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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은혜 가운데 귀한 종교 개혁 주의를 맞이했는데요. 이 귀한 주의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더욱더 풍성한 주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오늘은 퀴즈로 설교를 시작해 볼까요? 한번 맞춰보십시오.
이것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하여 말합니다. 또 많은 사람은 이것을 노래로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것을 하지는 않습니다.
굉장히 다양한 것들이 여러분들 머릿속에 그려질 텐데요. 많이 말하고 많이 노래를 하는데 정작 가지 않는 역시 눈치가 있는 분들이 요즘 저희가 찬양으로 불렀던 다시 복음 앞에라고 하는 찬양의 가사를 제가 올려드렸어요. 많은 이들이 말하고 많은 이들 노래는 하지만 정작 가지 않는 길, 두려운 생각보다 많이 힘들고 험한 길보다 그저 말로만 가기에 점점 멀어져 간다. 내게 생명 주었던 그 길 그게 바로 뭐라고요?
복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찬양을 가끔 부르고 지난주에도 설교 이후에 이 찬양을 불렀습니다. 오늘도 설교 이후에 이 찬양을 부를 텐데요. 우리가 이 찬양의 가사가 어쩌면 지금 나의 상태, 우리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 시작해서도 막 예수님을 막 찬양했던 예수님 사랑합니다고 고백했던 우리의 고백들이 있었어요. 우리 입술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예수님을 닮아가겠다고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오직 말씀대로 살겠다고 우리 나름대로 신앙생활하면서 그렇게 결단하고 고백하는데 과연 내가 실제로 예수님처럼 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이들 이렇게 갓난 아이들이 있으면 너무 이쁘면 아기 예수님 같아 막 이렇게 표현하는 분들도 계세요.
근데 그 아이들한테 야 예수님 닮았다 아기 예수님 닮았다 이렇게 말하면 그건 축복 같은 말인데 애들한테
야 너 예수님처럼 살아라 이건 축복이에요.
저주에 고민할 것도 없이 축복이죠. 근데 예수님 같이 살아라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얼마나 고난을 당하시고 힘드셨는지 그 길은 이 아이에게 권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예수님을 닮고 싶다고 우리가 입으로 고백은 하는데 실질적으로 예수님을 닮은 어떠한 고난은 거부합니다. 그래서 점점 멀어져가고 점점 이용하려 하고 이 찬양의 고백이 어쩌면 정말 우리의 고백인 것 같아요.
그래서 마지막에 결단하죠. 나다 뒤돌아가 주님께 예배드리고 다시 십자가의 길을 걷겠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복음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믿고 그 복음을 살아내야 그 복음의 능력이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오늘은 무슨 주일입니까? 종교개혁주일 우리 하늘소망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교회니까 오늘이 몇 주년일까요? 네 507주년 기념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아주 그냥 종교개혁을 기억 잘하라고 우리 교회 전화번호 뒷번호가 뭐라고요? 네 1517년을 기억하자고 1517로 우리 뒷번호를 달았다고 말씀을 드렸죠. 기억하기 좋아요.
여러분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기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믿음의 선배들 그 신앙을 기억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고요. 그 신앙을 기억하면서 지금 나의 신앙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다시금 개혁하는 것.
지난주 말씀처럼 개혁은 어떻게 돼야 된다고요?
