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16년 사도행전 제7강
순교자 스데반
말씀/행6:8-7:60
요절/행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오늘은 순교자 스데반 이야기입니다. 스데반은 초대교회 첫 순교자로 복음을 영접한지 얼마 안되어 순교합니다. 7장 2절에 ‘부형들이여’ 부른 것을 보면 나이도 젊습니다. 젊은 나이에 메시지 한 번 전하고 순교한 것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의 순교는 예루살렘에 갇혀있던 예수의 복음이 전 세계로 전파되는데 기폭제가 됩니다. 지금까지 초대교회는 예루살렘에만 국한되었고 유대인들로만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복음은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전파됩니다. 또한 스데반이 전한 메시지와 순교는 예수님을 대적하던 사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 시간 스데반의 순교를 살펴보면서 순교자적 신앙이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스데반 (6:8-15)
8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스데반은 사도들을 대신해 구제하는 일을 섬기도록 세움 받은 일곱 일꾼 중 한 사람입니다. 3절에 보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5절에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고 10절에도 ‘지혜와 성령’으로 말한다 했습니다. 7장 55절은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라고 했습니다. 이를 모두 합치면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와 믿음과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의 공식적인 직분은 ‘구제부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제뿐만 아니라 백성들 사이에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본래 예수님께서 행하셨고 후에는 사도들이 행했습니다. 스데반은 공식적인 직분이 사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처럼 살았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처럼 살았습니다. 어떤 직분을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목자라는 직분을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자처럼, 사도들처럼, 예수님처럼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데반은 성령 충만함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스데반의 삶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른바 ‘자유민의 회당’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유민들은 포로로 이방 땅에 끌려갔다가 로마에 의해 해방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와 자기들의 회당을 형성한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그들은 헬라파 유대인이었습니다. 스데반도 헬라파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스데반이 예수의 복음을 전하자 어떤 자들이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했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사람들을 매수해 거짓 증인을 세워 스데반을 체포당하게 했습니다. 거짓 증인들은 스데반이 ‘거룩한 곳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한다 했습니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함을 우리가 들었노라(14)” 거짓 고소했습니다. 성전 예배와 율법은 유대교를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을 헐고 율법을 고치는 것은 유대교를 무너뜨리는 일이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체포해 심문했을 때도 동일한 내용으로 고소했습니다. 예수님도 공회에서 동일한 죄목으로 사형 판결을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스데반도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게 되지 않을까요? 스데반은 이미 이런 위협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15). 이것은 공회에 모인 사람들, 즉 적대자들이 본 스데반의 얼굴입니다. 천사와 같은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요? 거짓 증언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나 분노가 없는 사랑, 적대자들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평안, 조금의 의심도 없는 확신 등 이런 내면의 상태가 그대로 드러난 얼굴이 아닐까요? 그들 말대로 스데반이 하나님을 모독했다면 결코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데반에 대한 혐의를 풀고 석방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심문합니다.
Ⅱ. 스데반의 메시지 (7:1-53)
대제사장의 심문에 스데반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거나 그들의 고소가 거짓임을 변론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을 인용해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합니다.
첫째. 아브라함, 요셉, 모세 (2-43)
2절을 보십시오. 메소보다미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하란을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했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될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100세가 될 때까지 약속의 자녀를 얻지 못했습니다. 100세가 되었을 때 그의 몸은 늙었고 아내 사라의 태는 말라 도저히 자식을 낳을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바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약속의 자녀 이삭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성취될 작은 실마리에 불과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해변의 모래처럼 많아질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의 후손들이 400년 동안 이방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다 가나안에 돌아와 차지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후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은 약속의 증표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모두 몸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증표를 몸에 새긴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비롯한 조상들에게 약속을 주셨고 그 약속에 기초해 약속을 이루어오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예수님을 통해 본격적으로 성취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당시 약속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성취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나 더디게 성취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몸에 하나님의 약속의 증표를 새기고 있었지만 그 약속을 믿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스데반이 살던 시대에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몸에 약속의 증표인 할례를 행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에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에 신실하셨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고 약속이 성취될 가능성이 희박하더라도 반드시 약속하신 것은 성취하시는 분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예수님을 이 땅에 메시야로 보내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에 근거해 구원역사를 이루어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옛 약속이 무엇이며 또 우리에게 하신 새 약속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말씀을 제대로 믿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아브라함은 불가능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인정해주셨습니다(창15:6).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을 신앙생활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문자 그대로 잘 지키고자 했을 뿐 하나님의 마음과 약속은 제대로 헤아려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대로 보내신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죄를 범하고 맙니다.
