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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3월 24일(목).
치술령(766m) :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산행코스 : 박제상기념관주차장-칠조마을-콩두루미재-갈비봉-치술령-법왕사-박제상기념관주차장.
▣산행시작 : 박제상기념관주차장 10시 21분.
▣산행종료 : 박제상기념관주차장 14시 57분.
▣산행거리 : 약 8.5km.
▣소요시간 : 4시간 36분(중식 및 휴식시간 포함).
10 : 21 박제상기념관주차장.
11 : 31 콩두루미재.
12 : 07 갈비봉.
13 : 02 경주망부석.
13 : 13 치술령 정상.
13 : 24 울산망부석.
13 : 30 참새미.
14 : 13 법왕사.
14 : 57 박제상기념관주차장 산행완료.
▲ 10시 21분 : 박제상기념관주차장 출발.
▲ 오늘은 신라의 페넬로페(Penelope)같은 여인... 신라의 충신이며 왜국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남편
"박제상"을 그리다 숨을 거두고 치술령의 신모(神母)가 되었다는 박제상의 부인 금교김씨(치술공주?)의
설화가 있는.. 치술령의 망부석을 찾아가는 길이다. 미세먼지로 시야가 좋지 않다.
▲ 충신 김제상의 부인 김씨의 친정동네인 만화리 일대이고.. 마을 뒷쪽으로 치술령이 보인다.
페넬로페(Penelope)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름으로... 오디세우스의 아내이며... 스파르타의
이카리오스와 물의 요정 페리보이아 사이의 딸이다. 트로이 전쟁 이후 남편이 오랫동안 집을 비웠을 때
주변의 많은 지도자들이 페넬로페에게 구혼했던 이야기가 나온다. 구혼자들의 끈질긴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페넬로페는 남편의 아버지인 라이르테스의 수의를 다 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페넬로페는 3년 동안 매일 낮에 짰던 천을 밤이면 다시 풀어버림으로써 실종된 남편을 저버려야만 하는
재혼의 날을 늦추어나갔다. 그러던 중 마침내 남편 오디세우스가 돌아와 그녀는 구원되었다...는 신화다..
그러나.. 신라의 박제상은 김씨부인에게 돌아오지 못했다.
▲ 주차장에서 14~5분정도 도로를 따라 오다가 첫 삼거리에서 칠조3길 이정표를 따른다.
▲ 7~80m 진행하면 다시 삼거리에서 칠조3길 이정표가 있고.. 좌측으로 꺽어 올라간다..
표지판이 높게 달려 있어서 잘 보아야 된다.
▲ 포장길을 따라 계속 직진이다.
▲ 마지막 농장앞을 통과..
▲ 남도의 봄향기 가득한 수선화가 반긴다..
▲ 돌단풍...
▲ 대구에서는 진달래조차 꽃피울 생각도 않는데... 역시나 남도의 향기가 물씬 난다..
▲ 시멘트길을 따르다가 포장이 끝나도 옆길로 새지도 말고 계속 직진하면 콩두루미재로 오르게 된다.
▲ 현호색.
▲ 흰 노루귀..
▲ 임도... 가야할 갈비봉 능선이 올려다 보인다.
▲ 웬 트럭??
▲ 집게발 중장비도 보이고.. 가까이 가보니 고사목을 실으러 왔다..
▲ 11시 31분 : 콩두루미재.
"두루미"는 한묶음.. 또는 엮음의 뜻을 가진 "두름"의 경상도 방언으로 "콩두루미"는 콩을 일정량으로
엮은 것이라는 뜻이다. 작은 산들의 오르내림이 짚으로 엮어 놓은것 같아서 생긴 이름인듯 하다.
▲ 갈비봉 오름이 제법 가파르고 로프 가드로 정비는 잘되어 있다.
▲ 노랑제비꽃.
▲ 오름내내 육산의 지루함이 끝날즈음 코뿔소같아서... 정상이 가까워지는지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 등산로입구였던 칠조마을쪽에는 진달래가 활짝 피었더니 고도차이가 300m는 되어서 인지..
능선의 나이많은 진달래군락은 아직도 수면중이다.
▲ 12시 07분 : 갈비봉..
▲ 샌드위치 같은 바위..
▲ 흔들바위 같아서...
▲ 넓적바위.. 최고의 밥상자리다.
▲ 미세먼지로 온통 닦지않은 유리창처럼 보인다..
희미하게 보이는 동대산능선 너머로 울산 정자항이 있는 동해안이 펼쳐진다.
▲ 최고의 밥상자리에서 아우성치는 민원을 해결하고...
▲ 울산시의 작품인지... 배려인지... 곳곳에 벤치가 많이 있다..
▲ 12시 51분 : 헬기장...
