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榮州 鳳凰山 浮石寺 柱聯
(영주 봉황산 부석사 주련)
경북 영주시 부석사로 345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에 있는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初祖 義湘의상 이래
그 전법傳法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
의상은 676년 부석사에 자리 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법을 이은 법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부석사의 창건을 정리한 역사적 기록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비석에 쓰인 몇 문자나 절을 재건한 기록과 보수한 기록 등만이 전한다.
부석사 동쪽 언덕에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가 있는데,
이 비의 건립 연대는 명문銘文의 마멸이 심하여 확인할 길이 없으나
국사가 입적하신 이듬해인 고려 문종 8년 (1054)으로 추정된다.
비문에는 의상 당대의 부석사의 모습과 그의 법손들이 줄곧 이곳에
주석해 온 것을 알려 주는 귀중한 내용이 담겨있다.
한편 부석사가 세워지기까지에 관해 ‘삼국사기’에는 고승 의상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전하며
삼국유사에는 “의상이 태백산에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고
대승교 (대승불교)를 포교하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신라 문무왕 16년 (676) 2월에 의상대사가
문무왕이 뜻을 받들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상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소백산이나 태백산 등지에 초가를 짓고
불경을 강의하거나 토굴에서 화엄세계의 심오한 뜻을 닦은 것으로 보아
7세기 후반의 부석사는 의상의 영정이 있는 조사당을 중심으로
초가집이 몇 채 있는 아주 청빈한 양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부석사를 중수한 기록은 자주 발견된다.
조선 성종 21년(1490)에 조사당을 중수하였고
성종 24년(1493)에 조사당에 단청을 하였다.
명종 10년(1555)에 화재로 인해 안양루가 소실되었으며
선조 6년(1593)에는 조사당 지붕을 개수하였다.
선조 9년(1596)부터 11년까지 석린 스님이 안양루를 중건하였다.광
해군 3년(1611)에는 폭풍우로 인해 무량수전의 중보가 부러져 중수하였고
경종3년(1723)에는 무량수전 본존불의 금색을 다시 했다.
영조 22년 (1746)에 화재로 승당, 만월당, 서별실, 만세루,
범종각 등이 소실되었으나 그 이듬해에 중수하였고
영조 44년(1765)에는 무량수전 본존불의 금색을 다시 했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는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해체 수리하였는데
이때 허리 부분이 잘린 석룡石龍이 노출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량수전 서쪽에 있던 취원루聚遠樓를 동쪽으로 옮기고
취현암醉玄庵이라 한 것도 이때라고 한다.
1967년에 부석사의 동쪽 옛 절터에서 쌍탑을 옮겨 범종각 앞에 세웠고
1969년에는 무량수전 기와를 갈았으며 1977년부터 1980년에 걸쳐
전체적으로 정화하면서 일주문 ‚ 천왕문 ‚ 승당 등을 신축하였다.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서 밝히는 경북 영주 부석사는
창건 후 의상은 이 절에서 40일 동안의 법회를 열고
화엄의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설법함으로써
이 땅에 화엄종을 정식으로 펼치게 되었다.
특히, 의상의 존호를 부석존자浮石尊者라고 칭하고
의상의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모두 이 절과의 연관에서 생겨났다.
의상 이후의 신라 고승들 가운데 혜철惠哲이 이 절에서 출가하여
‘화엄경’을 배우고 뒤에 동리산파桐裏山派를 세웠고,
무염無染 또한 이 절에서 석징釋澄으로부터 ‘화엄경’을 배웠으며,
절중折中도 이 절에서 장경藏經을 열람하여 깊은 뜻을 깨우쳤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이 절을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고 하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서 부석浮石의 향음鄕音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또 고려 정종 때의 결응決凝은 이 절에 머무르면서 대장경을 인사印寫하고,
절을 크게 중창한 뒤 1053년 (문종 7)에 이 절에서 입적하였다.
