이미 일체 다라니문을 얻어서 悉能容受一切法海(실능용수일체법해)하며,
모두모두 다 일체 법을 전부 받아들이고 수용한다. 그리고
善住三世平等智地(선주삼세평등지지)하며, 三世平等智地에 잘 머문다.
이것은 우리는 공부할 때 공부하는 것 같고, 공부 놓아버리면 眛(매)해 버리고 그러는데 여기 三世平等智地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眛하지 않는 경지에 善住. 잘 머물고 있다. 아주 잘 머물고 있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眛하지 않는다.” 이 뜻입니다.
우리는 금생에 공부 잘 해도 죽을 때 眛하고ㆍ다시 태어날 때 眛하고ㆍ두 번 아주 크게 眛해 버리니까 전부 캄캄한 겁니다. 그래도 그 인연이 남아있어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또 공부하는 겁니다. 기억은 못하지만,眛해 버려서 기억은 못하지만 그 좋은 인연, 업연은 남아있어가지고 나도 모르게 이렇게 인연이 맺어지는 겁니다. 그런 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과거에 다 이렇게 같이 공부했습니다. 같이 공부했는데 죽을 때 眛하고ㆍ태어날 때 眛하고ㆍ두 번이나 그냥 캄캄한 그 터널을 빠져나오느라고 기억은 안 됩니다. 그렇지만 그 인연은 남아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선행을 많이 짓고ㆍ복을 많이 짓고ㆍ공덕을 많이 지어도 기억도 못하고 언제 지었는지 몰라도 그 선업은 남아있는 것이지요.
萬般將不去(만반장불거)요 唯有業隨身(유유업수신)이라.
죽을 때 아무 것도 못 가져가지만 오직 지은 업만 따라간다. 선업이 됐든 악 업이 됐든 다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또 펼쳐지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도리를 알고 사는 겁니다. 그 다음에
已得深信廣大喜樂(이득심신광대희락)하며, 깊은 믿음으로써 아주 넓고 큰 기쁘고 즐거움을 이미 얻었으며, 또 이 보살들은 無邊福聚(무변복취)를, 끝없는 복의 무더기를 極善淸淨(극선청정)하며, 아주, 지극히 훌륭하게 하였다. 복의 무더기를 = 無邊福聚. 또 虛空法界(허공법계)를 靡不觀察(미불관찰)하며, 그리고 허공 법계를 다 관찰해. 환하게 꿰뚫어 보고 있다. 그 다음에
十方世界一切國土(시방세계일체국토)의 所有佛興(소유불흥)을 咸勤供養(함근공양)하시니라. 어디든지 부처님이 계시면 그 부처님을 다 가서 勤供養이라. 부지런ㆍ부지런히 공양한다. 시방에 있는 所有. 일체부처님이 佛興하면, 부처님이 출현하면 열심히 가서 공양 올린다. 이것이 이 사자좌에서 나온 보살들의 덕행입니다. 평소에 이렇게 살고 있다 이것이지요. 그 다음에
이들의 偈頌讚歎이라. 소개만하면 안 되지요? 소개하면 으레 한 마디 해야 됩니다. 한 마디 해야 되지요. 화엄경은 시간 제약 없고ㆍ종이 제약 없고ㆍ무슨 장소 제약 없고 해서 동참한 보살들은, 어지간한 보살은 다 노래 한 마디씩 하도록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딴 경전은 그런 경전이 없지요.
6, 偈頌讚歎(게송찬탄)
(1) 海慧自在菩薩의 讚歎(해혜자재보살 찬탄)
爾時(이시)에
海慧自在神通王菩薩摩訶薩(해혜자재신통왕보살마하살)이
承佛威力(승불위력)하사
普觀一切道場衆海(보관일체도량중해)하고
卽說頌言(즉설송언)하사대
諸佛所悟悉已知(제불소오실이지)호니
如空無碍皆明照(여공무애개명조)하사
光遍十方無量土(광변시방무량토)하야
處於衆會普嚴潔(처어중회보엄결)이로다
如來功德不可量(여래공덕불가량)이라
十方法界悉充滿(시방법계실충만)하사
普坐一切樹王下(보좌일체수왕하)하시니
諸大自在共雲集(제대자재공운집)이로다
佛有如是神通力(불유여시신통력)하사
一念現於無盡相(일념현어무진상)하시니
如來境界無有邊(여래경계무유변)이어든
各隨解脫能觀見(각수해탈능관견)이로다
如來往昔經劫海(여래왕석경겁해)에
在於諸有勤修行(재어제유근수행)하사
種種方便化衆生(종종방편화중생)하야
令彼受行諸佛法(영피수행제불법)이로다