또 스데반은 유대인들의 여러 조상들이 형제 요셉을 ‘시기해’ 애굽에 종으로 판 일을 강조합니다(9). 그들의 조상들은 시기심으로 완악해져 요셉을 구덩이에 빠뜨려 죽이려하고 그것도 모자라 애굽에 종으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시기심에 눈멀어 쓸모없다고 버렸던 요셉을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생명의 구원자(창50:20)’로 삼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을 인류의 구원자로 삼으셨음을 상기시킵니다.
스데반은 특히 모세와 관련해 조상들의 거절과 불순종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 애굽 사람들에게 거절당했습니다. 그도 이스라엘의 다른 아이들처럼 버려져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살리셔서 바로의 딸의 아들이 되게 하여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나이 사십이 되어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돌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동족을 살리고자 애굽 사람을 쳐죽였습니다. 그때 모세는 동족들이 자신의 행동을 보고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주실 거야” 깨달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25). 그러나 스데반은 조상들이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이런 모세를 어떻게 거절했다고 말합니까? 27,28절을 보십시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오? 어제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오늘은 나를 죽일 참이오?” 이 말을 듣고 모세는 도망해 미디안 광야에서 나그네로 40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척했던 모세를 하나님이 다시 보내셨음을 강조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소?’ 하면서 거절한 바로 그 모세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세를 지도자와 해방자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이 모세’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고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많은 기사와 표적을 행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너희 가운데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워 주실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입니다(37). 이 모세가 시내 산에서 그에게 말씀을 전해 주던 천사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준 사람입니다(38). 스데반은 ‘이 모세’, ‘이 사람’을 반복해 사용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역하고 배척했던 모세를 하나님이 얼마나 귀하게 쓰셨는지 강조합니다.
이상에서 스데반은 아브라함, 요셉, 모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약속대로 신실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거부당한 자들을 택해 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이나 모세를 거절한 당사자는 바로 유대인들의 조상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택함 받은 자’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 자부심의 핵심에는 모세가 전해 준 ‘율법’과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말하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 드러난 유대인들의 모습은 그 자부심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들은 모세조차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거부해 버린 요셉과 모세를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과 그들에게 주신 율법과 성전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은혜를 받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스데반은 자신의 설교를 듣고 있는 자들이 이 사실을 깨닫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택함 받은 것은 나의 공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들을 수없이 거역하고 거부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선택받고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거절했던 모세를 하나님이 택하셔서 ‘지도자’와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세에게 마땅히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모세에게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마음이 애굽으로 향했습니다(39). 모세를 거절했던 그들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그 앞에 절하는 우상 숭배자들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41).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섬겼습니다(42). 선지자 아모스의 지적대로 그들은 아이들을 희생 제물로 불태워 드리는 암몬의 신 몰록을 섬기고 앗수르의 신 ‘토성’을 섬겼습니다(42,43). 하나님도 마침내 이들을 외면하셨고 그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됩니다.
이상에서 스데반은 하나님이 구원자로 세우신 모세를 배척하고 불순종한 조상들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다윗 왕보다 더 위대하게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모세를 조상들은 영적무지와 교만 때문에 배척하고 불순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조상들에게 거절당한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우시고 그를 통해 놀라운 구원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이와 같이 스데반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가 예언한 바로 ‘나와 같은 한 선지자’인 예수님을 배척했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이 행하고 있는 죄악은 과거 조상들이 행한 죄악과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을 파괴한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게 말하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자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임으로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한 것입니다.