1372년 (공민왕 21)에는 원응국사圓應國師가 이 절의 주지로 임명되어
퇴락한 당우를 보수하고 많은 건물들을 다시 세웠다.
그 뒤 조선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1580년(선조 13)에
사명당泗溟堂이 중건하였으며, 1746년(영조 22)에 화재로 인하여
추승당秋僧堂, 만월당(滿月堂, 서별실(西別室, 만세루(萬歲樓, 범종각
등이 소실된 것을 그 뒤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부석사는 소백산 동북쪽에 이어진 봉황산의 약간 경사진 산기슭에
아홉 여개의 단을 쌓아 작은 평지를 만들고 조성된 평지에
기起-승乘-전轉-결結로 부처의 세계로 입문하는 전각들을 배치하여
일주문-천왕문-범종루-안양루로 이어지는 관문을 통하여
비로소 극락보전인 무량수전無量壽殿에 도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국보 제18호인 부석사 무량수전과 국보 제19호인
부석사 조사당浮石寺祖師堂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인
범종루梵鐘樓, 원각전圓覺殿, 안양루安養樓, 선묘각善妙閣, 응진전應眞殿,
자인당慈忍堂, 좌우요사左右寮舍, 취현암醉玄庵, 성보전시관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범종루와 안양루는 대표적인 누각이고,
원각전, 응진전, 자인당은 법당이며, 선묘각은 부석사의 창건연기와
인연이 있는 선묘의 영정을 봉안하여둔 곳이다.
범종루는 사찰의 중문中門에 해당하며, 본전을 향하는 입구 쪽에서는
팔작지붕을 하고 반대방향은 맞배지붕이므로 일반 사찰건축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성을 보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으로서,
누각에는 ‘鳳凰山浮石寺봉황산부석사’라는 편액이 있을 뿐 범종은 없다.
무량수전의 건축 시기는 적어도 고려 우왕 시대인 1376년 이전으로 보는데,
목조건물이 650여년 세월을 견디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는 것은 기적이다.
이 무량수전은 아미타여래 불상을 모신 부석사의 중심 건물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두 번째로 오래되었으며,
날아갈 듯 치켜 올라간 기와지붕은 물론, 멋스러운 창문과 벽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건물의 조화와 안정을 위해 중간 부분을
약간 불룩하게 만든 ‘배흘림기둥’은 부석사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다.
이 무량수전에 걸린 ‘무량수전無量壽殿’ 편액이 바로
고려 공민왕이 쓴 어필御筆이다.
이 편액은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의 침략으로 인해 안동으로
피난해 있을 당시에 안동에서 가까운 영주 부석사를 찾아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다시는 이러한 침입이 없도록
막아줄 것을 기원하는 한편 부석사의 무량수를 비는 뜻’에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금의 글에 낙관이 없었던 관례에 따라
이 편액에도 낙관은 없으나, 어필을 상징하는 금자金字로 되어있다.
고려 공민왕이 개성으로 귀경한 것이 1363년 무렵이고
무량수전이 1376년에 중건된 것으로 미뤄볼 때,
편액은 이전에 걸려 있던 것을 건물 중수 후에
다시 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편액은 대략 650여 년 동안
한 자리에 걸려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실제 현존 사찰 편액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무량수전 앞에는 안양루를 오르는 석단이 2단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대석단과 합하여 상·중·하의 셋으로 보는 가람 경영방법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녹유전은 가로와 세로가 14㎝의 정방형 기와로서 두께는 7㎝이며,
벽돌 표면에 0.3㎜ 정도의 녹유를 발라 광택을 내게 한 신라시대의 유품이다.
이것은 ‘아미타경’에 극락세계의 땅이 유리로 되어 있다고 한 것에 입각하여
무량수전의 바닥에 깔았던 것이다.