毘盧遮那具嚴好(비로자나구엄호)하사
坐蓮華藏師子座(좌연화장사자좌)하시니
一切衆會皆淸淨(일체중회개청정)하야
寂然而住同瞻仰(적연이주동첨앙)이로다
摩尼寶藏放光明(마니보장방광명)하야
普發無邊香焰雲(보발무변향염운)하며
無量華纓共垂布(무량화영공수포)어든
如是座上如來坐(여시좌상여래좌)로다
種種嚴飾吉祥門(종종엄식길상문)에
恒放燈光寶焰雲(항방등광보염운)하야
廣大熾然無不照(광대치연무불조)어든
牟尼處上增嚴好(모니처상증엄호)로다
種種摩尼綺麗窓(종종마니기려창)과
妙寶蓮華所垂飾(묘보연화소수식)에
恒出妙音聞者悅(항출묘음문자열)이어든
佛坐其上特明顯(불좌기상특명현)이로다
寶輪承座半月形(보륜승좌반월형)이요
金剛爲臺色焰明(금강위대색염명)이라
持髻菩薩常圍遶(지계보살상위요)어든
佛在其中最光耀(불재기중최광요)이로다
種種變化滿十方(종종변화만시방)하야
演說如來廣大願(연설여래광대원)일새
一切影像於中現(일체영상어중현)이어든
如是座上佛安坐(여시좌상불안좌)로다
爾時(이시)에, 그 때에
海慧自在神通王菩薩摩訶薩(해혜자재신통왕보살마하살)이
承佛威力(승불위력)하사,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서
普觀一切道場衆海(보관일체도량중해)하고 卽說頌言(즉설송언)하사대,
一切道場의 衆海를 널리 관찰하고 곧 게송을 설해 말하되,
1. 諸佛所悟悉已知(제불소오실이지)호니, 모든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을 이미 다 다 알았어요. 그 안 것을 如空無碍皆明照(여공무애개명조)하사,
허공이 걸림이 없듯이 그렇게 다 밝게 비춰본다 이 말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을, 끝없는 경계인데도 그것을 다 남김없이 밝게 비춘다.
光遍十方無量土(광변시방무량토)하야, 光. 敎光(교광)이라는 말을 쓰지
요. “불교” 라고 하는 이것이 敎光입니다. 언제 무슨 전깃불 비추듯이ㆍ태양 비추듯이 그렇게 비춘 적은 없습니다. 그런 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대로 빛입니다. 그래서 敎光이라는 말을 잘 쓰는데요. 그 가르침의 빛이 시방 한량없는 국토에 두루ㆍ두루 해서
處於衆會普嚴潔(처어중회보엄결)이로다. 衆會에 처해서, 많은 대중이 있는 곳에 있으면서 널리 깨끗하게 장엄하도다. 또 두 번째 게송.
2. 如來功德不可量(여래공덕불가량)이라, 여래의 공덕은 가히 헤아릴 수 없다. 十方法界悉充滿(시방법계실충만)하사, 시방 법계에 다 가득 차 있어.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처해있는 이 현실 이대로가 여래의 공덕입니다. 여래의 공덕으로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렇게 이해가 되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여래의 공덕이라고 해서 달리 만들어가지고 어느 한 구석에 모셔놓고 “아 이것이 여래의 공덕이다.” 그것 몇 푼어치 되겠습니까? 현재 있는 그대로를 그냥 여래의 공덕이라고 보는 그런 안목입니다. 화엄경은...
十方法界悉充滿이라 했잖아요.
普坐一切樹王下(보좌일체수왕하)하시니, 一切樹王下에 널리 앉으시니, 그러니까 부처님이 깨달은 그 장소는 전부 보리수입니다. 보리수아래입니다. 그래서 一切樹王下입니다. 일체 보리수나무 밑에 널리 앉으시니
諸大自在共雲集(제대자재공운집)이로다. 크고 큰 여러 보살들이 自在하게 함께 구름처럼 몰려오더라.
3. 佛有如是神通力(불유여시신통력)하사, 부처님은 이와 같은 신통력이 계시사 一念에 現於無盡相(일념현어무진상)하시니, 한 순간에 無盡. 다 함이 없는 모양을 나타내시니 如來境界無有邊(여래경계무유변)이어든,
여래의 경계는 가없거든 各隨解脫能觀見(각수해탈능관견)이로다. 그랬습니다. 우리가 저 앞에서 볼 때 모두 보살들이 여러 번 나와서 소개 됐었는데
모두 그랬지요? 무슨 보살은 이러이러한 해탈을 얻고ㆍ무슨 보살은 이러이러한 해탈을 얻고. 그랬습니다. 이것이 그 말입니다. 각각 해탈을 따라서 능히 觀見하도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해탈이거든요.