▲ 법왕사(2.1km)로 내려가는 길도 있다.
▲ 분재같은 명품소나무..
▲ 아래쪽에서 올려다 본 경주망부석.
▲ 13시 02분 : 경주망부석. 동대산능선 너머 정자 바닷가가 있다.
여기에 돌아오지 않는 지아비를 그리워 하며 하염없이 동해를 바라보았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알아보자.
옛날 신라의 눌지 마립간(눌지왕)은 고구려와 일본에 보낸 자신의 동생들을 그리워 하였다.
그래서 충신박제상에게 자신의 동생들을 데려오라고 시켰다. 그래서 박제상은 맨 처음으로 고구려에 가서
둘째 동생을 데려오고, 곧바로 일본에 가서 셋째 동생을 구하러 갔다. 이때 아내는 남편을 붙잡기 위해
남편을 쫓아갔지만 남편을 태운 배는 이미 떠나고 말았고, 박제상은 셋째 동생만을 돌려 보낸 채 자신은
그 곳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죽는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아내는 남편이 떠난 울산쪽 율포(栗浦)가
보이는 산능선에 올라갔다가 몸이 굳어 그 자리에서 굳어 바위가 되었고, 사람들은 이 바위를 남편을
그리워 하는 바위라고 하여 망부석(望夫石)이라 하고 산능선을 치술령(鵄述嶺)이라 하였다고 전해 온다.
▲ 데크를 따라 올라가면 치술령정상이다.
▲ 13시 13분 : 치술령 정상.
▲ 신모사지.. 박제상의 부인이 망부석에서 죽은후 치술신모(鵄述神母)로 추앙하는 사당을 지었던 곳이다..
건물이 있었던 주춧돌 및 부속의 흔적들이 이곳에서 발굴 되었다고 한다.
▲ 왼쪽 이정표에는 없고.. 뒷쪽 이정표의 법왕사쪽으로 가면... 또 하나의 울산망부석이 있다.
▲ 13시 24분 : 울산 망부석 데크.
▲ 올라왔던 갈비봉 능선에 막혀서 인지... 미세먼지 때문인지... 여기서는 동해가 잘 보이지 않는다..
▲ 아래쪽에 새겨진 망부석 글자가 뚜렷하다..
▲ 이 바위가 울산망부석이다.. 유래는 경주망부석과 같다..
▲ 참새미라는 이정표가 보인다..100m다 다녀 오자..
▲ 13시 30분 : 참새미..
▲ 알미늄 뚜껑으로 닫혀 있다..
▲ 박제상 부인이 마셨던 물이라 하고.. 마르지 않고 물맛이 좋다 하고.. 바가지까지 걸려 있어서...
▲ 해서... 뚜껑을 열어 보았더니.. 이건 아니올시다 이다.. 어느 누군가가 잘하려고 했던 마음은 알겠지만..
양은냄비솥을 묻어 놓은건 좀 그렇다.. 중금속 오염도 있을수가 있다.. 넓적 항아리를 묻었더라면... 한다.
▲ 다시 울산 망부석으로 와서.. 법왕사로 하산하려 한다.
경주망부석쪽에서는 동해바다가 잘보인다 하여 진짜 망부석이라 하고... 울산망부석 쪽에서는 부인이
참새미의 물로 연명하며 무사귀환을 빌었으니 여기가 진짜라고 한다.. 어느쪽이 진짜인게 무에 그리
중요한가... 지아비를 향한 지극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지는 아름다운 곳이지 아니한가?...
▲ 법왕사 하산길 초입에 포스가 남다른 소나무가 있다..
▲ 많은 블로거들이 쩍벌소나무라고 하던 나무다.. ㅎㅎ.. 자연의 정원사가 키워낸 명품이다.
▲ 바로 이웃한 이 나무는 온몸이 빼배꼬인 모습이다..
▲ 귀한 노루귀를 다시 만난다...
▲ 올라올때 있었던 헬기장으로 가는 갈림길이다..
▲ 법왕사 전경..
▲ 한튀미저수지.. 많이 가물었다.
▲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칠조마을 유래비.
▲ 14시 57분 : 박제상기념관주차장.. 산행을 완료하고.. 치산서원과 기념관을 둘러 보고자 한다.
▲ 치산서원 입구..
치산서원은 박제상과 그의 아내 김씨부인(金氏夫人)을 기리는 서원이다.
▲ 치산서원 홍살문..
서원의 기원은 신라시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처를 제사지내기 위해 신라시대 울주 묵장산(墨匠山)의
치술령(鵄述嶺)이라는 고개에 세워졌던 "신모사(神母祠)"에서 출발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745년(영조 21)에 영해박씨 주도로 신모사가 있던 두동면에 다시 건립하여 박제상과
그의 부인 및 두 딸을 제향하고 있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91년에
복원되었다. 치산서원지(鵄山書院址)를 포함하는 박제상유적(朴堤上遺蹟)이 1997년 10월 9일에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매년 3월 초 정일(丁日)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 삼강문.