선비화仙飛畵는 의상이 사용했던 지팡이를 꽂아 놓았더니 살아난 것이라 하는데,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의상이 죽을 때
“내가 여기를 떠난 뒤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으리라.”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영주 부석사를 대표하는 국보, 보물 및 문화재는 다음과 같다 :
국보 제17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45호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6호 조사당벽화보물 제249호
삼층석탑보물 제255호 당간지주보물 제735호
고려목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 원융국사비 등
* 참조로, 영주 부석사 범종루 누각 편액에는
“鳳凰山浮石寺봉황산부석사”라 쓰여 있고
일주문 편액에는 “太白山浮石寺태백산부석사”로 쓰여 있다.
그리고 “浮石寺부석사”라는 이름의 사찰은 경북 영주瀛州 태백산 지맥인
봉황산鳳凰山과 충남 서산瑞山 조비산鳥飛山에도 있다.
1. 浮石寺 無量壽殿 禮典 柱聯 :
(부석사 무량수전 예전 주련)
佛身普遍十方中 (불신보변시방중)
부처님 몸 온 세상에 두루 하시니
三世如來一體同 (삼세여래일체동)
삼세여래가 모두 한 몸이시라
廣大願雲恒不盡 (광대여래항부진)
크나큰 원력 구름 같이 항상 다 함이 없고
汪洋覺海渺難窮 (왕양각해묘난궁)
넓고 넓은 깨달음의 바다 아득하여 끝이 없네
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붕재하방)
아미타불이 어느 곳에 계신가
着得心頭切莫忘 (착득심두체막망)
마음 간직하여 절대 잊지 말 것이니
2. 浮石寺 地藏殿 柱聯 :
(부석사 지장전 주련)
地藏大聖威神力 (지장대성위신력)
지장보살님의 위신력威神力은
恒河沙劫說難盡 (항하사겁설난진)
몇 억 겁劫을 두고 다 설명하기 어려우니
見聞瞻禮一念間 (견문첨례일념간)
보고 듣고 우러러 예배하는 일념 사이
利益人天無量事 (이익인천무량사)
사람과 하늘에 이익 되는 일 무량하여라
3. 浮石寺 說法殿 柱聯 :
(부석사 설법전 주련)
白衣觀音無說說 (백의관음무설설)
백의관음은 말없이 설법 하시네
南巡童子不聞聞 (남순동자불문문)
남순동자는 들은바 없이 듣노라
甁上綠楊三際夏 (병상록양삼제하)
화병 위 푸른 버들은 늘 여름이요
巖前翠竹十方春 (암전취죽십방춘)
바위 앞 푸른 대나무는 어디나 봄일세
*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는 붓다와 보살을 모신 건물을
통상 ‘전殿’이라고 부르고, 붓다와 보살 외
다른 분을 모신 건물을 ‘각閣’이라고 부른다.
자세히 분류해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
①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신 법당이다.
대웅전은 절의 중심이 되는 전각으로, ‘법력法力으로
세상을 밝히는 영웅을 모신 전각’ 이라는 뜻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세상을 법으로 정복한 위대한 영웅인
‘대웅大雄’이라 한 데서 유래한다.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의 좌우에 협시 하는 분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또는 십대제자 중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모신다.
삼세불三世佛이나 삼신불(三身佛 : 법신불.보신불.화신불)을 모시기도 한다.
삼세를 통하여 불법으로 교화하는 삼세불은 현세의 석가모니불,
과거의 연등불인 제화갈라보살, 그리고 미래불인 미륵보살이다.
삼신불인 경우 석가모니불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봉안하기도 하며
이럴 경우 격을 높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부른다.
② 대적광전大寂光殿
대적광전의 본존불은 비로자나불이다.
비로자나불은 연화장세계의 교주이신데,
그분이 계시는 연화장세계는 진리의 빛이 가득한
대적정의 세계라 하여 대적광전이라 부른다.
화엄계 통의 사찰에서는 대적광전을 본전으로 삼는다.
대적광전은 화엄세계를 드러내기 때문에 화엄전이라 부르며,
화엄세계의 본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다는 뜻에서 비로전이라고 한다.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한 삼신불을 모신다.