그런데 불교는 한 마디로 표현했을 때 해탈인데 그 해탈이 자기 깜냥의 해탈입니다. 자기만한 해탈이지, 해탈이라고 사람마다 다 같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궁극에 가면 하나가 되겠지만, 그러기 전에는 저 앞에서 사람마다 해탈이 다 달랐잖아요. 보살마다 해탈이 다르듯이 우리도 그렇습니다. 불교에 인연해서 1년이 됐든지ㆍ10년이 됐든지ㆍ오래 됐든지 간에, 그것 상관없이 그 나름대로 얻은 그 공덕이 있어요. 그 나름대로 아는 안목이 있어요. 그것을 해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사실은 안목만치 해탈이 되어야 됩니다. 안목만치 자유로워야 되는 겁니다. 불교는 아는 만치 자유로워야 돼요. 불교는 다른 말로하면 한 마디로 해탈이다. 그래서 해탈감을 누리면서 사는 것. 이것이 불교의 궁극목표지요. 그 다음에
4. 如來往昔經劫海(여래왕석경겁해)에, 여래가 지난 날 아주 오랜 세월
에 在於諸有勤修行(재어제유근수행)하사, 참~~ 이 좋은 말인데요.
諸有에 있으면서, 부처님은 옛날 오랜 세월동안 諸有에 있으면서 부지런히 수행했다 그랬습니다. 諸有가 뭡니까? 지옥ㆍ아귀ㆍ축생ㆍ인도ㆍ천도ㆍ아수라. ←이런 육도의 세계를 諸有라고 그럽니다. 선방에서 공부했다는 소리도 없고ㆍ산중에서 공부했다는 소리도 없고ㆍ법당이나 토굴에서 뭘 하면서 공부했다는 소리가 없습니다. 중생과 더불어 아니, 지옥중생ㆍ아귀중생ㆍ아수라중생, ←이 중생으로 더불어 부지런ㆍ부지런히 수행했다. 저는 이 구절을 보고 아주 별도 쳐놨는데요. ‘아~! 바로 이거구나! 이것이 진짜 수행이구나!’ 요즘 복지활동을 많이 하는데, 복지활동 그 자체가 좋은 수행이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것이 뭡니까?
在於諸有勤修行이지요. 부처님이 옛날에 수행하는 것 어디서 뭘 수행했나?
諸有에서 육도중생과 더불어 있으면서 부지런히 수행했다. 참 좋은 말입니다.
種種方便化衆生(종종방편화중생)하야, 가지가지 방편을 써가면서 중생들을 교화해요. 令彼受行諸佛法(영피수행제불법)이로다.
그 중생들로 하여금 모든 불법을 받아서 행하도록 했다. 제가 늘 그러지요? 우리는 어디서 급식활동을 하더라도 “그 밥 한 그릇에 불법을 얹어서 주라ㆍ불법을 얹어서 주라. 아니면 부처님 사진이라도 걸어놓고, 부처님 사진 한 번 눈으로 흘낏 보고 하는 그런 인연이라도 맺어 줘라.” ‘눈으로 한 번 사진 본다고 그것, 그까짓 것이 뭐 무슨 공덕이 있겠나?’ 하지만 그것이 다 자기도 모르게, 보는 사람은, 그 사람 자기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의 저~ 제 8 아뢰아 식 속에 박혀집니다. 자기도 몰라요. 그런데 그것이 박힌다고요.
그런데 그 중에 인연이 딱 맞아 떨어진 사람은 그야말로 필이 촥~~ 오는 겁니다. 느낌이 딱 와가지고 그 때부터 딱 발심해가지고 정말 아주 신심을 일으키는 그런 수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지활동을 하되 “항상 밥 한 그릇에라도 불법을 얹어서 줘라ㆍ무슨 방법이든지 그 상황에 맞춰서 불법을 얹어서 줘라.” 저는 그런 말을 잘하는데 이 보십시오. 種種方便으로 化衆生하여 令彼.
그 중생들로 하여금 모든 불법을, 여러 가지 불법을 받아서 행하게 한다.
그랬지 않습니까? 이 네 번째 게송 너무 좋습니다. 부처님은 수행을 諸有에서 했다. 육도중생과 더불어 살면서 했다. 법당ㆍ법당마다 전부 이것 크게 써서 붙여놓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 다음 다섯 번째 게송,
5. 毘盧遮那具嚴好(비로자나구엄호)하사, 비로자나법신 부처님은 嚴好.
아름다운 장엄을 갖추어서 坐蓮華藏師子座(좌연화장사자좌)하시니,
蓮華藏師子座에 앉아계시니, 아~~ 연꽃. 연꽃으로 아로 새겨진 그 사자좌에 앉아계시는데 一切衆會가 皆淸淨(일체중회개청정)이라. 모든 대중들은 또 거기에 걸맞게 아주 뛰어나고 훌륭해요. 그래서
寂然而住同瞻仰(적연이주동첨앙)이로다. 고요히 법석에 머물면서 함께 부처님을 척~ 우러러보고 있는 모습. 한 번 상상해 봅시다.
6. 摩尼寶藏放光明(마니보장방광명)하야, 마니보배가 광명을 놓아서
普發無邊香焰雲(보발무변향염운)하며, 無邊. 끝없는 향기불꽃구름을 널리 발하며 無量華纓이 共垂布(무량화영공수포)어든, 한량없는 꽃다발을
華纓이라는 것은 꽃다발입니다.꽃다발이 같이 축~~ 드리워져 있다 하는 것입니다. 함께 드리워져 있거든 如是座上如來坐(여시좌상여래좌)로다.