삼강(三綱)이라 함은 유교 도덕의 기본이 되는 세 가지 도리인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 즉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강문은 충신 박제상과 열녀인 김씨 부인, 효성스러운 그 두 딸까지를 함께 모시는
치산서원의 문 이름과 부합이 된다.
▲ 관설당.
관설당은 박제상의 호이며.. 편액은 박제상의 48세손 '박형수'(朴炯壽)가 쓴것이다.
▲ 치술령이 올려다 보이는 치산서원 정원은 꽃이 활짝피는 봄철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 첫째... 성인문. 삼강중에 군위신강(君爲臣綱) 충(忠)에 해당하며 사당으로 가는 문이다.
문을 들어가는 법은 "우입좌출(右入左出)" 오른쪽으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나오는 것이다.
▲ 충렬묘.. 영정과 위패를 모신곳이다.
박제상이 인질을 구하러 고구려와 왜국에 가고 기다리던 부인은 망부석이 되고 신모가 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던 무렵인 신라의 그시대를 알아보자..
신라의 제17대 내물왕(奈勿王), 제18대 실성왕, 제19대 눌지왕(訥祗王 417~458) 당시의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서 신라의 국력이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시도 때도 없이 강대국에 왕자를 볼모로 바쳐야하는 딱한 형편이었다.
그 무렵 고구려는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의 즉위를 계기로 동북아시아의 최강대국이 되었고, 백제는
근초고대왕(近肖古大王)을 정점으로 한반도 남부에서 마한과 가야를 제압하여 강대국으로 도약하고있었다.
신라는 걸핏하면 북쪽에서 고구려와 말갈이, 서쪽에서 백제가, 남쪽에서는 가야와 왜가 번갈아가며 침범해
국운이 풍전등화 신세였다. 내물왕이 재위 38년인 서기 393년 왜군이 서라벌을 포위, 나라가 거덜 날
위기에 빠졌을 때 광개토태왕이 대군을 보내 왜군을 물리쳐 구해주었다. 그러나 399년에는 백제가 가야와
왜군과 합세해서 쳐들어와 신라의 영토는 오로지 서라벌 주변만 남게 되었다.
이 망국의 위기도 광개토태왕이 5만 대군을 급파해 가까스로 면할 수 있었다. 고구려의 보호가 없었다면
신라는 나라의 형태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지경이었다.
그러자 고구려는 신라를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군사를 주둔시키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인질로 와 있던 신라의 왕자 김실성을 고구려의 꼭두각시 임금으로 만들고자 고구려
군사들과 함께 돌려보내 내물왕을 죽이고 신라 왕위에 앉도록 했으니 그해가 402년이다.
임금이 된 18대 실성왕은 전에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원한을 꿈에도 잊지 않고 있었다.
죽은 내물왕에게는 나중에 임금이 되는 눌지, 복호(卜好, 寶海), 미사흔(未斯欣, 美海), 기보 등 아들 4형제
가 있었다. 실성왕은 왜국을 달래 남쪽의 위협을 제거한다는 구실로 막내 조카 미사흔을 왜국에 인질로
보냈다. 그때 미사흔의 나이 겨우 열 살이었다.
또한 재위 11년(412년)에는 둘째 조카 복호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고 그리고 자신의 사위이자 첫째조카인
눌지마저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인질로 온 눌지의 군자다운 풍모에 탄복
하여 돌려 보낸다. 구사일생으로 실성왕의 눈을 피해 신라 서라벌로 몰래 돌아온 눌지는 은밀히 군사들을
모아 전광석화처럼 거사하여 장인이기도 한 실성왕을 죽이고 본래 자신의 것이던 왕좌를 차지했다.
눌지는 그렇게 하여 선왕인 내물왕과 4형제의 원수인 실성왕을 죽이고 신라의 제19대 임금으로 등극했던
것이다. 비록 본래 자신이 앉아야 할 왕좌의 자리를 되찾기는 했지만 그는 늘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고구려와 왜국에 인질로 끌려가 있는 두 아우 때문이었다.
이에... 눌지왕은 양산태수인 박제상에게 자신의 동생들을 데려오라고 시킴으로 충신 박제상과... 김씨부인과
망부석.. 치술신모의 이야기가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는 것이다.
▲ 충신 박제상 영정..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박제상(朴堤上, 363∼419)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이다.
제5대 파사왕의 5대손이며 할아버지는 갈문왕인 박아도이고, 아버지는 파진찬인 박물품이다.