계속 이루어져야 된다고요. 한 번 개혁했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부부 관계도요. 한 번 행복해라고 한다고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계속 계속 서로를 위해 더 노력하고 노력하고 알아가고 공부하고 그런 과정에서 세워져 가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요. 계속 개혁되어야 합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문에 면죄부 판매에 대한 부당성을 꼬집는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면서 시작된 개신교 507주년 기념일입니다. 여러분 그 당시에 절대 권력을 가진 교황 그리고 교회를 비판한다. 이건 정말 목숨을 내걸고 해야 되는 행동이었습니다. 루터는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이 상황에서 타협하거나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눈에 보이는 교황보다 눈에 보이는 교회 권력보다 하나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던 사람이에요. 카톨릭의 권위보다 말씀의 권위가 이 사람에겐 더 높게 여겨졌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이렇게 읽다 보니까 지금 이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교회가 그리고 이러한 흐름이 성경적이지가 않은 거예요. 그래서 과감하게 그 잘못을 지적하며 도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지금 우리는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좀 이런 종교 개혁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점검하길 원합니다. 우리 교회에 지체된 우리의 모든 삶이 우리 스스로가 개혁되지 않는다면 교회 공동체는 개혁될 수 없고 교회 공동체가 개혁되지 않는데 어떻게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능력을 상실해버린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믿는다고 말은 하는데 믿지 못하고 믿는다고 말을 하는데 그 믿는 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복음대로 살지 못하는 하나님을 향하여 주님 주여라고 외치면서 정작 다른 죄인을 섬기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들이 있지 않은지 점검해야 합니다.
루터는요. 평소에 자기의 죄 때문에 늘 고민이 많았어요. 자기가 늘 죄인같이 여겨지는 거예요.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가 너무나도 크다라고 여겨지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늘 자신의 이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로마에 있는 라테나노 성당에 28개의 성 계단이라는 데가 있는데, 그 28개의 성 계단을 무릎으로 뚫고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며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르고 내렸습니다.
근데 이 성계단이 어떤 계단이냐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재판받으러 그 올라가셨던 그 빌라도 법정에 있었던 계단을 통째로 옮겨가지고 다시 만들어 놓은 게 이 성계단이래요. 굉장히 의미 있는 예수님이 올라가신 그 계단이라는 거죠. 그 계단에서 무릎이 피멍이 들도록 고행하듯이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나의 죄를 사해 주십시오. 나의 죄를 사해 주십시오.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갈급한 심령으로 그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했다는 거예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년을. 그런데 죄씻음 받았다고 하는 확신도 구원에 대한 확신도 그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고민이 깊어지는 거예요. 아니 내가 하나님을 믿는데 나는 신앙인인데 왜 나는 계속 죄인이라고 더 내 안에 있는 죄가 더 크게 보이고 나는 구원받았다고 하는 확신이 없는가 그 고민 속에 살아가던 이 루터가 말씀을 읽는 중에 놀라운 깨달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복음을 만난 것이죠. 그 복음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찾아서 헤맸던 그러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7절 말씀 한번 다 같이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아멘 이 짧은 구절의 복음 그리고 하나님의 믿음 이 단어들이 이 루터의 그 갈급하던 심령에 탁 심겨진 거예요. 그리고 루터의 삶이 지금까지와 완전히 다른 삶으로 전환하게 된 게 바로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복음을 믿음 루터의 심령 속에 이것이 확신이 되었고 그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는 거예요.
16절 말씀도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아멘 그렇죠 바로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래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게 확신이 든 거예요. 그전에는 뭔가를 해야 되는 거야 마치 요즘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에서 무슨 절을 몇 번을 해야 되고 또 뭐를 뭘 몇 번을 드려야 되고 막 이런 거 있잖아요. 몇 시간 동안 뭐를 해야 되고 이런 게 아니라 어떤 행위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아주 명확한 복음을 이 말씀에서 발견한 거예요.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으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이 간단하고 이 명확한 복음을 우리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나는 믿는 사람이야. 나는 신앙생활을 몇 년 했어?
이렇게 말하는 거 중요한 거 아닙니다. 내가 지금 실제적으로 무엇을 믿고 있고 그 믿는 대로 나는 살아가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 당시에 중세 유럽이 교황 그리고 교회 그들은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이 교회의 모습과는 너무 다릅니다. 오히려 정치 세력보다 더 힘을 가졌어요. 그 당시에 왕보다 더 큰 힘을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황제와 교황을 상대로 싸우는 일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 거는 일이에요.