이와 같은 자리 위에 여래가 앉아 있더라. 如是座上에 如來坐더라.
7. 種種嚴飾吉祥門(종종엄식길상문)에, 가지가지로 꾸미고 꾸며놓은 길상한 그 문에 恒放燈光寶焰雲(항방등광보염운)하야, 항상 燈光의 보배 불꽃을 놓아가지고서 廣大熾然無不照(광대치연무불조)어든,
廣大하고 熾然하게 다~ 다 모두 비추거든 牟尼處上하야 增嚴好(모니처상증엄호)로다. 牟尼. 이것은 역시, 화엄경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 하면 化身(화신)부처님인데도 法身(법신)과 같이 봅니다. 法身이나ㆍ化身이나ㆍ또 報身(보신)이나 똑 같이 비로자나나ㆍ노사나나ㆍ석가모니나 똑 같이 하나로 봅니다. 그래서 여기 牟尼 = 부처님께서 그 위에 앉아 계시사 더욱 더 嚴好. 잘 꾸며져 있더라.
8. 種種摩尼綺麗牕(종종마니기려창)과, 가지가지 摩尼로 꾸며놓은 그 아름다운 비단으로 느려놓은 아름다운 그 창과
妙寶蓮華所垂飾(묘보연화소수포)에, 아름다운 보물로써 만들어 놓은 그 연꽃이 잘 꾸며져 있는 곳에 恒出妙音聞者悅(항출묘음문자열)이어든,
거기서 가만히 그냥 보는 데만 그치지 않고, 항상 妙音이 나와요.
아름다운 소리가 나와서 듣는 사람이 다 아주 기분이 좋고, 기쁘게 하거든
佛坐其上特明顯(불좌기상특명현)이로다. 부처님이 그 위에 턱~ 앉아계셔, 특별히 明顯해요. 특별히 뚜렷이 밝게 드러나 있어요.
부처님을 한껏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우리 머릿속에 있는 부처님ㆍ부처님. 3000년 전에 오셔가지고 지금까지 우리에게 끼친 그 혜택ㆍ인류에게 끼친 그 혜택. 부처님생애를 우리가 얼마만치 알든지 간에,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 하면 정말 하늘같은 존재로 우리 머릿속에 다 있습니다. 그런 것을 여기다 이렇게 그린 겁니다. 이것은 어떤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우리 머릿속에 ‘아~ 부처님이라고 하는 분.’ 이라고 하는 이 상념을 그대로 현상 화 해보는 것이지요. 이런 것이 다 상징적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9. 寶輪承座半月形(보륜승좌반월형)이요, 보배바퀴로써 부처님이 앉은 그 법좌를 받들고 있는데, 半月形이다 이 말입니다. 반달같이 척~~ 됐더라. 그 위에 부처님의 자리가 있고, 그 위에 부처님이 앉아계신다는 것이지요.
寶輪承座가 半月形이요 金剛爲臺色焰明(금강위대색염명)이라.
다이아몬드로써 그 받침대를, 부처님이 앉는 받침대를 딱~ 했는데 거기에는 아주 아름다운 빛깔이 아주 밝게 빛나고 있더라.
持髻菩薩常圍遶(지계보살상위요)어든, 계를 가진 보살들이, 상투 髻자로 쭉~~ 나왔었는데 여기는 꽃송이입니다. 이 髻자가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상투 계자ㆍ꽃송이 계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상투도 꽃송이 비슷하잖아요. 상투를 보고 꽃송이를 만들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기는 “꽃송이를 가진 보살이” 이렇게 해야 좋아요. “꽃을 전부 들었다.” 이 말입니다. 꽃을 든 보살들이 쭉~~ 부처님을 둘러서 있어요. 그냥 맨 손으로 밋밋하게 서 있으면 모양이 그렇잖아요. 전부 꽃 한 송이씩 들고 부처님을 에워싸고 있다. 佛在其中最光耀(불재기중최광요)로다. 부처님이 그 가운데 딱~ 계시는데 가장 뚜렷하게 빛이나요. 너무 근사하게 빛난다.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아~ 근사하지요? 이런 것은 연출을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대만 불광사에서 법회 하는 것을 불교TV에서 보면 거의 이런 수준으로, 여기에 설명해놓은 이런 수준으로 그 무대를 꾸미고, 참 아주 근사하게 하잖아요. ‘무슨 내용을 설법 하는가?’ 하고 가만히 들어보면 그 자막이 다 나오니까요.
사실 별 내용은 없는데, 그 설법 법사 척~ 중앙에 앉고ㆍ무대 주변에 잘 꾸미고ㆍ양 옆으로는 스님들이 쫙~ 앉고, 한쪽에는 비구니스님들 한쪽에는 비구스님들 잘 앉아가지고 게송을 설하면 비구니스님이 아주 아름다운 음성으로 게송을 쫙~~ 읊고, 그러면 후렴으로 청중이 다 같이 노래하고요. 법회 진행이 아주 기가 막힙니다. 연구를 많이 했더군요. 기가 막히게 연구했는데 그 원본이 이 겁니다. 원본이 화엄경입니다.