둘째. 성전 (44-50)
스데반은 모세와 더불어 성전에 대해 말합니다. 성전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48-50절을 보십시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지극히 높고 크신 분이기 때문에 성막이나 성전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요 땅이 하나님의 발판이라는 말은 하나님은 온 우주의 어디에도 안 계시는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의 존재를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하나님은 메소보다미아에도 계셨고 애굽에도 계셨고 광야에도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서 있는 광야를 거룩한 땅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또 스데반은 38절에서 ‘광야교회’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때는 성막조차 세워지지 않았기에 이것은 어떤 장소나 건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요2:19)” 말씀하신 것도 건물이 아닌 예수님 자신이 성전 됨을 일깨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이 그토록 신성시했던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지금은 그 한 쪽 담벼락만(통곡의 벽) 남았습니다. 그 앞에서 유대인들은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과연 성전이 사라진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공동체에 여전히 임재해 계십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임재하시는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어떤 건물이나 사람이 지정한 어떤 장소에 제한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임재해 계신다는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하나님은 교회건물 안에만 갇혀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도 함께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드리는 이 시간뿐만 아니라 삶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스데반은 긴 설교의 결론으로 “우리는 모세가 우리에게 전해준 율법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우리에게는 성전이 있어. 성전이 있는 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편이야”라는 강한 유대적인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 아주 강한 말로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51-53절을 보십시오. 결과적으로 누가 율법과 성전을 거스른 것입니까? 조상들과 같이 지금 그들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오시리라고 예고했던 메시야 예수님을 죽인 그들이 율법과 성전을 거스른 것입니다.
Ⅲ. 스데반의 순교 (54-60)
스데반의 설교에 그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스데반이 하는 말을 듣고 몹시 화가 났던 차에 스데반이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본다고 말하자 ‘꼭지’가 돌아버렸습니다. 그들은 이성을 잃고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성 밖에 끌고 나가 돌을 던졌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기도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은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과 동일한 기도를 합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살다가 예수님처럼 죽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그의 인생은 참 비참해 보입니다. 예수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것도 마지막 설교 한편 남기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도 교회를 여럿 세우지도 못했습니다. 설교를 통해 단 한 사람도 회개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돌에 맞아 비참하게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또 그로 인해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손해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형들의 시기로 팔려간 요셉을 생명의 구원자로 세우신 것처럼, 백성들에게 거절당한 모세를 그들의 구원자로 쓰신 것처럼,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십자가에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세우신 것처럼, 스데반의 순교를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지역에 전파되도록 쓰셨습니다. 또 안디옥교회가 개척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11:19). 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여겨지는 사도바울을 세우는 일에 밑거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초대교회 교부였던 터툴리안은 ‘그리스도인들이 흘리는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 했습니다. 씨앗은 땅에 심겨지면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흘리는 피는 단 한 방울도 헛되지 않고 선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한다 해서 순교하는 시대에 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순교는 나와는 먼 얘기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터툴리안과 동시대에 살았던 코모디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피를 흘리는 신자들 뿐 아니라 피를 흘리지 않더라도 끝까지 사랑과 겸손과 인내와 그리스도의 모든 덕을 지키는 신자는 모두 순교자다.”
사람들은 업적과 성과에 관심이 많습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어떤 큰일을 했는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다른데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업적과 성과를 남겼느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했느냐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요셉처럼,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스데반처럼 비록 빨리 약속의 말씀이 안이루어지고 사람들에게 거절당할 지라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쓰십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죽음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자하는 사람은 날마다 ‘순교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내 자아와 욕심이 죽지 않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도 하나님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하나님께 믿음으로 헌신하고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순교자적인 삶을 통해 생명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역사가 흥왕하게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