장성하여서는 18대 실성왕의 사위가 되었고.. 경남 양산의 태수가 되었다.
충신 박제상의 일본 이야기
고구려에서는 복호를 쉽게 데려 왔지만 꾀많은 왜국에서 왕자를 빼내어 오기가 쉽지 않아서 신라를 배반한
자로 속여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들어가서 몰래 미사흔을 돌아가게 했다. 사실을 알게된 왜왕은 분노하여
꾸짖으니 박제상은 “나는 우리 임금의 뜻을 이루려고 했을 뿐이오.”라고 대답했다. 왜왕은 이르기를
“네가 신라의 신하라고 말하면 반드시 오형(五刑)을 내릴 것이고, 왜국의 신하라고 말하면 반드시 중(重)한
상(賞)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박제상은 “차라리 계림(雞林)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 왜왕이 발바닥을 벗기고 갈대를 베어낸 뒤에 그 위를 걷게 하고 묻기를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라고 묻자, 박제상은 “계림의 신하요.”라고 답했다.
또 뜨거운 철판 위에 서게 하고,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라고 물으니, 박제상은 “계림의 신하요.”라고
답하며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마침내 왜인들이 목도(木島)에서 불태워 죽였다.
▲ 둘째... 박제상의 부인인 금교김씨(金校金氏)의 사당으로 들어가는 망해문(望海門)이다.
바다(海)를 바라보는(望) 문... 망부석을 연상시키는 이름이다.
▲ 신모사.
박제상 부인 금교김씨의 사당인 신모사(神母祠) 이다. 치술령에서 금교김씨가 남편을 그리다 죽은 후 신라
조정에서는 그녀를 국대부인(國大夫人)에 봉했는데, 그녀를 기리는 후세의 사람들은 그녀의 절개를 높이
사서 치술령의 신모(神母)라고 불렀다고 한다.
▲ 전사청(典祀廳).
매년 3월 초에 봉행하는 향사를 준비하는 곳으로 제기 등의 향사 도구를 보관하고 있다.
▲ 셋째... 사효문(思孝門)..
박제상과 김씨부인의 두 딸인 아기(阿奇)와 아경(阿慶)의 영정을 모시는 쌍정려(雙旌閭)가 있다...
▲ 쌍정려(雙旌閭)... 첫째딸 아기(阿奇)와 셋째딸 아경(阿慶)의 영정.
둘째딸 아영은 눌지왕의 동생 미사흔과 혼인한다.
여기서 또다른 전설하나...
박제상의 순국 소식을 들은 김씨부인은 슬픔과 원한을 이기지 못하여 딸 셋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서
왜국를 보면서 통곡하며 남편을 따라 정절로써 죽으려 하자, 딸 셋 또한 따라 죽으려 함에, 둘째 딸
아영(阿榮)에게 이르기를 ‘너는 살아남아서 네 동생 문량(文良)을 양육하여 아버지의 후사를 잇게 하라.’
하고 부인 자신과 두 명의 딸, 즉 큰 딸 아기(阿奇), 막내 딸 아경(阿慶)은 함께 정절사 하였는데...
죽은 세 모녀의 시신은 곧 돌이 되어 망부석이 되었고, 그 넋은 새가 되어 망부석 남쪽 십 여리에 떨어져
있는 국수봉 바위틈으로 날아가 숨었다... 문량(文良)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백결선생" 을 말한다.
▲ 해설사님의 친절한 안내와 설명으로 많은걸 배우고.. 샛문으로 박제상 기념관으로 간다.
▲ 추모비를 거쳐서...
▲ 기념관 전시실로...
▲ 충신 박제상과 김씨부인... 김씨부인은 누구인가?...
▲ 일본으로 가는 박제상...
▲ 박제상기념관은 총 64억원의 사업비를 투입,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치산서원 인근 9,461㎡
부지에 2개 동의 한옥 양식으로 착공 1년 7개월만에 2008년 9월 준공됐다. 기념관은 크게 충신 박제상을
기리는 박제상기념관과 울주문화관, 교육영상실, 옥외전시공간 등으로 꾸며졌다. 이 가운데 기념관은
박제상 일대기 및 가족이야기를 밀랍인형과 도표, 영상 등으로 꾸며져 있고 문화관에는 박제상이 살던
신라시대상과 울주의 민속 등이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다.
▲ 박제상의 김씨부인과 두딸.. 아기와 아경..
김씨부인의 친정마을인 만화리에서 교과서에서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충신 박제상과 그의 부인...
금교김씨부인의 사랑으로 살다 사랑에 죽어간 망부석 사랑의 애절한 사연이 있는 치술령 산행을 하면서
과거와 현대를 함께 하는 가슴 설레임과 역사유적을 통해 얻어 들은 이야기가 보석처럼 빛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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