그런데 청중은 그런 환경에 오면ㆍ그런 법회 장소에 오면요?
시시한 것 가지고도 아주 크게 감동이 됩니다. 우리 사바세계 중생은 相見(상견)중생입니다. 모양을 우선으로 보는 겁니다. 모양 보고 그냥 혹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시한 소리도 그냥 아주 감동으로 들리는 겁니다. 그것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뭘 행사를 하더라도 그 행사의 어떤 그 성격에 맞도록 장엄을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持髻菩薩. 꽃송이를 든 보살들이 쭉~~ 둘러서서, 첩첩이 둘러있는데 부처님이 그 가운데 떡~ 계셔요. 最光耀입니다. 가장 빛을 내고 있더라.
種種變化滿十方(종종변화만시방)하야, 가지ㆍ가지 변화가 시방에 가득해
서 演說如來廣大願(연설여래광대원)일새. 부처님이 설법하시고ㆍ또 보살들이 그 어떤 모습을 보이는 것이 끝도 없지요.그리고 여래는 광대한 서원을 말하자면 연설하더라. 중생제도 하겠다고 하는 四弘誓願(사홍서원) 좋습니다.
四弘誓願. 그 외에 온갖 誓願들을 연설하고 있더라.
一切影像이 於中現(일체영상어중현)이어든, 일체 그림자와 같은 모습들이 다 그 가운데에 나타나거든,
如是座上에 佛安坐(여시좌상불안좌)로다. 이와 같은 자리 위에 부처님이 턱~ 편안히 앉아 계시더라. 부처님이 앉아 있는 그 광경을 어떤 형상으로써 이렇게 표현은 했습니다만, 이것은 아까 잠깐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의식 속에ㆍ신심 있는 불자들의 의식 속에 계시는 부처님입니다. 사실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부처님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부족하지요. 여러분의 마음속의 부처님이 어디 이렇게만 계시겠습니까? 더 하지요ㆍ훨씬 더 하지요.
그래서 부처 佛자를 어디다, 예를 들어서 종이에다 하나 써도 그 종이를 함부로 어떻게 처리하지 못해서 쩔쩔 매는 것 아닙니까? 부처 佛자가 써져 있으니까 그 종이를 함부로 못 버린다 이 겁니다. 우리는 꾸겨서 휴지통에 못 버리잖아요.
조금만 상식 있는 불자라면 그것 함부로 꾸겨서 휴지통에 못 버리는 겁니다. 고이 잘 태우든지 해야지요. 우리 머릿속에 있는 부처님은 여기서 그리는 것 보다 사실은 더 합니다. 그런데 과거에 우리 선배들이 부처님에 대한 그런 마음이야 오죽 했겠습니까? 천 배 만 배 더할 것 아닙니까? 경은 이런 것이 참 어렵습니다. ‘이것이 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것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디에 이런 광경이 있었단 말인가?’ 이렇게 따지기로 하면 불교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雷音菩薩의 讚歎(뇌음보살 찬탄)이라. 이 雷音菩薩의 讚歎은 부처님이 앉은 자리하고, 땅을 위주로 그렇게 합니다. 자리하고 땅을 위주로...
앞에서는 부처님이 앉은 모습만을 주로 이야기를 했는데요.