따라서 법신불인 비로나자불, 보신불인 아미타불,
화신불인 석가모니불을 봉안하는 것이 상례다.
다만 우리나라 선종 사찰에서는 선종의 삼신설에 따라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을 봉안한다.
③ 극락전極樂殿
극락전은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이다.
아미타불은 본래 임금의 지위와 부귀를 버리고 출가한 법장비구로서,
보살이 닦는 온갖 행을 다 닦아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48대원]을 세우고 마침내 아미타불이 되었다.
아미타불의 광명은 끝이 없어 백천억 불국토를 비추고,
수명이 한량없이 백천억 겁으로도 셀 수 없다 하여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또한 주불의 이름을 따라 미타(彌陀殿이라고도 한다.
경북 영주의 부석사 무량수전이 유명하다.
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신다.
④ 미륵전彌勒殿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이신 미륵불을 모신 곳이다.
미륵불에 의해 새로이 펼쳐지는 불국토 ‘용화세계’를 상징한다.
하여 용화전龍華殿이라고도 하고, ‘미륵’의 한문 의역인
‘자씨’를 붙여 자씨전慈氏殿이라고도 부른다.
미륵은 미래세의 세상에 출현해서 중생을 제도한다는 부처님이시다.
미륵전은 전북 김제의 금산사 미륵전이 대표적이다.
⑤ 원통전圓通殿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으로, 특히 그 사찰의
주불전主佛殿일 때 원통전이라고 부른다.
원통이란, 관세음보살이 모든 곳에 두루 원융통圓通通을 갖추고
중생의 고뇌를 소멸해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반면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부불전副佛殿일 경우에는
관음전(觀音殿)이라고 한다.
⑥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은 약사유리광여래(약사여래)를 모신 법당이다.
약사여래는 현세중생의 모든 재난과 질병을 없애주고
고통에서 구제해주는 현세이익적인 부처님이다.
약사여래는 동방유리광정토의 주인이시다.
만월보전, 유리광전, 보광전이라고도 부른다.
⑦ 팔상전八相殿 팔상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을 봉안한 곳이다.
여덟 폭의 그림에서 연유하여 팔상전 또는 부처님의 설법회상인
영산회상에서 유래하여 영산전靈山殿이라 부르기도 한다.
불단 없이 벽에 팔상도를 봉안하는 것이 보통이다.
주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고, 좌우 협시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봉안한다.
충북 보은의 법주사 팔상전이 대표적인 예다.
⑧ 나한전羅漢殿
나한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 중 아라한과를
성취한 성인, 즉 나한을 모신 곳이다.
나한은 아라한의 약칭으로, 번뇌를 남김없이 끊은 성자라는 뜻이다.
부처님에게는 열여섯 명의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16나한이라고 한다. 나한전은 영산회상의 모습을 재현했다고 해서
영산전靈山殿이라 하며, 또는 참된 진리와 완전히 합치한 분들을
모셨다는 의미에서 응진전應眞殿이라고도 부른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좌우에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봉안되어 있다.
그 좌우에 열여섯 명의 나한이 웃고, 졸고, 등을 긁는 등
자유자재한 형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나한의 숫자가 500명인 경우도 있는데
이는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 부처님 생전 설법을 정리하기 위해
최초로 집회를 열었을 때 모인 비구의 수가 500명인 데서 유래하였다.
이를 오백결집이라고 한다.
⑨ 명부전冥府殿
지장보살을 봉안한 경우는 지장전地藏殿이라고 부르고,
시왕을 모신 경우는 시왕전十王殿이라고 불린다.
시왕은 지옥에서 죄의 경중을 정하는 염라대왕을 비롯한 열 명의 왕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의 공간인 명부세계의 주존이므로 지장전을 명부전이라고 한다.
⑩ 대장전大藏殿
대장전은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축조한 건물이다.