1521년 종교개혁이 시작되고 난 이후에 보름스 의회에서 회의가 있었습니다. 루터는 이 보름스 의회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합니다. 파문을 당할 뿐만 아니라 황제로부터의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선고를 받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냐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누구든지 이 사람을 죽여도 아무런 거기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루터를 죽여도 살인죄가 형성이 되지 않는 이 사람은 누구든지 죽여도 되는 사람 이런 식으로 선고를 받아버린 겁니다. 죽음의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의회의 재판을 앞두고 루터는 몇 날 며칠을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어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을 내가 탁 봤다가 말씀으로 막 무장돼가지고 외쳤는데 그 외친 그 선포 때문에 이렇게 사형 선고가 내려진 거예요. 얼마나 두렵고 떨릴까요? 하나님의 일이지만 인간적인 두려움과 떨림이 루터에게도 있었습니다. 죽음의 판결이 뻔했기 때문에 두려움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보름스 회를 앞두고 모든 의욕을 잃어버리고 두려움에 떨면서 고통과 시비 가운데 빠져서 그렇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가 검은 상복을 입고 남편의 방으로 돌아옵니다. 루터가 묻지 아니 누가 죽었냐고 그랬더니 그 카타리나가 말합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셨어요.
무슨 말이냐고 슬피 울며 말하는 그 카타렌에게 나무랍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영원무궁하신 분인데, 그분이 어떻게 돌아가시냐고
이 말을 들은 카타리나가 맞받아치며 말합니다.
그 전능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당신, 당신이 지금 오늘 지금 보여주고 있는 이 모습은 무엇입니까? 마치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처럼 맥이 빠져서 누워 있는 것 아닙니까?
이 말을 들은 루터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우리의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하는 시편 46편 1절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찬송의 시를 기록해요.
그게 바로 아까 전에 우리가 찬송가로 부른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이게 루터가 작사 작곡한 겁니다. 한번 여러분 제가 가사를 그대로 읽을 테니까 지금 루터가 어떤 심정인데 어떤 고백을 하고 있는지를 한번 여러분들 느껴보십시오.
내 주는 강한 성이오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섞어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데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아멘 이 찬양의 시를 기록하고 찰스 오세의 소환을 받아 보름스 의회 법정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죠. 루터 니가 지금까지 주장했던 바를 다 철회한다라는 말 한마디만 하면 너는 모든 걸 사면하고 다시 회복해 주겠다.
루터는 말합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사로잡힌 바 되었습니다. 나는 철회할 수도 없으며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양심을 버리는 것은 옳은 것도 안전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지금 종교개혁주의를 맞이하면서 종교개혁 때 외쳤던 큰 그 구호를 기억하길 원합니다.
한번 따라해볼까요?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여러분 이 5가지, 이 5가지의 교리가 우리 기독교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근데 여러분도 한번 점검해 보시길 원합니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과연 우리가 지금 혹시 오직이 아니라 변질되어 버린 것들이 있지 않은지 점검하길 원해요. 그 길은 좁은 길입니다. 마치 루터가 걸어간 것처럼 지금 여러분들 우리가 사는 시대도요. 이제 신앙생활하는 것이 예전에는 나 교회 다녀라고 하는 말을 자랑스럽게도 이야기하고 교회에 초청하는 것을 아주 그냥 당연하게 여기는 그러한 우리나라의 시대가 있었어요.
근데 요즘에는 교회 다닌다는 말을 숨기려고 하는 성도들이 생깁니다. 왠지 사람들한테 손가락질을 당하는 경우가 있고 또 손해 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길을 따라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지만 그 뒤를 따라서 구름과 같은 허다한 증인들이 마틴 루터가 또 수많은 증인들이 그 길을 걸어갔고, 우리가 그 길을 걸어야 우리 다음 세대들이 그 길을 따라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 따라해볼까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아멘 여러분들의 삶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 때에도 오직 복음으로 온전하게 무장하여서 이 종교 개혁의 정신 5가지를 기억하면서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가 성경 말씀대로 은혜에 감격하며 늘 예수 그리스도만 붙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는 이 단어가 너무 희미해져버렸어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러한 삶만 살았어도 지금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나부터 우리부터 하나님께 영광을 오직 믿음으로 다시 복음으로 일어서는 우리 모두가 되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