(2) 雷音菩薩의 讚歎(뇌음보살 찬탄)
爾時(이시)에 雷音普震菩薩摩訶薩(뇌음보진보살마하살)이
承佛威力(승불위력)하사
普觀一切道場衆海(보관일체도장중해)하고
卽說頌言(즉설송언)하사대
世尊往集菩提行(세존왕집보리행)에
供養十方無量佛(공양시방무량불)하시니
善逝威力所加持(선서위력소가지)로
如來座中無不覩(여래좌중무불도)로다
香焰摩尼如意王(향염마니여의왕)으로
塡飾妙華師子座(전식묘화사자좌)하니
種種莊嚴皆影現(종종장엄개영현)하야
一切衆會悉明矚(일체중회실명촉)이로다
佛座普現莊嚴相(불좌보현장엄상)하야
念念色類各差別(염념색류각차별)하니
隨諸衆生解不同(수제중생해부동)하야
各見佛坐於其上(각견불좌어기상)이로다
寶枝垂布蓮華網(보지수포연화망)이어든
華開踊現諸菩薩(화개용현제보살)하야
各出微妙悅意聲(각출미묘열의성)하야
稱讚如來坐於座(칭찬여래좌어좌)로다
佛功德量如虛空(불공덕량여허공)이여
一切莊嚴從此生(일체장엄종차생)이라
一一地中嚴飾事(일일지중엄식사)를
一切衆生不能了(일체중생불능료)로다
金剛爲地無能壞(금강위지무능괴)라
廣博淸淨極夷坦(광박청정극이탄)이어든
摩尼爲網垂布空(마니위망수포공)하야
菩提樹下皆周遍(보리수하개주변)이로다
其地無邊色相殊(기지무변색상수)하니
眞金爲末布其中(진금위말포기중)이라
普散名華及衆寶(보산명화급중보)하야
悉以光瑩如來座(실이광영여래좌)로다
地神歡喜而踊躍(지신환희이용약)하야
刹那示現無有盡(찰나시현무유진)이라
普興一切莊嚴雲(보흥일체장엄운)하야
恒在佛前瞻仰住(항재불전첨앙주)로다
寶燈廣大極熾然(보등광대극치연)하야
香焰流光無斷絶(향염류광무단절)이라
隨時示現各差別(수시시현각차별)하니
地神以此爲供養(지신이차위공양)이로다
十方一切刹土中(시방일체찰토중)에
彼地所有諸莊嚴(피지소유제장엄)을
今此道場無不現(금차도량무불현)하시니
以佛威神故能爾(이불위신고능이)로다
爾時(이시)에, 그 때에
雷音普震菩薩摩訶薩(뇌음보진보살마하살)이 承佛威力(승불위력)하사,
부처님의 위력을 받들어서 普觀一切道場衆海(보관일체도장중해)하고,
널리 일체 道場衆海를 관찰하고 卽說頌言(즉설송언)하사대,
게송을 설해 말하되,
1. 世尊往集菩提行(세존왕집보리행)에, 세존께서 과거에 보리 행을 모을 때, 菩提行 = 자비와 지혜라고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면 자비와 지혜, 지혜와 자비입니다.그 때에 그 菩提行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뭐냐?
供養十方無量佛(공양시방무량불)이다. 이랬습니다. 시방의 한량없는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 이것이 菩提行이다. 여기는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十方無量부처님은 결국은 모든 사람 내지, 화엄경의 안목으로 보면 모든 존재ㆍ두두 물물입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눈여겨 봐야할 것은 사람이지요. 사람입니다. 사람을 부처님으로 공양하는 것. 이것이 세존이 과거에 닦은 수행이다 하는 그런 뜻이지요.
善逝威力所加持(선서위력소가지)로, 善逝 = 부처님을 善逝라고 표현하지요. 이 善逝라는 말이 여래 10호 중에 저는 제일 좋다고 봅니다.
“선서시여!” 하는 경전의 그런 표현이 많습니다. “선서시여!” 10호를 다 이야기 하지 않고 善逝를 제일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선서가 무슨 뜻인가 하니
“행복한 분이시여!ㆍ잘 사시는 분이시여! 성공한 인생이시여!” 글자대로 해석하면 “지금 잘 가고 계시는 분이시여!” 이 뜻입니다.
“인생을 잘 보내고 계시는 분!” 그 뜻입니다. 갈 逝자 아닙니까?
물이 흘러가듯이 현재 “흘러가고 있는 분ㆍ잘 흘러가고 있는 분.” 그런 뜻이 이 善逝라는 뜻입니다. 참~ 아주 좋은 표현이지요.
“부처님은 일생을 잘 사시는 분이다.” 현재 정말 “잘 사시는 분이다.”
진리를 제대로 깨달으신 분이니까 한 순간ㆍ한 순간을 제일 값있게 사실 것 아닙니까? 도둑놈은 하루를 사는데 도둑질 하는 것으로서 하루의 인생을 보내고, 사기 치는 사람은 하루의 인생을 사기 치면서 인생을 보낼 것이고, 봉사가 인생의 최대의 목표라고 생각 하는 사람은ㆍ최고의 가치라고 생각 하는 사람은 봉사 하면서 하루를 보낼 것이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이 자신의 재산이니까 깨달음의 안목으로 하루의 인생을 보내니까 제일 잘 보내는 분이지요. 善逝.
정말 잘 보내는 분이지요. 그래 인생을 제일 잘 보낸 분입니다.
왜냐? 깨달음의 안목으로 인생을 보냈으니까요. 그 안목만치 사는 겁니다.
자기 안목만치 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꾸 견문을 넓히고ㆍ또 이 성인의 가르침, 이런 뛰어난 가르침을 못 따라가더라도 자꾸 접하는 것. 이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善逝의 威力으로써 加持한 바로 如來座中無不覩(여래좌중무불도)로다.
부처님이 자리에 앉아 계시는데 그 가운데서 모두 다 본다. 못 본 사람이 없다.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사람이 아무리 수억 만 명이 모여도 부처님은 다 본다. 그런 뜻입니다.
2. 香焰摩尼如意王(향염마니여의왕)으로, 향기 나는 불꽃. 그와 같은 어떤 마니구슬. 摩尼는 여의주지요? 如意. 중복된 표현입니다.