대장전이란 편액을 건물로는 경북 예천의 용문사 대장전과
전북 김제의 금산사 대장전이 있다.
⑪ 적멸보궁寂滅寶宮
적멸보궁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전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심으로써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음을 상징한다.
적멸보궁에는 불상을 따로 봉안하지 않고 불단만 있다.
우리나라에는 5대 적멸보궁이 있는데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설악산 봉정암이다.
⑫ 조사당祖師堂
조사당은 한 종파를 세운 스님이나 후세에 존경받는 큰스님,
그리고 창건자나 역대 주지스님의 영정 또는 위패를 모신 당우이다.
국사가 배출된 절에는 조사전 대신 국사전이다.
전남 순천의 송광사 국사전이 대표적이다.
조사당은 부석사 조사당, 신륵사 조사당 등이 유명하다.
⑬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주로 법당의 뒤쪽 한 켠에 있다.
삼성각 안에는 우리 고유의 토속신들,
즉 산신. 독성. 칠성 등을 모신다.
모신 신상에 따라, 산신각. 독성각. 칠성각이라고 부른다.
⑭ 범종각梵鐘閣
범종각은 범종을 보호하는 건물이다.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범종 외에 법고法鼓, 운판雲鈑, 목어木魚 등
불전사물佛殿四物을 함께 놓기도 한다.
⑮ 누각樓閣
누각은 2층의 다락집 형태로 대부분 주불전을 마주보고 서있다.
좌우에는 요사채가 마당을 둘러싸고 있어,
뜨락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구조를 이룬다.
그러나 사찰의 본래 배치는 중앙에 금당이 자리 잡고,
뒤로는 강당이, 앞에는 중문이 있는 형식이다.
그리고 이들을 회랑廻廊이 빙 둘러서 연결하는 구조였다.
중문 대신 누각 형태로 달라진 것은 절이 산 속에 세워지면서부터 인듯하다.
특히 누각은 사찰에 대중이 많이 운집하면서부터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누각은 출입 통로이면서 또한 불전사물 봉안,
대법회시 대중운집 장소 등의 용도로 쓰인다.
* 주련柱聯은 집 기둥〔柱〕마다 시구詩句를 이어서〔聯〕걸었다는 뜻이다.
좋은 글귀나 남에게 자랑할 내용을 붓글씨로 쓰거나,
그 내용을 얇은 판자에 새겨서 걸기도 한다.
판자 아래위로 하엽荷葉을 양각陽刻하든지 연꽃을 새기든지
당초무늬를 새기든지 하여 윤곽을 정리하고
그 가운데에 글귀를 적어 새김질하기도 하는데,
글씨의 윤곽만 새기는 기법을 쓰기도 하고 양각을 하기도 한다.
판자 전체에는 보통 밀타승蜜陀僧을 발라 하얗게 만들고,
글씨에는 먹을 넣든지 군청群靑을 가칠하고,
양각한 무늬들은 삼채三彩 정도로 단청하여 화려하게 꾸미기도 한다.
내용은 건축물의 특징에 맞게 다양한 문구가 쓰여지거나 새기게 되는데
사찰에는 포교를 위한 부처님의 말씀을, 정자에는 좋은 경치를 읊은 시詩를,
개인 집에는 생기복덕生氣福德을 소원하는 내용이나
덕담의 글귀나 인격함양을 위한 좌우명,
또는 수신제가를 할 수 있는 좋은 시를 새겨서 건다.
이와 같이 현판과 주련은 우리의 전통 건축양식과
우리 조상들의 생활양식 뿐 만아니라 사상, 문학을 알 수 있으며,
특히 서예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러한 현판과 주련에 대한 연구를 위해
현장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글씨는 나날이 박락, 탈색되어
서체의 형태가 변모되어 가고 나무는 벌레에 의해
부식되어 가고 있음을 목도하고 우리가 소중한 전통문화에 대한
계승과 보존에 얼마나 무심하고 있는지를 반성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