香焰摩尼如意王으로써 塡飾妙華師子座(진식묘화사자좌)하니,
塡 = 아주 편안하게ㆍ아주 안정되게. 아름다운 꽃 사자좌로써 잘 꾸몄으니
種種莊嚴皆影現(종종장엄개영현)하야, 가지가지 장엄이 다 그림자처럼 나타나서 一切衆會悉明矚(일체중회실명촉)이로다. 일체 대중들이 부처님을 다 밝게 볼 수 있다.
3. 佛座普現莊嚴相(불좌보현장엄상)하야, 부처님이 부처님자리에서 장엄한 모양을 다 널리 나타내서, 念念色類가 各差別(염념색류각차별)하니,
念念에, 순간순간에 그 빛깔, 그 색깔의 종류들이 각각 差別해요. 계속 바뀐다 이 뜻입니다. 한 가지 색으로 가만히 있으면 무슨 재미가 있나요?
계속 바꾸여야지요. 그 부처님자리를 꾸민 그 장엄이 무슨 장치를 어떻게 해 놨는지 계속 순간순간 바뀌는 겁니다. 念念色類가 各差別한다 했잖아요.
念念色類가... 그러니까 반찬도 가끔 바꾸어가면서 먹어야 되고ㆍ그 불단도 가끔, 신도님들을 생각해서 가끔 변화를 줘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향로나ㆍ촛대 같은 것도 몇 벌 다른 걸로 준비해 놨다가 한 번씩 바꿔주는 겁니다. 여름마다 한 번씩 바꾼다든지ㆍ일주일에 한 번씩 바꾼다든지 ‘야~, 우리스님 이 향로 또 새로 샀는가? 또 바뀌었네ㆍ또 바뀌었네.’ 한 세 벌만 놔두면 될 것 아닙니까? 그렇게 계속 변화를 주면 좋습니다. 보세요. 여기는 念念色類各差別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순간순간ㆍ1초마다 바뀐다 이것이 이 뜻입니다. 화엄경이 참~~ 량도 많지만, 구석구석이 이런 주옥같은 가르침의 배울 것이 참 많습니다.
隨諸衆生解不同(수제중생해부동)하야, 중생들이 각각 다르잖아요.
중생들을 따라서 그 이해가 같지 않아요. 제가 부처님을 설명하지만, 여러 스님들의 머릿속에 있는 부처님은 또 다를 겁니다.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各見佛坐於其上(각견불좌어기상)이로다. 부처님이 그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각각 다르게 본다. 다 다르게 본다 이겁니다. 이해가 다르니까요. 그 다음에
4. 寶枝垂布蓮華網(보지수포연화망)이어든, 보배 나무 가지가 垂布해서, 드리운 연꽃그물이 있거든 華開踊現諸菩薩(화개용현제보살)하야, 꽃이 피어가지고서 쑥~ 높이 나타나요. 踊現 하는 것은 꽃이 피면서 쑥~ 위가, 연꽃이 대개 그렇잖아요. 위로 나타나서, 모든 보살들을 그렇게 나타낸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各出微妙悅意聲(각출미묘열의성)하야, 각각 아름다운 생각을 기쁘게 하는ㆍ뜻을 기쁘게 하는 마음에 드는 그런 소리를, 각각 미묘한 소리를 내어
서 稱讚如來坐於座(칭찬여래좌어좌)로다. 여래가 자리에 앉아 계신 것을 칭찬하더라. 그 다음에 그 땅이 견고해서 금강. 다이아몬드로 땅이 되었다.
화엄경 첫 구절에 그런 것이 나왔었습니다.
5. 佛功德量이 如虛空(불공덕량여허공)이여, 부처님의 功德量이 허공처럼 그렇게 많아, 一切莊嚴從此生(일체장엄종차생)이라. 일체 장엄이 전부 여기서부터 생겼다. 그 여기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一一地中에 嚴飾事(일일지중엄식사)를, 낱낱 땅에 꾸민 일들을
一切衆生이 不能了(일체중생불능료)로다. 일체 중생들이 다 알지 못하더
라. 이렇게 그 땅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6. 金剛爲地하야 無能壞(금강위지무능괴)라. 그랬잖습니까?
다이아몬드로 땅이 되어서 능히 무너뜨리지를 못하더라.
廣博淸淨極夷坦(광박청정극이탄)이라. 그랬습니다.
넓고 넓으며 청정해서 지극히 평탄하더라. 아주 편안하고 평탄하더라.
摩尼爲網垂布空(마니위망수포공)하야, 마니주 구슬로써 그물이 되어가지고 허공에서 확~ 펼쳐가지고내렸어요. 그 당시로서 꾸밀 수 있는 표현은 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菩提樹下에 皆周遍(보리수하개주변)이로다.
보리수 밑에 쭉~~ 두루두루 펼쳐놨더라. 이런 이야기인데요.
처음에 始成正覺(시성정각)하시니. 부처님께서 비로소 정각을 이루시니
그 땅은 堅固(견고)하야 金剛所成(금강소성)이라. 그 땅은 견고해서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졌더라. 그 이야기를 詩형식을 통해서 여기다 그대로 다 해놨습니다. 말이 조금 다르지만 똑 같이 해놨습니다. 그런데 거기는 사실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다이아몬드는 하나도 없습니다. 있을 까닭도 없고요. 저는 사실 이 생각이 나서 거기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에 갔을 때, 주변을 둘레둘레 살펴보기는 했습니다. 기대는 안했지만 살펴보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밖으로ㆍ밖으로 나가도 그저 척박한 땅일 뿐이지 다이아몬드는 있을 수가 없어요. 이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어떤 정신세계를 이렇게 펼쳐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주 기분 좋을 때,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지요.
그런 것을 미루어서 이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진실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부처님의 정신세계에서는 이것은 진실입니다. 이것은 절대 진실이지 거짓은 아닙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실이다.” 라고 이렇게 알면 절대 안 됩니다. 사실하고 진실하고는 다릅니다.
‘스님들이 저한테 무슨 감정이 있어가지고 어디 가서 막 선전한다.’ 면 그것은 그 사람이 본 진실이지 사실은 아닙니다. 사실은 없어요.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은 없어요. 사실과 진실을 달리 봐야 되는데 그것을 같이 본다고요. 이러한... 특히 경전에서, 우리가 경전을 이해하는 열쇠가 그 겁니다. ‘아~, 이것은 부처님의 입장에서 이것은 진실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입장에서 정말 진실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것이 있느냐?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이해하면 경전 이해 못 하는 것이지요.
7. 其地無邊色相殊(기지무변색상수)하니, 그 땅은 끝이 없고 색상이 아주 특수하니 眞金爲末布其中(진금위말포기중)이라. 이것 보세요.
眞金으로써 가루를 만들어가지고, 가루 末자입니다. 眞金으로써 가루를 만들어가지고 그 땅에다가 펼쳐 놨어요.
普散名華及衆寶(보산명화급중보)하야, 名華. 아주 이름 있는 꽃과 아름다운 여러 가지 보배들을 널리 흩어가지고서
悉以光瑩如來座(실이광영여래좌)로다. 모두들 다 여래의 자리를 빛나게 했더라. 그런데
8. 地神이 歡喜하야 而踊躍(지신환희이용약)하니라. 지신이 뛸 듯이 아주 기뻐하고 있어요. 刹那示現無有盡(찰나시현무유진)이라.
찰나에 지신들이 그 기뻐하는 모습을 나타내는데 끝이 없어요.
普興一切莊嚴雲(보흥일체장엄운)하야, 그래서 일체 莊嚴雲들을 지신들이 널리 일으켜 가지고서 恒在佛前瞻仰住(항재불전첨앙주)로다.
항상 부처님 앞에 있으면서 우러러 보고 있더라.
9. 寶燈廣大極熾然(보등광대극치연)하야, 보배등불이 넓고 커서 지극히 熾然해, 환하게 밝게 타오르고 있다 이 말입니다. 불이 없을 수가 없지요.
寶燈이 廣大해서 極熾然이라. 환하게 타오르고 있다. 그런데
香焰이 流光無斷絶(향염류광무단절)이라. 거기서 또 무슨 끄름이 나는 것이 아니라, 향기로운 불꽃이 그냥 빛을 흘려보내면서 끊어지지 않고 끝없이ㆍ끝없이 그 빛이 쏟아지더라.
隨時示現各差別(수시시현각차별)하니, 때에 따라서 示現하는 것이, 때마다 示現하는 것이 각각 차별하니
地神以此爲供養(지신이차위공양)이로다. 지신들이, 부처님이 성도한 그 부다가야 그 자리를, 그 땅을 지키는 지신들이 이것으로 공양을 삼았어요.
불을 환하게 비춰서 대중들이 모이고ㆍ가고ㆍ오고하는데 장애가 없도록 그렇게 해주는 일을 지신들이 했다는 것입니다.
10. 十方一切刹土中(시방일체찰토중)에, 시방 일체 모든 세계 속에
彼地所有諸莊嚴(피지소유제장엄)을, 그 땅에 있는 모든 장엄들을
今此道場無不現(금차도량무불현)하시니, 지금 이 도량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것이 없어, 十方세계 一切刹土에 있는 것을, 거기에 모든 장엄들을, 그 땅에 있는 모든 장엄들을 이 도량. 부처님이 성도하신, 성도하신 그 도량에서 다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도 一微塵中含十方이지요. 또 사실은 전부 연기로 되어 있고, 그것을 法界緣起(법계연기)라. 이렇게 하는데, 법계에 있는 모든 존재는 전부 연기로 되어 있다.
以佛威神故能爾(이불위신고능이)로다. 부처님의 위신력인 까닭에 짐짓 능히 이러하더라. 그것이 오직 “부처님의 위신력” 그렇게 했는데 그 위신력도 결국 우리의 한마음을 떠나 있는 것은 아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